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땅 중동(中東/Middle East)<5>
10. 중동지역 고대 유적(遺蹟)들
팔미라(Palmyra) 유적(시리아) / 페트라(Petra) 유적 (레바논) / 통곡(痛哭)의 벽(이스라엘)
중동지역은 까마득한 기원전 문화가 꽃피었던 지역으로 수많은 유적들이 있는 곳인데 살펴본다.
이곳 중동지역(M. East: Arabia)은 히타이트(Hittite) 고대왕국(BC 20세기)의 유물유적은 물론, 이집트와 전투장면 부조(浮彫) 등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方舟)’ 이야기도 이곳이 현장이다. 또 중국에서 낙타에 비단을 싣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거나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 등을 거쳐 수만 킬로를 오가던 캐러밴(Caravan)들의 실크로드(Silk Road)의 종착점도 이곳이었다. 당시 그 캐러밴(Caravan)들의 경유지였던 이곳에 고대도시 팔미라(Palmyra) 유적도 있고 세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중 하나로 꼽히는 ‘잃어버린 도시 페트라(Petra)’ 유적도 현재 이 지역 요르단(Jordan)에 있다.
BC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야기를 베르디가 오페라로 만드는데 그 오페라의 대표적인 곡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고, AD 70년,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벽인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의 성지(聖地)이다.
AD 6세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Mohamet)가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로 기록한 것이 꾸란(Koran), 혹은 40세에 알라(Allah)의 계시를 받은 뒤 적었다고도 하는 것이 이슬람의 성서(聖書)인 꾸란인데 모든 종교의 완성체라 주장하고 알라(Allah:야훼)를 유일신(唯一神)으로 모신다.
무함마드는 출생지 메카(Mecca)에서 냉대와 박해로 시달리다가 AD 622년, 400km 북쪽의 메디나(Medina)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것을 헤지라(Hegira-聖遷)라 부르고 이슬람력(曆)의 기원(起源)으로 삼는다.
이슬람 종교인들은 모든 기도를 드릴 때 제단(祭壇)을 무함마드가 태어난 메카(Mecca)로 향하고, 일반가정에서 기도를 올릴 때도 반드시 메카 방향으로 앉아 기도를 드린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바미안(Bamyan) 불상(佛像:높이 55m)은 AD 6세기 간다라 미술 양식으로 조성된 거대한 부처님 석상인데 이슬람 집단인 탈레반 집권 후 로켓포를 쏘아 파괴해버렸다니 기가 막힌다.
이 불상이 우리나라 신라의 혜초(慧超)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도 언급되어 있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신라의 혜초(慧超)스님이 당시 천축국(天竺國)이라 부르던 인도(India)에 가서 불경을 가지고 오는 과정을 기록한 여행기(旅行記)이다.
마사다 요새(이스라엘) / 알라무트 요새(매의 둥지:이란) / 바미얀 석불 파괴 전후(아프가니스탄)
아시아 대초원의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은 칭기즈칸이 집권한 후 중국 전역은 물론, 유럽까지 쳐들어가며 대제국을 건설한다. 당시 이란 남부는 이슬람 시아파인 어쌔신(Assassin)파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알라무트(Alamut) 요새를 세우고 온갖 잔인한 일들을 저질렀다고 한다. 요새는 ‘매의 둥지’라 불리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유명하던 곳인데 몽골족의 공격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고 한다.
산의 장로(長老)라 불리던 요새의 주인 하산(Hassan)은 건장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암살자(暗殺者)들로 양성하는데... 특수교육을 통하여 신출귀몰, 다양한 암살기술을 가르친 후 이슬람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돈을 받고 제거해 주는 집단으로, 성공하고 돌아오면 마약(해시시)에 취하게 하고 최고의 음식, 아름다운 미녀들로 파묻혀 천국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했다고 한다.
만약 암살에 실패하고 잡히면 그 자리에서 알라(Allah)를 위한 순교(殉敎)라고 교육받았으니 웃으며 자살했다고 한다.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물속에서, 벽 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나 목표물을 제거하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진다고 했는데 이 귀신집단을 몽골족은 하루아침에 없애버린 것이다.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은 몽골족이 지나간 자리는 개미 새끼, 풀 한 포기도 살아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우는 아이도 ‘몽골(蒙古)족이 나타났다’ 하면 곧바로 울음을 뚝 그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곳을 주제로 한 영화들도 수없이 많은데 ‘아라비아의 로렌스’, ‘벤허(Ben Hur)’ 등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한 세계 인류의 고대문명은 세계 4대 문명발상지라 하여,
①메소포타미아 문명, ②이집트의 나일 문명, ③인도의 인더스 문명, ④중국의 황하(黃河) 문명 4곳을 꼽았다.
그러나 훗날 고고학자들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이 4개 지역 문명보다 훨씬 앞선, 엄청난 규모의 문명을 꽃피웠던 곳이 수도 없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기존의 4대 문명과 나중 밝혀진 고대문명들을 묶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집트(Egypt/애굽)의 유적유물
나일(Nile) 문명은 BC 3200년경, 아프리카 나일(Nile)강 유역에 발달했던 고대문명으로, 32개 왕조(王朝)가 이어져 왔는데 이름이 알려진 파라오(Pharaoh:임금)만도 200명 정도이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들도 수없이 많아 수백 명의 파라오가 3천여 년간 왕권을 이어 내려왔을 것이라고 한다.
이집트가 있는 곳은 아프리카 대륙이지만 위치상 중동지역으로 분류된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 이집트 왕가의 계곡 / 파라오(왕) / 여왕 네페르티티
이집트의 중심부를 흐르는 나일강은 매년 범람해 상류의 흙을 날라다 하류에 퇴적하여 농경에 적합한 비옥한 땅이 형성되어 고대 인류가 일찍부터 정착해 살았다. 이들은 농업과 관개(灌漑)기술이 발달했고 태양력을 사용했으며, 토지측량술, 기하학(幾何學), 의학(醫學) 등 실용학문이 크게 발달했다.
이집트인들은 왕(파라오)을 태양신 라(Ra)의 아들이고 살아 있는 최고의 신으로 믿었으며, 사후 세계와 영혼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내세를 위하여 시신을 미라(Mummy)로 만들어 영원토록 보관했다. 관(棺) 속에는 ‘사자의 서(死者의 書)’를 함께 넣었는데 그 내용은 죽은 사람을 내세를 보호하는 주문(呪文)과 영생(靈生)을 기원하는 글, 신(神)에 대한 찬가(讚歌)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집트(애굽)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나일강 변에 기원전 3,000년경에 왕조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역대 파라오(Pharaoh/王) 중 최고의 왕으로 꼽는 이가 람세스 2세(Ramesses II)이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신(新) 왕국 제19대 왕조의 제3대 파라오(BC1303~1213)로 20대에 왕위에 올라 66년간 이집트를 통치했고 90세 이상 장수했던 왕이다. 그는 새로운 수도(首都)를 세웠고, 위대한 건축물인 아부심벨(Abu Simbel) 대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건축물을 지은 황제이기도 하다.
현재는 이집트 제19대 왕조의 황금기(黃金期) 황제였지만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 이전의 왕조들을 살펴보면 기록으로 남은 것이 제1왕조(BC 3100~)부터 6왕조(BC 2181~)까지를 고왕국 시대라 하며 이 시기에 수많은 피라미드가 건설되어 ‘피라미드(Pyramid) 시대’라고도 한다.
다시 제11~제12 왕조(BC 2040∼1758) 시기를 중왕국 시대, 그리고 제18~20 왕조(BC 1570∼1070) 시기를 신왕조 시대로 구분하는데 수많은 작은 왕국들이 있기도 하였지만, 멘투호테프 2세 때(BC 2061) 비로소 이집트가 통일되는 등 장구(長久)한 역사와 왕국들의 부침(浮沈)이 극심하였던 지역이 이곳이다.
이집트의 종교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잡신들을 숭배했는데 하늘의 신 호루스(Horus) 등 수없이 많았지만, BC 14, 아케나톤(Akhenaten)에 의해 태양의 신(神)인 라(La)를 유일신으로 숭배하게 된다.
이집트는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기하학(幾何學)의 발달 등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집트는 지중해(地中海)를 향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Nile)강 유역의 광대한 지역이 옥토(沃土)였기 때문에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매년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여 토지의 경계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고 한다.
장마가 끝나고 강물이 줄어들면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다시 농토의 경계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초기에는 너무나 어려워 서로 경계선을 놓고 다툼이 일어났다고 한다.
마침내 그들은 태양의 고도(高度), 멀리 떨어진 산 정상으로부터의 각도(角度) 등을 정밀히 관측하여 정확히 토지의 경계선을 다시 정확히 그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하학(幾何學/Geometry)의 기초라고 한다.
중국도 매년 황허(黃河)강과 양쯔(揚子)강의 범람(氾濫)으로 인해 토지경계 문제로 다툼이 잦았는데 언젠가 중국에 온 이집트인이 황제 앞에서 어렵지 않다고 각도와 태양의 고도 등으로 설명을 하자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던 중국의 황제가 ‘뭐라고?(幾何/찌허?)’라고 하였다 하여 동양에서는 기하학(幾何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잦은 범람(氾濫)으로 농민들의 피해가 심각하자 근래(AD 1900년경) 댐을 건설했는데 바로 어마어마하게 큰 아스완(Aswān)댐이다.
댐에 물이 차오르자 근처 계곡에 있던 수많은 고대 유적들이 물에 잠길 우려에 빠지게 되었는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힘을 합쳐 유적들을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그중 가장 거대한 공사가 아부심벨(Abu Simbel) 신전의 이전(移轉)이었다.
이 신전은 람세스 2세(Ramesses II)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신전(神殿)으로, 계곡의 낮은 곳에 있던 신전을 높은 곳으로 옮기는 공사였다. 신전이 너무나 어마어마한데 정면에는 높이 20m나 되는 람세스 좌상(坐像) 4개가 움푹 들어간 절벽을 등지고 있고, 발 둘레에는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Nefertari)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작은 조각상들도 세워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절벽 안쪽으로 56m를 파고 들어가 만든 3개의 연속된 홀도 있는데 신전 내부는 왕가(王家)의 여러 조상(祖上)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여러 채색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이 세워진 시기가 기원전 14세기쯤이니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에 건립된 신전(神殿)이다.
카르나크 신전 / 룩소르 신전 /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 투탕카멘 황금마스크
그 밖에도 BC 1,400년경에 지어진 룩소르(Luxor) 신전, 카르나크(Karnak/BC 2,000) 신전, 이집트 고대 왕족들의 무덤들이 있는 ‘왕가(王家)의 계곡(溪谷)’ 등 유적(遺蹟)들이 널려있는 곳이 이집트이다.
왕들의 무덤인 피라미드는 나일(Nile) 강가에 약 80기(基) 정도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가 쿠푸왕 피라미드로, 밑면은 정사각형인데 한 변의 길이 227m, 높이 146m로 어마어마한 크기이며 한 개 2.5톤 정도 되는 돌을 230만 개나 쌓아 올렸다니 전체 돌 무게만도 684만 톤이나 나갈 것이라고 한다.
피라미드 앞에는 얼굴은 사람, 몸은 사자인 스핑크스(Sphinx)가 있는데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멕시코에는 더 많은 약 200개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내가 보았던 가장 큰 피라미드가 테오티우아칸에 있던 태양의 피라미드로, 밑면적은 쿠푸왕 피라미드와 비슷하지만 높이는 1/3 정도로 낮고 네 면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으며 정상은 평평하게 하여 신께 올리는 제단을 설치한 형태의 피라미드였다. 신기하게도 이곳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 멕시코에 비슷한 피라미드가 있다니....
이집트의 장례 절차는 시체가 다시 환생(還生)한다고 믿어 부패(腐敗)되지 않도록 미라(Mummy)를 만들어 보관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먼저 콧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머리 안에 있는 뇌를 끄집어내고 옆구리를 갈라 창자를 꺼내 건조(乾燥)시켜 항아리에 보관하였으며 시신(屍身)도 건조하여 함께 보관하는 방법이다. 9세에 즉위, 19세에 사망한 소년 왕 투탕카멘(Tutankhamen)은 미라(Mirra)에 황금 마스크가 씌워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