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인간에 관한 물음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물음은 "인간은 물질 덩어리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존재인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날까지 나와 있는 주장들을 구분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 번째 관점은 인간은 결국 '물질적인 존재'라고 보는 '유물론'의 주장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나 공산주의자 마르크스 등이 이런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지성, 정신, 영혼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물질이 거듭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라고 봅니다. 즉 단백질 덩어리가 고도로 진화하여 오늘날 인간의 문명을 이뤄냈다는 것으로 인간의 육신이 수명을 다하면 그 정신도 함께 소멸한다는 주장이죠. 이러한 관점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고유의 가치를 놓치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수억 원짜리 명견이 있고, 또 우리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몫을 못 차지하는 노숙자 한 사람이 있는데, 어느 사람의 실수로 그들이 죽었을 때, 명견의 죽음은 손해배상만으로 끝나지만 노숙자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형사적 책임인 과실치사 등의 형벌이 수반되겠지요. 돈으로만 해결이 안되는, 사람이란 동물과 구분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이 바로 영혼을 가리킵니다. 철학자들은 이 영혼을 지닌 인간의 위상을 확실히 하기 위해 , 무릇 식물들이 지닌 생명원리를 생혼(生魂:생명을 관장하는 기운)이라 불렀고, 동물들이 지닌 생명원리를 각혼(覺魂:감각의 기운)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물의 각혼(覺魂)은 식물의 생혼(生魂)을 함께 갖고 있고, 인간의 영혼엔 앞의 두가지 혼(魂)과 함께 또 다른 혼(魂)을 갖고 있겠지요. 두 번째 관점은 물질을 넘어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되 육체를 나쁘게 보는 '이원론적' 입장입니다. 플라톤을 위시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로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에 의하면, 영혼들이 본래 이데아(idea)의 세계에서 살다가 죄를 짓고 그 벌로 잠시 이 세상에 와서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견해입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 속박, 무덤이라는 점에서, 영혼은 육체에 속한 욕망을 이성의 힘으로 극복해야 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은 육체를 떠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육체관으로,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쳐 고행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서구에서 일어난 신비주의 경향의 문화 정신 운동의 하나로, 서구문명에 대한 위기감과 그것에 따른 전환을 주장하는 정신사적 운동)의 사상가들이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여 수련,단련,명상 등을 통한 의식의 진화를 꾀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영혼을 선하게 보고 육체를 나쁘게 보는 관점은 바람직하지 않겠습니다. 세 번째,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육체를 나쁘게 보지 않는 일원론적 관점입니다. 곧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합일체'로 보는 입장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철저하게 영혼과 육체의 통합체로 봅니다. 유럽의 2000년 인문학을 통섭한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러한 성경의 인간관을 기초로 하여 인간은 영과 육의 단일체이며, 인간은 "동시에 육신(肉身)이고 동시에 영혼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육체는 앞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보는 것처럼 '악한 실재'가 아니고 '선(善)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선(善)을 행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토마스의 견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육체를 죄덩어리로만 보던 종래의 육체관을 극복하고, 육체가 할 수 있는 선(善)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비로소 '영육의 조화'와 '심신일여(心身一如)가 영적 목표로 자리매김 되었고, 금욕(禁慾)위주의 소극적 영성(靈性)보다 사랑과 선행을 강조하는 적극성 영성이 확립되었습니다. 이제 영혼에 집중하여 그 영혼의 기능은 어떤 것일까요? 실재로 이 세상에서 꽤 성공하여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사람들 중에 행복하지 못하고 영적 갈망을 크게 느낀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삶은 공허하고 허무하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그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남 보기에 사회적으로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인생 말년에 와서 하느님을 찾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이는 바로 그들의 영혼이 굶주릴 대로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적인 그 어떤 부(富)도, 성공도, 행복도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지 않고는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부러울 것이 없을 만큼 부자이지만, 실상 내면으론 한없이 가난한 영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은 '하늘 냄새'라는 시에서 영혼의 향기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 하늘 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맑은 영혼에서 맑은 내가 나고, 탁한 영혼에서는 탁한 내음이 날 것입니다. 흔히 "그 사람 참 영혼이 맑다"라는 말을 하죠. 영혼에게는 고독처럼 좋은 보약이 없답니다. 그런데 흔히 바쁘다는 핑계로 '영혼'을 돌볼 시간을 못 갖습니다. 그러나 새벽 일찍 일어나 누리는 고독의 시간은 그 맛이 아침이슬 맛입니다. 요즘 직장과 가정에서 스트레스로 영혼이 짓눌리는 것처럼 느끼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바로 이럴 때 "고독" 속에 잠겨 자신의 영혼과 맞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상에서 고독을 즐기는 법을 터득한 사라 밴 브레스낙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도 속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육체, 정신, 감정, 영혼이라는 네 개의 방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방에서만 산다. 하지만 인생을 풍요하게 살아가려면 날마다 네 개의 방에 규칙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말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방에 있는가? 누군가 등을 떠밀어 원하지도 않는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닌가? 방의 주인은 오직 당신이다." 우리는 육체의 방, 정신의 방, 감정의 방에는 매일 섭섭하지 않을 만큼 들릅니다. 이젠 영혼의 방에 머무는 즐거움을 누려볼 때입니다. 혼자 고독의 방에 머물다 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고독 안에서 불안이 변하여 평화가,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움틀거릴 것입니다. 고독의 열매는 의지로 맺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멈춰 영혼을 추슬러볼 일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라고 물을 때, "나는 영혼이다" 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비록 땅 위에 살고 있어도 이미 하늘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VIP 목록 가운데 가장 첫 번째 귀빈 이름을 "내 영혼"이라 적은 사람은 이 땅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글은 차동엽 신부님(사목신학 박사, 2019년 11월 12일 61세에 선종하심)의 책 <잊혀진 질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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