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외할아버지의 와병
이튿날 양력 초사흗날 아침 일찍 어머니와 나는 할머니와 아재의 전송을 받고, 성내 마차부에 가서 마차를 타고 밀양역으로 갔다. 차표를 사고 곧 개표를 하고 타는 곳으로 가 얼마 안 있어 기차가 들어왔다. 배부른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차안으로 들어갔고 젊은이의 자리 양보로 앉아 갈 수 있었다. 1948년의 양력 정초는 집총한 경찰이 거리 요소마다 서 있는 공포분위기로 시작되었다. 나라를 반 동강내어 미제의 식민지 예속의 땅으로 만들려는 친미반역자들도 제들이 하는 짓이 어떤 반역인지를 아는지 나라를 온통 공포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나도 기분이 안 좋아 그들을 보는 눈매가 좋을 리는 없겠지만 만삭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지라 그들도 감히 붙잡고 시비 거는 일은 없었다. 대구 대신동 버스 간에 도착하여 버스 간 사무실에 있는 그 아저씨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무사히 좌석에 앉도록 했다. 구지에 도착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시간은 아직 정오 전이었다. 집에 들어오니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무거운 몸에 오랜 여행으로 고단하셨던지 방에 들어가자 베개를 찾아 베고 먼저 눕기만 했다. 나는 보퉁이를 방안에 넣어두고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곧 바로 안채에 들어갔더니 작은 방에 아이들 소리가 왁자했다. 안채 머슴애 희진이 희선이 둘과 우리 집 머슴애 용아 셋이 한 이불 속에 들어가 ‘항복받기’장난을 치고 있다. 내가 방문을 열어 얼굴을 들이밀자 어울려 놀던 세 놈이 모두 반가운 얼굴로 한목소리로 “형아! 언제 왔어!” 하고 일어나 다가든다. 그래서 나는 셋을 데리고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큰방에서 나오시면서, “어제 저녁에 아래 창동 사택에서 면장 어른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기별을 받고 안 선생님이 아이들을 부탁하고 내려가셨는데, 어찌 됐는지 모르겠네....” 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일단 사택으로 가볼 요량인데, 이 세 놈이 따라오는 본새가 멀리 갔다 왔으니 빈손이 아니라는 걸 짐작하고 따라 오는지라 방에 넣어둔 보퉁이를 뒤지어 버스 간 매점에서 산 과자 봉지를 내어 놓았더니 셋 놈들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나는, “내 방에서 책상 위에 있는 것은 건드리지 말고 이방에서 잘 놀아라.” 하고 나와 창동의 아랫담으로 내려 왔다. 어머니는 고단할 것 같아서 사정을 보고난 다음에 이야기할 작정으로 그냥 나 혼자 내려갔다. 면장 사택으로 들어가자 마침 정업이 아재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냥 걱정을 담은 얼굴로 보았더니 나를 잡고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지금은 기침이 좀 멎어 주무시고 계신다. 모두 잠 깨실까 해서 그 방은 엄마만 계신다. 좀 전에 도동에서 형님도 오시고, 큰집형님도 오셨는데 모두 일단 돌아가셨다.” 나는 “병세가 어떠신데?”라고 물었다. “보통 기침은 많이 하시고 빛깔이 안 좋은 담이 많이 나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제 오후 열도 심하게 나시어 일찍 들어오셨다. 그래 자리를 펴고 저녁때까지 누우셨는데, 저녁에 잣죽을 자시고 좀 있다가 기침을 많이 하시더구나. 그런데 뱉어내는 담에 피가 많이 섞여 나오니 ..... 아버지 자신도 놀라고 모두 놀랐지. 그래 의사를 불러다가 진찰을 하고 객담을 채집해서 갔다네. 한 두어 시간 지나서 의사가 약을 지어 와서 말하기를 ‘당장 대구의 큰 병원으로 가서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는구나. 의사가 자네 아버지, 밀양 새형님께 하는 말이 ⟪결핵⟫이라는구만. 진행도 상당히 되었다는 거야.” 평소에 외할배의 잦은 기침에다 유달리 속 깊은 기침소리에 누리끼리한 기분 나쁜 가래빛깔로 하여 그런 병이 아닐까 했지만, 막상 절박하게 당하게 되니 그저 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성함이 김문식(金文埴)이고 바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주향으로 모신 도동서원이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으며 그 지방에서 성장하셨다. 옛날에는 위세 당당한 조상을 둔 탓으로 그리고 커다란 문중의 힘으로 일 안 하고 양반이라는 행세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로 식・의・주에 구애됨이 없이 살았다. 무슨 능력으로 하셨는지는 몰라도, 양반의 위세에다 만석꾼의 외가에 또한 만석꾼의 처가에, 그 경제력으로 첩까지 두며 살았던 이조봉건제도가 낳은, 그래도 나에게는 사랑과 정이 많은 외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태어나게 한 문중과 고향에 대해 극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나 겨레의 사랑까지는 ... 그래 이런 작은 사랑이 바탕이 되어 간혹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나간 전시대의 많은 애국자들도 있어서, 나의 외할아버지의 구지중학교 설립과 구지 창동마을에 전기를 들이는 일이 애국을 지향한 것은 아닐까, 하고 구태여 생각해보고도 싶기는 하지만, 이는 내 욕심이라고나 해야겠지. 그래도 반가운 것은 그 지독한 일제식민지통치 아래에서 친일역적, 민족반역자로 낙인 찍혀 그 후손인 나나 내 외가의 종형제자매들에게 겨레의 욕바가지를 덮어쓰도록 하지는 않았다는 데 대한 고마움은 늘 가지고는 있었던 것이다. 일제 말기, 일제는 모든 것을 전쟁을 위하여 알뜰하게 빨아가고, 쇠붙이라면 또한 알뜰하게 뜯어가던 왜놈들이 망하고 우리 땅에서 쫓겨나간 다음에, 우리에게 무슨 전력이 있다고 보았는지 자기 고장 구지면에 전등불이 들어오게 한다면서 여름 더위 겨울 추위를 마다 않고 그 허약한 신체로 관청마다 아는 연고를 찾아 매달려 기어이 전등불이 들어오도록 전기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10월 어느 날 전기가 들어오는 날, ‘전기가설축하기념’이라는 솔문을 세우고 맛좋은 조선돼지 「구지돼지」(주1)의 돼지머리를 한가운데 두고 각종 전, 떡, 과실 거기에다 막걸리로 제수를 차리고, 세상에도 희한한 전기귀신이 있는지 갓 쓴 100촉짜리 전구를 모셔 놓고 구지면의 유지들과 함께 선비랍시고 유건을 쓰고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읽는 우리 외할배의 모습은 지금 생각만 해도 정말 가관이었다. 이때 구지초등학교 어린이들이 합창하는 「전기의 노래」가, 그 노래를 지은 김형복(金炯福) 선생님의 그 찰떡 같이 두텁한 얼굴 모습과 함께 지금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전깃불이 들어 왔네, 랄 랄라 랄 랄라 랄 앞집에도 전등불 뒷집에도 전등불 큰거리로 환 하고 골목길도 환하고 방앗간은 윙 윙 윙 논에 물도 쏴 쏴 쏴 들어 왔네 들어 왔네 전깃불이 들어 왔네 ......................
8.15해방 후 구지면장이 되신 외할아버지는 면장으로서 할 일로 두 가지를 세우셨다. 그 하나는 구지중학교인데 이는 완전하지는 못했으나 학교는 설립했다. 비록 「고등공민학교」라는 성인교육기관을 빌려서 이지만 설립했다. 이제 이 학교를 발전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 다른 하나가 구지에 전기가 들어오게 하는 것인데 이건 이제 성취되었고 이를 장차 각 동내마다 확대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시는 할아버지의 마음에 따라 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날이 갈수록 병세는 심해지고 결국 대구의 동성로에 있는 「정내과의원」에 입원하셨다. 그리고 세월은 더욱 각박하게 흘렀다. 11월 4일, 국련총회(제2차) 정치위원회에서 그 설치를 가결한 이른바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새해 1948년 1월 8일에 서울에 들어왔다. 12일에는 「미・소공위」 회의장이었던 덕수궁 석조전에서 첫회의를 열고 인도대표 메논을 임시의장으로 해서 13일부터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개별인사를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은 이남에 있는 「민전계」 정치인들과의 접척을 보장받기 위하여 미군정당국에 이들에 대한 신분보장을 요구했다. 미군정당국은 이에 대해 ‘불체포성명’이란 것을 발표했으나 군정경찰당국의 수사는 여전했다. 남로당과 민전의 이른바 좌익단체는, 조선문제에 대한 유엔 결의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의 활동묵적이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에 있으므로 이를 전면 반대할 것을 결정했다.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은 남과 북에서 선거감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북에 있는 소련군사령부와 면담하자고 요청했으나 소련 측은 거절했고, 위원단의 월북요구도 거절했다. 이승만은 1월 25일, 「유엔임시조선위원단」과의 협의에서 소련군이 이북에 있는 이상 이남만이라도 단독선거를 할 수밖에 없고 이남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치안력이 보장될 때가지 미군이 계속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이 협의에 앞서 한민당 당수 김성수는 12일 제1차 회의에 참석해서 「유엔임시조선위원단」에서 수립하는 정부는 이북이 설혹 보이콧하더라도 사실상 중앙정부일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승만과 김성수는 남조선단독선거와 남조선단독정부를 기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단에 대해서 반분단은 이제 이론적 대결은 이미 지내버렸고,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란 그것을 사실화하는 하는 수단임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반분단의 투쟁은 단독선거를 파탄 내는 일이고, 결과적으로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시작이 바로 「2.7구국투쟁」이었다. ----------------------- <주>
(1) 「구지돼지」: 6.25전 경북 돼지 축산에서 그 고기맛이 좋기로 구지돼지와 지례돼지가 유명했다. 검은돼지이지만 주둥이가 기다랗게 쑥 나온 놈이 주둥이와 네 말목, 두 귀끝과 꼬리끝이 유독 흰 빛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