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풀리는 수수께끼
추경감은 처음 설희주의 죽음을 알려 주던 경상도 사투리의 사나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수수께끼가 이 사건의 열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구들 중에 누군가가 설희주를 죽였다면 그 경상도 사나이를 조연으로 내세웠는지
모른다는 추리를 쉽게 할 수 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나이가 거짓으로 설희주가 죽었다고 전화를 해야 할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범인의 심부름을 맡은 경상도 사나이가 시간을 잘못 들어 채 죽이기도 전에 신고부터
먼저 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 었다.
추경감은 그쪽 수사를 맡았던 박형사로부터 받은 적선동 미리내 다방에 드나드는
3040대의 리스트를 가지고 그곳으로 갔다.
박형사가 준 명단에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두 사람과,
그 동네를 배회하는 전과자 몇 명이 있었다.
조치건. 31세.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 전과는 없고 적선동 일대에서 라이터, 만년필,
선글라스 등 신사 용품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이었다.
미리내 다방에는 하루에 대여섯 차례씩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또 한 사나이는 그곳을 무대로 한 주먹패로 전과 3범의 박민재.
특히 칼을 잘 써서 박사시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세번의 전과도 칼로 사람을 찔렀다가 얻은 별이었다.
성질이 포악하지만 의리가 있어 인근의 조무래기들이 잘 따른다고 했다.
세번째는 얼굴이 살짝 얽은 차상사라는 사나이. 본명은 차명준인데 공군 상사를
지냈다고 해서 차상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이는 42세. 원래 서대문 쪽에서 주먹을 휘둘렀으나 독립해서 효자동 쪽으로 나온 뒤
적선동도 가끔 드나 들었다.
부모의 고향은 북쪽이고 피난 와서 인천에 있었다고 했다.
추경감은 이 세 명의 건달 중에 경상도 말을 쓰는 조치건을 먼저 만났다.
두어 시간 다방에 버티고 앉았으니까 선글라스를 손에 든 조치건이 나타났다.
추경감이 손짓으로 부르자 그는 얼른 다가와서 행상 상자를열어 펼쳤다.
"아저씨, 좋은 물건 있습니다."
그는 추경감의 표정을 슬쩍 보고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경찰관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는 것 같았다.
추경감의 행색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둥그스럼하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은 잔주름 살, 후줄근한 옷차림, 꼭 복덕방의 마음 좋은
할아버지 스 타일이다.
"좋은 게 뭔데?"
추경감이 가만히 묻자 그는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더니 박스에서 포장된 약품 같은 것을 꺼냈다.
"이건 스웨덴서 들어온 건데. 아주 그만입니더."
"뭐가 그만이야?"
"두 시간도 좋고 세 시간도 좋은 기라예. 여자를 아주 쥑여주는기라요."
"이게 여자 죽이는 약이야? 죽여 봤어?"
추경감이 빗나간 질문을 했다.
"아이구, 나야 뭐 젊은데 약 힘 빌려가 여자 쥑입니꺼? 생짜로 조져도 얼마든지라요."
"이걸 어떻게 쓰는데?"
추경감이 그것을 받아들고 짐짓 흥미가 있는 척했다.
"시작하기 전에 살짝 바르모 되는 기라예. 너무 많이 바르모 안 되는 기라요."
조치건은 심한 사투리로 이야기했다.
"값이 얼마야?"
"아저씨한테 특별히 싸게 하지요. 오늘 마수거린데."
"마수?"
"예, 첫 손님을 마수거리라 안카는기요?"
"그래서."
"5만원만 주이소. 특별인기라요."
"5만원. 너무 비싼데."
추경감이 얼굴을 찌푸려 보이자, 조치건은 얼른 값을 다시 불렀다.
"2만원."
추경감은 그를 더 붙들어 둘 셈으로 2만원의 거금을 투자 했다.
경감 월급으로는 가벼운 돈이 아니었다.
더구나 수사비 같은 것을 청구할 수는 없었다.
"당신 고향이 경북이야? 문경? 상주?"
조치건은 빙그시 웃으며 돈을 재빨리 호주머니에 넣었다.
"상줍니더. 우째 그리 잘 마칩니꺼?"
"내가 사람을 좀 찾는데. 당신은 이 일대 다방에 다 다니지?"
"여기가 내 직장인기라요."
"혹시 설희주라는 여자 이 다방에 자주 오지 않았나?"
"설희주가 누군기요? 탤런트인기요?"
"아니, 명왕성 그룹 며느리."
"아아, 그 칼에 찔려 죽은 여자 말하는기요?"
조치건이 갑자기 당황하며 일어섰다.
"본 일 있어?"
추경감이 조치건의 팔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조치건은 그제서야 상대가 형사라는 것을 눈치챘다.
추경감은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분명 설희주와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설희주씨의 먼 친척인데 걔가 죽기 전에 이 다방에서 누구한테 거액의 돈을 빌려준
일이 있어. 죽고 나니까 돈 갚을 생각을 않치 뭐야.
그래서 설희주에게서 돈 빌려간 남자를 찾고 있는 거야."
추경감은 급한 김에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설희주와 자주 만나던 남자 본 사람만 찾으면. 내가 크게 사례할 텐데."
조치건은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난 그런 사람 모릅니더."
조치건은 일어서더니 슬그머니 딴 자리로 가버렸다. 추경 감은더 붙들지 않았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 품속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이봐! 강형사, 이 목소리 그때 전화 신고한 목소리와 비교해 봐."
"예? 이게 누구 목소립니까?"
"조치건이라는, 미리내 다방 일대에 다니는 선글라스 행상 목소리야."
추경감은 호주머니에서 2만원이나 준 약통을 내보였다.
"이거 자네 가져."
강형사는 추경감이 주는 약통을 영겁결에 받아들었다.
"이게 무슨 약입니까? 저 아픈 데 없는데요."
"그게 여자 죽이는 약이래."
"예?"
강형사가 눈을 크게 떴다. 추경감은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추경감은 다시 다방 주변을 훑으면서 두사나이 박민재와 차명준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러나 사건이 날 무렵 차명준은 서울에 있지 않았고,
박민재만 그 다방을 드나들었다고 증언들을 했다.
"혹시 박민재가 경상도 사투리를 가끔 쓰지 않나요?"
추경감은 이미 자기 신분을 알고 있는 미리내 마담에게 물어보았다.
"박사시미는 고향이 충청도라고 하던데. 경상도 사투리는 쓰지 않는 것 같았어요."
추경감은 박민재의 고향이 설희주의 외가와 같은 충남 서천이라는 것이 자꾸 걸렸다.
그래서 출생한 마을까지 추적해 보았는데 공교롭게도 설희주의 외가와 같은 마을이었다.
추경감은 박민재와 설희주가 분명히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박형사를 시켜 그것을 집중적으로 조사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은,
박민재가 경상도 사투리로 살인 사건 신고를 한 사람은 아니란 것이었다.
추경감의 그런 생각은 적중했다.
"반장님, 그놈입니다. 그놈! 이제 사건 해결되었습니다."
추경감이 출근하자마자 강형사가 흥분해서 떠들었다.
"좀 정신차리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봐. 뭐가 그놈이란 말야?"
"설희주 피살 사건의 범인은 적선동 라이터 행상 조치건 입니다."
"뭐야?"
"그놈의 목소리가 그놈의 목소립니다. 이런 죽일 놈!"
"그놈의 목소리가 그놈의 목소리?"
추경감은 무슨 뜻인지 알면서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성문이 같아요, 성문(聲紋)! 신고할 때 녹음해 놓은 목소리 무늬와 전번 반장님이
떠온 목소리가 동일인이라고 과학수사연구소에서 통고해 왔습니다.
이제 사건은 해결된 것입니다. 박형사가 묶으러 갔으니 곧 올 겁니다!"
강형사는 춤을 추듯 사무실을 한 바퀴 돌면서 신이 나서 어쩔줄 몰라했다.
"공연히 그 집 식구들만 의심했군 그래."
신나 하는 강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추경감이 입을 열었다.
"쯧쯧쯧. 전화 건 녀석이 범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 집 식구들은 아직도 강력한 용의자들이란
말이야."
추경감의 신중론에 강형사는 코읏음치고 싶있지만 참았다.
조치건을 잡으러 간 박형사는 퇴근 무렵이 훨씬 넘어 맥 빠진 모습으로 들어왔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강형사가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헛수고했어. 벌써 토끼고 없어. 눈치를 챘나 봐.
어제 아침부터 적선동 일대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답니다."
"뭐야? 내가 당장."
성미 급한 강형사가 점퍼를 걸쳐 입었다.
"날뛴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집은 알아보았나?"
추경감이 침착하게 말했다.
"예, 하숙하고 있는 집에 가 보았습니다만, 이틀째 들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연고지는?"
"그게 아직."
"반장님, 저한테 맡기십시오. 아이구, 이 독 안에 든 쥐를!"
"자, 서둔다고 될 일이 아니야.
내일 알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늦었으니 쐬주나 한잔 하지."
추경감은 그의 평소 성미대로 느긋하게 말했다.
바쁠수록 천천히 해야 실수가 없다고 그는 늘 선배답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 이튿날도 조치건의 행방은 묘연했다. 의도적으로 종적을 감춘 것이 분명했다.
시경에서는 전국 경찰에 전통으로 지명 수배령을 내렸다.
조치건의 하숙방은 수색영장을 가기고 가서 뒤졌지만 아무단서도 찾지 못했다.
외설스런 포르노 책자와 엉터리 정력제같은 것만 잔뜩 나왔다.
다시 허송 세월이 며칠이나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반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강형사가 진주 목거리 하나를 들고 들어오면서 떠들었다.
비닐봉지에 넣은 목거리는 첫눈에도 굉장히 비싼 물건으로 보였다.
"그게 뭐야? 자네 장가 들려고 장만한 거야?"
추경감이 농담으로 말했다.
"예? 제가 이렇게 비싼 걸 혼수로 줄 만큼 부자라면 벌써
여우같은 마누라에다 토끼 같은 아들딸을."
"넋두리 그만두고 이야기부터 해봐!"
"이것이 죽은 설희주의 물건이라면 어쩌겠습니까?"
강형사는 비닐 봉지에 든 목걸이를 흔들면서 말했다.
"뭐? 정말이야?"
추경감이 정말 놀란 듯 목걸이를 받아들면서 눈을 동그랗게떴다.
"이걸 영등포역 앞의 금은방에서 찾아냈습니다."
"누가 어떻게 거기 있는 걸 알아냈지?"
"영등포서에서 절도범을 한 놈 잡았는데 그놈의 장물을
추적하다가 보니까 이게 발견된 겁니다.
이게 설희주의 것 이란 것은 고봉식이 확인했습니다. 여길 보십시오."
강형사는 진주 목걸이의 이음 부분을 가리켰다.
백금으로 된이음 부분에는 조그만 글자 같은 것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거기 무어라고 쓰였나?"
글씨가 너무 작아 벌써 노안이 된 추경감은 읽을 수가 없었다.
"HJ.S라고 쓰여 있습니다. 희주 설의 이니셜입니다.
고봉식이 결혼 1주년 기념일에 사준 것이라고 하더군요."
"흥! 그때까진 깨가 쏟아진 모양이군. 결혼 선물도 다 사 다주고 말이야."
"첫해 1년이야 어떤 부분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떤 잡 지를 보니까 부부가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3년째부터이고,
이혼을 가장 많이 하는 위기의 해는."
"됐어. 총각이 알아 보았자 얼마나 알겠나.
그쯤 해 두고 이 목걸이가 그 금은방에 간 경위나 말해 보게."
"한 달쯤 전 30대의 남자가 가져와서 팔고 갔다고 합니다.
날짜를 확인해 보았는데 설희주가 피살되기 하루 전이었습니다."
"뭐야? 하루 전?"
"예, 그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 30대 사나이는 누구야?"
"인상착의나 말투 등으로 보아 박민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민재?"
추경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박민재와 설희주는 아는 사이인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박민재의 고향은 충남 서천, 설희주의 외가와 같은 마을 입니다.
설희주가 어린 시절 외가에 자주 가서 살다시피 했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 가기 전에는 입 하나 던다고 외가에서 자라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같은 또래인 동네 개구장이 박민재와 알개 된 것은 당면하지요."
"음."
추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했으나 불이 켜지지 않았다.
계속 불꽃만 튀기고 있었다.
추경감이 생각에 잠길 때 하는 버릇이었다.
"저번 사모님이 사다 주신 새 라이터 어떻게 하셨어요?"
강형사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추경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박민재의 사진을 가지고 그 금은방으로 가서 확인해봐."
추경감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박민재 사진이 어디 있습니까?"
강형사가 두 손을 벌려 보았다.
"이봐, 박민재가 전과 몇 범인지 알아? 별을 주렁주렁 단 놈인데 경찰에 사진이 없단 말야?"
추경감이 큰소리로 말하자, 강형사는 찔끔해서 목을 움츠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금은방 주인은 그 진주목걸이를 가지고 온 사람이 박민재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설희주 같은 여자가 박민재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야.
신분상으로도 그렇지만,
대학까지 나온지성인이 무식한 불량배와 무슨 볼 일이 있었을까?"
추경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사무실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남녀 관계라는 것은 타인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분과 지식 정도가 초월한다고 이상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강형사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 목거리를 설희주가 죽기 전에 가져간 것이 틀림없다는 건 참으로 풀기 어려운 일이야."
"죽인 뒤 뺏어간 것이 아닌 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사건현장 어디에서도 박민재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야 박민재 정도의 별을 단 놈이라면 장갑 끼고 범행하는 게 당연하지.
그 금은방에서 혹시 날짜를 착각한 것 아닐까?"
"저도 그걸 여러번 다짐했습니다만, 그 금은방 장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착오란 있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추경감과 강형사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는 싱겁게
풀려버렸다. 박민재가 자기 발로 경찰에 나타난 것이다.
"어디 숨어 있있어?"
안면이 있는 추경감이 물었다. 턱이 뾰족하고 눈이 양쪽으로 치켜 올라가 험상궂게
보이는 박민재는 오히려 여유 있는 미소를 띠었다.
"숨긴 제가 왜 숨겠시유? 죄진 것 없어유. 흑산도 가서 리루좀 하다 왔시유."
"리루?"
"예, 바다낚시 말입니다. 우럭, 돔."
"알았어. 낚시 좋아해?"
"아이구, 말도 마이소. 공짜 좋아하고 요행 좋아하는 놈이 낚시 좋아한다고 무식한
소리 하는 눔 있지만 그게 아니어유.
한놈 척 걸있을 때 그 팽팽한 낚시줄에서 전달되어 오는 손맛이란."
"됐어, 됐어. 그걸 묻자는 게 아니고, 당신 설희주 언제 만났어?
명왕성 그룹 사모님 설희주 말이야." 추경감이 단도직입적으로 다그쳤다.
"아하, 그 일 때문에 절 찾으셨어유? 후후후, 희주는 제 어릴적 친구여유.
물안골 살 때 소굽친구지유."
"그것도 알아. 근데 마지막 만난 것이 언제냐 말야?"
추경감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제가 죽이지 않았어유. 어느 눔인지 알면 제가 그냥 안둡니다."
박민재의 언성이 높아졌다.
"얼마나 불쌍하고 착한 여잔데, 그런 여자를 죽입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
흥분한 박민재의 얼굴을 추경감이 노려보았다.
"죽기 이틀 전이었나봐유."
설희주와 박민재는 고향에서 어릴 때 종종 만나고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몇해 전 설희주가 외가에 다니러갔다가,
이제는 장년이 된 박민재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을 존대할 수도 하대할 수도 없어 서먹서먹하다가 나중에 편하게 서로
존대어를 썼다고 했다.
그 뒤 서울에서 가끔 설희주가 박민재를 불렀다.
서로 사는 형편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즐겁게 웃기도 했다.
그런데 설희주가 죽기 이틀 전날 연락이 와서 적선동의 미리내 다방에서 단둘이 만났다.
"어째 얼굴이 좋지 않은데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하는 설희주를 보고 박민재가 걱정 했다.
"걱정? 응, 걱정이라기 보다는. 민재씨,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누구에겐가 그녀는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야? 말해 봐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인지.
희주씨같은 착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
박민재는 무슨 일이 희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 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어서 말해 봐요."
"내일 모래 말야, 내 대신 전화 좀 걸어줘."
"모래? 전화를? 왜?"
"그건 묻지 말아요. 그럴 사정이 좀 있어요."
"어디에다 무슨 전화를?"
"경찰서에다가, 아니 경찰국 범죄 신고하는 데에다 내가
죽었다고."
"뭐야? 무슨 농담을?"
처음에는 박민재도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너무나 진지하게 이야기하기에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 정말 설희주씨가 죽는 건 아니지?"
"물론이지. 내가 죽긴 왜 죽어. 그럴 사정이 좀 있어.
누굴 깜짝 놀라게 해서 버릇을 고치려고 해요." 박민재는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남편의 버릇을 고치려고 하는줄 알고 그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좀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면 살릴 수 있었는데.
어느 놈에게 속아서 목숨을 잃은 게 분명해요."
박민재는 입술을 깨물고 분해 했다. 진정인 것 같았다.
"근데 왜 당신이 전화를 하지 않았어?"
추경감은 박민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공교롭게 되느라고, 전화를 건 사람은 제가 아니고 조치건이란 놈입니다.
그 '경상도 쪼우'라는 떠돌이."
"뭐야? 조치건에게 시켰다고?" 추경감과 강형사는 마침 내 매듭이 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을 받았으면 당신이 직접 걸어야지 왜 남을 시켰어?"
강형사가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다.
"그게 뭐 죄가 됩니까? 이 손 치우고 얘기합시다."
추경감이 흥분한 강형사를 손으로 제지했다.
"그래서?"
"희주는 오후 4시, 즉 16시에 전화를 하라고 했지요.
삼청동 어디어디로 가면 여자가 죽어 있다고.
근데 내 부탁을 받은 조치건이 2시, 즉 14시로 잘못 듣고 그때 전화를 건 겁니다."
"왜 당신이 직접 걸지 않고 남을 시켜?"
강형사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다시 다그쳤다.
"그게 말입니다, 공교롭게 되느라고.
나와 조치건이 점심을 먹고 돌아오다가 걸렸지 뭡니까.
우린 오토바이를 타고 서대문 가서 사철탕 한 그릇씩을 먹고 오다가 미리내
다방 앞에서 걸렸지 뭐유."
"뭐가 걸려?"
"오토바이는 내가 운전하고 뒤에 조치건을 태우고 오는데
건널목에서 일단 정지 안 했다고 의경이 잡지 뭡니까? 의경도 경찰이유?"
"엉뚱한 소리 말고 얘기 계속해."
"그 빡빡한 의경이 영 놔주어야지요. 할 수 없이 경찰서로 가게 되었지요."
"거짓말 말아. 딱지만 끊지 경찰서엔 왜 가?"
강형사가 주의를 주었다.
"하도 뿔따구가 나서 한 대 쥐어박았지요."
"폭력을 썼군. 공무집행방해."
추경감이 점잖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경찰서에 끌려가면서 조치건 보고 전화 부탁을 했지요.
경찰서에 가서 내가 그런 전화 걸면 어떻게되겠습니까?"
박민재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째서 한두 시간 뒤에 또 전화를 걸었어?"
강형사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투다.
"나는 경찰서에서 조서를 받다가 아무래도 이놈이 일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미리내
다방으로 전화를 해서 물어보 았더니 아니나 달라요.
그래서 호통을 치고 다시 전화를 하라고 했지요. 그때가 대여섯시 됐을 겁니다."
"으흠!"
추경감은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수수께끼 하나가 풀린 셈이다.
그렇다면 박민재나 조치건은 범인이 아니지 않는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