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회에서는 주제 발표자를 정하지 않고 열린 토론방으로
참석한 모든 회원이 자기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돌아가며 해보자고 정했습니다.
박경선은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글> 책 이야기를 하고싶어 이 책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참고로 하십시오.
186책명-우리들의 하느님- 주제.hwp
책명- 우리들의 하느님
자- 권정생 산문집
(아버지의 소작 농민으로 월사금을 못 내어 어머니가 장날 행상을 다녔다. 밥 짓는 일을 열 살 때부터 맡아하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시작한 것이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점원노릇. 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 살 때부터였다.)
출-녹색평론사
독정-2018.2.5.읽고 -2020.8.14. 다시 읽다
<주제 1> 복 짓기에 대하여 -옷짓기와 밥짓기ㅡ
송리동 당집에는 정월 보름날 제사가 있다. 한 50년 전에는 당집 천정에 ‘옷걸이’와 ‘옷따기’가 있었다. 정월 열나흘 밤까지 좀 형편이 나은 집에서 새옷을 짓거나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을 지어 아무도 몰래 가져가 걸어 놓을 때는 남의 것을 훔치러 갈 때보다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옷을 갖다 건 것을 자기 집 식구조차 몰라야 한다. 그렇게 걸어놓은 옷은 또 가난한 이웃이 아무도 모르게 가져와서 입는다. 이것을 “당집에 옷따다 입는다.”고 했다. 옷걸기를 한 사람이나 옷 따다 입은 사람 모두가 그해 복되게 살 수 있다. 그 복은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이 화목한 지극히 소박한 복이었다. 옷은 한사람이 한 가지씩 따다 입어야지 그 이상 가져다 입으면 벌을 받는다. 따다가 입고 있는 옷은 절대 비밀이 지켜지기 때문에 누가 걸었고 누가 따다 입은 것인지 당사자밖에 모른다. 교회에서도 두손 모아 꿇어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거기 공자님의 말씀, 부처님 말씀, 서낭당 당집에 빌던 우리 조상들의 신도 함께 있고 바위, 나무에서 치성 드리던 원래 하느님도 섞여 있다. 석가나 예수는 하느님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본래 하느님 모습을 찾으려 애쓴 분들이다. 결국 그들은 모두에게 하느님 모습을 발견했고 각자 가려진 눈을 뜨게 하여 자기 모습을 보게 했다. 이 세상에서 진정 공생의 길을 찾고 평화적 삶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가 참된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다.
<주제 2>농촌사람들의 말
60살만 넘기면 그 머릿속은 거의 백과사전 같아진다. 아픈 사람이 생기면 약도 가지가지다. 여자애들이 산과 들로 나가서 나물을 캐면서 평생 동안 익히는 식물에 대한 식견은 어떤 전문가보다 훨씬 깊다. 보통 식물학을 전공한 사람도 시골 할머니만큼 한포기 풀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가지기란 어렵다. 달래 나물은 어떤 곳에서 캐면 가장 맛이 있는지를 책상머리에서 공부한 사람은 절대 모른다. 달래 나물은 목화밭에서 자라는 것이 가장 알이 잘 영글고 깨끗하다. 그것도 이른 봄 달래싹이 바늘처럼 보일 듯 말 듯 돋을 때 캐면 한 구덩이에서 새알같은 달래뿌리가 한웅큼씩 나온다. 시장에서 팔고 있는 달래는 시퍼런 달래잎이 20센티가 넘고 알뿌리가 작다. 원래 달래는 알뿌리를 먹는 나물이다. 바늘같은 줄기 끝에 새알같이 하얀 뿌리가 달랑달랑 달려 있어 달랑이라 했던 것이 달랭이, 달래로 바뀐 것이다. 지금도 경상도 농촌에서는 달랭이라 부른다. 본래 말을 만드는 사람은 전문 국어학자가 아니라 농어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은 말을 만들었다. 달랭이는 모양을 보고 이름을 지었고 씀바귀는 맛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꽃다지 나물은 원래 코딱지라 했다. 허허롭게 빈 밭에 코딱지처럼 다닥다닥 돋아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지은 것이다. 동이처럼 생긴 동이감, 더 길쭉한 상투감, 또아리처럼 납작한 또아리 감, 익을수록 시커멓게 되는 먹감이라 부른다. 질경이풀을 농촌에서는 간가지로 부르지 않는다. 뺍지구와 질겅우 두 가지로 부른다. 질겅우는 줄기가 길고잎은 순가갈처럼 생겼고 뺍자구는 뿌리 머리에서 잎이 시작되어 질겅우와는 다르다. 가뭄이 들면 뼙자구 쪽이 더 납작하게 잎이 땅바닥에 붙어버린다. 일본말에 납작한 것을 ‘빼짱꼬’라고 하는데 이 뺍자구가 건너가서 그렇게 불린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농촌 할머니들은 두 가지의 질경이를 분명히 구분 지을 줄 안다, 이른 봄부터 나물을 캐면서 식물의 모양, 빛깔, 그리고 쓴맛 단맛을 익히고 언제 어느 때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까지 안다
<주제 3> 자연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돌려줘야 하는 것이 바로 더불어 사는 평등의 원칙이며 그게 평화다.
· 초가지붕을 뜯고 나니 참새가 없어지고, 지붕 속에 살던 능구렁이와 족제비가 없어지고, 그러다보니 쥐가 많아져서 쥐약을 살포해서 고양이가 죽고 다른 가축들이 죽었다. 자연은 어느한 군데가 망가지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화학비료를 하다 보니 땅이 죽고 땅이 죽으니 그 속 곤충이 죽어 상대적으로 해충이 늘어났다. 농약을 살포하니 개울로 흘러들어 물고기가 죽고 물고기가 죽으니 새들이 죽고 새가 죽으니 나무들이 병들고. 교육은 힘을 가르치고 힘만이 최상의 평가기준이 되었다.
주제 4-권정생 동화 <용구삼촌>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삼촌은 건넛집 다섯 살 배기 영미보다 더 어린애 같았다. 영미는 마을 들머리 구멍가게에 백 원짜리 동전으로 얼음과자도 사 먹을 줄 아는데 , 용구삼촌은 밥 먹고 뒷간에 가서 똥 누고 고양이처럼 입언저리밖에 씻을 줄 모르고 야단만 맞고 자라서인지 벙어리에 가깝게 말이 없었다. 그런 삼촌이 언제부터인지 누렁이를 데리고 못골 산으로 풀을 뜯기러 다니게 된 것이다. 삼촌이다 소를 데리고 간다기보다 누렁이가 삼촌을 데리고 간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삼촌이 누렁이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누렁이가 앞장 서서 가고 삼촌은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용구도 이제 소를 다 뜯길 줄 알고, 색시감만 있으면 장가도 가겠구나.”
감나무집 할아버지가 우스게 말을 하고 껄껄 웃으며 삼촌을 칭찬까지 했는데, 오늘 이렇게 기어코 바보로 돌아간 것이다.
못골 골짜기는 캄캄해지고 낙엽송 솔숲은 조용하기만 했다. 응달쪽 사람들도 모두가 양지쪽 참나무 숲쪽으로 모여들었다. 숨이 차는 것도 잊은 채 아버지와 하께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억새풀이 우거지고 작은 소나무가 있는 조금 우묵한 곳에, 사람들은 모여 앉아 있기도 하고 서있기도 했다. 여러 개의 손전등이 쪼그리고 누워있는 삼촌을 비추고 있었다. 삼촌은 죽지 않았다. 다복솔 나무 밑에 웅크리고 고이잠든 용구삼촌 가슴에 회갈색 산토끼 한 마리가 삼촌처럼 쪼그리고 함께 잠들어 있었다. 귀머거리에 가깝도록 가는 귀가 먼 삼촌이 큰소리로 불렀는데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건 이상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그동안의 걱정과 피로도 다 잊고 용구삼촌의 잠든 모습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엾는 삼촌, 그러나 누구보다 착하고 고운 삼촌은 이렇게 우리들이 애쓰는 천연덕스럽게 잠을 자다니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삼촌은 우리들 눈 앞에 평화를 즐기고 있는 거이다.
“용구삼촌!”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삼촌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가 그때까지 곤히 잠들었던 멍청한 회가랙의 산토끼가 놀라 눈을 뜨더니, 축구공처럼 굴러가듯 달아나는 것이었다.
“삼촌! 일어나 집에 가.”
그러면서 나는 삼촌이 얼굴에 뺨을 비비며 흐득흐득 흐느껴 울고 말았습니다.
· 노인들은 옛날 어려웠던 시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고 하면서도 “그때는 그래도 사람답게 살았지.”한다. 꽁보리밥에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어도 꿀맛 같았고 삶은 호박에 볶은 콩가루를 더북더북 묻혀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었던가? 초가을 풋수수를 잘라다 꾹꾹 찧어 어래미에 내려 풋콩을 까넣고 쑨 수수풀때기는 최고의 건강식품이었다.
· 시골 아이들은 젓멋이 때를 빼면 부모가 따로 크게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란다, 부모가 일터에 나가 땀 흘려 일하는 동안에 자연이 품에 안아 기르는 것이다. 여름에는 매미가 자장가를 불러주고 가을철에는 엄마가 돌아올 때를 귀뚜라미가 알려준다. 엄마를 대신해서 삽사리가 볼을 핥아주고 고샅길을 아장걸음으로 나서면 거위가 꽥꽥거리면서 길라잡이 노릇을 자청한다. 아이의 살갗에 닿는 것, 코와 입, 귀와 눈에 닿는 것 가운데 아이들을 해칠만한 것이 없다. 풀잎에 종아리를 베거나 가시가 손바닥에 박히는 정도가 고작이다.
-윤구병의 <실험학교 이야기>에서
하지만 이런 농촌은 30년 전이다. 고샅길엔 경운기, 승용차, 트럭도 다니고 송아지만한 도사견 같은 큰 것 아니면 발바리라고 부르는 작고 앙칼진 개뿐이다. 깨진 유리병조각과 깡통과 플라스틱 비닐조각이 널려 있다. 한가로이 우는 매미소리 귀뚜라미소리도 사라졌다.
· 한국인들은 ‘나’라는 개별적 개념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아주 강한 국민이다. 그래서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집이다. 우리라는 복수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다.
산토끼나 노루가 마을에 내려오면 절대 잡지 않는다. 마을에 내려온 이상 우리 마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이지만 그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차례를 지낸다. 우리와 함께 먹고 한자리에 계신다는 따뜻한 마음씨는 죽음이란 시공을 초월한 정 때문이다. 이것을 미신, 우상으로 매도하는 것은 오히려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아름다운 관습이 많다. 가족 중에 누군가 먼길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그릇씩 떠놓는다. 그 떠놓은 밥을 우연히 집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한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일단 집에 찾아온 손님은 박대하지 않고 먹이고 재워준다.
·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