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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문학 통권 제72호 특집]
범대순 원로시인의 시 작품 16편 감상
①시 작품 15편 : 큰 바위의 꿈을, 불타는 무등산, 무등산 솔바람 외 13편
②작품해설 ‘백수광사의 산행’/김형중
③작품해설 ------------------/ 000 *어느 분이든 평론을 쓰시면 소정의 고료를 드리겠음.
[범대순 원로시인 약력]
광주 출생. 고려대 영문학과 동대학원 수학. 시집으로 『흑인 고수 루이의 북』『연가 ⅠⅡ 기타』『이방에서 노자를 읽다』『기승전결』『백의 세계를 보는 하나의 눈』『아름다운 가난』『세기말 길들이기』『북창서재』『파안대소』『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氣다』『산하』『가난에 대하여』『무등산』등이 있으며, 시론집으로 『백지와 기계의 시학』『트임의 미학』등이 있으며, 에세이집으로는 『눈이 내리면 산에 간다』가 있고, 『범대순전집』이 있으며, 기타 번역서와 연구서로 『1930년대 영시 연구』『W H. 오든』『현대영미시론』『스티븐스펜더 시집』『W. H. 오든 시집』등이 있다. 현재 전남대 명예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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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위의 꿈을
하늘이 하늘에 반하는 것은
거기 천둥소리가 살고
땅이 땅에 반하는 것은
거기 사람이 살기 때문
남자가 남자에 반하는 것은
거기 의로움이 있고
여자가 여자에 반하는 것은
거기 외로움이 있기 때문
무등산은
그 천둥소리 그 사람들
그 의로움 그 외로움
그 억만년의 생성生成
그 자락에 작게 태어나
천둥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의로움을 이웃으로
여든의 나이에 또 외로움을 만났으니
사람이면서
하늘이면서 땅이면서 있는 산
그 안에 한 줌 흙으로 살아
오래 큰 바위의 꿈을 꿀 거나
불타는 무등산
새해 아침 무등산 서석대 정상
1,100고지가 불타는 까닭이 있었다
검은 밤의 영하까지도
불타는 까닭이 있었다
입석대 바위가 서서 춤을 추는 까닭
온 산이 일어서면서 불타는 까닭이 있었다
무등산 서석대 하늘에 불이 나는 그 시각
때맞춰 산 아래 고을이 불타는 까닭
산과 사람이 같이 원시가 되는 까닭
나의 꿈이 불이 되는 까닭이 있었다
무등산 솔바람
무등산 솔바람은
눈보라 속
큰불이 식는 소리를 낸다
서석 입석 규봉이
찬 겨울과 같이
타는 원시를 달래고 있다
덕산 지공 너덜겅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둥근 돌의 그리움
사람들이 서서 그렇듯
지리산이 그렇듯
눈감고 같이 부르는 노래
무등산 솔바람은
헤아릴 수 없는 삶
멀고 아득한 마음 그 자색紫色을 분다
사람같이
무등산은
산이 아니라
강물같이
그래서 세월같이
무등산은
산이 아니라
날개같이
그래서 그리움같이
무등산은
산이 아니라
원시같이
그래서 불기둥같이
무등산은
산이 아니라
하늘같이
그래서 사람같이
무등산의 시원
나는 평생
무등산의 시원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무등산의 시원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신비한 불기둥을 만났다
그것은
나의 꿈속이었다
그리고
꿈을 깬 뒤로도 나는 불을 느낀다
불기둥이
나의 꿈과 같이 있기 때문이다
무등산 눈꽃
저것을 어떻게 한다냐
다만 하얀 것 위에 하얀 것
역사도 전쟁도 파묻어 버린
백 년 같은 저 작은 별들을 어떻게 한다냐
꽃 위에 또 사랑같이
찢어질 듯 휘어진 가지가지
말고는 있어도 다 아닌
저 하얀 사상을 어떻게 한다냐
바람결이 조금만 있어도 쏟아질 듯
쏟아지면 산이 무너질 듯
아슬아슬 가슴이 두근거리는
만유위험萬有危險의 법칙이여
사람은 없다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른
저 순수한 겨울을 두고
다시 도시로 가야 하는 미운 마음이여
작은 바위
옛날 그 멀고 가까운 옛날
두메 두메 하고도 꼬두메
우리 할머니의 긴 봄날이
토방에 앉아 졸고 있다
마당에 수탉 한 마리
까닭도 없이 홰를 치고
크고 높은 소리로 울면
조는 눈이 잠깐 떴다 감긴다
골목길은 꾸불꾸불
마람 울타리는 흔들흔들
드문드문 이가 빠진 대사립 멀리 무등산
그 안 하얀 숨소리가 가파르다
다만 높고 다만 푸른 하늘
더 높고 더 멀고 가까운 옛날이
무등산 중중머리에 주저앉은
나와 같이 바로 옆에 작은 바위
땀
한겨울에 땀은 귀족같이
거만하고 위선적이고
이마에서 눈에서
가슴에서 바짓가랑이 사이로
처음에는 가뭄에 마지못한
가랑비같이
그리고 승속 사이의
경계를 지나
숨 가쁜 역사이다가
선사시대로 거슬러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석기시대로
마침내 원시같이
소리 지르는 짐승같이
무등산 서석대
돌기둥같이 너덜겅같이
마신 물에 비하면
까닭이 없는데
어디에서 이렇게 쏟아지는지
나의 귀족은 타고 났다
한겨울 땀의 까닭으로
비로소 나는 무등산이구나
무등산 규봉無等山 圭峰
암자가 진달래꽃 숲 사이에 있다
장수 꿩 춘정을 아끼고 있는 정오
일흔을 넘긴 지긋한 피곤이 봄같이 달다
일어나 강같이 흐르는 바위에 서니
무등산도 금강산 일만 이천 봉
암벽이 대륙같이 소리 높이 침묵하고 있다
스무 개의 백 년들이 쏟아질 듯하구나
부활하는 성자들같이
이 자연 속에 인간으로 있음이 작지 않다
큰 눈 내리는 날 작정 없이 온 적도 있다
무등산 규봉에서는 계절은 의미가 없다
춘하추동이 다만 암벽이구나
새인봉
흰 구름도 푸른 하늘도 여기
긴 가난도 슬픔도 여기 있으면
어머니같이 흙 묻은 가슴이구나
무등산 새인봉에선
산새도 바위도 조선말로만 논다
전라도 사투리같이 모음 자음이 따로 없다
북으로 남으로 나의 행장은 바람 든 날개같이
꽃피다 말고 내리는 우박같이
늘 갈린 소리가 났었다
돌아와 여기 춘하추동에 서면
오랜 미움도 아픔도 다 그리움
아프리카도 히말라야도 모두 다 같이 있구나
바람재
무등산 덕산계곡 내내 겨운 산길
한여름 흐르지 않은 물을 그리며 걸었다
마침내 바람재 맑은 바람 맑은 까닭
지팡이가 먼저 알아보고 누워 버린다
저만큼 노란 날개 붉은 부리의 산새가
서로 추상으로 말해도 다 알아듣겠다
도시도 민주주의도 동상도 얼마나 다 헛소리냐
바람재에 서면 그렇게 말해도 죄가 아니다
무등산 서석대
-정규철에게
무등산 서석대 정상에 이르면
모난 바위에 앉아도 꽃방석이구나
무지개 붉은 힘으로 쉬는 호흡
원시같이 흐르는 땀이 푸르다
높은 하늘이 흐르는 구름과 같이 있고
사방으로 둘러선 산들이 다 하나이구나
7
시간을 다스리는 숫자들이 증발하더니
세상이 따라다니다 말고 돌아가 버렸다
순수하구나
미치고 싶은 마음
밤을 새며 바로 서고자 한 나를 한사코 가로막은
역사도 세계도 그 사람들도 미워할 수가 없구나
적벽 동천赤壁 洞天
명월이 있고 청풍이 있고 금사어화가 있던 적벽 동천
겨울 설경 속 낙조가 늘 새벽종과 폭포를 기억하는 옛날
학을 부르면 학이 오고 구름을 부르면 구름이 돌아왔었다
무등산 모후산 가까이 동으로 옹성산 그리고 멀리 백아산
백두대간의 남악 나라가 천둥과 합류한 물 섬진강 웃머리
반공半空 높이 수리數里를 천척 단애의 적벽이 있었다
하늘이 열린 이래 일월과 푸른 구름이 지킨 사람과 자연은
지금 춘추에 가려 다만 망향의 탑으로 나그네로 서서
낙조 다음의 시간을 향하여 뜻하는 자색을 그리고 있다
김립의 가난과 시와 세월이 하늘을 뜻으로 아직 남아 있고
여기 산천은 어제를 넘어 오늘로 내일로 역사처럼 흘러가지만
적벽 팔경은 꿈같이 눈을 감으면 마음속에 더욱 크게 있구나
산새
눈이 깊은 무등산 서석대
구름에 닫는 큰 바위
자세히 보니 작게 열린 창
창 안에 나를 보는 눈
그때 가까이 빨간 산새가
하늘을 닮은 소리로 울며 날아간다
새인봉 노래
새인봉을 만날 때까지
나는 바람이었다 구름이었다
그리움이었다
여기서 비로소 태어났다
여기서 나는 바위 위에
사투리로 말하는 산새가 되었다
산새는 새인봉 둘이면서 열 봉우리
노래가 멀리 긴 길 푸른 들에 닿는다
서울을 바다를 대륙을 욕심으로
내가 이방에서 눈이 사나울 때
새인봉은 늘 타고난 전라도
나에게 어머니를 일으켰다
돌아와 여기 서면 동으로 아침 해
그리고 지리산으로 동해로 백두산으로
서로는 다도해 제주 황해에 지는 해
아 여기 서면 비로소 가난도 푸른 하늘이구나
새인봉 광사狂士
새인봉 오르는 길에 진달래꽃을 만나
새인봉에 물소리가 나는가 물었더니
이 가뭄에 바위산에 웬 물소리
꽃은 자기만 아는 목소리로
비가 올라나 함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진달래꽃을 따라 산 넘어 하늘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나도 꿩처럼 소리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산이 울리는 큰 소리로
그렇다 이년아 왜 아니냐
나는 새인봉에 미친 놈이다
[시집, ������무등산������ 해설]
白鬚狂士백수광사의 山行
김형중(문학평론가/조선대 국문과 교수)
1. 그 밤의 춤
생각해보니 1988년 봄, 참 오래 전 일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선생은 학과장(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보직교수)이었고, 나는 학과 학생회장이었다. 겪어보니 시절이 좋아진(?) 지금은 학과 학생회장이란 게 학과 행사를 주도적으로 치르는 학생 대표 정도의 평범한 의미를 갖는 듯하다. 하지만 그때는 좀 달랐다. 앞뒤로 6월 항쟁이 있었고,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고, 전교조가 생겨나던 즈음이었다. 도시 곳곳에 최루탄 내음이 진동했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던 학생운동 조직에서는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지만) 소위 ‘대중화 노선’에 따라 비공개 언더 조직이 커밍아웃하면서(실제로는 아니었다) 학생회 공개 조직이 일종의 투쟁 조직으로 재구성되던 시기였다. 그런 판국에 천성에 반하는 게 분명한 그 일을 덥석 맡겠다고 나선 나는 많이 무모했고, 그만큼 겁먹었고, 그럴수록 오만하고 반항적으로 보이려고 표정과 행동을 과장했다.
그 즈음에 선생이 나와의 한 끼 식사 자리를 청했다. 당시 단과대 학생회장이었던(이 말은 그가 나보다 아주 더 많이 거칠고 정의롭고, 따라서 안하무인인데다, 학업과는 무관한 ‘투사’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선배 J와 학과 부학생회장이었던 후배 P와 함께였다. 난감했다. 우선은 내가 낯을 많이 가리는 데다, 특히 어려운 어른들과 마주 앉기를 병적으로 꺼려했기 때문이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선생을 사석에서 뵙지 못한다). 게다가 당시 같은 시국에 만약 학과장 직함을 가진 교수가 학생회 간부들을 불러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면 거기엔 분명 어떤 의도가 있을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말을 전해 들은 J형은 평소의 배포 그대로 ‘비싼 밥 한 끼 먹고 오는 거지 짜샤’라며 껄껄 웃어제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고, 좁쌀만 한 간담을 어찌어찌 숨기고 사는 것이 당시 매일의 일과였던 나는 그를 흉내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자주 들어가지도 않았던 강의실(선생은 20세기 영미시를 가르쳤던 걸로 기억한다)에서 외에, 내가 선생을 사적인 자리에서 대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오래 된 집 특유의 안정감이 느껴지던 시내의 자그마한 한정식집 이층 방이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자라지 못했으므로, 각양각색의 찬들이 소량으로 많이 차려진 한정식은 동료들과 구워 먹던 대패 삼겹살 맛만 못했고, 난생 처음 먹어본 생선회는 너무 비려서 선생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젓가락질 두어 번으로 예의만 차렸다. 반면 J형은 스스럼이 없었고 불손했는데, 그래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먹었다. P는 웃다 먹다 할 뿐 말이 없었고(그는 평소에도 지나치게 말이 많다가 또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나는 어서 이 자리가 끝나 내키는대로 말하고 내키는대로 행동해도 좋은 캠퍼스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돌이켜보면 선생도 그랬으리라.
이제 내가 대학 선생이 되어 겪어 보았으니 알고도 남는다. 그 새파란 젊은 (실은 젊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들이 뱉는 엄중한 시국에 대한 단언적 이야기며, 딴에는 완장 하나씩 찼다고 시도 때도 없이 놓는 어깃장이며, 무지에서 비롯된 어설픈 용맹담 따위를 들으며 밥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생은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내색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오래 못 봐온 친구들 대하듯, 우리에게 안부를 묻고, 사연을 묻고, 일상을 묻고, 그리고는 자신이 살아온 내력과 문학과 시에 대해 따뜻하고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때까지도 내게는 문학도라 할 만한 자부심도 머리에 든 지식도 없었으니, 그가 말하는 ‘기계와 백지의 시학’이니 ‘이방에서 읽은 노자’니 ‘오든’이니 하는 낯선 어휘들 앞에서 어리둥절하기는 했을지언정, 끝내 단호하고 투쟁적인 학생회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일 기회를 누리지는 못했다. 이 이상한 학과장 교수는 우리를 교화해야 할 불온한 학생으로 대할 의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날 그가 우리에게 했던 말이며 지었던 표정이며 했던 행동의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취기가 알맞게 무르익은 뒤였지 싶다. 선생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말하던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대로 옮겨 적지는 못하지만, 내용은 이랬다. “유치원 선생 빼고 선생이란 선생은 다 해 봤으니, 정년 후에는 빨간 모자 쓰고 아이들이랑 이렇게 놀아보는 게 내 꿈이라네.” 그 말이 과장이나 허사가 아니란 사실은 곧바로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선생이 이어서 한 행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처럼, 정말로 아이처럼, 춤을, 무슨 블루스도 탱고도 지루박도 아닌 기이하게 천진난만한 이상한 춤을, 덩실덩실, 정말로 덩실덩실 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면 나는 금새 그 춤이 조르바가 추었음직한 바로 그 춤이라는 걸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고, 꽤 훗날에서야 그 밤 선생이 보여준 그 춤사위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어떤 인상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공무도하가>의 그 유명한 ‘백수광부(白鬚狂夫)’ 형상이 그것이다. 국문과로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한 후였고, 프로이트를 읽으면서 문학이 어쩌면 일종의 광기 직전은 아니겠는가(프로이트가 말한 ‘승화’가 그것이다) 의심하기 시작하던 때의 일이다.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슬프지도 비장하지도 않게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절규하는 연인을 뒤로 한 채 물에 뛰어드는 한 미친 사내의 이미지에서 나는 디오니소스의 한국 버전을 감지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떠오르던 것이 바로 선생이 그날 밤 추던 그 춤이었다. 온화하고 절제된 표정과 행동 너머, 선생의 이면에는 디오니소스나 백수광부, 혹은 조르바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춤을 보던 날 밤 이후로 나는 선생의 삶, 선생의 말, 선생의 문학에 대해 그 진정성을 의심해 본 바 없는데, 실제로 문단의 행사나, 이런저런 회합이나, 심지어 우연히 맞닥뜨린 길거리에서 얼핏 보게 되던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실로 그 말의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시인의 풍모’ 그 자체였다. 그가 문학하는 이로서의 내 존재를 언제부터 알았는가와 무관하게 그는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서 어떤 절대적인 표상(나도 늙을 테니 꼭 그렇게 늙었으면 싶은)이었던 것이다.
2. 구석참의 시인
과도하게도 ‘풍모’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유심히 관찰한 이라면 이 말이 고작 은사에게 어쩔 수 없이 바치는 흔한 경의의 수사만은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 하얀 백발의 말총머리에 오래되어 보이지만 잘 어울리는 모자를 눌러쓰고, 말수는 적되 해야 할 말의 급소를 찌르는 화법을 구사하고, 오래 있어 야 할 자리에서는 구석참을 지키고 있되 오래 있지 않아야 할 자리에서는 어느 순간 스르륵 자취를 감추는 것이 선생의 평소 모습이다. 그리고는 일단 일어서면 마르고 곧은 척추를 직립보행하는 동물 최고의 모범처럼 세우고 걷는다. 그렇다고 차갑거나 엄한가 하면 그도 아닌 것이, 웃음은 소박하고 행동에는 격의가 없다.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볼 기회가 없었던 이들이 태반일 독자들을 위해서라면 이 시집에 실린 두 편의 시로 선생의(이제부터 그의 시 얘기를 해야 할 테니, ‘선생’이란 말을 잠시 ‘시인’이란 말로 바꾼다) 인품에 대한 구차한 설명을 대신할 수도 있겠다.
방 가운데
이야기꽃이 피는데
등잔불 뒤에
구석참 한 사람
무등산 야생화처럼
숨어서 웃고 있다
세상일 넘치고
할 말 어찌 없으랴
산에 고개 많고
강에 굽이 많고
숲을 보라는 말
바다를 보라는 말
푸짐한 말잔치
낄 틈 없지 않으련만
그대로 구석에 앉아
그 사람 그저 웃고 있다
- 「구석참」 전문
1930년생이니 시인 나이 어언 여든이 넘었다. 당연히 살아온 날들 동안 산만큼 많은 고개와 강만큼 많은 굽이를 넘지 않았을 리 없다. 흔히 ‘격동’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사용되곤 하는 ‘한국 현대사’를 염두에 둘 때, 1930년대에서 2010년대까지 그가 살아온 생애에 대해서라면 온통 하지 못한 말들로 넘쳐 날 줄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는 내내, 마치 무등산 야생화가 그렇듯, 등잔불 뒤 구석참에나 앉아 별다른 말이 없다. 물론 이 시의 화자가 관찰하고 있는 ‘그 사람’이 시인 자신이라는 단서는 시 안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많은 말잔치(섣부른 시인들, 섣부르게 도통한 자들일수록 얼마나 말들이 많은지)에도 내내 구석참을 지키며 ‘그저 웃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시인 자신임을 확신한다. 여러 번 목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태도가 작품 「무당촌」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무당촌 마지막 무당은 젊은 박흥숙이었다
광주교도소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람이다
그 사연을 말하기엔 마음이 너무 아프다
- 「무당촌」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른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무당 박흥숙에 대해서다. 그이에 관한 시이므로 의당 시는 그이의 사연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사연을 말하기엔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만 할 뿐,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는 일을 삼간다. 이 시가 힘을 얻는 것이 실은 바로 그 침묵 때문이다. 여든 넘은 노시인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연이라면 그 사연의 깊이와 아픔이 어떠할지, 독자로서는 쉽게 짐작하기 힘들다. 그 짐작하기 힘듦이 박흥숙의 죽음에 더욱더 강렬한 아우라를 부여한다. 이처럼 절제와 함구,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하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인의 어법이자 산행시 시작법이다.
노시인에게는 외람된 말이지만,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늙어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럴듯한 문장 몇 줄 쓰고, 시인 명패 가진 이들 치고 언행이 저와 같은 이들을 나는 그리 자주 본 적이 없다. 특히나 산을 시로 쓴다는 이들일수록 하나같이 도인이고(이때 산은 인생 말미의 그 뻔한 가르침을 얻는 도구가 되고 만다) 하나같이 열혈지사인 것이(이때 산은 도도한 역사와 민족의 기상 같은 사람의 옷을 입고 만다). 그 앞에서는 자주 튀는 침과 되풀이되는 허언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꼭 저렇게만 늙고 싶다는 내 바람이 실은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지도 나는 안다.
물론 시인에게도 저리 늙는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데, 여전히 저 단아하고 곧은 언행 너머, 그 밤 추던 그 이상한 춤사위가 사라진 데가 어딘지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백수광부를, 혹은 디오니소스를 몸에(흔히 이것들은 정신에 감추어지지 않는다) 감추어둔 이는 어떻게든 열병을 앓게 마련이라고 나는 프로이트에게서 배웠다. ‘억압된 것의 회귀’가 그것이다. 그러니 그 춤은 어디로 억압되었다가, 어디로 회귀하는 것일까?
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무등산의 파우스트
물론 그가 쓴 시만이 그 답을 일러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이가 진정한 의미에서 시인이라면 그 안에서 자신을 감추지는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존재의 집이자, 라깡의 말마따나 무의식의 집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시가 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억압된 백수광부는 시 속으로 회귀할 것이다.
������무등산������의 시인은 그러나 애초부터 시 속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를 억압할 의도조차 없었던 듯하다. 시집을 펼치면 처음 대하게 되는 것이 이런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 인용자) 중국 고전에 비유하고 때로 과장하고 영풍명월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일상에서 멀리 하였다. 따라서 힘들어도 글에 자기의 거친 숨결이 보이면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아니다. 나의 산행은 잃어버린 무등산의 원시를 찾아가는 고산고수(苦山苦水)의 길이고 자기의 영혼과 육체를 짊고 산을 오르는 짐꾼이고 셰르파의 기록이기도 하다. 진경(眞景)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나는 자기 자신에게 단순하고 순수하고 솔직하다. 그리고 산행이 고행이고 중독이고 광기이기 때문에 그래서 산행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책머리에>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쓰기를 선조들의 영풍명월과 단호히 구분한다.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산행시들은 “고산고수의 길”이고 “영혼과 육체를 짊고 산을 오르는 짐꾼”의 기록이란다. 또 자신에게 산행은 “고행이고 중독이고 광기”란다. 나는 이 소박하고 솔직한 말들 중에서도 특별히 ‘육체’란 말과 ‘광기’라는 말에 유념하는 편이다. 물론 이 두 어휘는 실은 의미론적으로 같은 계열에 속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수양이 정신에 속하는 딱 그만큼, 광기는 육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등산 시편 100편을 묶은 이번의 시집에서 내 눈에 가장 도드라지는 동사가 바로 ‘미치다’이다. 바람을 노래하고 달을 읊었던 선조들과는 다르게, 90년대(실은 지금까지도) 한국 시단을 풍미한 이른바 생태시인들과도 다르게, 그는 산에 가면 대개 ‘미친다’. 여기 그 예들이 있다.
“알프스와 무등산이 다른 것은 / 알프스는 밤에 어둠 속에서만 미치게 하고 / 무등산에서는 내가 대낮에도 미친다는 것”( 「알프스 산 한밤중」에서). “무등산에 첫눈 내리면 / 내가 왜 우는지 / 서석대도 입석대도 규봉도 너덜겅도 / 다람쥐도 노루도 미친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무등산에 눈 내린다」에서). “무등산 정상 천둥이 / 미친 폭풍우와 야합할 때 // 바위 위에서 다 벗고 / 백 년의 춤을 춘 까닭 / 그가 서석대 150번째 / 땀방울이 미친 날이었다”(「서석대 설치미술」에서). “장마가 들면 나도 미친 산이고 물같이 / 하루에도 몇 번씩 덕산계곡에 가 있다”( 「무등산 장마」에서)
알프스에서와 달리 시인은 무등산에서라면 대낮에도 미친다. 첫눈이 내리면 봉우리들이나 동물들도 그 내력을 모르게 미치고, 천둥이 정상과 야합할 때는 바위 위에서 나체로 백년의 춤을 추며 미치고, 장마가 들면 하루에도 몇 번씩 덕산 계곡에 가서 미친다. 아마도 무등산에서의 이 광기를 두루 종합하는 시가 「무등산에서 미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일 것이다.
무등산에서 미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방향이 없이 쏟아지는 비가 미쳤다
알게 구멍이 난 하늘이 미쳤다
화살같이 쏟아지는 물이 미쳤다
무등산에서 미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소리치며 불어대는 바람이 미쳤다
소리치며 부러지는 나무가 미쳤다
지진 같은 바위의 울음소리가 미쳤다
무등산에서 미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절벽에 부딪치는 구름이 미쳤다
구름 위에 서 있는 어지러움이 미쳤다
심호흡 사이로 짙은 산 냄새가 미쳤다
무등산에서 미친 것은 죽음보다 신난다
무등산에서 혼자 죽은 것은 무의미하다
미친 비 미친 바람 미친 나무 바위 구름
미친 무등산을 두고 나만 죽으면 너무 무의미하다
- 「무등산에서 미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전문
미친 시인의 눈에 무등산의 모든 것들은 다 미쳤다. 비도, 하늘도, 계곡의 물도, 바람도, 나무도, 바위도, 구름도, 산내음도 다 미쳤다. 그 끝에서 결국에는 죽음마저 광기에 굴복당한다(“무등산에서 미친 것은 죽음보다 신난다”). 온건하고 상투적인 의인법으로 자연을 인간화시켜버리고야 마는 그 숱한 생태시들로부터 범대순의 시를 구분시켜주는 저 강렬한 광기의 기록들을 두고, 그가 20세기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인 오든(W.H.Auden)의 숭배자였단 사실을 떠올리는 것도 딱히 틀린 독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 저 시의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연 네 행은 시인의 광기에 관한 그보다 심오한 기원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내가 읽기에 시인의 광기는 칸트 이래로 낭만주의자들이 소위 ‘숭고’(sublime)라 불렀던 감정과 형제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풍경이나 사물 앞에서 인간의 이성이 압도당할 때, 상상력의 크기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무한자 앞에서 인간 스스로의 유한성이 한없이 초라해질 때(물론 칸트에 따르면 이성은 금새 오만함을 회복한다),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을 칸트는 ‘숭고’라고 불렀다. 공교롭게도 칸트가 숭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예로 들었던 것 역시 알프스 산이었음은 흥미로운데, 아마도 괴테의 저 유명한 파우스트가 바다 앞에서 느꼈던 감정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내 눈은 저 아득한 바다로 끌렸다네.
그것은 부풀어서 저절로 솟구쳐 올랐다가는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파도를 퍼부어
넓고 평탄한 해변을 덮치는 걸세.
난 그게 못마땅하네. 오만한 마음이
정열에 들뜬 혈기를 못 이겨
온갖 권리를 존중하는 자유정신을
불쾌한 감정으로 바꿔놓은 것 같아서 말일세.
우연이려니 생각하고 더욱 날카롭게 응시해 보니,
파도는 멈췄다가 다시 구르면서
당당히 도달했던 목표에서 멀어져 가는 거야.
시간이 되면 이 유희를 또 되풀이하는 거지.
......
여기서 나는 싸우고 싶다. 이것을 이겨내고 싶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2권, 정서웅 옮김, 민음사, 2001, p.297)
파우스트는 지금 바다 앞에 서 있다. 그는 거의 미치기 직전인데, 이유는 바로 자신 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 때문이다. “부풀어서 저절로 솟구쳐 올랐다가는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파도를 퍼부어 넓고 평탄한 해변을 덮치”는 바다, 또 다시 구르면서 “당당히 도달했던 목표에서 멀어져 가는” 바다, 그것의 리듬은 실로 무한하다. 파우스트가 존재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그리고 그가 지상에서 사라지곤 난 후에도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 바로 저 무한한 파도의 리듬이다. 파우스트가 불쾌해서 못견디는 것은 바로 그 바다의 무한성이자 숭고함이다. 왜냐하면 그 앞에서 인간의 ‘자유정신’은 고작 찰나의 기도이자 무력하기 그지없는 일순의 몸부림 같은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가 메피스토펠레스를 충동질해 세 명의 용사로 하여금 바다와 한편인 필레몬의 오두막을 불태우고 노인 부부를 화형시키게 하는 광태를 보여주는 것도 같은 이유다. 파우스트는 무한한 것의 위용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한계성에 직면해 미쳐버린 유한자다.
파우스트가 바다가 아닌 산을 마주했더라면, 아마도 앞서 인용한 시의 마지막 연처럼 말했으리라. ‘산에서 혼자 죽는 것은 무의미하다. 미친 산을 두고 나만 죽으면 너무 무의미하다.’ 이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이해하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숭고한 감정이 이성에 굴복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광기는 그 넘쳐나는 신명으로 마치 무한을 얻을 것처럼 도도하고 거침없다. 광기는 숭고에 굴복하지 않고, 무모하게도 스스로 숭고해지고자 한다. 시인이 자신의 산행은 요산요수가 아니라 고산고수요, 시지프의 고행과 같다고 했던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산행 곳곳에서 소리지르고 발가벗고 춤추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물론 유한한 인간 존재가 산과 바다와 하늘의 무한성과 대등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무한한 것 앞에서 굴복하지 않기로 작정한 자에게 산행은 무한이 유한을 점거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의 은유가 될 수밖에 없다. 노시인의 몸속에 여전히 어떤 열정과 광기가 도사리고 있어서, 유한한 몸으로 저 말없는 무한성에 도전할 때, 산행은 고행이 된다. 영혼의 일이 아니라 육체의 일이 되고, 유한이란 숙명의 짐을 진 셀파의 고역이 된다. 말하자면 솔직하고 꾸밈없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행위가 된다.
4. ‘죽을 존재’의 윤리
그러나 애석하게도 광기와 신명은 항상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신명 후 백수광부는 죽음의 복수를 당하고, 디오니소스는 무아지경에나 잠시 들렀다 갈 뿐 오래도록 소식이 없다. 어느 순간 피로가 찾아오면 내 몸은 다시 유한자,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인간이란 슬프게도 ‘죽을 존재’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방문에는 예외가 없다.
그럴 때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알다시피 파우스트가 바로 그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직면하여 취한 태도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그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노인의 (은은하게 고대적인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오두막을 불태우고 그들을 화형시킨다.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강변하며 결백의 수사학을 펼치지만 실은 미필적 고의다. 이후의 행적이 그 증거인데,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역사를 시작한다. 거대한 바다를 메우고 유유한 물길을 막는다. 루카치가 ������파우스트������를 두고 “피가 뚝뚝 듣는 본원적 축적의 시”라고 부른 이래로, 그는 최초의 근대적 개발자이자 무자비한 자연의 정복자가 된다. 근대는 그런 방식으로 무한한 것들을 파괴함으로써 스스로를 무한한 어떤 것으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물론 그 폐해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의 막바지를 사는, 그래서 파우스트보다는 더 현명한 노시인은 그처럼 폭력적인 길을 택하지 않는다. 가령 어느 가을 중봉에 올라 백마능선을 바라보며 “길고 큰 사상을 타지 못하고 하산하자니 눈물과 같이 한이 남는다. 아름다움은 절망, 백마이면서 젊음이었다.”(「무등산 백마능선」)라고 노래할 때, ‘백마’는 분명 광기의 다른 말이고 ‘하산’은 분명 죽음의 다른 말이다. 광기 밖에서 보면 광기는 젊음과 같이 허망하고, 산은 여전히 나 없이도 무한하게 아름답다. 나는 필멸의 존재, 이제 광기로도 저 산을 정복하지 못했으니, 다른 길이 없다. 그의 시에 ‘광기’ 만큼이나 자주 ‘죽음’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따라서 주의를 요한다. 그런데, 시인에 따르면 죽음은 ‘셀프’다.
나도 익힌 셀프 가운데
여든의 맨발 그리고 산행
혼자 가는 무등산
죽음에 이를 나의 병도 셀프이다
- 「셀프 문화」에서
여든 넘은 시인이 맨발로 산에 오르며 생각하자니, 죽음은 셀프다. 이 말을 좀 더 현란하고 철학적인 용어로 번역하자면 죽음은 실존의 단수성(특이성, singularity)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누구나 홀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죽어본 적이 없는 채로 죽게 되므로 죽음은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 유한성, 그 단수성을 철저하게 자각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절대적 타자이기도 하다. 누구도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다만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죽는다.
흥미로운 것은 블랑쇼와 낭시가 ‘공동체’와 ‘윤리’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죽는다. 나뿐만 아니라 타자 또한 나처럼 단수적으로, 절대 완전하게 되지 못한 채 죽는다. 우리 모두는 타자와 죽음을 공유하는 유한하고 또 유한한 존재들이다. 실로 죽음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연루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탄생하는 것이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이고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이다. 죽음은 우리들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들로서 뭔가를 존재론적으로 분유(partage)하고 있는, ‘공동-내-존재’임을 드러내주는 거의 유일한(‘사랑’과 함께) 체험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 읽은 동냥으로나 나와 타인의 죽음에 대해 아는 척할 수 있을 뿐, 그 깊은 속내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선생(이제 다시 생의 가장 지혜로운 시절을 사는 내 은사, 그를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의 혜안이야말로 실은 ‘체험적으로’ 여기에까지 미쳐 있다고 믿는 편이다. 이런 시들 때문이다.
큰비 내린 산에서 길을 잃은 시각에
강이 되어 버린 물속에 그대로 섰다
화살처럼 날아다니는 번개도 가깝다
쏟아지는 큰비 속에 어둠이 들면서
나무뿌리가 거꾸로 서는 것이 보인다
벼락을 미리 알고 우는 바위도 있다
생을 어떻게 마감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생을 마감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이랴
그런데 아닌 속마음이 거기 있었다
산 말고 거리에서 들에서 마치고 싶구나
바람 번개 벼락 말고 사람 옆에 있고 싶다
아니게 죽더라도 사람 앞에서 죽고 싶다
- 「큰비 내린 날의 산행」 전문
오 내일이 내일이고 내일이면서 내일이고 하늘이고 사상인 당신
당신들 속에서 같이 내가 자식 낳고 비비고 살면서 떠나지 않고
여기 이렇게 있다가 이제 가을날 같이 갈 날을 가고 있는 생애여
걸어 보지 못한 길 파안대소로 이제 그 야생을 마감하고자 한다
- 「파안대소의 여진」 전문
여기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죽음이 둘 있다. 「큰비 내린 날의 산행」에서 선생은 처음엔 산에서 생을 마감할까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만약 앞선 시들에서처럼 그의 산행에 숭고와 광기만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내 거리와 사람 옆에서 죽음을 맞겠다고 맘을 고쳐먹는다. 쉽고 단촐한 문장들이지만, 저 문장들 안에는 단수적인 유한자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죽어야 할 존재인 타인들에 대해 느끼는 연대감에 대한 성찰이 있다. 그 감정은 파우스트의 정복욕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다.
이때 그 타인들은 물론 「파안대소의 여진」에서처럼 익명의 ‘당신’들이다. 일면식도 없고,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공유한 바 없지만, 저 유구한 무등산 아래 살며 필연코 닥칠 죽음을 공유한 바로 그 ‘당신들’ 속에서, ‘자식 낳고 비비고 살면서 떠나지 않고’ ‘이제 가을날 같이 갈 날을 가고 있는 생’을 선생은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수 십 년에 이르는 무등산행이 다만 광기의 고행뿐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금도 올려다 보면 눈앞에 보이는 바로 저 산이, 결국에는 ‘걸어 보지 못한 길’을 남기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자들의 운명 앞에서도 ‘파안대소’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을, 그에게 선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