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가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1764년(영조 40년)! 통신정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재야 학자 이광려의 특별한 부탁을 받고 쓰시마(對馬島)에서 가져온 것. 조엄은 일본 방문기 ‘해사일기’에서 ‘이름은 감저(甘藷)다. 효자마(孝子麻)라고도 한다’고 했다.
고구마를 쓰시마 사람들은 ‘고코이모(孝行芋)’라고 했다. 그것을 조엄이 ‘고귀위마(古貴爲麻)’로 표기하였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희는 1820년에 지은 ‘물명고’에서 고구마를 ‘甘藷’로 표기하고 한글로 ‘고금아’라고 했다. ‘koukoimo[고코이모, 孝行藷]’는 근대 일본어 ‘koukou[고코, 孝行]’와 감자, 토란 따위를 의미하는 일본어 ‘imo[이모, 藷/芋/薯]’의 합성어인데, 이를 한글로 표기한 외래어가 고구마이다.
고구마 종자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 농민들은 앞다퉈 심었다. 구황(救荒) 농산물로서 허기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관오리들이 고구마 순을 백 포기씩이나 수탈해 갔고 아전들은 한 이랑씩 거둬 갔으니 점차 재배하는 농가가 없게 됐다가….
명나라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서광계는 저서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 고구마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금만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다.’
이러한 사실을 왕실에 상소한 학자 대신들이 있어 고구마는 19세기 초 다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강필리의 ‘감저보’와 김장순의 ‘감저신보’ 등이 감저의 재배법과 이용법에 대하여 쓴 대표적이 책이다.
첫댓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희는 1820년에 지은 ‘물명고’에서 고구마를 ‘甘藷’로 표기하고 한글로 ‘고금아’라고 했다.
이 것을 보면 감저는 원래 제주어가 아니라 표준어였다. 헌데 육지에서는 한글 '고금아'를 소리나는데로 '고구마'로 부르고
제주에서는 한자어인 甘藷를 사용함으써 이제 와서는 감저가 제주어라고 하게된 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