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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보문산 자락을 찾아서.
일시 : 2022. 4. 9. 토요일.
장소 : 대전시 중구 어남동, 정생동, 무수동.
대상 : 권이진 선생 묘소, 신채호 선생 생가, 권이개 선생 묘소,
권 유 선생 묘소, 이춘계 선생 묘소, 손 필 선생 묘소.
글 : 민 중 원.
화창한 봄 날씨에 만개한 벚꽃나무가 길가에 도열하여 환영하듯 맞이하니 소풍가는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인다. 지난 2년간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하여 정기답산(定期踏山)을 못하였는데 오늘은 거의 2년 반 만에 맞이하는 정기답산이다. 반가운 얼굴도 보고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기회이니 풍수를 떠나 행복한 하루를 예감할 수 있었다. 오늘 답산(踏山)할 곳은 두세 번 둘러본 곳이지만, 처음 보는 것처럼 선입관을 버리고 평상심을 유지하여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권이진 선생 묘소)
승차한 지 40분 만에 첫 번째 목적지 권이진(權以鎭) 선생 묘소 앞에서 하차하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1668~1734) 선생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탄옹(炭翁) 권시(權諰) 선생의 손자이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외손자이고 명재(明齋) 윤증(尹拯) 선생은 스승이자 고모부이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른 곳과는 다르게 시선이 대부분 위쪽을 향하게 되니 주변 산세가 높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혈장(穴場: 봉분 주변 가까운 공간.)의 주변이 가파르고 무엇인가 어색해 보이며 산과 묘 자리가 한 몸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에 비유하면 가슴에 품어 안고 있어야 할 어린 아이를 왼쪽 팔뚝 상부에 앉혀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보통 묘소는 양팔이 감싸고 있는 가슴에 있어야 하는데 너무 가파른 경사로 붙일 곳이 없었다. (이런 곳을 풍수에서는 무실(無實)이라 한다.)
가파른 곳은 기(氣)가 머물지 못하고 흘러내려 도망가는 자리이니 풍수용어로 살기(殺氣)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그런데 현재 묘의 자리는 다소 경사가 완만한 왼쪽 팔뚝 상부에 위치하여 기(氣)를 머물게 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용(龍:산)에는 살기를 벗어나지 못하여 혈(穴:기운이 모인 묘 자리)을 못맺는 노룡(老龍)과 박환(剥換:거친것이 곱게 변화됨)되어 혈을 맺을 수 있는 눈룡(嫩龍:어린 용)이 있는데, 이곳은 탈살(脫殺:살기를 벗음)이 안된 노룡(老龍:늙은 용)이다. 즉 꽃피고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고목에 해당한다.
혈장(穴場:묘가 있는 가까운 공간)에 올라 둘러보니 뒷산(내룡:來龍)이 넓게 흩어지고 가파르게 내려오니 혈을 맺을 자세(현무수두:玄武埀頭:뒤산이 완만하고 평탄하게 내려옴)가 안되어 있고 입혈맥(入穴脈:혈장으로 내려오는 은은한 줄기.)의 자취와 윤곽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앞산(조산과 안산:朝案山)이 명당(明堂:앞마당)의 넓이에 비하여 너무 높으니, 자손 중에 간혹 우매한 자손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이진 선생 묘소 아래)
시선을 낮추어 아래를 보니 묘소의 기운을 설기시켜 끌고 도망가는 어린 줄기(눈지:嫩枝)가 앞으로 나가니, 마치 고목에 새순이 나간 듯하였다, 이로 인하여 묘 앞의 물길이 양분(兩分)된다면 가족 간의 뜻이 다를 수도 있고 명당(明堂:앞에 펼쳐진 들판)이 둘로 나뉘어 보이니 불편하다.
그 어린 줄기는 나가서 오른 쪽으로 낮게 굽어갔는데, 이곳을 감싸 보호하기 보다는 오른쪽 아래 다른 곳을 감싸고 있었으니 무정(無情)하다. 오른쪽 아래 감싼 곳도 가파르니 밑으로 내려가 발끝에 점혈(點穴)하는 방법인 점법(粘法:脫殺法:혈이 맺힐 봉우리(혈성)가 꼭대기와 전후좌우의 옆이 모두 살기를 벗어나지 못하여 밑으로 내려가 발끝에 붙이는 정혈법.)을 써서 탈살혈(脫殺穴:살기를 벗어난 곳에 쓰는 묘자리)로 재혈(裁穴:묘지를 조성함)은 가능하나 그곳도 이곳과 같은 노룡(老龍)이다.
차라리 앞으로 내려간 탈살(脫殺)된 어린 줄기인 눈룡(嫩龍)으로 내려가서 혈(穴)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어차피 바닥(局)이 좁고 사(砂:주변 산봉우리)가 높아 좋은 자리는 나오기 어렵겠다는 느낌이 들어, 다음에 다시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수성(水城:물길)은 내당수(內堂水:내명당 물길)와 외당수(外堂水:외명당 물길)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 굴곡하여 나가니 다행이다. 고인의 안식(安息)과 후손들의 번창함을 기원하며 하산하였다.
(신채호 선생 생가)
두 번째 목적지인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생가지(生家址)에 도착하였다. 고령신씨(高靈申氏)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은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을 저술하였다. 이곳에서 출생하여 8살까지 살았다.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둘러보니 이곳도 첫 번째 답산지와 비슷한 국세였다. 동네가 바닥이 좁고 둘러싼 산들이 가파르고 높았다. 양택(陽宅:살림집)에서 꺼리는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형세다.
생가에 도착하여 보니 뒷동산이 높고 가파르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뒷동산을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가면서 낮아지니 오른쪽 뒤로 가서 낮아진 곳에 의지하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곳은 뒤에서 내려오는 물길도 감싸 안고 흘렀다.
(신채호 선생 생가지의 높은 두 앞산 사이로 향(向을 정할 곳)
집터에서 앞을 보니 앞산(案山: 집터나 묘 자리의 정면에 있는 첫 번째 봉우리.)이 형태는 잘 생겼으나 너무 높고 가까웠다. 그래서 앞이 막힌 것 같이 답답하였다. 그래서 향(向)을 오른쪽으로 약간 돌려 남향을 하면, 앞을 막고 있는 높은 두 봉우리 사이에 뚫린 공간으로 향(向)하게 되니,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줄일 수도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국(局)이 좁고 사(砂)는 높으니 불리한 양택지(陽宅地:살림집터)이다. 후손들의 행운을 기원하며 차에 올랐다.
(권이개 선생 묘소)
다시 세 번째 목적지 권이개(權以鍇) 선생 묘소로 향하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한와(閒窩) 권이개(權以鍇) 선생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장예원(掌隸院) 사평(司評:정6품)을 역임하였다.
하차하여 혈성(穴星: 혈이 맺힌 봉우리)을 올려다보니 맥진처(脈盡處: 산줄기가 끝난 곳)인데도 암석이 드러나 보이니 탈살(脫殺)이 덜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무관(武官)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지만 가파른 혈장에 올라 내룡(來龍:뒤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을 보니, 왼쪽에서 오른쪽(左旋龍:시계방향)으로 오다가 가까이에서 다시 왼쪽(右旋龍:반시계방향)으로 꺾이어 지현굴곡(之玄屈曲: 갈지자 검을현자 처럼 구불거림)하여 왔다.
뒤로 가서 입수룡(入首龍: 혈성 뒤로 연결된 산줄기의 첫번째 마디.)을 보니 기복(起伏: 일어났다 엎드렸다함; 탈살(脫殺)을 위한 행태) 속기(束氣: 산줄기가 낮고 좁게 잘록하게 묶인 곳으로 입수룡에 필수)하고 다시 꿈틀거리며 위로 올라오니 비룡입수(飛龍入首: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형태)에 돌혈(突穴:솟아오른 모양의 혈형(穴形))로 혈을 맺었다. 혈성(穴星:묘자리가 있는 봉우리)은 작지만 기운이 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앞에서 올려다볼 때 제일 위에 있는 돌혈이 권이개 선생 묘소)
전체적으로 좁고 둥근 형태이니 개금취수(開金取水: 공처럼 둥근형태의 혈장에 깊게 파헤쳐 장(葬)하는 것)로 몰장(沒杖: 개착법(開鑿法)으로 12도장법 중의 하나)법을 써서 혈장을 낮추고 깊게 장(葬)할 곳이라 생각된다. 옛글에 돌혈(突穴)은 음(陰)의 기운에 속하여 속으로 숨으니 깊어야 마땅하다(泡突屬陰氣. 隱于裏. 宜深.)고 하였다.
혈장에서 앞을 바라보니 비교적 넓고 평탄한 명당(明堂: 앞에 펼쳐진 들판)을 갖추었고 백호작국(白虎作局: 우백호(右白虎:오른쪽을 감싼 줄기.)가 안산(案山:정면에 있는 첫번째 산.)을 겸함)에 좌청룡(左靑龍:왼쪽을 감싼 줄기.)이 하수사(下手砂: 물길이 나가는 쪽 산줄기)가 되어 역수(逆水:나가는 물길을 거슬러 막음.)하고자 함은 좋았다. 그러나 수구(水口: 물길이 나가는 곳)가 관쇄(關鎖: 막아 잠근 형태)되지 못하여 바람과 물길의 통로가 넓게 뚫린 형태로, 혈장(穴場)에서 보이지 않아야 할 외명당(外明堂: 청룡, 백호, 안산 밖의 큰 들판)이 보이는 것은 아쉽다.
왜냐하면 외풍(外風)에 뚫려 풍취(風吹:바람을 탐)가 있게 되면 내당(內堂)의 모인 기운이 흩어지니 자손에 불리할 수도 있다. 또한 수구(水口:물이 나가는 곳)가 넓게 열려 재물인 물(풍수에서는 물을 재물로 봄)이 쉽게 달아나면 가난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멀리의 조산(朝山: 앞에 안산 너머로 멀리 보이는 산들)이 첩첩으로 나성(羅城: 멀리의 산들이 성곽처럼 외부를 둘러싼 것)을 이루어 먼 훗날을 기약할 수 있겠다. 자손들의 앞날에 번영이 있기를 기원하며 하산하였다.
(권유 선생 묘소)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1시 30분 즈음에 네 번째 답산지(踏山地) 권유(權惟) 선생 묘소에 도착하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여옹(旅翁) 권유(權惟:1625~1684) 선생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전의현감(全義縣監)을 역임하였다. 탄옹 권시 선생의 아들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사위가 되고 명재 윤증 선생의 처남이다. 무수옹(無愁翁) 권기(權愭) 선생의 동생이다.
넓은 혈장(穴場)이 눈길을 끌었으나 혈성(穴星:혈이 맺힌 봉우리)의 중심부를 피하여 청룡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추측하건데 백호는 멀고 무정(無情)하여 가까운 청룡의 보호를 받고자 요감법(饒減法: 요호감룡(饒虎減龍:백호를 멀리하고 청룡을 가까이 함.) : 청룡이 가깝고 역수(逆水)하여 유정(有情)하면 백호를 멀리하고 청룡에 가까이 한다.)을 쓴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묘 뒤로 가서 내맥(來脈: 혈장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줄기.)을 살펴보려니 왜 하필 이 자리인가 하는 강한 의문이 생겼다. 뒤가 허(虛)하니 내맥(來脈)이 뚜렷하지 않고 오히려 움푹 들어가 골진 형태이니 임두수(淋頭水: 혈 위로 맥이 없어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묘의 머리 쪽으로 흘러오는 것: 淋頭者穴上無脈而水淋墓頭也.)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겠다. 하여간 자연스럽지 못한 자리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권형징 선생 묘소)
바로 옆에는 손자(권이진 선생 아들 권형징 공)의 묘가 있는데 할아버지 자리보다는 정상적으로 느껴졌다. 권유 선생 묘는 청룡 쪽인 구석을 바라보았는데 손자 묘는 앞에 펼쳐진 명당(들판)을 향하니 좋았고 뒤의 내룡(來龍:내려온 줄기)도 가파른 것이 흠이나 중심맥으로 실(實)하게 받쳐주었다.
그러나 혈장(穴場:봉분 주변의 가까운 공간인 혈마당)이 주변보다 융기(隆起)되지 않았으니 원만(圓滿:둥글게 부풀어 오름.)한 형태가 못되고 순전(脣氈:봉분 앞쪽의 공간.)도 부풀지 못하여 기운이 약(弱)한 형태가 흠이 되었다. 후손들의 발전을 기원하며 하산하였다.
(이춘계 선생 묘소)
다음 다섯 번째 목적지 이춘계(李春啓) 선생 묘소로 향하였다.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춘계(李春啓) 선생은 고려 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으며,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합천이씨 10세조로 상서공파(尙書公派) 파조(派祖)가 되었다.
제법 높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자리하여 이 곳에 묘소가 있다는 것을 근처 사람들도 모를 정도였다, 어렵게 올라가 보니 이 분이 합천이씨 대전 입향조(入鄕祖)이고, 두문동 72현과 충절을 지킨 고려 말 충신 등 119위를 모신 개성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추향(追享)된 분임에도, 이곳이 접근성이 취약하여 그런지 깨끗하게 관리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뒤로 내맥(來脈:내려온 줄기)을 보고자 능선을 따라 걸어보니 평탄하고 갈수록 미미하게 낮아지며 솟은 봉우리(父母山:혈성 뒤에서 감싸고 받쳐주는 첫번째 산.)는 가까이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뒤에서 감싸주는 봉우리들(후현무:後玄武)이 멀어서 장풍(藏風:바람을 막아줌.)에 문제가 있었다.
내룡(來龍)은 뚜렷한 굴곡(屈曲)과 기복(起伏) 없이 약간의 꿈틀거림(微動形態)으로 거의 곧고 평탄하게 혈장(穴場)으로 올라왔으니 아쉽다. 비룡입수(飛龍入首)로 맥진처(脈盡處:줄기가 멈춘 곳.)에 돌혈(突穴: 솟아오른 모양의 혈 형태.)을 맺었다. 양 옆과 앞은 대단히 가파른 지세(地勢)로 걷기 어려울 정도였다. 따라서 가파른 살기(殺氣)를 피하여 봉우리(穴星) 꼭대기에 자리를 잡는 방법인 개법(蓋法:압살법(壓殺法:아래에 있는 가파른 살기를 위에서 누르고 머리 위에 묘를 쓰는 방법.)으로 점혈(點穴:묘자리를 잡음.)하였다.
(이 봉우리(혈성) 정상에 이춘계 선생 묘가 있다.)
혈장(穴場)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보니 바로 뒤로 약간 솟은 뇌두(腦頭: 혈 바로 뒤에 약간 솟은 곳.)에서 백호쪽으로만 선익사(蟬翼砂: 뇌두로부터 양쪽으로 위에서 혈을 감싸 보호하는 매미 날개처럼 은미(隱微)한 줄기.)가 한개 뿐이었다. 몇 발짝 내려와 청룡 쪽으로 배부르게 내려간 것은 선익(蟬翼)이 아니고 혈장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선익(蟬翼)으로 본다면 이 곳은 혈을 맺을 수 없는 자리이다.
혈장 앞부분은 순전(脣氈; 혈을 맺고 남은 기운이 앞에 뭉친 것)이 있어 살찐 형태여야 하는데, 혈장 앞 백호 쪽에서 한 줄기 맥(脈)이 혈장에서 앞으로 빠져 나가고 있으며, 혈장 앞 가운데와 청룡 쪽의 순전(脣氈)은 약간 함몰된 것으로 보아 혈(穴)의 기운이 약해 보였다. 그 함몰된 곳에 묘가 실전된 아들(상주목사 이몽부 선생)의 단(壇)이 있었다.
앞으로 빠져 나간 맥선(脈線)을 뒤로 추적하여 위의 승금(乘金;봉분 바로 뒤에 약간 솟은 곳과 선익사.)까지 연결해보니 혈장 백호쪽 가장자리로 이어졌으니 이 것이 맥선(脈線)이다. 이 뼈대(骨)인 맥선에 살(肉)이 붙어서 청룡 쪽으로 둥글게 혈장을 이룬 것이 기(氣)가 모인 곳이다. 즉 맥(脈)이 뼈(骨)라면 기(氣)는 살(肉)로 비유할 수 있겠다.
따라서 맥선을 피하여 기(氣)가 모인 곳에 금정(金井;관 묻을 자리)을 파고 맥장(脈葬)이 아닌 기장(氣葬)을 해야 옳바른 장법(葬法)인데, 봉분을 크게 하고자 맥선을 손상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곳은 혈장(穴場)이 좁고 장풍(藏風)이 부족하니 봉분도 작고 낮게해야 한다.
사수(砂水: 주변 산봉우리와 물길.)를 보면 혈성(穴星) 꼭대기에 천혈(天穴: 비교적 높은 곳의 혈로 부자(富者)보다 귀인(貴人)이 나올 자리.)로 점혈(點穴)하였으니 장풍(藏風)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백호는 낮지만 이곳을 감싸 돌아 유정(有情)하나 청룡이 다소 멀리 있어 허(虛)하다. 앞의 물길이 반궁수(反弓水;나를 감싸지 않고 맞은편을 둥글게 감고 흐르는 형태로 흉(凶)하다.)를 이루니 사수(砂水)가 도와주지 못하고 있었다. 자손들이 번성할 것을 기원하며 하산하였다.
(손필 선생 묘소)
끝으로 손필(孫泌)선생 묘소를 향하였다. 밀양손씨(密陽孫氏) 송재(松齋) 손필(孫泌) 선생은 조선 중기 문무겸전한 인물로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정3품)를 제수(除授) 받았다. 밀양손씨 대전 입향조(入鄕祖) 역승공(驛丞公)의 7대손이다.
혈성(穴星;혈이 맺힌 봉우리)을 뒤로 하고 입수룡(入首龍:혈이 맺힌 봉우리 뒤로 연결된 줄기의 첫번째 마디로 도두일절(到頭一節)이라함.)을 밟아 보니 낮게 가라 앉아 속기(束氣:잘록하게 묶인 곳)하고 다시 솟아올라 혈성 머리(星頭)에 연결되어 좋았으나 입수룡이 혈성 뒷면에 붙은 지점에 지각(枝脚: 산줄기의 옆으로 뻗은 작은 줄기.)이 생겼으니 문제가 있다.
용(龍)에는 지각이 있을수록 좋으나 입수룡(入首龍)에서는 지각이 생기면 기운이 분산되어 좋지 않다. 다만 지각이 짧아 멀리 도망가지 않아 다행이다. 그런데 그 지각 끝이 궁금하여 밟아 내려가니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그 지각 모양이 쓸개를 매달아 놓은 형태로 위는 좁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고 둥근 모양의 주머니처럼 매달려 있었다.
혈성 뒷면이니 혹시 귀(鬼)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간 있었지만, 이곳은 직룡입수(直龍入首:뒤에서 곧게 들어온 줄기)이니 횡룡입수(橫龍入首:옆에서 들어온 줄기)에 있는 귀(鬼:횡룡입수에서 혈성 뒤를 지탱해 주는 짧게 내려간 줄기.)는 아니다.
이곳에 작은 혈(穴:묘자리)이 숨겨져 있는 것이니 바로 섬살혈(閃殺穴:살기를 피하여 예상하지 못한 곳에 숨어 맺힌 혈.)인 것이다.
그러나 소혈(小穴)에 불과한데 뒤의 용(龍:산줄기)을 따라 내려오는 물길을 역수(逆水)하여 거둔 형태이니 가난은 구제할 수 있겠다. 극도로 궁핍한 사람이 점혈(點穴)하여 생활이 안정되면, 다시 옮겨야할 아주 작은 자리로 생각된다.
(손진덕 선생 묘소)
다시 혈성에 올라 내려다 보니 혈성이 앞의 명당(들판) 쪽으로 양팔을 벌려 개면(開面:배면(背面)중에 혈이 맺힐 수 있는 면(面)이 열림)이 되어 좋았으나 약간 가파른 것이 흠이 된다. 맨 위에 있는 묘가 손필 선생의 아버지(손진덕 공:孫進德 公) 자리이고 바로 아래 단에 손필(孫泌) 선생 묘와 손필 선생의 아들(次男) 손익해 공(孫翼海 公) 묘가 나란히 있었다.
이 3대 묘를 비교하자면, 아버지 묘는 뒤는 실(實)하나 좌우(左右)가 허(虛)하니 너무 높게 점혈(點穴)하였다. 손필 선생과 차남의 묘는 전체 혈성(穴星)의 중심으로 안정되어 보였는데, 손필 선생 묘가 중심맥에 가까우니 더 나아 보였다. 그러나 순전(脣氈)이 가파르니(人作?) 기운이 약한 형태가 되었다.
이 곳은 혈장(穴場)을 자연 상태로 두지 않고 인공적으로 훼손하여 계단식 집단묘지를 조성하였으니 혈증(穴證)을 찾기가 어렵다. 즉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은 보살면(菩薩面:상분(上分) 하합(下合)의 윤곽이 뚜렸하지 않고 평탄하여 혈증이 없는 곳)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앞의 들판인 명당(明堂)이 반궁(反弓:나를 향해 빈 활을 당긴 모양.)의 형태이니 거기에 따라서 흐르는 물길도 반궁수(反弓水)일 수 밖에 없다. 사수(砂水)는 무정(無情)한 편이다. 자손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하산하였다.
(손익해 선생 묘소)
[이 글은 풍수지리 교육상 초학자를 위하여 이기(理氣)보다는 형세(形勢)를, 장점보다는 단점을 많이 거론하였고,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을 수 있으니 관계자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이해가 있기를 소망하며 펜을 놓는다.]
첫댓글 교수님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고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입문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선생님과 함께 다녀온 날이었습니다. 대전은 참으로 풍수공부하기 좋은 공간들이 수두룩 하니 이도 기쁨이 됩니다.
유회당 권이진 묘소 앞으로 보이는 목성사가 정면에 보입니다. 너무 웃자란 나무들을 정리하여 귀인봉(목성)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고압의 공간이라 부족하나 어린 가지를 잠시 밟아보니 ...
사진과 같이 건좌손향의 귀인봉이 있었습니다. 순전 앞으로 가파른 것은 흠이지만 일광지지로서 볼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기가 퍼지고 고압의 사세는 역시 아쉬움을 남기는 공간이라고 봅니다. 간만에 다녀온 선생님과 여러 회원님들의 건강하심으로 임인년 새봄이 더욱 아름다웠었던 그날이었습니다. 님들 모두 행복하세요
청원 안갑수 꾸벅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