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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西晉의 서예 미학 사상――書勢의 미학
청운 추천 0 조회 20 09.08.03 15: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6절 西晉의 서예 미학 사상――書勢의 미학

西晉시대에 이르러 楊泉의《草書賦》, 成公綏의《隸書體》, 衛恒의《四體書勢》, 索靖의《草書勢》, 劉劭의《飛白書勢》등 비교적 다양한 형식의 서론 저술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 서론들은 주로 각 서체의 書勢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토론한 것이 가장 큰 공통적 특징이다. ‘體’, ‘勢’, ‘狀’, ‘賦’등으로 서체의 특징을 귀납한 것은 각 서체의 형상과 심미적 특징을 자연 만물의 형상적 특징에 비유하여 인식한 ‘法象’미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서론에는 서체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의 규율을 지닌다는 것을 전제로 새로운 서체의 위치와 예술적 가치를 긍정하였다. 또 서예의 창작과 감상에서 객관 물체의 형상 이외에 창작 주체의 주관적 의식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당시의 서예 미학 이론이 書勢에 관한 일치된 주장을 중심으로 하고 새로운 서체와 창작 주체의 의식 문제를 공통적으로 토론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서예 미학의 흐름을 반영한다. 후대의 서예 미학 이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西晉시대의 書論은 衛恒의《四體書勢》이며 그 속에 당시는 물론 東漢시대 이후의 서예 미학 이론이 종합되어 관철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는《四體書勢》를 중심으로 西晉시대 여러 書學者의 서예 미학 사상을 고찰한다.

衛恒은《四體書勢》에서 자신이 연구한 서체 변천의 순서에 따라서《字勢》,《篆勢》,《隸勢》,《草勢》의 순으로 한자와 각 서체의 書勢을 논술하였으며 서체의 실용적 효용과 심미적 범주 그리고 서가와 서체에 대해서도 평론을 하였다. 그 가운데《篆勢》는 蔡邕의 문장을 인용하였고,《草勢》는 崔瑗의 문장을 인용하여 자신의 이론과 함께 수록하였다.《字勢》에서는 戰國시대의 策書와 古文經書 등의 古文 서체를 후대 서체의 근원으로 인식하고 찬양하였다. 그는 古文 서체의 심미적 범주를 자연 만물의 형상에서 찾았으며 그 심미적 특징은 ‘象形’이라고 귀납할 수 있다.《隸勢》에서도 隸書를 실용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서체라 평가하고 실용성과 예술성의 심미 법주를 천지 자연의 만물에 기초를 둔 象形性에서 찾았다. 書勢의 심미 범주를 자연 만물에 비유한 것은 東漢시대 이후의 서예 미학 이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당시의 심미 사조이다. 成公綏의《隸書體》, 索靖의《草書勢》, 楊泉의《草書賦》, 劉劭의《飛白書勢》등 西晉시대의 書論에서 각 서체의 특징을 ‘體’, ‘勢’, ‘狀’, ‘賦’ 등의 제목으로 자연 만물과 서체의 심미적 특징을 서로 연관시켜 설명한 것은 東漢시대 이후의 ‘法象’ 미학과 ‘書勢論’의 종합하여 象形 미학으로 표현한 것이다. 成公綏가 隸書를 “垂象表式, 有模有楷”라 하고 衛恒이 古文을 “存古人之象”이라 하며 索靖이 蝌蚪鳥篆을 “類物象形”이라 한 것은 각 서체는 본래부터 상형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와 같이 魏晉시대의 서학자들은 書勢를 자기가 자연 만물 속에서 직관적으로 느낀 심미 범주에 비교하였다. 이는 西晉시대의 서예 미학 이론은 東漢시대 이래의 法象設을 계승한 것으로 서예의 심미 표현 방법을 자연 만물에서 찾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미 문자 스스로에 만물의 형상을 근본으로 하는 象形의 특징이 구비되어 있다면 서예 작품에는 자연히 象形의 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象形의 미가 표현되는 것은 서체의 형태가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는 書勢라는 것이 당시 서예 미학의 중심 사상이다.

서예의 심미적 특징을 천지 자연에 감추어져 있는 미에 비유하여 書勢論을 주장한 서예 미학은 당시 성행한 玄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魏晉시대의 현학은 ‘도리를 터득하면 그것을 설명했던 말은 잊게 된다’는 ‘得意忘言’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다. 언어가 그것이 나타내는 뜻 그 자체는 아니지만 뜻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뜻을 설명하는 수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뜻의 근본은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되므로 당시의 사상가들은 ‘得意忘象’을 강조하였다. 우주의 근본과 대자연의 운행 규율을 깨달으면 그것을 상징하는 형상에 얽매일 까닭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서학자들도 이와 같은 사상적 영향을 받아 자연계 만물의 형상을 통하여 형상이 아니라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심미 정수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자연의 운행 중에서 자연 본래의 모습뿐 아니라 자아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과 자아 그리고 예술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서예의 심미 특징을 자연 만물의 심미 정수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衛恒이 “就而察之, 有若自然”이라 하고 成公綏가 “能擧萬物之形, 序自然之情”이라 한 것은 당시 서예 미학 사상이 玄學을 바탕으로 자연 만물의 심미 정수를 중시하였음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숭상한 심미 의식의 반영으로 창작 주체가 자연 만물과 교감하여 그 심미적 특징을 묘사하는 것을 서예의 창작의 본질이라 이해한 서예 미학 사상이다.

西晉시대의 서학자들은 천지 자연을 서예의 심미 근본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서체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을 자연의 순리처럼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서체 변화를 긍정하고 그 속에서 규율을 찾았으며 동시에 새로운 서체의 지위와 심미적 가치를 긍정하였다. 衛恒은《四體書勢》에서 서체가 변천한 까닭을 번잡함에서 간편함을 추구하는 실용성에서 찾았으며 최초의 문자인 古文에서 篆書를 거쳐 隸書와 草書로 변천하는 것을 긍정하고 今文 서체인 隸書와 草書를 긍정하였다. 현대에 확립된 학설을 근거로 할 때 衛恒이 戰國의 策書와 古文經書 등을 최초의 한자 서체라 한 것과 서체의 형성과 변천 등에 관한 이론이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당시에 새롭게 발견된 옛 서체 자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서체의 변천사를 연구하여 古文, 籒篆, 小篆, 隸書, 草書, 行書가 차례대로 변천한 까닭을 번잡함을 버리고 간편함을 취한 실용성에서 찾은 것은 서예 이론사에서 매우 가치 있는 연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체 변천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당시의 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한 학설이다.

서체 변천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모두 시대에 따라 변천한 새로운 서체를 긍정한 것과 동시에 그 실용적 효용과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成公綏가 예서를 “規矩有則, 用之簡易”이라 하고 索靖이 예서와 초서를 “損之隸草, 以崇簡易”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서체의 실용적 지위를 인정한 것이다. 또 成公綏가 “時變巧易, 古今各異”라 한 것, 楊泉이 “字要妙而有好, 勢奇綺而分馳”라 한 것, 색정이 “睿哲變通, 意巧滋生”이라 한 것, 劉劭가 “飛白之麗, 貌艶勢珍”이라 한 것은 모두 새로운 서체의 예술성을 긍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서예의 창작에서 “巧”, “奇”, “妙”, “艶”, “麗” 등의 심미적 범주를 요구하였으며 이 범주를 표현할 때 비로소 서예의 예술적 가치가 부여된다고 인식하였다.

法象 미학을 근본으로 하여 새로운 각 서체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한 西晉시대의 서예 미학에서는 심미 객체의 탐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작 주체의 주관적 의식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서예의 창작은 고전 회화와 달리 물상의 객관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 주체가 인식한 추상적인 미적 상징을 표현하는 예술이기 창작 주체의 정서나 감정 그리고 예술적 감각이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상형의 단계를 벗어난 예서, 행서, 초서, 楷書의 창작에서는 창작 주체의 주관적 요소가 더욱 분명하게 요구된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역대 서예 미학 이론에서는 창작 주체의 주관 문제를 매우 중요한 관점으로 토론하여 왔다. 창작 주체의 주관적 심미 의식에 관해서는 西晉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토론되기 시작하였으며 “心”과 “意”의 문제가 창작 미학의 중요한 범주로 대두되었다. 당시의 서학자들은 한자의 탄생을 사람이 객관 사물을 통하여 인식한 사유의 결과라고 인식하였다. 그들은 문자 창조에 대한 이와 같은 전제 아래에서 서예의 창작에서도 창작 주체의 주관적 의식을 중시하였다. 成公綏가 ‘意曉’라 하고 索靖이 ‘變通’을 강조한 것은 모두 서예의 창작에서 객관 물상에 대한 주관적 의식의 중시하고 객관 사물과 주관 의식의 결합을 강조한 미학 이론이다. 객관 물상과 주관 의식의 문제를 토론한 이들의 서예 미학 이론은 당시 성행한 玄學의 영향을 받았으며《周易》에서 나타난 “書不盡言, 言不盡意”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말은 사람의 뜻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고 글은 또 말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象’으로서 ‘意’를 표현한다는 사상을 서예의 창작 미학에 인용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할 때 ‘意’는 ‘象’을 통하여 본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예의 ‘象’은 곧 창작 주체의 ‘意’와 상통하는 것으로 ‘意’의 시각적 상징임을 알 수 있다. 衛恒이 “睹物象之致思, 非言辭之所宣”라 한 것은 ‘象’이 있어야만 ‘意’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象’과 ‘意’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意’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가장 이상적인 것은 ‘言’이 아니라 ‘象’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그가 서예의 예술적 위치를 문학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음을 비추어 주기도 한다.

이상에서 토론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西晉시대의 書論은 새로운 서체의 書勢論을 중심으로 하였다. 書勢論에 나타난 서예 미학은 玄學의 사상적 바탕 위에서 東漢시대에 성숙한 法象 미학을 계승하여 서예의 심미 범주를 자연 만물의 형상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그들은 창작 주체가 자연 만물의 형상이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미를 체현할 때 비로소 심미적 가치가 부여된다고 이해하였다. 이와 같은 미학은 서예의 창작에서 창작 주체의 주관 의식을 중시한 사상이다. 이와 같이 창작 주체의 “意”를 중시한 서예 미학 사상은 東晉시대 衛鑠과 王羲之의 서예 미학 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尙意’의 미학이 성숙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衛恒의《四體書勢》는 書勢論과 함께 古文, 篆書, 隸書, 草書의 탄생과 역사적 발전 등에 관하여 논술하여 최초의 중국서예사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衛恒은 먼저 東漢시대 이후 이룩된 문자학의 연구 성과를 기초로 한자의 탄생과 서체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였다. 한자의 탄생을 “有沮誦倉頡者, 始作書契以代結繩, 蓋睹鳥跡以興思也.”라 하여 한나라 시대의 崔瑗, 趙壹 등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河圖洛書’의 이야기를 排除하고《易․繫辭下》,《說文解字敘》등에 전하는 전통적 이론을 채택하였다. 또 한자의 造字法을《周禮․地官․保氏》에서부터 전하여 漢나라 시대의 鄭衆, 班固, 許愼이 계승한 ‘六書’설 가운데 許愼의 이론을 채용하였다. 이와 같은 문자 탄생 이론의 기초 위에서 古文, 篆書, 隸書, 草書의 변천 과정과 각 서체의 효용, 심미적 범주 등을 筆勢論을 중심으로 논술하였으며 역대 중요한 書跡과 서예가의 자료를 彙集하고 평론을 더하였다.

書勢論과 書體論 이외에도《四體書勢》에서 위항이 이룩한 서예이론의 업적으로는 고대 書跡과 역대 서예가에 대한 자료를 彙集하고 비평한 것을 들 수 있다. 위항은 漢武帝시대에 魯恭王이 공자의 古宅에서 얻은《尙書》《春秋》《論語》《孝經》등의 서체를 당시 사람들이 蝌蚪文이라 불렀다고 기록하였다. 또 太康원년 魏襄王冢에서 출토된 策書를 자신의 조부인 衛覬의 서체와 비교 연구하여 고문 서체가 여러 종류이었음을 고증하고 고문의 예술성을 찬미하였다. 위항이 비록 고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고는 하지만 그가 이룩한 서예이론의 업적이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역대 서예가의 자료 수집은 각 서체에 따라서 분류하였으며 서체별로 서예가의 우열을 평가하기도 하였다. 먼저 古文 서예가로는 邯鄲淳과 衛覬가 뛰어나다고 하였으며 篆籒와 小篆 서예가로 李斯, 曹喜, 邯鄲淳, 韋誕, 蔡邕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隷書 서예가로 師宜官, 梁鵠, 毛弘, 左子邑을 들었고 行書 서예가로는:劉德升, 鍾繇, 胡昭를 뛰어난 서예가라 하였다. 草書 서예가로는 杜度, 崔瑗, 崔寔, 張芝, 張昶, 張超, 姜孟穎, 梁孔達, 田彦和, 韋誕을 꼽았다. 그리고 한자의 탄생과 造字法 등 文字學에 뛰어났던 학자로 胡毋敬, 趙高, 程邈, 王次仲, 甄豐, 許愼을 꼽아 서예가와 文字學자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

위항은《四體書勢》에서 역대 서예가의 서예 활동을 기록한 것과 동시에 그들 사이의 師承관계를 밝히고 우열을 평가하였다.(사승 관계 정리엽배규 p10) 역대 서예가들을 평가한 방법으로는 ‘崇古’와 ‘得法’의 비평 사상을 표준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衛誕師淳而不及也.”, “蔡邕采斯喜之法, 爲古今雜形, 然精密閑理不如淳也.”, “伯英弟子文舒者次伯英.”이라 한 것은 崇古의 비평 표준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위항은 전통과 師法의 기초 위에서 충분히 得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가의 역량에 따라 충분히 변화와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張超亦有名, 然雖與崔氏同鄕, 不如伯英之得其法也.”, “鵠宜爲大字, 邯鄲淳宜爲小字, 鵠謂淳得次仲法, 然鵠之用筆, 盡其勢矣.”, “魏初有鍾胡二家爲行書法, 俱學之於劉德升, 而鍾氏小異, 然亦各有其巧, 今盛行於世.”라 한 것은 그가 서예의 발전과 변화에 매우 긍정적이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서예는 역사적 흐름과 함께 계승되고 변천할 뿐 아니라 서예가가 갖추고 있는 천분과 工夫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위항의 작가론은 兩晉시대의 서예가 고도의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항은《四體書勢》에서 書體論, 書勢論, 書家論의 초기적 체계를 구축하여 후대의 서예이론과 실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東晋시대의 서예가 초서, 행서, 小楷를 중심으로 극도로 발전한 것이 비록 위항의 이론이 직접적 원인이 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문, 전서, 예서 초서, 행서로 변천하는 맥락을 파악하고 그 탄생과 演變에 대하여 논술한 書體論과 字勢, 篆勢, 隸勢, 草勢에 관하여 논술한 書勢論 그리고 그가 彙集한 서예가의 우열 평론 그리고 師承 관계 등의 논술한 작가론은 당시까지의 이론 자료 가운데 가장 신빙성이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후대의 서학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서예사적 근거가 되었다.

추가할 곳을 찾아봐\

索靖이 서체 변천과 새로운 서체의 실용적 지위를 인정하면서 제시한 “變通”의 사상은 보편적 변화의 규율을 수용하는《周易》의 전통 사상을 바탕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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