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장도, 이불장도 없이 비키니 옷장이 피난민 살림처럼 놓여 있는 의병장 후손의 허름한 살림살이. 좌측부터 월겸, 옥겸, 옥녀
의병장 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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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범도 뛰는 차도선이란 말이 있었어요. 기골이 장대하셨다는 할아버지께서는 하루 저녁에도 천리를 다녔다고 해서 '차천리'라고 불렀다고 해요. 왜놈들이 할아버지를 잡으려고 아무리 추적했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서 잡지를 못했다는 거예요." (셋째 손녀 월겸)
"아버지는 살아계실 적에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하시다가 한이 맺힌다고 하면서 이야기 끝을 맺지 못하고 울곤 했어요. 어머니 하신 말씀이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으셨고, 할머니가 왜놈들 등쌀에 시달리며 자식을 키우느라 고생이 심하셨다고 하셨어요." (넷째 손녀 옥겸)
차도선(1863년~1939년) 의병장의 손녀들이 추석을 하루 앞둔 9월 24일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나 가난한 형편 탓에 추석 명절 임에도 고기 굽고 전을 굽는 냄새는 피우지 못했다. 이들은 차도선의 셋째 아들인 '원복'씨의 딸이며, 맏딸 옥성은 87년 63세로 사망했다.
셋째 손녀 월겸(63)씨가 할아버지의 무용담을 꺼내자 넷째 손녀 옥겸(59)씨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감당해야만 했던 고통과 힘겨움을 떠올렸다. 평생 농사지으며 살았다는 둘째 손녀 옥녀(71)씨는 "기래 기래 기랬지!", "기러게 말이야!"라며 두 동생의 이야기에 맞장구쳤다.
함경남도 산포수 출신으로 홍범도 장군과 함께 무장봉기에 나섰던 차도선. 신출귀몰하는 지략과 개마고원의 지형을 꿰뚫은 산포수의 경험을 살린 전술로 일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했던 인물이다.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북한의 김일성은 그를 찾아가 밤새 토론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항일투쟁은 당대에서 그치지 않았다. 형(차도심)과 조카(차원식)을 비롯해 아들 셋(리덕, 운학, 원복)과 손자 셋(두천·일천·금천) 등 가문의 모든 사내는 항일투쟁에 투신한다. 3대에 걸친 항일투쟁은 투옥·고문·사형으로 이어졌고, 일제의 악행에 못 견딘 가족들은 남부여대하고 피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외동딸은 굶주림을 면키 위해 남에게 주어야 했고, 손자 두 명은 어린나이(15세, 7세)에 병으로 사망했다.
"바퀴벌레 들끓지 않는 아파트에서 살아봤으면"
▲ 천신만고 끝에 국적을 취득한 월겸씨가 독립유공자 증서를 보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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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매 중 한국에 첫 발을 디딘 이는 월겸씨다. 광복 55주년을 맞아 해외독립유공자로 초청돼 지난 2000년 8월 11일 입국했지만 보훈처는 초청기간 일주일이 지나자 중국으로 되돌아가라고 통보했다.
한국 정부가 할아버지에게 건국훈장(1962년)을 추서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한국에 거주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처리 등을 위해 잔류했다.
할아버지의 조국은 냉혹했다. 출국 기간을 넘긴 그는 독립유공자 후손에서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
어린 시절 부상으로 척추측만증(꼽추)을 앓아 1m 가량의 작은 키를 가진 그는 일가친척 하나 없는 한국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 가리봉 일대에서 식당 종업원과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다 임금을 떼이기도 하고, 잘 곳이 없어 노숙생활을 하다 '중국동포의집' 김해성 목사를 만나 살길을 찾게 됐다.
그는 "중국에 있는 남편이 (2000년 11월)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불법체류자라는 기구한 처지 탓에 가보지도 못했다"면서 "일가친척도 없이 누울 곳도, 먹을 곳도 없어 울고 다녔는데 김해성 목사를 만나 살길을 펴게 됐고, 김 목사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의 훈장도 찾고 국적도 취득하게 됐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2004년 1월 29일 천신만고 끝에 국적을 취득한 그는 독립유공자 후손 정착금(6000만원)을 언니·동생과 사이좋게 나눴다.
유족연금(월 12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는 그는 "조국을 위해 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 덕분에 대우받고 사는 것이 항상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후손이자 국회의원인 김원웅 의원에게 후원금도 내고, 수재의연금 모금에도 동참했다.
월겸씨는 지난 9월 21일 서울 금천구 가리봉오거리 일대의 고시원 2층 건물로 이사했다. 1천만원 전세인 4평가량의 단칸방에는 이불장도, 옷장도 없이 허름한 비키니 옷장과 여행 가방이 피난살림처럼 놓여 있다. 화장실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20m 가량 떨어진 길거리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낡은 싱크대는 높이가 맞지 않아 허리가 아프다.
그는 "전에 살던 방보다 바퀴벌레도 덜 들끓고 햇빛도 들어서 낫지만 임대아파트 구경을 다녀온 뒤로는 마음이 흔들린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서울시 영구임대아파트(봉천동아)를 신청했다가 추첨에서 떨어져 오는 11월 다시 신청할 예정이다. 그는 "바퀴벌레가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냈으면 정말 좋겠다"고 소원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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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부상으로 척추측만증(곱추) 장애를 안고 사는 월겸씨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야 공동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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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회복 됐을때나 안 됐을때나 여관 청소원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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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의 한 호텔에서 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옥겸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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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월겸씨 초청으로 지난 2004년 6월 한국에 온 옥겸씨는 2005년 12월 31일 독립운동가 후손의 자격으로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한국에 함께 거주하는 남편과 세딸, 두 사위는 중국동포일 뿐이다. 한 가족 안에 두 국적의 희비는 중국동포 차별정책의 현주소인 것이다.
옥겸씨는 언니 집 근방의 100만원 보증금에 월세 20만원짜리 집에서 살고 있다.
강남 역삼동 M호텔 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오전 11시부터 밤 12시까지 13시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 쉬는 데 받는 돈은 130만원이다. 자본주의에서 돈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몸이 아프지만 뼈 빠지게 일한다고 했다.
막내딸 이봉자(30)씨는 10개월 된 아들을 중국에 있는 친척집에 맡기고 지난 8월 12일 한국에 왔다.
식당 종업원으로 12시간 일해 월 120만원을 버는 딸이 대견하다고 옥겸씨는 칭찬한다. 두고 온 갓난 아들 때문에 베갯잇 적실줄 알았는데 잘 참더라는 것이다. 악착 같이 돈 벌어 자식 잘 키우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옥겸씨는 "모질지만 자식을 맡겨놓고 오라고 했다, 한국에 아이를 데리고 오면 아이 맡기는데 돈 다 집어넣어야 한다, 돈 벌러 왔는데 애만 붙들고 있을 수 없으니 눈물 머금고 자식 맡기고 오라 했다"며 "돈을 벌어야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인데 어쩔 수 있겠냐"고 자식 떼어 놓은 아픔을 달랬다.
옥겸씨는 "국적회복이 안 됐을 때도 여관 청소, 국적이 회복 됐을 때도 여관청소…, 일이 너무 힘들 때는 그런 생각이 든다"면서도 "할아버지 때문에 못살게 되고 공부 못한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아요, 이렇게 한국에 와서 살게 된 것만 해도 할아버지 덕분인데, 감사하고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이 나라 건설할 때 삽 하나 떴나요? 나라 원망 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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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몸으로 5남매를 키운 억척스런 의병장 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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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씨는 지난 2006년 10월 31일 국적신청 했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법무부 관계자는 지난 9월 28일 "서류 심사 중이며 연말 정도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고, 보훈처 관계자는 "만일의 사고(가짜 독립유공자 후손)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서류심사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 스스로 "형제 중에 가장 가난하고 못 배워 좀 부족해요"라고 말하는 옥녀씨. 하지만 그는 30년 전에 남편을 잃고도 혼자서 5남매를 키운 억척스런 조선의 어머니다. 그는 "가난한 자식들 살 방도를 찾아보려고 한국에 왔다"며 "일해서 돈 벌고 싶어도 너무 노쇠하여 써주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동생 월겸씨가 사는 부근에 보증금 300만원에 월 25만원짜리 집에서 큰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첩첩산골에서 평생 농사만 짓고 살다가 발전한 조국에 오니 너무 좋다"며 웃음 짓다.
그는 '독립유공자 후손을 잘 보살피지 않는 정부가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이 나라 건설할 때 우리가 삽 하나 떴나요? 아무리 그래도 이 나라 원망 안 해요"라고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지난해 8월 고모(월겸)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 잡부로 일하고 있는 옥녀씨의 큰아들 홍대근(49 휘남현)씨는 "중국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먹고 살기 바빴는데 한국에서는 일이 힘들기는 해도 돈 버는 재미가 있다"면서 "어머니 잘 모시고 살다보면 더 좋은 날이 오지 않겠냐"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의병장의 칠순 손녀의 말처럼 중국동포로 평생 살아온 이들은 조국 건설에 삽 하나 보태지 않았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오빠까지 3대에 걸친 항일투쟁으로 조국 독립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래서 후손들은 못 배웠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제 부강해진 조국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3대에 걸쳐 항일투쟁으로 가난해진 차도선 후손들의 고달픔을 덜어주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