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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토수복과 역사회복 원문보기 글쓴이: history author
硏經齋全集外集卷五十一 地理類 四郡考 성해응 (成海應) 청나라기록에는 발해땅이 지금 조선땅안에 많이 있다고 한다.(우리상식으로는 발해땅은 당시에 청나라에 대부분있어야 한다.) 명나라일통지에는 장백산은 삼만위동북천여리에 있다고 한다. 횡으로 천리나 된다. 남쪽에 압록강이 흐르고 북쪽에 혼돈강이 흐른다. 청나라일통지에는 장백산은 길림오라성동남쪽에 있다..횡으로 천여리나 된다. 동쪽은 영고탑에서 서쪽은 봉천부여러산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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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지리지에 따르면 명나라 삼만위 동북쪽 천여리에 장백산이 있고 그 산주위로 천여리가 전부 장백산(현대의 표현으로는 장백산맥)
이다. 중국역사지도 명나라편은 명나라 삼만위를 지금 심양시 동북쪽의 개원시일대로 주장하고 있다. 조선의 지리지에는 명나라 삼만위가 조선영흥에 있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에는 영흥에 비류수가 있다고 했고 지금 한국과 중국의 지리학자들은 비류수를 혼하즉 지금 심양시바로 아래에 있는 강이라고 주장한다.
청나라지리지는 더 구체적이다. 동쪽으로 영고탑에서 서쪽으로 봉천(지금 심양시)까지를 장백산천여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청나라의 지리지는 조선땅이 영고탑에서 봉천이남으로 기록한 것이다. 왜냐면 장백산 남쪽은 조선땅이기 때문이다.
대청일통지는 1700년대에 2번 편찬되고 1800년대에 또 수정해서 편찬했다. 대청일통지를 인용한 성해응은 1760-1830년에 걸쳐 살았던 학자로 그가 본것은 아마도 1700년대에 편찬된 청나라지리지인 대청일통지일 것이다.
즉 조선이 1600년대초 청나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영토가 줄어든 뒤에 1700년대에 조선과 청사이에 체결된 국경조약이후의 조선과 청의 영토를 알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기록은 1700년대 러시아쪽에서 기록한 조선의 북쪽경계가 아무르강이라는 기록과 동일하다.
조선이 일제에 식민지가 되지 안았다면 정당한 조선의 영토는 바로 혼하와 아무르강을 잇는 선인 것이다.
위의 지도는 1600년대에 조선에서 제작된 고지도이다.
조선 함경도 장백산이라는 분명한 글귀가 적혀 있으며 백두산서쪽에 장백산이 또 그려져 있으며 장백산남쪽에는 의무려산이 표기되어 있다.
즉 명나라 삼만위는 청나라 삼만위와 위치가 다른 것이다. 고대에는 이웃나라가 자신의 나라를 도와주면 땅을 떼어주는 것이 흔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임진왜란때 명나라 황제인 만력제는 구두쇠로 소문났다. 내탕고라는 개인금고를 만들어서 돈을 긁어모았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명나라는 수십만의 병력과 양식을 지원했다. 그 대가로 아무것도 없이 철수했을까?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명나라군이 전쟁이 끝난뒤에도 전라도일대에 주둔하고 있다고 했다 전라도는 이순신장군과 조선군이 지켜서 비교적 온전한 곳인데 왜 명군이 주둔하고 있을까? 실록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당연히 선조가 기록으로 남길리가 있겠는가?
아무튼 1600년대 조선지도는 조선의 국경이 요하서쪽 의무려산 북쪽일대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청나라에 패전한 이후 조선은 또 영토가 줄었다. 그나마 저 국경선이 유지가 되어야 하는데 정조사후 권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어린왕을 앉힌후 나라를 말아먹었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아들에게 좀더 국정을 가르쳐주고 죽었더라면 조선이 재기할 마지막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