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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 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pp. 343-457. (P.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우선 헬레니즘이후 다시 말하면 알렉산드리아학파 이후에 로마제국이 성립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왜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따로 주목하지 않는가하는 문제는 젖혀두고, 한 철학자가 존재론(제일철학)과 같은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체계의 서술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체계의 서술이 있다. 플로티노스에게 상향하는 길과 하향하는 길이 있는데, 벩송은 플로티노스의 방식은 플라톤과 비교하여 반대 방향이라 한다. 플라톤 사유에서는 아페이론에서 이데아로 향하는 인식의 과정을 변증법이라 하고(폴리테이아편), 이데아에서 (데미우르고스를 매개로 해서) 아페이론으로 향하는 길을 신화의 길이라 한다(티마이오스편). 플로티누스 사유에서는 물질에서 일자로 향하는 길이 신화의 길이고, 일자에서 물질로 향하는 길이 변증법의 길이다. 이러한 벩송의 설명에서, 전자의 회귀의 길이 신앙 또는 신념체계와 닮았고, 후자의 유출(풀림, 생성)의 길은 실증적 인식의 길로 보았을 것이다. 벩송으로써는 일자가 동일성의 통일성 전체가 아니라, 자연과 같은 다발의 총체성(l’intégralité)로 보아서 자연의 자기 풀림, 긴장의 이완, 압축의 팽창으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의 필연적 풀림(ex-plication)이나 벩송의 부풀어(gonfler)가는 과정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 심층의 엉킴이 풀림으로 보는 들뢰즈가 생성을 말하면서도, 과거의 과정(기억)은 지층의 층위로 또는 주름 잡힘으로 보는 것도 이중 과정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 말하자면 플라톤과 다른 방식으로 제1철학을 사유하는 계보는 소크라테스, 스토아,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벩송, 들뢰즈의 계열이며, 도덕에 관한 한에서도 루소를, 역사적 사건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로베스삐에르와 생 쥐스트 등이, 그리고 예술사에서 인상주의 화가 마네 등등, 시인으로서는 말라르메가 있을 것이다. (50NMH)
제29장 로마 제국의 문화 419-437
로마제국은 여러 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문화사에 영향을 주었다. / 첫째 로마는 헬레니즘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영향은 별로 소중한 것도 심각한 것도 못된다. [로마가 그리스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둘째 로마제국이 그리스와 동양의 서반부에 끼친 영향은 깊고도 또한 지속적인 것이다. 이 중에서 기독교의 영향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로마의 실용성, 도로와 행정은 지속적 영향이 맞다. 그러나 종교는 기독교의 영향은 로마를 통하여 유럽에 전파되었다]
/ 셋째 로마의 오랜 기간의 평화는 문화를 널리 보급하는데 큰 의의를 갖고 있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정부와 관련된 단일한 문화이념의 이념에 익숙하게 되었다. [시저(케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방식은 전쟁을 통해 성립한 것이다. 군사조직은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기계가 아니다. 이기심과 부를 탐하는 용병들이 전쟁기계일 수 있다.]
/ 넷째 헬레니즘 문명이 이슬람교도에게 전달되었으며, 또 이것은 결국에는 서부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529년 아카데미아 폐쇄 이후 학자들은 학문의 자유를 찾아 이슬람으로 이동하였고, 이 학문이 북아프리카를 횡단하여 리베리아 반도로 해서 서유럽에 들어올 것이다.] (419)
323 알렉산드로스(Alexandre le Grand, Ἀλέξανδρος ὁ Μέγας, 356-323) 사망, 왕위계승(diadoque)전쟁, 제국의 4분할; 마케도니아(카산드로스, Cassandre, Κάσσανδρος, 전358-전297),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Ptolémée Ier, Πτολεμαῖος, 전368/366경-전283), 트라키아(뤼시마코스 Lysimaque, Λυσίμαχος, 전361년경-전281), 레반트 지역에서 페르샤(셀레우코스 Σελευκος) )
264-261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1차 포에니전쟁(les guerres puniques, 전264년-241년) [크게보아 두 번의 카르타고 승리 뒤 셋째에는 로마의 승리였다. 로마가 시라쿠스를 장악하게 된다. / 카르타고 지휘관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 전270경-전228) 카르타고의 군인, 정치가. 유명한 장군 한니발의 아버지이다.]
221 - 중국의 통일 진시황(秦始皇, 즉위 246-210)
218-201 제2차 포에니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고작 28살에 불과한 젊은 장군인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처음에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전211사망)가 패배하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Quintus Fabius Maximus, 전275경-전203)의 지연전, 적의 보급로 차단전으로 한니발 군대를 약화시키기에 성공한다. [한니발(Hannibal, 전247-전183)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이자 정치가, 203년 패배이후로 도망 다니다, 자결한다.]
[역사가 묘하게도 로마와 한(漢)나라가 거의 같은 시대에 패권을 잡는다.]
202 - 한나라 유방(劉邦)이 초나라 항우(項羽)를 해하(垓下)에서 격파. 한(漢)나라 성립.
100 카이사르(Jules César, Gaius Julius Caesar, 100-44)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장군.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 동맹을 맺고 콘술이 되어 민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지방장관으로서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58-51 케사르 갈리아 정복 전쟁을 치르다. 베르셍제토릭스의 로마침공에 저항(52년)/ 베르셍제토릭스(Vercingetorix,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골지방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케사르는 이것을 진압하여 일단 갈리아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되찾았다.
69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전69-전30)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여왕의 죽음으로 전30년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몰락
27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av.63-ap.14, 재위 av.27-14)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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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7 바울 전도
54 제5대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68) (재위 54-68)(14년) 로마의 제5대 황제. 의붓동생과 어머니 등을 죽이고, 그리스도인에게 화재의 책임을 물어 박해를 가하다. 반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6 유태인 폭동(베스파시아누스 군대의 유대 (진압) 전쟁: -70)
79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폼페이, 헤르크라네움 시 매몰.
200 키프리아누스(Cyprian, Lat. Thaschus Cæcilius Cyprianus; 200경–258) 카르타고 주교
354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 Aurelius Augustinus, 354-430) 북 아프리카 타가스트(Tagaste)에서 태어나다. 히포의 주교.
민주주의 운동은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그라쿠스(Gracchi) 형제에 의해 시작되어 그 후에 일련의 시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드디어 ‘참주정제’를 세우게 되었다. (420-421)
133, 121 그라쿠스 형제: 티베리우스(Tiberius Gracchus, 전168/163-133?](30세) 133년 호민관(tribun de la plèbe), 가이우스(Gaius Gracchus, 전154-121)(33세) 124년 호민관.
100 카이사르(Jules César, Gaius Julius Caesar, 100-44)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 전106–전48), 크라수스(Crassus, 전115경–전53)와 함께 1차 3두 동맹을 맺고 콘술이 되어 민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지방장관으로서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누나(Julia Caesaris Minor, 전101-51)는 옥타비이누스(나중에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아들이다.]
27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전.63-후14) 등극 (재위 전27-후14) 41년간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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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오현제]제9대 황제 네르바(Nerva, Marcus Cocceius Nerva, 30-98, 재위 96-98) (2년) 로마 황제 즉위. 5현제(五賢帝)라 불리는 다섯 황제 가운데 첫 번째 황제이다.
98 [오현제]황제 트라야누스(Trajan, lat.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53-117; 재위 98-117) 로마 황제, 그의 통치기간에 로마 영토의 전성기 였다.
284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5경–312경)(재위 284-305) 로마 황제 / 4두 정치(4분할 정치)
306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 재위 306~337) 크리스트교와 결탁?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크리스트교 공인
375 훈족이 게르만 족 공격함으로써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95 아틸라(Attila 395?-453) (별칭은 Flagellum Del ‘신의 징벌’이란 뜻) 훈족의 왕(434~453년 재위, 445년까지는 형 블레다와 공동 통치) 로마 제국을 침략한 새외(塞外) 민족 최고의 왕이며 남부 발칸 지방과 그리스, 이어서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공략했다. 아틸라는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에서 에첼,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에서는 아틀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로마사).
395 로마제국(BC 27 황제체제)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동서로마 분열되었다
476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Odoacre, roi des Hérules)에 의해 서로마 제국 멸망하였다.
529 아카데미 폐쇄: 유스티아누스는 529년에 다마스키오스(Damascios le Diadoque διάδοχος 458-538)가 이끌던 아테네의 네오플라톤주의 학교를 폐쇄하였다. 이 학교는 기원전86년에 문 닫았던 유명한 아카데미를 연장한 것이다.
1096 <제1차 십자군 전쟁: 모두 9차례(Croisades, 1096-1291) (I 1096-1099, II 1147-1149, III 1189-1192, IV 1202-1204, V 1217-1221, VI 1229, VII 1248-1254, VIII Loui IX 튀니지에서 사망, IX 1291) >
1453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 동로마 몰락)과 더불어 근대의 기점으로 간주되는 시간이 바로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다.
그러므로 7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동안 그리스 문학이나 그리스 문명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한 것은 아라비아인들이었다. 11세기 이후에는 무어(Moor)인의 영향을 받아, 서로로마는 점점 그리스의 유산 중에서 잃었던 것을 되찾게 되었다. (425)
1. 로마가 그리스 사상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 426
이 영향은 기원전 2세기에 역사가인 폴리비오스(Polybios, Πολύβιος, fr.Polybe, 전200경-전118경)와 파나이티오스(Panétius de Rhodes, Παναίτιος, 전180경-110)에게서 시작되었다. (426)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200년경에 아카디아(Arcadia)에서 태어났다. 그는 죄인으로 로마에 송환되었지만, 다행히 소(小) 스키피오(Scipion Émilien, 전185-129)의 친구가 되었다. .. 포에니 전쟁사(Punic Wars)를 썼다. ..그가 그 역사를 쓰고 있는 동안에, 이미 로마의 제도에 대한 그의 찬양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버렸다. (426)
스토아 철학자인 파나이티오스는 ... 소(小) 스키피오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
그는 초기 스토아철학자의 사상보다 정치적인 색채가 더욱 농후하였으며, ... 그의 후계자인 포시노니우스가 스토아 철학에 준 보다 폭넓은 체계로 말미암아 스토아 철학은 로마인들 중에서도 진지한 사람들이 마음을 끌었다. (427)
플루타르코스(Plutarque, Πλούταρχος, 46-125)는 저서 위인 전기(Vies parallèles des hommes illustres, en grec Βίοι Παράλληλοι / Bíoi Parállêloi)에 두 나라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들을 서로 비교하였다. (427).
2. 그리스 및 동방이 로마에 끼친 영향 428
(1)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그리스인들과 만났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야만적이고 사납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 로마인들이 그리스인들보다 월등한 점은 전술과 사회적 단결력뿐이었다. (428)
로마가 헬레니즘화 함에 따라 생활 습성이 유약해지는 경향을 보이기, 원로인 카토(Cato, 전95-전46) 같은 사람을 미워하게 되었다. .. 갑자기 흘러드는 부(富)는 이 모든 사태를 변화시켜버렸다. 작은 농장들은 차츰 사라지고, 노예 노동자들을 부리는 대지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429)
(2) 한편 비헬레니즘(Non-Hellenic)적인 종교와 미신은 날이 갈수록 서방에서 점점 더 확고한 지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431)
미트라(Mithras) 교는 본래 페르시아 종교였으며, 기독교와 경쟁을 하였다. .. 미트라교도 하나의 태양신이지만, .. 이것은 조로아스터(Zoroaster) 이후로 페르시아 종교의 신조의 일부가 되어 왔다. (432)
3. 정치와 문화의 융합 433
정치나 윤리적면에 있어서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의 자유시대에 내세운 철학보다 어느 의미에서는 더욱 훌륭한 철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 스토아 철학은 인류가 한 동포임을 믿고 있었으며, ... (434)
로마제국은 본질상, 그 이념에 있어서, 세계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로 전해졌다. .. “온 세상이 평화를 선포한다”는 말은 교회가 후기 스토아학파에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434)
4. 헬레니즘 매개자로서의 이슬람 교도 435
7세기의 에언자(마호메트)의 제자들은 시리아와 이집트 및 북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고 다음 세기에는 스페인도 손에 넣었다. (435)
아라비아 어원에서 파생한 말 ... 대수(Algebra), 알콜(Alcohol), 연금술(Alchemy), 증류기(Alembic), 알칼리(Alkali), 방위(Azimuth), 천정(天頂, Zenith) 등이 있다. .. 이 연금술은 아라비아인들이 그리스인[알렉산드리아인]들에게 배웠으며, 이를 완성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435-436)
제30장 플로티노스 438
신플라톤주의(Neoplationism)를 창시한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205-270)는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중 마지막 사람이라 하겠다. 그가 생존한 시기는 로마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때였다. (438) - [제갈량(諸葛亮, 181-234)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 용수, 나가르주나(龍樹, Nâgârjuna 150?-250?) 인도의 불교학자. 중론(中論)』“Prajñānāma mūla madhyamaka kārikā”(Traité du Milieu)에서 전개한 공(空)의 사상은 그 이후의 모든 불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e Sévère, Septimius Severus (Lucius Septimius Severus Pertinax), 145-211) [재위193-211]는 로마 역사에서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다
211 황제 카라칼라(Caracalla, Marcus Aurelius Severus Antoninus, 188-217, 재위 211-217) 로마의 황제(재위 211-217). 공동통치자인 동생 게타를 죽이고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재정상의 이유로 로마제국 내 전체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인심을 얻기 위해 대목욕장을 건설하고 병사들에 대한 지출 증대를 벌충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어 주조했다. 파르티아 원정 중에 근위장관 마르키누스에게 암살당했다.
218 황제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204?-222) (재위 218-222)(4년) fr. Heliogabalus 고대 로마의 황제(재위 218~222). 태양신의 대신전을 건립하고 그 음란한 축제를 로마로 옮겨 궁정생활이 문란해지고 음모가 무성하게 되었다. 근위병에게 암살당하다.
225 고르디아누스 3세(Gordien III, 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 225-244) 로마 황제 재위(238 à 244) 별명은 « Anarchie militaire »이다. 그는 측근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오랫동안 알려졌으나, 243년 페르샤와 전투에서 부상이 병이 되어 죽었다고 한다. [페르샤전투에
243(서른아홉) 플로티노스 로마에 안착하다.
[245(마흔하나) 이 시기에 플로티누스가 로마에서 학교를 세우고 활동한다. ]
260 황제 갈리에누스(fr. Gallien, 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218-268) 등극. 공동통치에서 단일 통치가 되었다(260-268)(재위 8년) 원로원 출신이 아닌 군부 출신이 황제가 되었다. 황후 살로니나(Cornelia Salonina 243-268), 아버지와 달리 크리스트교교에 관대했다.
270 황제 퀸틸루스(Quintillus, Marcus Aurelius Claudius Quintillus –270) 재위 두 달, 황제 자살했다.
270 황제 아우렐리아누스(Aurélien, Imperator Caesar Lucius Domitius Aurelianus Pius Felix Augustus, 214/5-275 재위 270-275), 암살당했다.
275 황제 타키투스(Marcus Claudius Tacite, 200경-276: 재위 275-276) (아마도 암살)
268-285년 사이 황제들을 거의 재명에 산 황제들이 드물다.. Florien 276 석달 재위 암살.. Probus 재위 276-282 암살.. Carus 282-283 10개월 불확실한 죽음, Numérien 283-284 아마도 암살, Carin 283-285 전쟁에서 죽음. *
플로티노스의 작품 속에는 이러한 일[경제적 파탄, 질서파괴]들에 대하여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비참하고 황폐한 현실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선(善)과 미(美)의 영원한 세계를 명상하는데 주력하였다. (438) [플로티노스가 로마사회에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은 그의 학적 기반이 알렉산드리아이며, 로마에서 경제적 기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스승과 달리 로마에서 학교를 개설했을까? - 전쟁에 참여하듯이 황제를 교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 중국의 유학자들이 천자를 교화시켜 변화를 일으키자는 생각은 한(漢)말을 거쳐서 당(唐)초에서 일까? (50NMH)]
기독교도들에게 “저 세상(the Other World, au-delà)”은 “천국으로(the Kingdom of Heaven)으로, 죽은 후에 즐길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이데아의 영원한 세계였다. 그 세계는 환상적[착각적]인 현상계(現象界)와 달리 실재계(實在界)였다. (438-439)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결합시키고, 플로티노스의 철학 중에서 많은 부분을 흡수하였다. 성직자 잉에(William Ralph Inge, 1860–1954)는 ..“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구조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 기독교를 파괴하여 분해하지 않는 한 기독교에서 플라톤주의를 분리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439)
그리고 플로티노스에 대해서는 “그 속에 플라톤이 다시 살아 있던 사람”이라고 말하였으며, 그가 좀 더 살아 있었다면 “몇몇 낱말과 몇 마디를 고침으로써 기독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을 지적한다. 잉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실적인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로티노스에 더 가깝다고 말하였다. (439)
플로티노스는 ... 청년시절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였으며, 그곳에서 39살까지 살았었다. 그곳에서 스승은 암모니오스 사카스(Ammonios Sakkas, 175경-242)였다. 이 사람은 신(新)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442)
그는 49세까지 되도록 아무 글도 쓰지 않았지만, 그 후로 많은 글을 썼다. 그의 저술은 포르피리오스((Porphyre, Πορφύριος, 232?-305?)가 편찬하여 정리하였다. 포르피리오스는 플로티노스보다 피타고라스 학파에 더 가까웠으므로 신플라톤학파를 더욱 초자연적으로 만들었다. (443)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은 성스러운 삼위(三位)로부터 시작한다. 일자(the One, l’Un), 정신(Spirit, Nous), 영혼(Soul, Ame), ... 일자는 최고의 존재자이고, 정신은 그 다음 존재자이며, 영혼이 그 다음이다. (443) [오리게네스(Origène, Ὠριγένης / Ôrigénês), 사카스 제자. 이 오리게네스는 호교론자 오리게네스(Origène, Ὠριγένης, 185-263)와는 다른 인물이다.]
일자(一者)가 무엇인지, 좀 모호하다. 때로는 신(神)이라고도 부르고, 때로는 선(善)이라고도 부른다. .. 존재자까지도 초월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떠한 속성도 붙여서는 안 된다. 다만 ‘그것은 있다’(이 대목은 파르메니데스를 연상케 한다). 신을 일체(The All)라고 하여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신은 일체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444)
우리는 이제 “제2위”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플로티노스는 이것을 누스(Nous)라고 불렀다. 스텐더드 사전에는 이것을 mind(정신)이라 번역하였다. .. [영국] 플로티노스의 번역자 맥케너(Stephen MacKenna, 1872–1934)는 이것을 Intellectual-Principe(지적원리)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 잉에(Inge, 1860–1954)는 spirit(靈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444)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 특히 「요한복음」의 저자 – 그리스도를 Logos(말씀)과 동일시하게 한 것은, 플라톤의 종교에 있어서의 지적인 요소였다. 이와 같이 볼 때, Logos는 reason(이성)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Nous 번역을 Spirit이라고 번역한다. (445) [러셀이 플로티노스의 위격을 크리스트교의 삼위일체에 준하여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일자가 아버지이고 누스는 성령이 되고 아들은 영혼이 된다. 그러면 거의 유사한 해석이 가능하며, 이는 또는 플로티노스 학설이 크리스트교가 공인되던 시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50NMH)]
누스는 일자의 표상(image)이라고 한다. 일자는 그 본질상 관조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일자의 관조가 곧 누스이다. .. 플로티노스가 말하기를 부분이 없는 존재는 그 자신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과는 하나이다. 플라톤에 있어서처럼 태양의 비유로써 설명할 수 있는 그 신(神)에 있어서는 빛을 내는 자와 받는 자는 동일하다. (445)
대체로 영혼을 비추는 것은, 마치 우리가 태양을 볼 때에 태양을 자체의 빛에 의해 보는 것처럼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 모든 것을 끊어버려라. - 에네아데스, 3권 71편.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몸에서 벗어나 나 자신 속으로 들어올 모든 다른 사물들에서 떠나, 자아(自我)에로 집중되어 놀랍게도 아름다운 것을 목격할 때, 일찍이 어느 때 보다도 가장 높은 차원(次元)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가장 고귀한 삶을 이루게 되며, 신성(神性)에 귀일(歸一)하여 ‘예지계’에 있어서 지고의 존재보다 낮은 모든 것위에 처하며 신성 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 / 그러나 예지의 상태에서 추론의 상태로 내려오는 순간이 있다. 신성 안에서 지낸 후에 오는 이러한 순간에, 나는 스스로 ‘어떻게 내가 여기 내려오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또는 ‘이 영혼이 어떻게 내 몸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하고 스스로 묻게 될 것이다. 영혼은 비록 몸 안에 있을 지라도 고귀한 것이며, 또 그 고귀함을 스르로 보여주고 있다. - - 에네아데스, 8권 1편.
여기서 영혼(soul)이 문제가 된다. 영혼은 삼위(三位) 중에서 셋째 위로 가장 낮은 위이다. 영혼은 누스보다 하위에 속하지만 생명을 가진 모든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 영혼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누스를 향하는 내적(內的)인 영혼과 외부로 향하는 또다는 영혼의 단계가 그것이다. 영혼은 이 운동에 있어서 그 형상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곧 자연이며 감각 세계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자연을 신과 동일하게 간주하였다. 그러나 플로티노스는 이것을 가장 낮은 영역으로 보며, 영혼이 누스를 향해 쳐다보는 일을 게을리할 경우에, 이 영혼이 유출(流出)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가시계(可視界, 사물계)를 악으로보는 그노시스주의(Gnostic)의 견해를 상기시킨다. (447-778)
그는 그노시스주의에 대하여 두 가지 종류의 반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영혼이 물질을 창조할 때에, 신적인 기억에 의해 이를 행하였으므로 결코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각의 세계는 감성계(感性界)가 선해질 수 있는 한, 가장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48) [물질계를 모자람 또는 악으로 보는 것은 그노시스 영향이라기 보다, 플라톤주의를 왜곡한 크리스트교의 영향일 수 있다. (50NMH)]
그노시스파의 견해를 반대하는 또 하나의 까닭이 있다. 그노시스파에서 주장하기를 태양이나 달 및 별들은 신적인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것들은 악령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지각된 사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의 영혼만이 선한 것이다. 그러나 플로티노스는 천체들은 신적인 존재자들의 신체이며, 인간보다 한 없이 탁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449)
물질은 영혼에 의해 창조되며, 독립적인 실재성을 전혀 갖지 못한다. 모든 영혼은 각각 자기 고유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 시간이 울리면 그 영혼은 내려와 그에게 적합한 육체 속으로 들어간다. 동기(動機)는 이성이 아니라 성적인 욕망에 더 가까운 무엇이다. (450)
엔네아데스 4권 영혼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그 중에서 제7편은 「영혼불멸론」으로 되어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물론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는 영혼이 육신의 형상이라고 말하였지만, 플로티노스는 이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만일 영혼이 육신의 형상이라면, 지적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51)
[우주론] 생명을 입은 모은 것은 결코 형체없는 구조는 아니며, 이 우주는 유기적인 것이고, 강력하고 완전한 모든 것을 내포한 생명체이며, 큰 지혜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지적인 신성(神性)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진 형상이 아니라고 부인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453) [자연에서 창발되는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고추밭에 잡초를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고추를 따려는 경작자의 의도에서 잡초일 뿐이다. 자연의 산물에는 선악이 없다. (50NMH)]
이 지고의 존재(the Supreme)는 그 나타남(출현 出現)에 있어서 조용히 수레에 실려 나올 수는 없으며, 직접 영혼에 운반되어 나올 수도 없다. 이 행차는 우선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 대왕의 행차 앞에는, 작은 행열이 앞서고 그 뒤에 순서를 따라 훌륭한 자들이 서고, 다음에 더욱 고귀한 자들이 그리고 이 왕의 근처에는 보다 가까운 자들이, 그 뒤로 극도로 명예로운 일행이 서고 마침내 모든 장관 뒤에 갑자기 지고의 군주가 몸소 나타난다. 그리하여 모두가 – 진실로 그가 나타날 때 그리고 사라질 때의 광경으로 만족하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 부복하여 그에게 만세를 부르는 것이다(엔네아데스, V 5, 3). 454)
한편 플로티노스 철학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밖을 내다보게 하기보다는 속을 들여다보게 하는 결함이 있다. ... / 이러한 주관주의(主觀主義)는 점차 성장해 온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나 소크라테스 및 플라톤의 학설에서도 그렇지만,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에서도 그런 주관주의를 찾아 볼 수 있다. .. / 그러나 이 주관주의는 점차 학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도 침투되어 갔다. 그리하여 이제는 과학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 않고 덕만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456) [어쩌면 중국 사상은 오랫동안 과학보다 인간의 덕에 관심으로 인성을 다루었는데 비해, 그리스에서는 이중성의 방향으로 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르네상스의 과학발달이전의 중세에는 인간의 덕 위에 종교성(신앙) 둠으로써 인성을 천상의 모방 또는 천상의 예속으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주관주의의 주체는 르네상스 이후에서야 다시 등장할 것이다. / 주관주의와 주지주의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자는 인성의 주체에 관한 것인데 비해, 후자에서는 과학에서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이라 해야 할 것 같다. (50NMH)]
플로티노스는 끝이요, 또한 시작이었다. - 그리스주의자로서 끝이고 기독교주의자로서는 시작이다. 그의 학설은 고대 세계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실망과 고민 가운데 지내며 낙담한 끝에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지만, 힘을 주지 못하였다. .. 그의 가르침 속에 일관된 정신은 유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싸워야 할 악이 타성이 아니라 야만성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후세에게까지 남을 수 있는 요소를 전하는 역할은 로마 후기의 기독교 철학자들이 했던 것이다. (456-457)
(8:39, 50NM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