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 ·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 |
| 노예의 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나남 |
사회주의 독재 예견 신자유주의 파도의 마중물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고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목격한 로렌스 하이에크 박사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병실에 누워 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단 한 마디로 받아넘겼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아버지 하이에크는 이미 오래전에 사회주의 몰락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소련이 무너지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중국의 개혁 · 개방을 결단한 덩샤오핑은 1978년 노령의 하이에크를 초청했다. “어떻게 하면 중국 인민을 굶주림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덩샤오핑의 물음에 하이에크는 이렇게 답했다. “농민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 뒤 중국은 집단농장에서 생산해 똑같이 분배하던 방식을 바꿨다. 국유지를 농민에게 임대해 생산량의 일부만 정부에 내도록 했다. 농산물의 자유시장을 허용한 지 3년 만에 중국인들은 기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를 인류 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경제학자 하이에크가 사회주의의 붕괴를 예견한 것은 1944년에 출간한 대표작 ‘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에서였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인류를 ‘노예의 길’로 인도하는 나쁜 이념이자 진보를 가장한 ‘악’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하이에크는 ‘이념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는 데 일생을 보냈다. 자신은 경제학자이지만 ‘노예의 길’은 ‘정치 서적’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치명적 자만’
하이에크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계획이나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위적 질서’로 바꾸려들면 애초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향력이 커져 막강한 힘을 지닌 정부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국가를 항상 지상의 지옥으로 만들어온 것은 인간이 그것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애쓴 결과였다’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더린의 풍자를 인용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꼬집었다. 하이에크는 훗날 이를 인간의 ‘치명적 자만’이라고 명명한다. 말년에 펴낸 그의 또 다른 역작 ‘법·입법· 자유’도 이 같은 자생적 질서론에 기초한 독창적인 사회 철학을 펼쳐 보인 것이다.
‘노예의 길’은 자유에 초점을 맞췄다. 계획은 비효율적이고 퇴행적일 뿐 아니라 자유를 파괴하고 결국 사람들을 ‘노예의 길’로 이끈다는 견해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평등을 강조하고 있으나 억압과 노예 상태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공격한다. 사회주의자들이 ‘위대한 유토피아’라고 일컫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가 달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결코 그 결과를 수용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체제를 낳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궁극적 가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라고 그는 역설한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수단이어서 내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라는 게 하이에크의 지론이다.
하이에크는 히틀러의 독재와 소련에서 벌어진 전체주의의 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색채로 물들어가는 영국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결의로 ‘노예의 길’을 썼다. ‘모든 당파의 사회주의자’에게 헌정하는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계획은 반드시 전체주의로 통한다며 파시즘과 사회주의에 맹공을 퍼붓는다.
“사회주의는 때로는 단지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사회정의, 더 큰 평등과 안전이라는 이상을 묘사하거나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또한 대개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채택하는 특정한 방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많은 유능한 사람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그 목적을 충분하고도 빠르게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의미를 지닌 사회주의란 사기업제도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 대신 그 자리에 중앙계획당국이 들어서는 ‘계획경제’체제의 창설을 뜻한다.”
그는 “대개의 계획주의자들은 지시경제가 다소 독재적 방식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경고음을 울린다. 그는 경쟁에 부정적인 사람들에겐 이렇게 반박한다. “경쟁하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이 큰 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유산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작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 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만 달려 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 있지 않다. 경쟁 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케인스 對 하이에크
이 책은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만약 자유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창출하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다시 시도해야 한다. 실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핵심적 원리는 19세기에 진리였듯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리다.”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촌동생이기도 한 하이에크는 이 책에서 경제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는 말도 남겼다. “‘경제학을 저주하고 멋진 세상을 건설하자.’ 이렇게 말하면 고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그저 무책임한 말일 뿐이다.”
이 책은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강성 노조와 공공부문 방만이라는 ‘영국병(病)’을 고친 대처리즘의 숨은 공신으로 알려진 영국 경제문제연구소와 관련된 얘기다. 이 연구소를 창설한 앤서니 피셔는 ‘노예의 길’을 읽고 자유주의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하이에크를 찾아갔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제가 정치에 입문하면 어떨까요?” 하이에크는 “아니오. 사회의 진로는 오직 사상의 변화에 의해서만 이뤄집니다. 당신이 먼저 합리적 주장으로 지식인, 교사, 작가들을 설득하고 이런 사상이 그들의 영향으로 보편화될 때 정치인들은 따라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피셔는 1955년 양계사업으로 번 돈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연구소 만드는 데 투자했다.
‘노예의 길’은 출간되자마자 영국은 물론 미국 등지에서도 하이에크가 순회강연을 해야 할 만큼 주목받았다.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 케인스도 깊은 공감의 뜻을 전했다.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당신의 견해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새 내가 당신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과 하이에크는 케인스라는 거목의 그늘에서 30년 넘게 찬밥 신세로 지내야 했다. 1930년대 말 세계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자본주의 세계의 정책과 지식 분야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착오적이고 극단적인 자유시장 옹호자로 냉대받으면서도 하이에크는 자신의 생각을 세밀하게 가다듬고 세상을 설득해나갔다.
1970년대 초 경제불황 속에서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 케인스 이론이 더 이상 효험이 없어지자 하이에크의 경제철학이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태동한 신자유주의 물결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라는 수원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 공로로 그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 견인
하이에크의 사상은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노예의 길’은 당시 옥스퍼드대 학생이던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의 손에 들어가 40년 뒤 세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촉매가 됐다. 대처 총리는 1989년 하이에크의 90회 생일에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작업과 사상이 우리에게 준 지도력과 영감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었으며, 우리는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 그곳의 민영화 정책도 ‘노예의 길’과 만난다. 케인스가 그랬듯이 하이에크도 30여 년간 세계경제 흐름을 주도했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불거지면서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더불어 하이에크의 성가가 다소 가라앉고 케인스가 복권됐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010년 주요 선진국들의 정부 부채위기가 몰아치자 하이에크 진영의 반격이 재개됐다. 이처럼 케인스의 ‘정부’ 대 하이에크의 ‘시장’ 전쟁은 쉽사리 끝이 보이지 않는다. 케인스주의자들이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생긴 시장의 실패를 들먹이면, 하이에크주의자들은 금융위기는 정부 개입에 따른 정책의 실패라고 맞받는다. 하이에크는 생전에 케인스와 자신의 차이를 익살스럽게 설명한 적이 있다. “케인스가 많은 것을 아는 여우라면, 나는 오직 한 가지 큰 사실만 아는 고슴도치다.”
하이에크에 대해서 두 가지 시각이 병존한다. 보수 진영은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자로서 그를 환영한다. 좌파 진영은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적 기반마저 허무는 우를 범한 ‘시장 근본주의자’라고 비판한다. 하이에크를 더욱 아프게 하는 건 나쁜 정부의 개입과 좋은 정부의 개입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아닐까 싶다.
이제 나치나 공산주의 같은 극단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북한을 제외하곤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노예의 길’은 여전히 정부의 역할과 시장, 자유의 중요성에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3년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 김학순│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 201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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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의 노예의 길 · 어떤 책인가
민주사회의 지식인이라면 꼭 만나야 할 한 권의 책이 있다. 현대인의 필독서이자 이제는 고전이 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이다. 부제목인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이 말해주듯이 이 책은 사회주의의 위험성을 근본부터 파헤치고, 나아가 민주주의의 타락을 막아 번영을 유지하기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설명한다. 사람들은 흔히 ‘평등한 사회’ ‘삶의 질적 보장’ 과 같은 사회주의적 구호를 좋아한다.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이처럼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실험은 궁극적으로 현실정치에서 전체주의로 귀결되곤 하였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좋은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그 목적이 이상적일수록 결과는 더 처참해질 수도 있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저자가 이 책을 쓰던 1940년대 당시는 사회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번성하던 시기 였다. 그럴듯한 목표를 내세워 국민을 현혹하고 경제를 조정하고 사람들을 통제 하려던 시도들은 결국 독일의 나치, 소련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사회주의가 전체주의로 가는 위험한 통로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바로 자유의 길이 아닌 독재와 노예의 길이었다.
『노예의 길』은 1944년 3월 영국에서, 그리고 같은 해 9월 미국 시카고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출판과 동시에 6개월 만에 3만 부가 팔려나갔고, 이후 여러 번의 재판을 통해 미국에서만 23만 부 이상이 팔렸다.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소련이 몰락하던 시기에는 소련 내 지식인들이 몰래 번역해 돌려보는 일까지 있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사회주의는 노예의 길
『노예의 길』은 유럽에서 나치즘이 극성을 부리던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저술 되었다. 전체주의가 세계를 휩쓸어버릴 것 같던 그때, 문명사회의 희망을 밝히는 한 권의 위대한 책이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알려 민주사회가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주의는 낯설기만 하다. 그런 나라를 찾기도 어렵다. 얼마 전만 해도 무아마르 카다피가 지배했던 리비아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프리카 몇몇 나라와 북한만 남았다. 이제는 그런 전체주의 국가와 독재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이는 시대이다.
하지만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민주국가들이 쉽게 전체주의 국가로 타락한 예를 볼 수 있다. 미치광이 학살자로 불리는 히틀러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등장 했다. 이후 독일사회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선동을 통해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통제된 사회가 되었고, 그 결과 국가 기본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사회로 변질되었다. 다시 말해 독일의 나치즘은 사회주의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집단화시킨 결과이며, 바로 전체주의 그 자체였다.
사회주의의 뿌리는 깊다. 유토피아는 인류가 오랜 기간 품고 있던 환상이었다. 철학자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꿈꾸며 위대한 철인이 나타나 정치를 해야 한다고 외쳤다. ‘철인군주가 통치하는 완벽한 이상국가’라는 꿈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이상사회는 독재자가 전횡하는 지옥이 되고 만다. 독재적 성향의 정치인일수록 현실을 유토피아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소리 높여 외치는데, 그것은 사탕발림일 뿐이다. 특히, 사회주의자들만큼 세상을 어지럽히고 타락시킨 경우도 찾기 어렵다. 결국 이상국가론에 이끌려 사회를 완벽한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유혹에 빠지다보면, 자신과 수많은 사람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모두를 노예의 길로 이끌게 된다.
민주사회를 지키는 일은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다. 어느 순간 국민을 현혹하는 민중주의자가 나타나 사회를 전체주의로 끌고 갈지 아무도 모른다. 나치즘의 독일, 공산주의 소련 같은 나라는 아니었지만, 유럽의 선진국가도 정부의 경제개입이나 통제의 함정에 수시로 빠져들었고, 사회복지와 소득재분배 같은 사회주의 정책실험은 늘 경제시스템의 근간을 흔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밀턴 프리드먼은 이 책의 출간 50주년 기념판 서문(1994년)에서 “불행하게도, 집단주의에 대한 억제력은 정부의 성장을 억제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정부의 성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하였다. 정부가 직접 생산활동을 관리하는 일로부터 사적 기업활동을 간접적으로 규제하고, 특히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 일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짜내는 것을 포함하여 소득이전정책을 시행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바뀌었다. 이 모든 것들은 평등과 빈곤의 퇴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나 실제에서는 특정 이해집단들에 대한 변덕스럽고 모순되는 잡탕 보조금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국민소득 가운데 정부에 의해 지출되는 부분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프리드먼은 “1944년 처음 발간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당시보다 현재의 미국에 더 잘 적용될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의 지적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온갖 사회주의 정책들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타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개인의 가치와 선택의 자유 원칙들은 훼손되고 있으며, 약자를 보호하자는 정치적 구호를 앞세워 경제통제 정책과 정부개입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 결과 정치적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계층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시대를 앞선 사상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출생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는 비엔나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경제학 두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지도하에 연구를 수행했으며, 1929~1931년까지 비엔나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1931년 영국으로 옮겨 런던대학교 교수로 지내며 1938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그는 독일의 전체주의에 환멸을 느껴 영국으로 왔지만, 영국에서도 사회주의가 점차 확산되자 충격을 받는다. 영국에서 벌어지던 사회보장 논쟁이나 공기업화 추진은 이미 독일의 나치당이 정치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이용했던 수단이었다. 전체주의의 뿌리가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다보면 그 사회는 점차 전체주의로 빠져들 수 있음을 간파했던 하이에크는 영국과 서방세계가 독일처럼 타락해가는 것을 염려해 『노예의 길』을 집필하게 된다.
하이에크는 이 책의 서문(1943년 12월)을 통해 이 책이 정치서적임을 밝히면서, “다른 속뜻이 있는 아마추어와 가짜 만병통치약을 팔려는 돌팔이들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고 있고, 이에 따른 위험수위가 너무 높아져 여론에 경고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며 사회주의자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뉴욕타임스의 경제편집장이었던 헨리 해즐릿은 “하이에크가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를 썼다.”고 격찬했고, 전 세계 지식인들이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세계의 흐름은 사회주의로 기울어 있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로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자유진영 국가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가 점차 확산되었다. 패전국을 민주국가로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서방국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내부에 일어나는 사회주의를 저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율적 시장치유보다는 장기적 부작용을 동반하더라도 당장의 정부개입과 혜택을 원했고, 이러한 추세는 1930년 대공황 이후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전 세계가 케인스의 정부개입주의에 휩쓸린 상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자유진영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이라는 또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싸움, 그리고 서방국가 내부에서 자라는 사회주의 세력과의 싸움에 직면하게 된다. 영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노동당의 집권으로 정부의 경제통제가 강화되었고, 미국에서도 정부개입주의는 확산되고 있었다.
하이에크의 주장이 현실정책에 반영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사회주의가 결국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하이에크의 예언은 결국 현실화되었다. 국가 내부에서 사회주의를 누르고 자본주의 원칙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 서방세계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전쟁 없이 몰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눈으로 확인한 하이에크는 199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가 꽃 피운 전체주의 국가와의 싸움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 국가 내에 터를 잡은 사회주의라는 내부의 적과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3의 길, 자본주의 4.0에서 보듯이,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를 적당히 가미한 유사 자본주의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점은 분명해졌지만,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주의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꾼 사상가, 하이에크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가 아니고 사상이다.” 하이에크의 말이다. 사상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그가 남긴 자유주의 사상은 우리 사회의 자산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침체되고, 어떤 사회가 부유해질까? 문제는 방향에 있다. 올바른 방향의 사상을 선택하는 사회만이 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를 경계하고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가 바로 참다운 정치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미제스와 더불어 오스트리아학파를 대표한다. 그는 경쟁 과정을 소비자의 수요와 더 나은 생산방식을 발견해가는 절차이자,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정보결핍을 극복해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 문제의 근본에는 늘 지식의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시장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시장을 통해서만 해법 찾기가 가능하다. 시장이 바로 집단적으로 지식을 만들고 창조해가는 곳인 셈이다. 그런 지식창조가 가능한 체제가 바로 자유시장경제이다.
반면, 정부는 민간의 지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부의 간섭과 개입을 중시하는 국가는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국가와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과신해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늘 사회주의 방식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패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정부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시장 흉내를 낼 수 있지만 시장을 대체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정부는 그 어떤 재화의 가격 하나도 제대로 결정할 수 없다. 경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1947년 스위스에서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밀턴 프리드먼 같은 자유주의자 36명이 참여하는 하나의 컨퍼런스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Mont Pelerin Society) 이다. 전 세계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이 협회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제임스 뷰캐넌, 로널드 코스 등이 주요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노예의 길』 외에도 기념비적인 책들을 남겼다. 『개인주의와 경제질서』(1949), 『자유헌정론』(1960)과 『치명적 자만』(1988)이 대표적이다. 1950년부터 1962년까지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한 후 다시 유럽에 돌아온 하이에크는 『법, 입법 그리고 자유』(1973)를 집필했고,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하이에크는 세상을 바꾼 사상가이다. 그가 내놓은 사상과 정책은 당장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장기적으로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이에크의 사상은 1970년대에 와서야 현실정치에서 채택되기 시작했다. 하이에크의 사상을 받아들인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시대의 흐름을 바로 세운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결국 하이에크의 사상이 20세기 후반을 다시 번영의 시기로 돌려놓았다.
하이에크의 해법은 중국에서도 빛났다. 등소평은 하이에크를 초청해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사회주의 시스템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경청했다. 하이에크가 내놓은 경제발전을 위한 처방은 간단하고 분명했다. 재산권 보호와 거래의 자유였다. 바로 정부가 소유했던 농지를 사유화하고 경작물의 사유화와 거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중국은 3년 만에 식량 자급을 달성하게 된다. 국가가 해준 것은 민간이 알아서 먹고살라고 내버려두고, 자기가 수확한 것은 자신이 갖도록 해준 것이 전부였다. 정부가 나서지 않고 내버려둔 것이 기아(饑餓) 해결의 열쇠였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과거 비슷한 경제수준에 있었다. 오히려 북한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산업시설이 많았다. 하지만 67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산업화에 성공한 민주국가로, 북한은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로 변했다. 그 차이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가에서 나왔다. 북한을 전체주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처방을 하이에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내놓은 것이다.
- 최승노 컬럼 |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 201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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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와 함께 경제학 고전읽기 · 『노예의 길』 · 법의 지배와 자유 |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기 위해 필수적인 법의 지배
1944년에 쓰여 진 《노예의 길》은 ‘대중 민주주의의 필연적 타락을 경고’ 한 책이다. 하이에크는 ‘더 큰 평등’, ‘직업과 소득의 보장’과 같은 잘못된 ‘자유’의 의미가 ‘민주주의’와 결합돼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되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주장은 독일 나치즘과 소련의 실상을 통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대선을 앞두고 쏟아지는 포퓰리즘 법안들과 이에 대한 우리사회의 환호는 하이에크의 경고를 떠오르게 한다. 이에 바이트는 《노예의 길》을 ‘자유’, ‘민주주의’, ‘법의 지배’로 나누어 그 의미를 역자 김이석 박사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자유로운 개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가 필수적이라고 하이에크는 이야기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하이에크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1. 자의적 정부의 배제로서의 법의 지배는 자유 확보에 필수적이다.
철학자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법만을 그리고 그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복종할 필요가 없을 때 우리는 자유롭다.” (Man is free if he never needs to obey no person but solely the laws.)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 <6장 (경제)계획과 법의 지배>에서 칸트의 이 말을 인용하며 개인의 자유의 확보에 법의 지배가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정한 개념을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는 그 반대가 되는 상태가 무엇인지 검토하는 것이다. 법의 지배의 반대는 자의적 지배이며 따라서 법의 지배란 자의적 지배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가장 강력한 자의적 지배는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법의 지배에 반대되는 개념은 자의적 정부(arbitrary government) 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자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이 지켜지는 상태는 법의 지배가 아니다. 그 어떤 내용의 법이든 그 법의 준수가 법의 지배는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기술적 세부사항들을 털어버리고 나면, 법의 지배란 정부가 모든 행동에서 미리 선포된 규칙들에 의해 제약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특정 위원회가 그 행위에 대해 탄핵을 받지 않는다는 입법(legislation)은 비록 법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이 법률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법의 지배는 아니다. 이는 강제력을 행사하는 국가 기구들에 맡겨진 재량이 가능한 한 축소되어야 한다는 의미의 법의 지배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회에서 법률로 만들어지는 무수한 입법 활동은 실은 법의 지배의 정신을 반하는 경우가 많다. 하이에크는 『법, 입법, 그리고 자유』 (Law, Legislation, and Liberty) I, II, III 시리즈를 출간한 바 있는데 책 제목이 시사하듯이 그는 법(law)과 입법(legislation)을 구분하였다. 여기에서 개인의 자유의 확보에 필수적인 재산권법, 계약법 등이 법에 해당하며, 자의적 정부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자의적 정부에서 가능한 종류의 법률, 예를 들어 특정 집단의 이익을 다른 집단의 희생 아래 보호하기 위해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 등은 입법에 해당한다. 2. 법의 지배의 두 가지 근거
법의 지배는 경제적 근거와 도덕적 혹은 정치적 근거에서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
첫 번째 경제적 근거는 법의 지배를 통해 국가의 행동을 사전에 예측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개인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세우고 자신들의 지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데 기초한다. 이런 의미에서 법의 지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국가의 행동이 예측 가능하려면, 미리 예측될 수 없는 개별적 상황과 상관없이 국가의 행동이 고정된 규칙들에 의해 제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의 지배는 이를 무너뜨리는 입법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법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 국가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미리 예측될 수 없는 구체적 상황에 따라 이 목적 달성을 위해 개인들에게 명령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입법이 이루어진다면, 국가의 행동은 미리 예측될 수 없다. 국가의 행동이 예측될 수 없으면 개인들로서는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국가가 더 많이 계획할수록 개인들은 계획하기 어려워지고 그 계획의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행정부에 광범위한 재량을 위임하는 방식의 입법, 즉 행정부의 자의적 명령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입법을 법의 지배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의 위험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법의 지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구체적 명령과 구별되는 일반적 규칙으로서 구체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형식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구체적으로 특정 목적을 지향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특정한 소득분배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목적을 가진 정부는 개인들의 의사에 반하는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불편부당한 정부의 필요성이라는 도덕적 혹은 정치적 이유이다. 일반적 규칙에 근거한 법의 지배가 아니라 구체적 명령의 성격이 강한 자의적 정부를 가능하게 하는 곳에서는 정부는 불편부당한 심판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가운데 어느 한 쪽 편을 들고 입법자들이 특정한 가치를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법의 지배가 확립된 곳에서만 정부가 국민들을 편 갈라서 특정 편에 손을 들어주는 파당적일 가능성이 차단된다. 정부가 편을 드는 신분이 만들어지는 셈인 것이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이렇게 말한다.
헨리 마인(Henry Mein)경은 “신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계약이 지배하는 사회로” 인류의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고 했지만, 신분의 지배에 진정으로 반대되는 것은 바로 법의 지배이다.
3. 법치보다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것은 오류
사람들이 법의 지배의 중요성을 잊어버리는 것은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자유주의 성향의 저널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지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었다.
“민주정부는 독재 못잖게 민주적, 대의적 성격을 희생하지 않고서 항상 절대적 잠재권력을 수중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부가 결코 건드릴 수 없는 개인의 권리란 없다. 국민에 의해 자유롭게 선출되고 반대당에 의해 충분히 공개적으로 비판받기만 한다면, 정부가 취할 수 있고 또 취해야 하는 통치권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법의 지배와 양립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는 정부를 기대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개인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의성을 가져도 좋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자유로운 선출, 공개적 비판만 있으면 그 자의성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국가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들이 국가를 위한 수단이 된다면 국가는 결국 누군가 그 권력을 잡을 것이고 개인들은 그 권력자의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다.
4. H. G. Wells의 사례와 우리 헌법
『노예의 길』에 나오는 웰즈(H. G. Wells)의 사례는 현재 우리나라 헌법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처럼 보인다. 그는 가장 포괄적인 중앙집권적 경제계획을 주창했지만 동시에 개인의 권리들도 보존하고자 희구하였다. 그는 인간의 권리선언에서 “어떤 차별적 제한도 받지 않고 무엇이든 사고 팔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였지만 동시에 “공동의 복지와 양립될 수 있는 양과 조건들일 때”에만 이런 권리가 허용된다는 부가 조건을 두었다.
너를 언제나 사랑한다고 해놓고 이럴 때만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유로운 직업선택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특정 직업이나 지위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당국을 당연한 듯 생각하고 있다. 이런 조항들로는 자의적 정부를 막을 수 없다.
우리나라 현행 헌법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119조 1항에서는 자유시장 경제를 기본질서로 내세우고 있지만 곧바로 2항에서 정부가 균형발전 등의 명분을 내세워 언제든지 시장에 간섭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을 면밀히 검토한 한 경제학자가 “우리나라 헌법은 어느 나라 헌법에 비해서도 더 반자유주의적이다”고 토로했듯이 하이에크도 우리 헌법은 법의 지배가 구현된 헌법으로 볼 수 없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 필자 소개 : 김이석 박사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뉴욕대학에서 <하이에크의 지식의 문제>(Hayekian Knowledge Problem)에 관한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시장경제제도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다.
- 바이트 칼럼 | 시장경제제도연구소 부소장 김이석 박사 | 201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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