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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9권
4. 왕생품을 풀이함②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을 얻고 그 가운데에서 유희(遊戱)하면서 초선(初禪)에 드느니라.
초선에서 일어나 멸진정(滅盡定)으로 들어가고, 멸진정에서 일어나 이내 4선에 들어가며,
4선에서 일어나 멸진정으로 들어가고, 멸진정에서 일어나 허공처(虛空處)에 들어가며,
허공처에서 일어나 멸진정으로 들어가고, 멸진정에서 일어나 이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어가며,
비유상비무상처에서 일어나 멸진정으로 들어가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초월정(超越定)에 들어가느니라.
【논】
【문】 만일 범부의 사람이라면 멸진정에는 들어갈 수 없는데 어떻게 보살이 초선에서 일어나 멸진정에 들어가는가?
【답】 아비담비바사(阿毘曇鞞婆沙) 중의 소승(小乘)에서는 그와 같이 말하고 있지만 부처님의 3장(藏)에 있는 말씀은 아니다.
또 이 보살 성인조차도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런 범부이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여섯 어금니를 가진 흰 코끼리는 비록 독화살을 맞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원수를 가엾이 여기나니,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이 아라한에게는 없다.
축생에서조차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 몸이 되어서 욕망을 여의고 선정에 들어가는데도 멸진정을 얻지 못하겠는가?
【문】 만일 보살이 멸진정을 얻음이 그렇다고 해도 초월정(超越定)의 법에서는 둘을 뛰어 넘을 수 없다.
만일 “초선에서 일어나 이내 멸진정에 들어간다.”라고 한다면 이러한 법은 있을 수 없다.
【답】 그 밖의 다른 사람은 비록 선정의 법이 있다 하더라도 힘이 적기 때문에 멀리 초월할 수 없지만 보살은 한량없는 복덕과 지혜의 힘으로 선정에 깊이 들었고 마음도 또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멀리 초월할 수 있다.
비유하면 마치 인간 가운데 역사(力士)는 뛰어넘는다 해도 서너 길[丈]에 불과하지만 천상의 역사라면 한계나 범주가 없는 것과 같나니,
소승의 법 안에서는 하나를 초월하는 것이 선정의 법이지만 보살은 선정의 힘이 크고 마음에 집착이 없기 때문에 멀고 가까움에 자유롭다.
【문】 만일 그렇다면 초월정이야말로 위대[大]하고 차제정(次第定)은 위대한 것이 아니어야 하리라.
【답】 두 가지는 다 같이 위대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초선에서 일어나 2선(禪)에 이르러도 다시는 다른 마음이 없고 한 생각으로 들게 되며, 나아가 멸진정에 이르기까지도 모두가 그렇기 때문이다.
초월정이란 초선에서 일어나 제3선(禪)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역시 다른 마음이 섞이지 않은 채 멸진정에 이르기까지의 역순(逆順)도 모두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월정은 수승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다른 마음이 섞임이 없으면서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반마(槃馬)가 회전하면서 마음대로 도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4념처(念處)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을 닦으면서도 [스스로는] 수다원(須陀洹)의 과위[果]ㆍ사다함(斯陀含)의 과위ㆍ아나함(阿那含)의 과위ㆍ아라한(阿羅漢)의 과위와 벽지불(辟支佛)의 도를 취하지 않으며,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8성도분(聖道分)을 일으키고 이 8성도로써 수다원의 과위 내지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아라한과 벽지불의 과위 및 지혜는 바로 보살마하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니,
사리불아,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아비발치의 지위 안에 머물러 있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논】
【문】 무엇 때문에 “이 보살은 6반야바라밀을 행한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단지 “4념처를 얻는다.”라고만 말씀하시는가?
【답】 말씀하기도 하고 말씀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보살은 모두가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37품(品)에 있어서도 혹은 행하기도 하고 혹은 행하지 않기도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를 증득하지 않는다 했는데,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있고 깊이 방편의 힘에 들어간다는 등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자기가 모든 도의 과위를 얻지 못한 채 어찌 남을 교화할 수 있겠는가?
【답】 부처님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되,
“이른바 성문이나 벽지불의 과위와 지혜는 모두가 보살의 법인(法忍)이며 단지 모든 도의 과위의 이름만을 받지 않을 뿐이다. 과위와 지혜는 모두가 무생법인 안에 들어간다.”라고 하셨다.
또 오직 증득하지만 않을 뿐이요 그 밖의 것은 모두 행하고 있으며, 보살의 도를 얻었기 때문에 아비발치(阿鞞跋致)라 한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에 머물러 도솔천(兜率天)의 길을 청정하게 하나니, 이는 현겁(賢劫) 중의 보살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에게는 저마다의 도(道)와 저마다의 행(行)과 저마다의 원(願)이 있다.
이 보살은 업의 인연을 닦아 도솔천 위에 나고 천(千)의 보살 모임 안에 들어가 차례로 부처님을 이루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양은 바로 현겁 중의 보살인 줄 알아야 한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이 4선 내지 18불공법을 닦으면서도 아직 4제(諦)를 증득하지 않는다면, 이 보살은 일생보처(一生補處)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논】
【문】 이 일생보처 보살은 마땅히 도솔천에 나야 하는데 어떻게 4선 등을 얻는다고 말씀하는가?
【답】 이 보살은 도솔천 위에 가서 나서 욕망을 여의고 4선 등을 얻는 것이다.
또 이 보처보살은 욕망을 여읜 이후부터 오래도록 부처님 법을 두루 갖추었으며 방편의 힘으로써 보처의 법을 따라 도솔천에 태어난다.
아직 4제를 증득하지 못했다 함은 일부러 미루어 증득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증득하게 되면 벽지불이 되고 마니, 부처를 이루기를 원하는 까닭에 증득하지 않는 것이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수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비록 선근(善根)을 심으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한다 하더라도 근기가 둔하고 행이 뒤섞였기 때문에 오랜 뒤에라야 그것을 얻는 것이며, 선근을 깊이 심었기 때문에 반드시 얻게 된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에 머물러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며 이롭지 못한 일은 말하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먼저 나쁜 말[惡口]이 있었기 때문에 보살의 마음을 내어 원을 세우기를,
“나는 영원히 입의 네 가지 허물[四過]을 여의고 이 도(道)를 얻으리라.”라고 한다.
또 이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 안의 모든 법에는 일정한 모양도 없고 집착할 수도 없으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양임을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익이 되는 것은 모두가 바로 부처님의 법이요 만일 이익되지 않는 것이면 비록 갖가지의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부처님 법이 아님을 안다.
비유하건대 마치 갖가지의 좋은 약도 병을 깨뜨리지 못하면 약이라 하지 못하며 심지어 흙이나 진흙 등이라도 병을 낫게만 하면 그것을 약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그가 그르칠 것을 염려하는 까닭에 무익한 일은 말하지 않는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을 행하면서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며,
한 부처님의 나라에서 또 다른 부처님의 나라에 이르면서 중생들의 3악도(惡道)를 끊어 주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6신통에 머무르면서 시방의 세계에 이르러서는 상ㆍ중ㆍ하의 세 가지 불선도(不善道)를 막아 준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에 머물러 단(檀)으로 우두머리를 삼아 온갖 중생을 안락하게 하나니,
음식을 구하면 음식을 주고 의복ㆍ침구ㆍ영락ㆍ꽃ㆍ향ㆍ방사ㆍ등촉 등 그 구하는 바에 따라 모두 베풀어 주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에게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게 하는 일이고,
둘째는 즐거움을 주는 일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3악도의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다.
이 보살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면서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그들이 바라는 바에 따라 모두 베풀어 준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마치 몸을 부처님처럼 변화하여 지옥 안의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축생과 아귀 안의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느니라.
【논】
【문】 이 보살은 무엇 때문에 부처님의 몸으로 변화하는가? 흡사 부처님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다.
【답】 어떤 중생은 부처님의 몸을 보고 제도되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전륜성왕 등의 그 밖의 다른 몸을 보고서 제도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몸을 변화하여 부처님이 된다.
또 세간에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대비(大悲)”라 하기도 하고 “세존(世尊)”이라 하기도 한다.
만일 부처님의 몸으로써 지옥에 들어가면 곧 염라왕(閻羅王)과 모든 귀신들도 막지 않으면서,
“이 분은 바로 존경해야 할 스승이시다.”라고 하니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문】 만일 지옥 안이면 불이 활활 타고 항상 고통이 있으며 마음은 언제나 산란하므로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교화할 수 있는가?
【답】 이 보살은 불가사의한 신통의 힘으로써 가마를 깨뜨리고 불을 끄며 옥졸(獄卒)을 제지시키고 광명을 놓아 그들을 비추어서 중생들의 마음이 안락해지면 그제야 그들에게 설법을 하므로 듣고는 곧 받아 지니게 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지옥의 중생들도 도를 얻게 되는가?
【답】 비록 도는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도를 얻을 선근의 인연은 심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한 죄이기 때문에 도는 얻지 못한다.
축생의 갈래 안에서는 당연히 분별해야 되나니, 혹은 얻는 이도 있고 혹은 얻지 못하는 이도 있다. 마치 아나바달다용왕(阿那婆達多龍王)과 사갈용왕(沙竭龍王) 등은 보살의 도를 얻은 것과 같다.
귀신의 갈래[鬼神道] 안에서도 마치 야차(夜叉)와 밀적금강(密迹金剛)과 귀자모(鬼子母)와 같은 이들은 견도(見道)를 얻은 이들이니, 이들은 모두가 큰 보살[大菩薩]들이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을 행할 때 몸을 변화하여 부처님같이 되어 두루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 세계에 이르러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또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나아가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시방의 깨끗하고 묘한 국토의 모양을 관찰하고 나서 스스로 수승한 세계를 일으키나니,
그 안의 보살마하살은 모두가 일생보처(一生補處)이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두루 6도(道)를 위하여 법을 설하되 부처님의 몸으로써 시방의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
만일 중생들이 제자의 가르침을 들으면 믿고 받들지 않으면서도 홀로 높으시고 자재하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그 말씀을 믿고 받든다.
이 보살은 두 가지의 인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세계를 장엄하나니,
세계를 장엄하는 법을 듣고 시방의 부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 청정한 세계의 모양을 취하니,
행업(行業)의 인연은 더욱더 수승해지고 광명 또한 많아진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국토 안에는 모두가 일생보처의 보살이기 때문이다.
【문】 먼저 이미 도솔천 위의 일생보처 보살을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어찌하여 다른 지방에 있는 세계의 보살이 모두가 일생보처라고 말씀하는가?
【답】 도솔천 위의 일생보처라 함은 이 삼천세계에서는 통상의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곳은 일정하지 않나니, 이른바 제일 청정한 이는 몸을 바꾸어 부처님의 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을 행할 때 32상(相)을 성취하고 모든 근(根)이 청정하고 영리하며,
모든 근이 청정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뭇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나니,
사랑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점점 3승(乘)의 법으로써 그들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몸[身]의 청정과 입[口]의 청정을 배워야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중생들의 눈으로 그런 몸을 보면 제도되기 때문에 32상으로써 몸을 장엄하는 것이다.
모든 근이 청정하면서 영리하다 함은,
눈 등의 모든 근(根)이 밝고 날카로워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신근(信根)ㆍ혜근(慧根)의 모든 마음에 속하는 근 등이 날카롭고 청정하기가 으뜸인 것이다.
보는 이는 그 희유(希有)함을 찬탄하면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없다.”라고 하며,
이 보살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의 말을 믿고 받들어 세상마다 도법(道法)을 두루 갖추어 3승(乘)의 도로써 열반에 든다.
이 32상과 눈 등의 모든 근(根)은 모두가 신업(身業)ㆍ구업(口業)의 인연이 청정함에서 얻게 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보살은 마땅히 신업과 구업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근(根)이 청정함을 얻나니, 이 청정한 근으로써 스스로 높은 체도 하지 않고 또한 다른 이를 얕보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항상 깊고 청정하게 6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눈 등의 모든 근이 청정하고 영리함을 얻어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며,
지혜 등의 모든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의 근도 청정하면서 영리하여 견줄 이가 없나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세간에 있는 통상의 법이라 함은, 만일 특이한 것을 얻으면 마음이 스스로 뽐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면서 생각하기를,
“너에게는 이런 일이 없고 나만이 홀로 이런 일이 있다.”라고 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도리어 부처님의 도를 상실하게 된다.
마치 경 중에서,
“보살이 다른 보살을 업신여긴다면 생각생각마다 1겁(劫) 동안씩 부처님의 도(道)와는 멀어지게 되며, 그러한 많은 겁을 지나고서야 다시 부처님의 도를 수행하게 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스스로 높은 체하지도 않고 또한 남을 얕보거나 하지도 않는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단(檀)바라밀과 시라(尸羅)바라밀 내지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에 머물러 끝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처음부터 성품이 악도를 두려워하며 공덕을 지어 악도에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발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라 함은,
아직 도달하기 전의 그 중간에 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원을 세우게 되니,
보살은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3악도에 떨어진다면 나 자신도 제도할 수 없는데 어찌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으랴.
또 3악도의 고뇌를 받을 때에는 성냄의 번뇌 때문에 결사(結使)가 더욱 자라나고 도리어 악업(惡業)을 일으키면서 다시 고통의 과보를 받게 된다.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 한다면 언제 불도를 수행할 수 있으랴”라고 한다.
【문】 만일 계율을 지닌[持戒] 과보로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보시를 말씀하는가?
【답】 계율을 지니는 것이 바로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근본이며 보시 또한 떨어지지 않게 한다.
또 보살은 계율을 지녀서 비록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빈궁한 이가 되어 자신을 이롭게 할 수도 없고 또 남도 이익되게 하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보시를 행하는 것이다. 그 밖의 바라밀도 저마다의 일이 있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아비발치 지위에 이르기까지 항상 열 가지의 선행[十善行]을 버리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부처님은 “계율을 지닌 까닭에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보시도 그에 따른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어떻게 시라바라밀을 행하고 아비발치의 지위에 이르게 되는가?”를 모르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다시 “항상 열 가지의 선행을 행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먼저는 “보살이 계율을 지니면서 견고하지 않더라도 보시가 뒤따르면서 돕는다.”라고 하셨고,
이번에는 “단지 계율을 지님이 견고하면서 열 가지의 선행을 버리지 않으면 3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단(檀)바라밀과 시라(尸羅)바라밀 가운데 머무르고 전륜성왕이 되어 중생을 10선도(善道)에 확고히 세우며 또한 재물로써 중생에게 보시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의 인연 때문에 전륜성왕이 되나니,
시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중생들로 하여금 10선도를 믿어 지니며,
단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재보로써 중생에게 베풀어 주되 역시 다함이 없다.
【문】 온갖 보살은 모두가 이 두 가지 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전륜성왕이 되는 것인가?
【답】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품(品) 중에서 설명하듯이 모든 보살은 갖가지의 법으로 부처님의 도에 들기 때문이다.
어떤 보살은 전륜성왕의 위의와 법을 듣고 그곳에 있으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으므로 이런 서원을 세우기도 하며,
혹 어떤 보살은 전륜성왕으로서의 인연을 심은지라 비록 원을 세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전륜성왕의 과보를 얻기도 한다.
스스로가 두 가지의 바라밀을 행한 까닭에 전륜성왕이 되면 역시 온갖 중생들을 교화하면서 열 가지의 착한 길을 행하게 하며 또한 자기 자신도 보시를 행한다.
듣는 이가 의심하면서,
“한 세상 동안만 되는 것인가, 세상마다 되는 것인가?”라고 하기 때문에 다음에 말씀하신다.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한량없는 천만의 세상 동안 전륜성왕이 되어 한량없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만일 보살이 전륜성왕이 되어야 크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음을 알면 곧 전륜성왕이 되며,
만일 스스로 다른 몸이어야 이익되게 함이 더 크다 함을 알면 역시 다른 몸이 된다.
또 세간의 법으로는 부처님께 크게 공양하려는 까닭에 전륜성왕이 된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항상 중생을 위하여 법으로써 밝게 비추고 또한 자신도 비추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끝내 밝게 비춤을 여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이 보살마하살은 부처님 법 안에서 이미 존중(尊重)을 얻었나니, 사리불아,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몸과 입과 뜻의 부정함이 망령되이 일어나게 하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위의 보살은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을 행하여 전륜성왕이 되지만,
이 보살은 단지 모든 경(經)을 분별하며 모든 법(法)을 독송하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부처님의 도만을 구할 뿐이다.
이 지혜의 광명으로써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또한 중생들도 이익되게 하니,
마치 사람이 어두운 길에서 등불을 켜면 자기 자신도 이익되고 또한 남도 이익되게 하는 것과 같다.
끝내 여의지 않는다 함은 이 인연 때문에 끝내 지혜의 광명을 여의지 않으면서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은 청정한 법으로 베풀면서 명리와 공경과 공경을 구하지 않고 제자(弟子)를 탐내지도 않으며, 지혜를 뽐내지도 않고 또한 스스로 높은 체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또한 비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시방의 모든 부처님만을 염(念)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중생만을 생각하면서,
“나도 이와 같이 부처님의 도를 배워서 법을 설하며, 의지함이 없고 집착함이 없으면서 단지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게 하리라.”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청정하게 법을 설하므로 세상마다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으면서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미 존중을 얻었다 함은, 위의 모든 보살로서 이와 같이 하는 이는 모두가 중생들 가운데 존중받게 된다는 것이다.
몸과 입과 뜻의 부정함이 망령되이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함은, 청정한 법으로써 보시하는 이는 몸ㆍ입ㆍ뜻의 악업(惡業)을 잡되게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몸과 입과 뜻의 악을 일으키면 듣는 이들이 혹시 믿고 받지 않기 때문이며,
만일 의업(意業)이 부정하면 지혜가 밝지 못하고, 지혜가 밝지 못하면 보살의 도를 잘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한 보살뿐만이 아니고 상래(上來)의 보살들이 이 법을 능히 행한다면,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존중한 이라 하리니,
만일 보살이 보살의 도를 행하고자 하면 모두가 죄의 행에 뒤섞이지 않아야 하고 온갖 나쁜 죄업이 망령되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행이 잡되면 행하는 도(道)에 어려움이 있어서 신속히 부처님의 도를 이룰 수 없나니, 죄업의 인연은 모든 복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은 신업(身業)이 부정하고 구업(口業)이 부정하며 의업(意業)이 부정한지요?”
【논】
【문】 사리불은 지혜에서 으뜸가는 분이신데 무엇 때문에 몸과 입과 뜻의 악업(惡業)을 모른다는 것인가?
【답】 사리불은 성문의 법 안에서는 알고 있지만 보살의 일은 다르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마치,
“만일 보살이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내면 이것은 바로 보살의 파계(破戒)이다.”라고 한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사리불은 의심하여, “어느 것이 보살의 죄이고 죄가 아닌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또 사리불은 몸의 세 가지 착하지 않은 길[不善道]과 입의 네 가지 착하지 않은 길과 뜻의 세 가지 착하지 않은 길이 바로 몸과 입과 뜻의 죄임을 알지만, 이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대답하시되,
“만일 보살이 몸과 입과 뜻의 모양[相]을 취하면 그것이 바로 보살의 몸과 입과 뜻의 죄가 되느니라.”라고 하셨으므로,
이러한 등의 인연 때문에 사리불은 물은 것이다.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몸이고, 이것이 입이며, 이것이 뜻이다.’고 하면서,
이렇게 모양을 취하고 반연하게 되면,
사리불아, 이것을 보살의 몸과 입과 뜻의 죄라 하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몸을 얻지 못하고 입을 얻지 못하며 뜻을 얻지 못하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만일 몸을 얻고 입을 얻고 뜻을 얻으면 이로써 몸과 입과 뜻을 얻기 때문에 능히 간탐하는 마음ㆍ계(戒)를 범하는 마음ㆍ성 내는 마음ㆍ게으른 마음ㆍ어지러운 마음ㆍ어리석은 마음을 내게 되나니,
그러므로 이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할 때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麤業]을 제거할 수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법이 공한[法空] 가운데서,
보살이 이 3업(業)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죄가 없는 것이 되고,
만일 3업을 보게 되면 그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내보이신 것이다.
성문의 법 중에서 열 가지의 착하지 않은 길이 바로 죄업(罪業)이 되고, 마하연(摩訶衍) 중에서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바가 있음을 보면 그것은 바로 죄가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짓는 것이 있고 보는 것이 있다 해도 짓는 이[作者]와 보는 이[見者]는 모두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거친 사람[麤人]에게는 거친 죄가 있고 세밀한 사람[細人]에게는 세밀한 죄가 있다.
마치 욕계(欲界)의 욕망을 여읠 때에는 5욕(欲)과 5개(蓋)는 나쁜 죄가 되고,
초선(初禪)이 포섭하는 착한 각관(覺觀)은 죄가 없는 것이 되며,
초선을 여의고 2선(禪)에 들 때에 각관은 죄가 되고,
2선에 속한 착한 기쁨[憙]은 죄가 없는 것이 되는 것과 같다.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 안에 들어가면 온갖 관(觀)과 소견[見]과 법(法)은 모두가 죄라고 한다.
소승(小乘)의 사람은 3악도를 두려워하므로 열 가지 착하지 않은 업[十不善業]을 죄로 삼거니와 대승(大乘)의 사람은 온갖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모양을 취하는 법과 3해탈문(解脫門)과 서로 어긋난 것이면 죄라고 하다.
이런 일이 다르기 때문에 대승이라 한다.
만일 이 3업(業)이 있는 것을 보면 비록 악(惡)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견고[牢固]하다고 하지는 않으며, 이 몸과 입과 뜻의 이 3업의 근본을 보지 못하면 이것을 견고하다고 한다.
이 보살은 법이 공한 까닭에 이 세 가지의 일을 보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일로써 간탐하는 모양ㆍ계율을 범하는 모양ㆍ성을 내는 모양ㆍ게으른 모양ㆍ산란한 모양ㆍ어리석은 모양을 일으키지만, 원인이 없으므로 결과도 또한 없다.
마치 나무가 없으면 그늘이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곧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麤業]을 제거할 수 있다.
【문】 먼저는 죄업(罪業)이라 말씀하고 지금은 무엇 때문에 거친 업이라 말씀하는가?
【답】 거친 업이나 죄업은 차이가 없다. 죄는 곧 거친 것으로, 세밀하다[細]고 하지는 않는다.
또 성문의 사람은 몸과 입의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을 거칠다 하고 뜻의 착하지 않은 업을 세밀하다 하며,
성냄[瞋恚]과 삿된 소견[邪見] 등의 모든 결사(結使)를 거친 죄라 하고 애(愛)와 만(慢) 등의 결사를 세밀한 죄라 한다.
욕각(欲覺)ㆍ진각(瞋覺)ㆍ뇌각(惱覺)의 3악각(惡覺)을 거칠다 하고 친리각(親里覺)ㆍ국토각(國土覺)ㆍ불사각(不死覺)을 세밀하다 한다.
단지 선각(善覺)만을 세밀하다고 하지만 마하연 중에서는 모두를 다 거칠다 한다.
이 때문에 여기서 거친 죄[麤罪]라고 말한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을 제거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몸을 얻지 못하고 입을 얻지 못하며 뜻을 얻지 못한다면, 이 같은 보살마하살은 능히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을 제거하느니라.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처음에 뜻을 내어서부터 열 가지의 착한 길을 행하면서 성문의 마음도 내지 않고 벽지불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 같은 보살마하살은 능히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을 제거하느니라.”
【논】
【문】 어떠한 것들을 몸과 입과 뜻의 세밀한 업과 서로 어긋나기에 거칠다 하는가?
【답】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범부의 업은 성문의 업에서는 거친 것이 되고 성문의 업은 대승에서는 거친 것이 된다.
또 더러운[垢] 업은 거친 것이 되고 더럽지 않은[非垢] 업은 세밀한 것이 되며,
괴로운 느낌[苦受]을 내는 인연의 업은 거친 것이 되고 괴로운 느낌을 내지 않는 인연의 업은 세밀한 것이 되며,
유각유관(有覺有觀)의 업은 거친 것이 되고 무각무관(無覺無觀)의 업은 세밀한 것이 된다.
또 나[我] 내지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를 보면 거친 것이 되고,
만일 나 내지는 아는 이와 보는 이를 보지 않고 단지 3업처(業處)ㆍ5중(衆)ㆍ12입(入)ㆍ18계(界)만을 보면 세밀한 것이 된다.
또 보는 바[所見]가 있으면 거칠다 하고 보는 바가 없으면 세밀하다 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만일 보살이 몸과 입과 뜻을 얻지 못한다면 이때에 세 가지 거친 업이 제거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처음에 뜻을 내어 필경공(畢竟空) 안에 머물러서 온갖 법을 얻을 수 없는데도 항상 열 가지의 착한 길을 행하고 성문의 마음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내지 않으며 모양을 취하지 않는 마음으로써 온갖 선근(善根)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의 죄를 제거한다 하며, 또한 청정하다고 한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부처님의 도[佛道]를 청정하게 할 때 단(檀)바라밀ㆍ시라(尸羅)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을 행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麤業]을 제거한다 하느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부처님의 도인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도라 함은 만일 보살마하살이 몸을 얻지 못하고 입을 얻지 못하고 뜻을 얻지 못하며,
단바라밀을 얻지 못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며,
성문과 벽지불을 얻지 못하고 보살을 얻지 못하고 부처님을 얻지 못한다면,
사리불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부처님의 도라 하나니, 이른바 온갖 법들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6바라밀의 전체의 모양[總相]에 의거하여 부처님의 도를 청정하게 한다.
【문】 사리불은 부처님으로부터 세 가지 악[三惡]과 세 가지 거친[三麤] 죄를 제거하는 일을 듣게 된 그것이 곧 부처님의 도를 청정하게 하는 것인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묻는가?
【답】 먼저는 3업(業)의 청정한 모양을 말씀하셨고 지금은 온갖 법의 청정한 모양을 말씀하신다.
먼저는 간략하게 말씀하셨고 지금은 개별적인 모양[別相]을 말씀하시며,
먼저는 단지 3업을 얻지 못함을 말했지만, 지금은 6바라밀과 모든 성현과 보살 및 부처님도 얻지 못하는 이것이 부처님의 도를 청정하게 한다고 하셨다.
온갖 법은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몸을 얻지 못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는 이것을 법공(法空)이라 하며, 성
문 내지는 부처님을 얻지 못하는 이것을 중생공(衆生空)이라 한다.
보살은 이 두 가지 공 가운데 머무르며 점차로 온갖 불가득공(不可得空)을 얻나니, 불가득공이 곧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다.
이 불가득공의 뜻에 관해서는 앞의 18공(空) 가운데 설명한 것과 같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그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자가 없느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그를 무너뜨릴 자가 없는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물질[色] 내지는 의식[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눈[眼] 내지는 뜻[意]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빛깔[色] 내지는 법(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눈의 경계[眼界] 내지는 법의 경계[法界]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바라밀 내지는 반야바라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10력(力)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수다원의 과위[須陀洹果]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阿羅漢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벽지불(辟支佛)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행하면서 6바라밀을 더욱 늘린다면 그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자가 없느니라.”
【논】 해석한다.
부처님은 사리불을 위하여 갖가지로 모든 보살을 분별하고 다음에는,
그를 위하여 어떤 보살이 발심할 때는 능히 그를 무너뜨릴 자가 없음을 말씀하시자,
사리불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모든 보살을 공경하며 이 때문에 묻기를,
“보살은 번뇌[結使]가 아직 끊어지지 못하고 아직 실상(實相)의 법을 증득하지 못했는데 무슨 인연 때문에 무너뜨릴 수 없나이까?”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대답하시되,
“만일 보살이 물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법공(法空)을 얻기 때문에 역시 중생공(衆生空)도 얻으며,
만일 이 법공에서 공을 관찰하면 그 역시 공하다.
이 막힘없는[無礙]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니, 능히 그를 무너뜨릴 자가 없다.”라고 하신 것이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안에 머물러서 지혜를 구족하나니, 이 지혜로써 언제나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폐악(弊惡)한 인간 안에도 태어나지 않으며, 빈궁한 자가 되지도 않으며, 받은 바의 몸은 사람이나 하늘이나 아수라에게 미움 받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앞의 세상에서부터 지혜를 좋아하고 온갖 경서(經書)를 배우면서 모든 법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들어 가려냈으며, 자신의 지혜의 힘으로써 온갖 법 안의 실상을 추구(推求)했나니,
이 온갖 법의 실상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 깊은 마음으로 사랑받으며, 이 한량없는 지혜와 복덕의 인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구족해져서 항상 부귀와 쾌락을 받으면서 불가능한 일이 없는 것이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지혜인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이 지혜를 성취함으로써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듣고 승가[僧]를 보며 또한 장엄하고 청정한 불국토를 보게 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지혜로써 부처님이라는 생각[佛想]을 짓지 않고 보살이라는 생각[菩薩想]도 짓지 않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이라는 생각[聲聞辟支佛想]도 짓지 않고 나라는 생각[我想]도 짓지 않으며,
불국토라는 생각[佛國想]도 짓지 않느니라.
이 지혜로써 단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또한 단바라밀을 얻지 못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또한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며,
4념처를 행하면서도 또한 4념처를 얻지 못하고 나아가 18불공법을 행하면서도 또한 18불공법을 얻지 못하느니라.
사리불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지혜라 하나니, 이 지혜로써 온갖 법을 능히 구족하면서도 또한 온갖 법을 얻지 못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두 가지의 지혜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모든 법을 분별하고 파괴하면서도 모양[相]을 취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에 집착하지도 않고 모양을 취하지도 않으면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듣는 것이다.
【문】 어찌하여 단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단바라밀을 얻지 못하는가?
【답】 단(檀) 가운데서는,
“동일하다, 다르다, 진실하다, 공하다.”는 것을 얻지 못한다.
이 단은 화합된 인연에서 생기며, 이 단 가운데서 중생으로 하여금 부귀와 쾌락을 얻게 하고 그리고 부처님의 도를 권하며 돕나니, 이 때문에 단을 행하면서도 또한 단을 얻지 못한다[不得]는 뜻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아가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나니, 이것을 보살이 지혜로써 온갖 법을 구족하면서도 모든 법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다섯 가지의 눈[五眼],
즉 육안(肉眼)ㆍ천안(天眼)ㆍ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을 청정하게 하느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의 육안이 청정한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은 육안으로 백 유순(由旬)을 보고 어떤 보살은 육안으로 2백 유순을 보며,
어떤 보살은 육안으로 하나의 염부제(閻浮提)를 보고 어떤 보살은 육안으로 2천하(天下)ㆍ3천하ㆍ4천하를 보며,
어떤 보살은 육안으로 소천(小千)세계를 보고 어떤 보살은 육안으로 중천(中千)세계를 보며,
어떤 보살은 육안으로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를 보나니,
사리불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육안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논】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다섯 가지의 눈이 생긴다고 말씀하지 않고 다섯 가지의 눈을 청정하게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보살에게는 먼저 육안이 있고 또한 네 가지의 눈의 나눔이 있지만 모든 죄와 번뇌(結使)로 덮혔기 때문에 청정하지 못하다.
마치 거울에는 밝게 비추는 성품이 있으나 때가 끼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다가 그때가 벗어지면 본래대로 밝게 비치는 것과 같다.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때 묻은 법[垢法]을 없애기 때문에 눈이 청정하게 된다.
육안은 업의 인연 때문에 청정해지고
천안(天眼)은 선정과 업의 인연 때문에 청정해지며,
나머지 세 가지의 눈은 한량없는 지혜와 복덕을 닦는 인연 때문에 청정해진다.
가장 큰 보살의 육안은 가장 뛰어나므로 삼천대천세계를 본다.
【문】 만일 삼천대천세계가 그 안에 백억의 수미산과 여러 산들ㆍ철위산(鐵圍山)에 둘러싸이고 높은 언덕과 수목 등 이런 것들로 막혀 있다면 어떻게 두루 볼 수 있겠는가?
만일 볼 수 있다면 천안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만일 볼 수 없다면 이 가운데서 어떻게 삼천대천세계를 본다고 하셨는가?
【답】 장애받지 않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만일 걸림이 없다면 삼천세계를 능히 봄이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살의 천안은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선정으로부터 얻는 것이고,
둘째는 전생에 행한 업의 과보로 얻은 것이다.”라고 한다.
업의 과보로 생긴 천안은 항상 육안 속에 있다.
이 때문에 삼천세계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장애가 되지 않는데, 이는 천안이 그 장애를 열어 주어서 육안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육안은 과보로 생긴 천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며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으므로 마음을 가다듬지 않아도 된다.
【문】 부처님은 세간에서 높으신 이[世尊]라 그 힘은 모두에 두루하신데 무엇 때문에 하나의 삼천대천세계만을 보시고 더 많은 세계는 못 보셨는가?
【답】 만일 육안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넘어 더 볼 수 있다 하면 천안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육안으로는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천안을 닦고 배운다.
또 삼천대천세계는 겁초(劫初)에 일시에 생기고 겁이 다할 때에는 일시에 없어진다.
세계의 바깥의 헤아릴 수 없는 유순(由旬)은 모두 그것이 허공이며 그 허공 안에는 항상 바람이 있어서 육안은 바람과는 서로가 어긋나니, 서로가 어긋나기 때문에 다른 세계는 더 볼 수가 없게 된다.
혹 어떤 보살은 삼천세계의 경계 위에서 머물며 그 수효를 헤아리지만 다른 지방의 가까운 세계만을 볼 뿐이다.
【문】 보살이나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한량없는 청정복덕을 쌓아서 육안으로 멀리까지 볼 수 있게 하지 않으신가?
【답】 이 육안의 인연은 거짓이어서 청정하지 않지만 천안의 인연은 청정하다. 만일 천안이 없다면 마땅히 육안을 닦아서 억지로라도 멀리 보게 해야 하리라.
또 마치 경의 말씀과 같아서 극히 멀리 본다 해도 삼천세계를 본다.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하고 경법(經法)은 심히 많으므로 혹은 멀리 볼 수 있기도 하지만 단지 이 가운데서는 조금 멀리 보는 부처님의 길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보살이 2천의 중세계(中世界)만 보는 것은 청정한 업의 인연을 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좀 더 못한 이는 소천세계를 보고,
다시 더 못한 이는 4천하(天下)와 하나의 수미산과 하나의 해와 달이 있는 곳을 보며,
다시 3천하ㆍ2천하ㆍ1천하와 천 유순 내지 백 유순을 보게 되나니,
이것을 최소한의 육안의 청정이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80이나 90유순 등을 말하면서 더 작은 것으로는 삼지 않는가?
【답】 전륜성왕이 보는 바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뛰어나다.
또한 사람이 전생에 등불을 켜는 등의 인연 때문에 견고한 눈의 감관을 얻게 되어서 멀리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끝내 백 유순까지는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보살로서 작게 보는 이가 백 유순을 보는 것이다.
【문】 해와 달은 위에 있어서 땅에서는 4만 2천 유순 떨어져 있는데도 사람들은 모두가 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백 유순도 볼 수 없다고 하는가?
고작 백 유순을 본다는 것이 어찌 대단하겠는가?
【답】 해와 달이 비록 멀다 하더라도 스스로 광명이 있어서 도리어 그 형상을 비추어 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지만 그 밖의 다른 물질은 그렇지 못하다.
또 해와 달은 멀기 때문에 비록 보고는 있다 하더라도 뒤바뀐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해와 달의 방원(方圓)은 5백 유순인데도 지금 보이는 것은 부채만큼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큰 것인데도 작게 보이므로 뒤바뀐 것이라 진실이 아니지만 보살의 육안은 그렇지 아니하다.
【문】 보살은 이런 육안을 얻고서는 어떤 일들을 보는가?
【답】 볼 수 있는 물질[色]을 보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뜻은 색중(色衆)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보살마하살의 천안이 청정한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의 천안은 온갖 사천왕천(四天王天)이 보는 바를 보고 삼십삼천(三十三天)과 야마천(夜摩天)과 도솔타천(兜率陀天)과 화락천(化樂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보는 바를 보며,
범천왕(梵天王)이 보는 바 내지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이 보는 바를 보느니라.
보살이 천안으로 보는 것은 사천왕천 내지는 아가니타천이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느니라.
사리불아, 이 보살마하살은 천안으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 안의 중생들이 여기에서 죽어서 저기에서 나는 것을 보나니, 사
리불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천안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의 천안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과보로 얻는 것이고,
둘째는 선정을 닦아서 얻는 것이다.
과보로 얻은 것은 항상 육안과 합하여 작용하며 오직 밤의 어두울 때에만 천안이 홀로 작용할 뿐이다.
모든 사람들의 과보로 얻은 천안은 사천하(四天下)를 보고,
욕계(欲界)의 모든 하늘은 아래는 보면서도 위는 보지 못하며,
보살이 과보로 얻은 천안은 삼천대천세계를 보나니,
선정을 닦고 욕망을 여읜 이의 천안으로 보는 바는 마치 먼저 10력(力)의 천안명(天眼明)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보살은 이 천안으로써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에 있는 중생들의 생사와 선악과 아름답고 추함 및 선악의 업의 인연을 보니, 장애되는 일 없이 온갖 것을 모두 다 보는 것이다.
또한 사천왕천 내지는 아가니타천들이 보는 것보다 더 뛰어나게 보지만, 이 모든 하늘들은 보살이 천안으로 보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삼계(三界)에서 벗어나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었으며 보살의 10력(力)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보살의 천안은 청정하나니, 그 밖의 보살의 천안에 대한 논의(論議)는 마치 찬보살오신통(讚菩薩五神通)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보살마하살의 혜안(慧眼)이 청정한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혜안을 지닌 보살은,
‘어떤 법이 유위(有爲)이다, 무위(無爲)이다, 세간(世間)이다, 출세간(出世間)이다, 유루(有漏)이다, 무루(無漏)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나니,
이 혜안을 지닌 보살은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듣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식별(識別)하지 못함이 없느니라.
사리불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혜안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육안은 막혀 있는 바깥일은 볼 수도 없고 또 멀리 볼 수도 없나니, 이 때문에 천안을 구하게 된다.
비록 천안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역시 이것은 거짓이어서 동일하다거나 다르다는 모양을 보고 남녀의 모양을 취하며, 수목 따위의 모든 사물들의 모양을 취해 뭇 물건이 화합하여 거짓으로 된 법을 보게 된다.
이 때문에 혜안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혜안 가운데에는 이런 허물이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떤 것이 혜안의 모양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8성도(聖道) 가운데 정견(正見)이 바로 혜안의 모습이니,
능히 5수중(受衆)의 실상을 보면서 모든 뒤바뀜을 깨뜨리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능히 열반의 지혜를 반연함을 일컬어 혜안이라 하나니,
반연할 바[所緣]는 깨뜨릴 수 없기 때문에 이 지혜는 허망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해탈문(解脫門)과 상응한 지혜를 바로 혜안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능히 열반의 문을 열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혜가 눈앞에 나타나서 능히 실제(實際)를 관찰할 때 분명하게 깊이 들어가 통달하면서 모두 다 아는 이것을 혜안이라 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능히 법성(法性)을 통달하여 곧장 지나가되 막힘이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정의 마음으로 모든 법 모양[法相]을 아는 이와 같은 것을 혜안이라 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공(法空)을 바로 혜안이라 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가득공(不可得空) 안에는 역시 법공도 없나니, 이것을 혜안이라 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18공(空)은 모두가 혜안이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어리석음[癡]과 지혜[慧]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세간의 법이 출세간(出世間)과 다르지 않고 출세간의 법이 세간과 다르지 않으며,
세간의 법이 곧 출세간이요 출세간의 법이 곧 출세간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다르다 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관(觀)으로 모든 마음의 작용을 멸해 점차로 더 갈 데가 없고, 온갖 언어가 소멸한 세간의 법 모양은 마치 열반과 다르지 않나니, 이와 같은 지혜를 바로 혜안이라 한다.”라고 한다.
또 여기에서 부처님은 스스로 혜안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보살은 온갖 법 가운데서 유위(有爲)라거나 무위(無爲)라거나 세간(世間)이라거나 출세간(出世間)이라거나 유루(有漏)라거나 무루(無漏)라고 생각하지 않나니,
이것을 혜안이라 한다.”라고 하신다.
만일 보살이 유위요 세간이며 유루라고 보면 곧 있다는 소견[有見] 안에 떨어지게 되고,
만일 무위요 출세간이며 무루라고 보면 곧 없다는 소견[無見] 안에 떨어지게 된다.
이 있다 없다 하는 두 소견을 버리고 쓸모없는 이론을 하지 않으면서 지혜로써 중도(中道)를 행하면 이것을 혜안이라 한다.
이 혜안을 얻게 되면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듣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식별(識別)하지 못함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혜안을 얻으면 삿됨과 굽음[邪曲]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무명(無明)과 모든 법의 전체의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도 저마다 모두가 이와 같다.
【문】 아라한과 벽지불 역시 혜안을 얻는데 무엇 때문에,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듣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식별하지 못함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 혜안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전체의 모양[總相]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모양[別相]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모든 법의 전체의 모양을 보나니, 이른바 무상ㆍ공 등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전체의 모양과 개별적인 모양의 지혜로써 모든 법을 관찰하신다.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비록 혜안이 있다 하더라도 분량이 있고 한계가 있다.
또 성문이나 벽지불의 혜안은 비록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본다 하더라도 인연이 적기 때문에 혜안 역시 적어서 법성(法性)을 두루 비출 수가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등잔불의 심지가 비록 깨끗하다 하더라도 작기 때문에 널리 비출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의 혜안은 모든 법의 실상을 비추되 그 바닥 끝까지 다하나니,
이 때문에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듣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식별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겁(劫)이 다하는 불이 삼천세계를 태울 때에는 그 광명이 비추지 않는 데가 없는 것과 같다.
또 만일 성문이나 벽지불의 혜안이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다 하면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분과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보살은 세상마다 복덕과 지혜를 쌓고 고행(苦行)을 했는데 베풀어 쓸[施用] 바가 무엇이겠는가?
【문】 부처님은 불안(佛眼)으로써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지만 이것은 혜안이 아닌데 이제 어찌하여 혜안이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다고 말하는가?
【답】 혜안은 부처님이 될 때 변하니, 일컬어 불안이라 한다.
무명(無明) 등의 모든 번뇌와 습(習)이 소멸되기 때문에 온갖 법 안에 대해 모두 다 환히 알게 된다. 마치 불안(佛眼)에 대해 설명하기를,
“법마다 보고 듣고 알고 식별하지 못함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육안과 천안과 혜안과 법안은 성불할 때 그 본래의 이름은 없어지고 단지 불안이라고만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염부제(閻浮提)의 네 개의 큰 강물[四大河]이 큰 바다 안으로 들어가면 강의 그 본래의 이름을 잃게 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육안은 모든 번뇌의 유루의 업으로 생기기 때문에 거짓이고 진실하지 않지만, 오직 불안만은 거짓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천안도 역시 선정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거짓이어서 실답게 사실을 볼 수 없다.
혜안과 법안도 번뇌의 습기가 아직 다하지 못하고 필경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버리게 된다.
불안 가운데는 이런 착오가 없으니, 그 끝을 다하기까지 그러하다.
이 때문에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혜안은 필경 청정할 수가 없고 그 때문에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다고 할 수가 없다.
【문】 부처님은 현재 과보로 얻은 육안으로 빛깔을 보시는데 이 일은 어떠한가?
【답】 육안은 비록 안식(眼識)을 낸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그의 작용에 따르지도 않으며 진실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마치 성자재신통(聖自在神通) 가운데서 말씀한 것과 같아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좋은 빛깔 안에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눈으로 나쁜 빛깔을 보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마음을 낸다.
때로는 빛깔을 볼 때도 “더럽다, 더럽지 않다.”는 마음을 내지 않고 단지 버림의 마음[捨心]을 낼 뿐이다.
이와 같다면 육안도 베풀어 쓸 바가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의 도를 얻을 때에는 5정(情)이 청정하여 본래와는 다르다.”라고 한다.
또 모든 법의 필경공(畢竟空)과 모든 법을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이 두 가지를 통틀어서 혜안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