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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27.주일낮예배 설교문 【부 활 주 일】본 문 : 누가복음 24 : 13 - 35제 목 :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라찬 송 : 165장, 8장할렐루야!!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은총이 사랑하는 새생명교회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안타까운 것은 부활절을 맞이하여도 아무런 감격이 없고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감각한 심령들이 되었습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또 부활하셨다는 것은 며칠이고 밤을 지새우면서 감격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 저려오고 눈물이 솟구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뻘떡 일어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인들은 감동도 감격도 없고 그저 ‘또 부활절이라고 하는 날이 되었구나’ 하는 식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11:17)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이 되었다고 하여도 우리들의 신앙마저 메말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마저 감동과 감격을 잃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항상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이 부활절은 우리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온 인류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신 날입니다. 만약에 우리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온 인류는 흑암과 절망과 죄악과 무질서와 혼돈과 폭력의 세계에서 헤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부활의 아침에 부활하셨기에 온 세상에는 소망의 태양이 뜨게 되고 여명의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우리 주님께 다 같이 영광을 돌립시다. 할렐루야!!만약에 부활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을 받은지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이야말로 모든 인류가 교파를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해서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하는 날입니다.사실 이 부활절은 성탄절보다 더욱 성대하게 더 기쁘게 지켜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의 예배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오늘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기쁨과 축복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예로부터 이 부활절에는 계란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 풍습은 1071년에 이스라엘 나라 예루살렘에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이 회교도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다시 찾기 위하여 기독교의 청년들이 모두 십자군이 되어서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 무렵 자그마한 마을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얼굴이 예쁘고 고운, 그러나 남루한 옷을 입은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모자린드(Mozarlind)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마을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군대에 나가고 집은 고약한 사람에게 빼앗겼습니다” 부인을 본 집 주인은, “참 안되었군요. 저의 집에 남은 방 한 칸이 있으니 거기서 사십시오.” 하고 인정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부인은 감사하다고 절을 하면서 그날부터 이 마음씨 고운 주인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줄을 지어 이 부인에게 먹을 것과 생활 용품을 갖다 주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이 고마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닭을 사다가 길러서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원래 유럽 쪽에서는 닭이 매우 귀했습니다. 부자들이나 닭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닭을 기르는 집이 한 집도 없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멀리 가서 닭을 몇 마리 구해왔습니다. 닭은 잘 자라서 알을 낳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알은 다시 병아리가 되었습니다. 닭의 숫자도 많아지고 알도 많이 낳았습니다. 그해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동네의 어린이들을 모두 초청하여 잔치를 하였습니다. 맛있는 요리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좋아하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부인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뒷동산에 가서 나무 밑에다가 새둥지를 하나씩 만들어 놓고 그 둥지에 이름을 달아두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왁자지껄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새둥지를 만들어 놓고 왔습니다.
부인은 아이들에게 마실 주스를 주고 아이들이 그 주스를 마시며 노는 동안에 준비하였던 달걀 그릇을 가지고 뒷동산으로 가서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새둥지에 달걀을 하나씩 놓고 돌아왔습니다. “자 이제 다시 뒷동산으로 가서 자기가 만든 둥지에 있는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이들은 뒷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둥지에는 색칠을 예쁘게 하고 예쁜 글씨를 쓴 달걀이 한 개씩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달걀을 가지고 기뻐서 떠들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달걀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자. 하나님은 사랑이 있고 마음 착한 사람을 도우신다 ”이 말은 모자린드 부인의 가정에 가훈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고 모자린드 부인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날 오후 모자린드 부인은 낯선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 소년은 앓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러 먼 길을 걸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부인은 그 소년에게도 부활절 달걀을 주었습니다. 소년은 달걀을 받아들고 부지런히 길을 갔습니다. 어느 산 고개를 넘을 때 소년은 길에 쓰러진 기진 한 병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그 병사가 너무 불쌍하여 가지고 가던 달걀을 병사에게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병사는 고맙다고 말하고 달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달걀에 쓰인 글씨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병사는 이 달걀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달걀을 준 부인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이 병사는 모자린드 부인의 남편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제대를 하여 돌아왔으나 집도 다른 사람이 살고 아내도 없어서 아내를 찾아다니다가 지쳐 쓰러진 것입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그 달걀 때문에 헤어져서 소식도 몰랐던 남편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던 집도 다시 찾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 전날(금요일)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 지낸 후 안식일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을 기다려서 여인들이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이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에서 이 여인들의 위대한 믿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①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몇몇의 여인들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여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드릴 목적으로 예수님의 무덤에 올라갔습니다. 가면서도 이 여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을 열어줄 것인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장사지내는 풍습은 우리나라와 달라서 언덕에다가 굴을 파고 굴 안에 시신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 준비하였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돌문이 열려져서 놀라움을 금할 길 없는 마음으로 무덤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간 데 없고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이 있었습니다. 이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눅24:5)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여인들은 허겁지겁 달려와서 제자들에게 이 말을 전하였지만 오히려 제자들은 이 여인들의 말을 허탄한 듯이 듣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② 이 때 이 여인들의 말을 들은 베드로가 뛰어서 예수님의 무덤에 올라갔습니다. 현장에 가서 확인하여 보니까 정말 여인들의 말 대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상하게는 생각하였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③ 바로 이날 오후에 되어진 일이 오늘 본문 말씀인 13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두 사람의 제자가 어깨가 축 늘어져서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엠마오로 향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의 두 제자는 12제자 중의 두 명이 아니고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의 두 사람으로서 글로바와 누가였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였을까요?“여보게 그 여인네들이 하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일까?” “에이 이 사람, 정신없는 소리하지 말게,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산다고 하는 말이 어디 있는가?”“그렇지만 이상한 일이잖은가?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인가? 그리고 베드로가 가서 보니까 사실이라고 하지 않던가?”그러면서 저들은 고개를 갸웃둥 거리면서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때 한 사람이 따라와서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이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고 말참견을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지만 두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인지 알아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여보시오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오면서 예루살렘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듣지도 못하였습니까? 나사렛에서 출생한 예수, 그분은 말과 일에 능하여 우리는 그분이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줄 구원자라고 믿고 있었는데 박해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오늘 아침에는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그 분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분이 부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같이 가시던 예수님이 엄숙히 책망을 하시면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풀이해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들의 마음속에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길을 가다가 한 여관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 예수님께서 식사를 위하여 축사를 하시는데 뭔가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구나!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구나!”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예수님은 홀연히 사라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예루살렘에 와 보니 벌써 다른 제자들도 모여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도 자기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열 번이나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예수님의 약속대로 열흘 후 오순절날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제자들은 놀라운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의 거리에 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씩이나 동고동락을 하였지만 주님의 부활하신 사실 앞에서 당황하고 의심하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어느 믿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몹시 갈등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이 제자들과 같이 믿음이 없이 갈등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곧 내가 이후의 어느 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모델이라고 하는 엄청난 소망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활 신앙에 대하여 의아해 하거나 막연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 시간에 이와 같은 애매하고 불확실한 신앙에서 확신 있는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이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로 생각하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생활 속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체험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도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는 예배와,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시다는 그 임마누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 (막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성경 욥기17:7절 말씀에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근심에 빠지면 볼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앞으로의 살아갈 생활에 대한 근심과 염려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주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요20:13-14절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너무나 당혹스럽고 슬퍼서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서 마리아의 등 뒤에서 계셨습니다. 너무 슬픔에 빠져도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요일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미움이 눈을 가리우면 모든 것이 미웁게 보이지만 예쁘게 보이는 사람은 나쁜 일을 해도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감정을 가지면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애5:16)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죄를 지으면 영혼이 어두워진다는 말씀입니다.우리가 영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근심, 걱정, 슬픔, 미움, 범죄, 욕심, 의심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거되지 않으면 영의 눈이 어두워서 밝히 볼 수가 없습니다. (엡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영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눈을 크게 뜨십시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2.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8-25절 사이에 보면 예수께서는 두 제자들에게 당신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을 때에 그중 한 사람이 정확하게 예수님과 지금까지의 사건 내용을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로 오신 것과 그는 말씀과 일에 능한 얘기며,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은 이야기며, 그리고 부활했다는 여인들의 말과 두 제자가 그것을 확인하였다는 이야기를 정연하게 말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아쉬움을 말하였는데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고 까지 얘기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내용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입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르게 전하면서 그의 발은 엠마오로 향하고 있다는 모순성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발걸음은 인간 편에서 자아 중심적으로 낙망하고 실의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오늘날도 자기는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서 말로는 성경을 줄줄 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동은 세상 향락에 빠져서 세상 사람과 같이 행동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생활은 엠마오로 향해 가면서도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주변 이야기는 줄 줄줄 말하면서 그들의 발걸음은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발걸음은 딴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빨리 되돌아 나와야 합니다. 이런 이중성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제자들은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① 선지자들의 예언이 수없이 있었고,② 예수님께서도 죽은 다음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고,③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본 것을 증거하였으며,④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다녀와서 같은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충분한 근거와 증인이 있음에도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충분한 근거와 증인이 있는데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1)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합니다.
본문 32절 말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속죄의 감격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감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2) 신령한 영의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본문 30-31절 말씀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이 임하여 있어도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심령의 문이 닫혀져 있고 영안이 닫혀져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축사하시고 주시는 떡을 먹고서야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요6:35)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영안이 열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인생길이 180도로 변화되어 되돌아오는 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속의 길이요, 정욕과 낙망과 불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신앙의 길이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소망의 길입니다. 그렇게도 그립던 고향집을 지척에 두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어려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순교의 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져 영의 눈이 열렸는데 아직도 근심과 걱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완전히 변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행함이 뒤따르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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