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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49권
5. 변수면품 ⑤
2.3. 상응수증(相應隨增)과 소연수증(所緣隨增)
앞서 [분별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98수면 중 몇 가지가 소연으로 말미암아 수증(隨增)하는 것이고, 몇 가지가 상응으로 말미암아 수증하는 것인가?1)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끊어지지 않은 변행수면은
자지(自地)의 일체의 법을
비변행의 수면은 자부(自部)의 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수증한다.
무루연혹과 상연혹은 그렇지 않으니
섭수되는 일이 없고,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수면은] 상응법에 따라
상응하기 때문에 수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변행수면의 차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계ㆍ자지와 타계ㆍ타지의 법에 대해 두루 작용[遍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변행하지 않는 수면의 차별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유루를 반연하는 것[有漏緣]과 무루를 반연하는 것[無漏緣]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변행수면 중에서 자계ㆍ자지의 법에 대해 두루 작용하는 것은 널리 5부(部)의 자계ㆍ자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아 수증하며, 변행하지 않는 수면 중에서 유루를 반연하는 것은 오로지 자부의 자계ㆍ자지의 법만을 소연으로 삼아 수증한다. 그러나 변행하지 않는 수면 중 무루를 반연하는 것과 변행하는 수면 중 타계를 반연하는 것은 소연의 경계에서 수증하지 않는다.2)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한 소연(즉 무루와 상계ㆍ상지)의 경계는 섭수(攝受)되지 않을 뿐더러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3) 이를테면 만약 어떤 법이 이러한 지(地) 중의 유신견이나 아애에 포섭되어 거기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경우, 이러한 유신견과 아애의 지 중에 존재하는 수면은 소연에서 수증하는 것[所緣隨增]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수증’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온갖 번뇌가 이러한 [소연이 되는] 법 중에 따라 머물며 증장하는 것[隨住增長]으로, 이는 바로 [소연에] 따라 속박[隨縛]되어 더욱[增] 어지럽게 엉킨다[昏滯]는 뜻이니, 마치 젖은 옷에 먼지가 따라 머무는 것[隨住]과 같으며, 윤택한 밭에 종자가 더욱더 잘 자라는 것[增長]과 같다.
그러나 온갖 무루의 법과 상지의 법은 하지의 온갖 유신견과 아애에 포섭되어 거기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반연하는 하지의 번뇌는 소연에서 수증하지 않으니, [소연에] 따라 속박되어 더욱 어지럽게 엉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하지의 생이 상지 등을 희구하였다면, 이는 바로 선법에 대한 욕망[善法欲]으로 염오한 것(즉 수면)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하지의] 염오를 떠나 여기(상지)에 태어나기를 욕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도(즉 도제)와 열반(즉 멸제), 그리고 상지의 법은 능히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하지의 번뇌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그러한 두 가지 수면(무루와 타계를 반연하는 수면)은 소연에서 수증할 리가 없으니, 마치 뜨거운 돌밭에 발이 따라 머물지 않는 것과 같으며, 불꽃 중에서 나방이 증장하지 않는 것과 같다.4) 즉 이 같은 수면은 직접적으로는 소의(所依)에 의해 일어나게 된 것으로, 그것이 바로 일어날 때 아울러 그러한 경계대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연수증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98수면] 중 어떠한 수면도 상응법(즉 심ㆍ심소)과 상응하기 때문에 그러한 법에서도 수증한다.5) 그리고 여기서 설한 ‘수증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그러하기 때문에 본송 첫머리에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이라는 말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따라 무루를 반연하거나 타계ㆍ타지의 법을 반연하는 온갖 번뇌는 오로지 상응법에서만 수증할 뿐이며, 유루를 반연하거나 자계ㆍ자지의 법을 반연하는 온갖 번뇌는 다 같이 소연과 상응법 모두에서 수증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떻게 수면이 상응법과 소연의 경계에서 수증한다는 것인가?
선대(先代)의 궤범사(軌範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이는 마치 성읍(城邑) 옆에 쌓여있는 오물더미와 같다. 즉 똥과 물과 흙 등이 서로 뒤섞여 있으면, 이러한 무더기 중에 똥의 더러움[過失]으로 말미암아 물과 흙 등도 역시 더러워지게 되고, 물 등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똥도 더욱 더러워지니,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여 그것들은 모두 지극히 추악한 것이 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와 상응하는 법의 취집(聚集) 중에서도 번뇌의 세력에 의해 심ㆍ심소가 더러워지고, 번뇌는 [다시] 그것의 세력에 의해 더욱 더러워지니,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여 그것들은 모두 더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취집이 상속함에 더러움은 점차 더욱 증장되며, 수행법(隨行法)인 생(生) 등도 역시 더럽힌다. 이는 마치 돼지와 개 등이 오물더미에 사는 것을 지극히 탐닉하고 즐거워하여 거기서 잠자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똥 등의 오물을 처발라 더욱더 더러워지며, 오물더미 또한 돼지 등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더러워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소연과 자지의 유루법은 번뇌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유루의 뜻을 성취하게 되며, 그것이 다시 번뇌의 세력에 수순하는 경우 그 세 가지 품류는 서로 순서대로 [더러움을] 더욱더 증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몸이 매끄럽고 청정한 이가 잘못하여 오물더미에 넘어지는 경우, 비록 똥의 더러움은 묻힐지라도 더러움이 더욱 증장되는 것은 아니며, 사람 역시 능히 그러한 오물더미의 더러움을 더욱 증장시킬 수 없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무루나 다른 계지(界地)의 법이 비록 번뇌의 소연이 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서로에 대해 더러움을 증장시키는 일이 없다. 이러한 무루나 다른 계지의 법을 반연하는 수면은 다만 상응법에 의해 수증될 뿐이다.”
유여사는 이에 대해 다시 이같이 설하고 있다.
“술에 독을 섞으면 그 공능이 동등하기 때문에 술의 독함은 더욱더 강렬해지고, 독의 세력 역시 증대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유루와 온갖 번뇌도 그 공능이 동등하기 때문에 서로를 도와 함께 증장하게 된다. 그러나 양약을 온갖 독 가운데 두면, 독의 공능을 감손시킬 뿐 증익시키는 일이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무루가 비록 번뇌의 소연이 될지라도 번뇌의 공능을 감손시킬 뿐 증익시키는 일이 없다. 따라서 무루를 반연하는 사견이 생겨나더라도 그것에는 능히 선근을 끊을 만한 힘이 없다.”
또한 역시 지교(至敎)에서도 온갖 수면이 무루를 반연하더라도 수증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필추들은 마땅히 알라. 의심의 먹이[疑食]란 무엇인가? 이른바 삼세[법]이니, 과거세에 대해 번뇌가 있고 의심이 있으며, 현재ㆍ미래세에 대해 설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고 설한 것과 같다.
즉 무위(즉 멸제)는 비록 번뇌의 소연이 될지라도 그것에 의해 수증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의심의 먹이로서) 설하지 않은 것이며, 이러한 무루의 유위(즉 도제)에 대해 설하지 않은 것도 역시 이에 준하여 의심에 의해 먹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6) [또한] 경에서 “제행은 무상하다”고 전체적으로 설한 것과 같다. 즉 이치상 실로 여기서는 오로지 유루법에 대해서만 설하였을 뿐이니, 뒤에서 “그것(제행)의 적멸(寂滅)을 즐거움으로 삼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7)
본론(本論)에서도 역시 “무루연의 번뇌는 수증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오로지 상응수증(상응법에 대한 수증)을 말한 것이지 소연수증(소연에 대한 수증)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거ㆍ미래의 수면도 수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결정코 수증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능히 발동하여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온갖 이생류(異生類)는 염오함이 없는 마음[無染心]의 상태에서 마땅히 수면을 떠났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존께서는 “어린 동자나 영해(嬰孩, 아기)가 잠을 자고 있거나 아플 때 비록 염오한 욕망[染欲]은 없을지라도 욕탐은 존재하니, 수면이 수증(隨增)한 것이다”고 말하였기 때문에,8) [과거ㆍ미래의 수면도] 수증할 뿐더러 나아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미 [수면을] 끊었다면, 소연과 상응법에서 수증하는 수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그들에게 여전히 상실되지 않은 수면의 상(相)이 있다고 하였겠는가? 따라서 수면이 수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대치도에 의해 그 세력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린 동자나 아기가 잠자고 있거나 병에 걸려 있을 때에도] 그러한 수면의 자체의 상이 상실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욕탐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혹은 지금 비록 작용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수면의 작용은 일찍이 있었고, 앞으로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역시 ‘수면’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예컨대 나라를 잃은 왕도 여전히 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대장장이가 작업을 중단하여도 여전히 그러한 호칭을 갖는 것과 같다.9)
(1) 수면의 수증을 부정하는 상좌 설 비판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수면은 어떠한 경우에도 상응법과 소연 두 가지에서 수증하는 일이 없다. [수면은] 단지 자성으로서만 존재할 뿐으로, 상속 중에 수반되어 이를 계박[隨縛]하며 사기(捨棄)되지 않는 것을 ‘자체(自體, 자성)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10)
[그렇다면] 상속에 따라다니며 계박하는 것(즉 현행의 번뇌인 纏)은 유성(有性)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는 스스로 답하여 말하기를 “오로지 유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온갖 전(纏)에는 상응법과 소연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역시 마땅히 [5]온과는 다른 자아자체[我性]나 색(즉 진흙) 등과는 다른 항아리 자체[甁性] 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야 한다.11) 그러나 이와 같은 편벽된 주장은 마땅히 스스로 숨겨야만 하는 것이다.
2.4. 불선과 무기성의 분별
1) 상 2계 수면의 경우
98수면 중의 몇 가지가 불선(不善)이고, 몇 가지가 무기(無記)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 2계의 수면과 아울러
욕계의 유신견과 변집견과,
이와 구기하는 치(癡)는 무기이며
이 밖의 나머지는 모두 불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색ㆍ무색계의 일체의 수면은 결정코 4지(支)와 5지에 의해 조복(調伏)되기 때문에,12) 어떠한 경우에도 이숙과를 초래할 만한 세력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수면은 모두 바로 무기성에 포섭된다. 만약 “그곳의 수면도 능히 이숙과를 초래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상 2계에도 좋지 못한 느낌[非愛受, 즉 苦受]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염오법(즉 불선이나 유부무기인 번뇌)이 좋은 느낌(즉 樂受)을 초래한다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13)
그렇지만 성도(聖道)로서 무기의 과실을 성취하는 것은 없으니,14) 오로지 유루법만이 이숙과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같은 종류(즉 유루인 색ㆍ무색계의 수면) 중에 이숙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야흐로 무기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있는 것이다.
어찌 경에서 “여러 성(聖)제자로서 만약 능히 제4정려에 들어가는 자라면, 능히 불선을 버리고 선법을 수습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15)
이 또한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예컨대 계경에서는 “여러 성 제자로서 이미 부동심(不動心)의 선(善)해탈을 증득하고 마니보(末尼寶)를 갖춘 자라면,16) 불선을 버리고 선법을 수습한다”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諸) 아라한도 불선을 갖는 것으로, 그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미 모든 불선법을 영원히 끊은 자라도 역시 4정단(正斷)을 부지런히 닦는 것을 인정하였던 것이다.17) 따라서 [그러한 경설은] 다 염괴대치(厭壞對治)와 원분대치(遠分對治)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어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8)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초정려에 들면] 모든 욕계의 악[欲惡]과 불선법을 떠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19)
(1) 상계에도 불선의 번뇌가 존재한다는 상좌 설 비판
그런데 상좌(上座)는 “[‘불선을 떠난다’고 하는 그러한 경설은] 선정의 상태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다”고 해석하여 말하였다.20)
그의 해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럴 경우] 욕계에 대해서도 역시 그와 같이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욕계에도 역시 선(善)의 삼마지(三摩地)가 존재하므로 마땅히 욕계의 악과 불선법을 떠났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색계의 경우와]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이생은 초정려에 들 때에도 역시 욕계의 악과 불선법을 떠난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대의 종의에 의하면 모든 이생류는 유루로서 상속하기에 온갖 번뇌를 떠난 이가 아닐뿐더러 그는 유학법에조차 수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해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닌 것이다].
계경에서 이미 “초정려에 들면 모든 욕계의 악과 불선법을 떠난다”는 말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상2계에는 결정코 불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생이 바로 초정려에 들 때에도 마땅히 욕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지(즉 초정려)의 악과 불선법을 떠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욕]계에 태어난 이에게도 상계의 번뇌가 역시 현행할 수 있을 것이며, 선정의 상태 중에서도 역시 악과 불선법을 떠나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하니, 번뇌[惑]에 의해 발동된 업은 능히 후유를 초래하기 때문에 여기(욕계)에 태어난 이도 그곳(색계)의 번뇌를 일으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일찍이 [어떠한 경에서도] “그곳에서도 [악과 불선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을 설한 일이 없으니, 이에 따라 결정코 그의 해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상좌는] 말하고 있다.
“상계의 번뇌도 욕계의 번뇌처럼 좋지 못한 과보[非愛果]를 초래한다. 이를테면 욕계의 불선의 번뇌는, 비록 보시 등의 도움으로 인해 인천(人天)의 생을 초래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초래되는 이숙과가 없지 않듯이, 색ㆍ무색계의 번뇌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번뇌의 공능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오로지 능히 고수(苦受)의 이숙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욕계 중에는 온갖 악취가 존재하기 때문에, [욕계의] 모든 처소는 다 동일한 수면이기 때문에 타화자재천의 번뇌도 역시 능히 악취의 과보를 초래할 수 있지만, 색ㆍ무색계에는 번뇌에 의해 좋지 못한 이숙과를 받을 만한 별도의 처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는 마땅히 [그 같은 상계의] 악의 이숙인에는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해야 하든지, 혹은 마땅히 상계에도 좋지 못한 결과를 받을만한 처소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21) 또한 욕계의 인취와 천취 중에서는 불선의 원만과(圓滿果)를 받는 경우가 있지만,22) 색ㆍ무색계에 이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대의 종의에서 “일체의 번뇌는 비록 다 같이 불선이라 할지라도 공능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고수를 초래하는 것도 있고 [고수를] 초래할만한 공능을 갖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마땅히 “모든 번뇌는 비록 다 같이 경계대상에 대해 미란(迷亂)되고 전도된 채 그것을 반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공능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바로 무기인 것도 있고 바로 불선인 것도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그곳의 번뇌가 불선이라면 고수의 이숙을 초래해야 함에도, 그 같은 사실은 이미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그곳의 번뇌가 능히 낙수(樂受)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상계의 번뇌는] 마땅히 무기가 되어야 한다.23) 온갖 유루업으로서 능히 좋거나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모두 무기성이라고 인정해야 하거늘, 어찌 혼자서만 [무기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또한 [그는] 말하기를 “무지성(無知性)은 선교(善巧)가 아니며, 일체의 번뇌는 그것(무지성)에 섭수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일체의 번뇌는] 다 불선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비록 그러한 [일체의 번뇌는] 다 선교가 아닌 무지에 섭수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공능의] 차별이 있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처럼 비록 [색ㆍ무색계의 번뇌가] 불선성으로서 동일한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고수의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원인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럴 경우] 그곳의 유학법(有學法)도 마땅히 불선을 성취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그는 스스로 “온갖 유학법도 불(不) 선교(善巧)에 포섭되는 수면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역시 ‘수면을 갖는 것[有隨眠]’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마땅히 “모든 번뇌는 다 선교가 아닌 무지에 섭수된다”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번뇌가] 번뇌 자체를 섭수한다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며, 이치상 두 가지의 사(思)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법을] 이끌어내는 것[引生]을 일컬어 ‘섭수’라고 하였다”고 한다면, 모든 선행도 마땅히 불선이 되어야 할 것이니, 무명이 연이 되어 그것의 생기를 이끌어 내었기 때문이다.24)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것(‘일체의 번뇌는 무지성에 섭수되기 때문에’라는 말)을 논거로 삼아 “색ㆍ무색계의 전(纏)과 번뇌는 바로 불선이다”는 사실을 논증할 수 없는 것이다.
2) 욕계 수면의 경우
유신견과 변집견의 두 견(見)과, 아울러 이와 상응하는 치(癡, 즉 무명)로서 욕계에 계속되는 것도 역시 무기성이다.
전도되어 일어난 것인데, 어찌 불선이 아니라는 것인가?
먼저 유신견의 경우, 선행에 수순(隨順)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근을 끊는 것[斷善]과는 다르기 때문에 결정코 불선이 아니다.25) 만약 “[유신견은] 역시 능히 불선에도 수순하기 때문에 마땅히 불선도 성취해야 할 것이니, 유신견 이후에 일체의 번뇌가 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한다면,26) 나는 바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다만 유부무기(有覆無記)라고 하였던 것으로, “그것은 선행에 수순하기 때문에 바로 선성을 성취한다”고 설한 것이 아니거늘, 어찌 “불선에도 수순하기 때문에 불선성도 성취한다”고 힐난하여 말하는 것인가? 유루선이 비록 [선ㆍ불선] 양쪽에 수순하는 것일지라도 선성을 상실하지 않듯이, 이 역시 그러한 것이다.27)
그러나 만약 “천상의 쾌락을 탐하여 희구하는 것도 복행(福行)에 수순하기 때문에 마땅히 무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고 한다면,28) 이러한 예증은 옳지 않으니, 천상의 쾌락을 희구하는 것은 바로 아견(즉 유신견)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당래 천상의 쾌락을 향수하리라”고 하는 [생각을] 방편[門]으로 삼아 능히 복행을 짓는 것이다. 그렇지만 탐(貪)은, 그것이 선근을 끊을 때 강력한 원인[强因]이 되기 때문에 불선이다. 혹은 아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대한 애[탐]이 비로소 현행하기 [때문에 불선이다]. 이를테면 “나는 당래 천상의 쾌락을 향수하리라”고 관찰함에 따라 비로소 그곳의 쾌락을 탐하고 희구하기 때문이다.
아만(我慢) 역시 유신견에 따라 그 이후에 일어나 마음으로 하여금 잘난 체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업에 따라 닦는 것이 아니며, 또한 친근한 선우(善友) 등을 등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선이다]. 이를테면 아만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믿고 뻐기며 잘난 체함으로써 선우와 가까이하는 일 등은 모두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다.29)
변집견 중 단멸의 극단[斷邊]에 집착하는 자는 생이 단멸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열반에 어긋나지 않을 뿐더러 염리문(厭離門)에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선이 아니니, 세존께서 “만약 ‘나는 일체를 모두 인정[忍]하지도 수용[受]하지도 않으리라’고 하는 견해를 일으킨다면, 이러한 견해는 탐욕에 수순한 것이 아니라 무탐에 수순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다.30)
또한 세존께서 설하기를 “온갖 외도들의 여러 견해의 갈래[見趣] 중에서 이 같은 견해가 가장 뛰어나니, 이를테면 ‘나[我]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것[我所]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것도 역시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31)
또한 이것은 크게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계경에서 “올바로 들은 것이 없는 어리석은 범부 이생으로서 크게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를테면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것도 역시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바로 그들이다”고 설한 것과 같다.
(1) 유신ㆍ변집견의 무기성에 대한 상좌 등의 논란 비판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 하열한 변집견에 해탈에 능히 수순하는 점이 있다는 것인가? 모든 유정의 일체 망견(妄見)은 다 여기에 포섭되니,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떠한 뜻에서 이러한 변집견이 능히 해탈에 수순한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이러한 견해가 하열하다는 것은 진실로 [그대가] 말한 바와 같으니, 방편문으로서 생의 단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집견의] 행상에 대해 세존께서는 어느 때 여러 필추들을 위해 묻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설[無問自說]하기를 “혹 어떤 부류들은 이를테면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것도 역시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 사유하였는데, 이와 같이 승해(勝解, 인가 결정)할 때 [5]하분결(下分結)을 끊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능히 해탈에 수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변집견 중의 단견은] 불선성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변집견 중에는 방편이 아님에도 방편이라 주장하는 견해가 없으며, 하열한 것임에도 뛰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없으며,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가 없으며, 내가 아니고[非我] 상주하지 않는 것[非常]을 나이고 상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없는데, 어떻게 “모든 유정의 일체 망견은 다 여기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변집견 중] 상주의 극단[常邊]에 집착하는 견해는 아견(我見)에 수순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이는 바로 무기이니, 그 이치는 아견(즉 유신견)에 대해 설한 바와 같다.
그런데 그(상좌)는 아직 참된 진리의 이치를 증득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또한 진리에 통달한 스승을 받들어 모시지도 못하였으면서도 항상 “나는 능히 사다리가 될 수 있다”는 만심(慢心)을 일으켜 스스로 이와 같이 “나로서는 어떠한 뜻에서 이러한 변집견이 능히 해탈에 수순한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였지만, 실로 말한 바와 같을 것이다.32)
유여사는 다시 말하기를 “유신견과 변집견의 두 견은 생사의 근본이 되기 마땅히 불선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의 설은 옳지 않으니,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기 때문으로, 첫째는 기인(起因)이며, 둘째는 생인(生因)이며, 세 번째는 이숙인(異熟因)이다. 즉 기인으로 말미암아 [3]계 [9]지를 뛰어넘지 못하며, 생인으로 말미암아 수생(受生)을 획득하게 되며, 이숙인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서 이숙과를 받게 되는데, 유신견과 변집견의 두 견은 기인과 생인이지 이숙인이 아니니,33) [스스로] 생의 근본이 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본론(本論)에서도 “유신견은 능히 3유(有)로 하여금 상속하게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소의신과] 구생(俱生)하는 유신견은 바로 무기성이니, 새나 짐승 따위에게도 유신견이 현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분별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면 바로 불선성이다”고 말하였지만,34)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능히 분별할 수 없는 것이면서 견(見)에 포섭되며 견도소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35) [또한 유신견이라고 한 이상] 이는 마땅히 수소단이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무아의 승해와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새나 짐승 따위의 구생신견)는 다만 수도소단으로서 불염오무기인 사지(邪智)에 포섭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으면,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된다. 즉 새나 짐승 따위는 전제(前際, 과거세) 등에 대해 능히 분별할 수 없음에도 유신견을 갖는 것처럼 역시 마땅히 의심[疑] 등이 현행할 수 있다고 해야한다. 또한 색ㆍ무색계에도 역시 유분별의 번뇌가 현행하므로 이를 마땅히 불선이라 해야 하지만, 거기에 불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비판한 것과 같다.
따라서 욕계 중의 유신견과 변집견의 두 견은 오로지 유부무기성에 포섭되는 것이다.
3) 욕계 수면의 경우(續)
이 밖의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일체의 수면은 앞서 언급한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그것들은 모두 다 불선성이다.
[본송의 “이 밖의 나머지는 모두 불선이다(此餘皆不善)”에서] ‘이[此]’란 욕계[의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욕계[의 번뇌] 중 앞서 설한 것(즉 유신ㆍ변집견과 이와 상응하는 무명)을 나타낸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다 불선으로, 게송에서는 번거롭게 설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 밖의 나머지는 모두 불선이다”고 한 것이다.
2.5. 근(根)ㆍ비근(非根) 분별
1) 불선성의 수면의 경우
앞에서 설한 불선의 번뇌 중에서 몇 가지가 능히 불선근(不善根)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선근은 욕계의
탐ㆍ진과 불선의 치(癡)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일체의 탐(貪)과 진(瞋)과 아울러 불선의 치(癡, 즉 앞서 언급한 무기인 유신ㆍ변집견과 상응하는 무명을 제외한 무명)가 불선근에 포섭된다. 세존께서는 이를 그 순서대로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 불선근이라고 설하였는데,36) 그 본질[體]은 오로지 불선의 번뇌이다. 즉 [모든] 불선법의 근본[根]이 되기 때문에 ‘불선근’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유부의] 종의는 이와 같다.
일체의 수면이 악법을 낳을뿐더러 그 모두는 후법(後法)의 원인이 되는 것인데, 어찌 오로지 이 세 종류만이 [불선근이라고] 하겠는가?
이 세 종류를 초과해야 할 이치가 없으니, 선근(즉 無貪ㆍ無瞋ㆍ無癡)에 반대되는 것을 불선근으로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불만(不慢) 등은 선근으로 건립하지 않은 것인가?
부처님께서 법에 대해 [분명히] 알고서 건립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5식신(識身) 중에 오만(惡慢) 등에 반대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한 다섯 가지 뜻을 갖춘 것을 불선근으로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5부(部)와 통하고, 6식에 두루 의지하며, 바로 수면성이고, 악한 신업과 어업을 발동시키고, 선근을 끊을 때 강력한 가행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만’ 등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37)
즉 그 밖의 번뇌가 불선근이 아니라고 함은 이러한 뜻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진 셈이기 때문에 본송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2) 무기성의 수면의 경우
불선의 번뇌에 불선근이 있는 것처럼 무기의 번뇌 중에도 무기근(無記根)이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역시 존재한다.
어떠한 것이 [무기근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기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기의 애(愛)와 치(癡)와 혜(慧)가 그것으로
나머지는 두 갈래와 잘난 체함에서 생기기 때문에 무기근이 아니다.
외방의 논사들은 무기근으로 네 종류를 설정하였는데
중(中)의 애(愛)ㆍ견(見)ㆍ만(慢)ㆍ치(癡)가 바로 그것으로
세 가지는 선정의 근거로서 모두 ‘치’의 소생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무기근에도 역시 세 종류가 있다고 설한다. 이를테면 온갖 무기의 애(愛)와 치(癡)와 혜(慧)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으로,38) 일체의 무기는 무기근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혜근은 유부(有覆)와 무부(無覆)의 무기를 모두 포섭한다. 여기서 ‘근’이란 바로 원인의 뜻으로, 무부무기의 ‘혜’도 역시 능히 [무기법을 낳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무기근에 포섭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에는 온갖 무기를 낳는 힘이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의(疑)와 만(慢)은 무기근이 되지 않는 것인가?
‘의’는 두 가지 갈래[趣]에서 일어나며, ‘만’은 잘난 체하는 것[高]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의’는 유예(猶豫)의 두 갈래에서 동요하며 일어나기 때문에 근(根)으로 설정하지 않았으니,39) ‘근’은 견고히 머무는 것[堅住]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은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는 것[高擧相]으로, 위를 지향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하지 않았으니, ‘근’은 아래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뿌리[根]의 모양도 이와 같아서 흙 밑으로 숨어들기 때문에 ‘근(즉 뿌리)’라고 이름하였으니, [뿌리] 자체는 아래로는 뻗어 내리고 위로는 싹을 낳는 것이다.40)
즉 이러한 세 가지(무기의 ‘애’와 ‘치’와 ‘혜’)도 그러한 뿌리와 같기 때문에 역시 ‘근’이라고 이름하였지만, 그 밖의 다른 무기는 수면이 아니거나, 혹은 뛰어난 작용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기근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외방(外方)의 모든 논사들은 무기근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41) 이를테면 온갖 무기의 애(愛)와 견(見)과 만(慢)과 치(癡)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무기를 일컬어 ‘중(中)’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선ㆍ악을 막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42)
어떠한 이유에서 [그들은] 이 네 가지를 무기근으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
어리석은 범부로서 상계의 선정[上定]을 닦는 모든 이들은 다만 애ㆍ견ㆍ만의 세 가지에 의탁하여 닦을 뿐이며, 이 세 가지는 모두 무명의 힘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이 네 가지를 무기근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부무기의 ‘혜’는 그 힘이 저열하기 때문에 무기근이 아니니, ‘근’이라고 하는 뜻은 필시 견고함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유가사(瑜伽師, 즉 요가행자를 말함)들은 ‘만’의 힘으로 말미암아 백천(百千)의 수승한 공덕에서 물러나게 되기 때문에, ‘만’으로서 그 힘이 뛰어난 것을 무기근으로 설정하였다. 즉 이러한 네 가지 법은 능히 무기의 염법(染法)을 낳는 것이다.”
(1) 무기근을 부정한 상좌 비판
그런데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기근은 존재하지 않으니, 성교에서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선ㆍ악법은 맹리(猛利)하여 필시 근(根)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만, 무기는 이열(羸劣)하여 공용에 의하지 않고서도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데, 어찌 근에 근거한다는 것인가?”
‘성교에서 [설한 일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이는 바야흐로 올바른 이치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무기의 번뇌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떠한 이유에서 일부의 염법(즉 불선법)은 동류의 근(根)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하면서 일부의 염법(즉 유부무기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무기의 염법도 동류의 근을 가지니, 이는 바로 염법이기 때문으로, 불선법이 그러한 것과 같다.43)
또한 어찌하여 그토록 결정적으로 ‘이는 성교에서 [설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저 상좌는 자신의 귀로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이를 부정하여 “이는 성교에서 [설한 것이] 아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성교가 이미 다 없어지고 사라졌거늘, 상좌가 듣지 않았다고 하여 어찌 성교에서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옛날의 위대한 모든 논사들도 다 같이 무기근에 대해 상론하였기 때문에 필시 [이에 관한] 성교의 명문(明文)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총명(總名, 즉 ‘무기근’이라는 말)으로써만 나타내고 [무기근의] 개별적인 명칭과 수(數)에 대해서는 나타낸 일이 없었으니, 이에 따라 [무기근은] 세 가지라거나 혹은 네 가지라는 논쟁이 있게 된 것이다.44)
또한 성교 중의 곳곳에서 유기(有記, 선과 불선)와 무기(無記)의 법에 대해 설하고 있으며, 또한 곳곳에서 유기와 무기의 법은 근(根)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어떤 곳에서는 역시 또한 유기근(선ㆍ불선근)에 근거하여 ‘무기근’이라는 명칭을 방편으로 설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것(무기근)은 성교에서 [설한 일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맹리한 것뿐만 아니라 이열(羸劣)한 법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마땅히 근의 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설정한 이취(理趣)로는 우리가 주장하는 무기근을 능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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