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크카르카.
설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마을이다.
3,800m 이상 고도에서만 사는 야크와 초원이 있는 마지막 고도에 위치해서
야크 방목하기 좋다는데, 눈이 덮여서 어디가 초원이고 어디가 험지인지 알 수가 없다.
어제저녁에 도착할 때는 몰랐는데 규모가 꽤 크다.
이번 여정은 여유 있게 목표보다는 목적에 충실해지고 싶었는데,
다음 이동지로 이동하는 목표에 매달리는 꼴이 되고 있다.
새벽 공기가 차다.
#2
간밤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돌돌옆님이 조금 나아 보인다.
원기를 회복하고 일정을 함께 마쳐야 하는데.
아침먹고 등 뒤로 햇살을 받으며 출발.
#3
마을을 벗어나자 눈 세상이다.
#4
날씨 참 좋다.
#5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와 후미의 거리가 꽤 많이 벌어진다.
#6
"옴바니반메훔"
앞서가는 포터의 뒷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커다란 바위에 앙증맞은 초르텐.
그려 놓은 그림이 재미있다.
"좋다. 참 좋다."
#7
레다르로 들어가는 다리.
길은 험하지 않으나 완만한 오르막에 눈길.
눈사태 위험 구간이 중간중간 나타나 긴장을 풀 수가 없다.
후미로 쳐진 일행은 시간이 갈수록 선두와 멀어진다.
눈밭 위에서 햇볕은 맞으며 기다리는 것이 지치게 한다.
#8
눈, 눈천지다.
#9
야크카르카 일대는 야크 방목지라 꽤 많은 야크를 만나게 된다.
#10
오늘 점심은 토롱패디에서 먹기로 되어 있는데 이 속도라면 오후 늦게야 점심을 먹게 되겠다.
길옆 가게에서 차와 간식으로 요기를 하는데 심란해 진다.
얼추 한 시간 가량을 찻집에 머물렀는데도 후미가 도착하지를 않는다.
일단 일행을 먼저 출발시키고 후미를 기다린다.
후미는 꽤 힘들어 보이는데 내색을 하지 않아 더 짠해진다.
"그래요. 힘내시자고요. 같이 가야지요."
#11
이번에는 좀 긴 눈사태 위험 구간이다.
더구나 사면은 아침부터 오전 내내 햇볕을 받은 경사면.
선두로 가던 텐바를 불러 세우고
일행을 분산시켜 통과하도록 한다.
눈사태 지역, 낙석 지역, 산사태 지역, 지반이 약한 지역 등 위험지역에서의 주행은
앞뒤 사람이 충분한 거리를 두고 움직여야 한다.
뭉쳐서 움직이다가 문제가 생기면 모두 한꺼번에 쓸리게 되고 그걸로 상황 종료.
흩어져서 움직여야 혹여라도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거나 후속 조치를 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12
가도 가도 끝없는 눈 길.
#13
이미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 지나고 있다.
주방팀은 토롱패디에 점심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겠지.
3시간 소요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눈길이라도 이미 5시간을 왔는데
토롱패디는 보이지를 않는다.
선두와 후미 간의 거리가 한시간 거리 이상 되는듯.
#14
토롱패디를 가기 위해 건너가는 다리인데 건너간 흔적이 없다.
이 다리는 토롱패디로 가기 위해 건너는 마지막 다리.
#15
위쪽으로 한참 더 가서 강바닥까지 내려가 조그만 다리를 건너 다시 올라가야 하는 옛길.
내려간 것보다 곱절은 더 올라가야 하는 밴드가 걸려있다.
"아, 미치겠다. 힘들어 죽겠는데"
건너편 한참 위에 찻집에선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좋겠다."
#16
밴드를 오르니 조그만 찻집에 "겨울나무"님과 "간다맨"님이 부처처럼 앉아 있다.
"긴디맨"님의 포스는 "생불"의 자태다.
"겨울나무"님이 찻집에서 파는 사과를 사놓고 하나씩 나눠준다.
제철이 한참 지난 사과는 요즈음 내 뱃가죽처럼 쭈글쭈글.
그러나 한입 베어 무니 사과 향이 입속으로 퍼지면서 달콤한 과즙이 가득 찬다.
힘든 기색이 역력한데도 내식을 안는 "겨울나무"님의 마음마저 더해져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행복한 사과가 되었다.
나눈다는 것은 위로하는 것이고 용기를 북돋는 것이고 긍정의 에너지를 전하는 것.
그리하여 서로가 고된 난관을 힘을 합쳐 헤쳐나가는 것.
사과 한 알이 불만스러운 상황을 잊고 힘을 내게 한다.
찻집에서 꽤 멀리까지 내려다보이는데 후미는 나타나질 않는다.
쉬던 일행들은 먼저 올려보내고 기다린다.
한 시간쯤 후 후미가 도착했는데 돌돌옆님이 거의 탈진 상태.
포터를 올려보내 업고 갈 수 있는 준비를 해서 내려오라고 하고
돌돌님 부부는 찻집에 기다리도록 한 후 토롱패디로 오른다.
얼마 가지 않아 돌돌옆님을 업고 올라갈 포터 셋을 만나
안전하게 이동할 것을 당부하면서도 그들에게 미안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 힘들 텐데.
어쩌하겠냐, 상황이 그런데.
#17
눈 없는 위험구간이다.
"랜드 슬라이스"라고 하는 급한 경사면에 걸려 있는 길.
언제 돌이 굴러떨어질지 모르는 길이다.
위에 먼저 도착한 일행들도 걱정이고
뒤에 상황이 안 좋은 일행에게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도 급해 마음만 서두른다.
"이 상황에 서두르다가는 내가 먼저 고산증을 만날 판이다."
마음속으로 천천히 천천히를 되뇌며 걷는다.
#18
"토도독"
조그만 돌 하나가 위에서 굴려 내려와 까마득한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놀라서 위를 쳐다보니 야생 산양이 지나가면서 굴려 내려온 돌.
저 눔들이.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저 놈들은 놀라서 뛸 것이고 그러면 나는 졸지에 돌 벼락을 맞을 확률이 높아진다.
서로 쳐다보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영겁을 시간처럼 느껴진다.
다행히 산양은 둔덕 너머로 조용히 사라진다.
"고맙다. 이눔아. 십년 감수했네."
#19
낙석 지역을 지나오자 이번에는 다시 눈길,
그리고 얼마지 않아 "랜드 슬라이스"가 끝났다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Thanks!"
그래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20
토롱패디에 도착.
다이닝룸에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일행들이 없다.
먼저 도착해서 점심 먹고 알아서 방 배정해서 자는 사람, 쉬는 사람, 정비하는 사람.
크게 실망했다. 후미는 거의 사투를 벌이며 오고 있고
결국 업고 오기 위해 포터들이 내려가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점심 먹으라고 떠 놓고 권하는 사람만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아니, 일행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밥이 넘어가나?"
성질을 부렸더니 머리가 무거워진다.
"여기가 4,500m지. 냉정해져야 한다."
오래지 않아 돌돌님 부부가 도착했다.
업혀 올라온 돌돌옆님은 내리게 하고 걷게 하니 걷는 건 괜찮다.
"당장 큰 문제는 안 생기겠다."
긴 의자에 눕히고 살피니 얼굴색이나 입술색은 큰 이상이 없는데 속이 매스껍고 구토증세가 있다 한다."
마침 상황을 보고 지나가던 미국인이
"나 의사인데 좀 봐주랴?"
물론 영어로 했다.
"아니. 우리도 의사 있다"
김정수 선생한테 상태를 살펴 달라고 하니 살펴보는 표정이 밝지를 못하다.
잠시 후 미국인 의사가 다시 왔는데 자기가 "응급전문의"라고 한다.
김정수 선생이 그러면 저 친구가 전공분야이니 살펴달라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미국인 의사가 면밀하게 살피더니
"지금 상태로는 큰 문제는 없겠는데 그래도 내려가는 것이 좋을듯싶다"고 한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오늘 자고 나서 내일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고.
내일은 급경사로 400m 이상을 올려야 하고 모래는 토롱 라를 넘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무리다.
아내의 상태가 매우 근심스러운 돌돌님은 안절부절은 못한다.
"어쩔 수 없지. 힘들어도 결정을 내려야 한다."
"돌돌님. 아무래도 내려가는 것이 좋을듯한데요."
돌돌님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럼 내려가야지요. 헬기 불러 주세요."
텐바가 헬기를 알아보는데 올 수 없다 한다.
잠시 고민 끝에 내려가기로 결정.
셰르파 "노리지"와 포터 3명을 팀으로 야크카를카까지 업고 이동하기로 한다.
3시 조금 넘은 시간.
일단 오늘은 야크카르카까지 내려가고 내일 지프가 운행되는 곳까지 가서
차량으로 "따또파니"로 이동해 합류하기로 하고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고 출발시킨다.
토롱패디 입구에서 내려가는 일행의 뒷모습이 안보일 때 까지 지켜보다가
다이닝룸으로 돌아와 앉으니 허탈하다.
누군가 점심을 먹으라고 음식을 덜어서 내 앞에 놔주기에 몇 술 뜨긴 했는데
지금도 그때 점심이 뭐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제정신이 아니였던거지."
롯지방에 짐을 풀고 앉아 있으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걍사르 이동 때와
어제 군상에서 롯지확보를 못해 야크카르카까지 무리하게 운행을 했던 것이
이런 사태를 불러온 것 같아 속상하고 미안하다.
잘 내려가고 있을까?
좀 있으면 어두워질 텐데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모두가 무탈하게 "따또파니"에서 만나야 하는데.
저녁때 다이닝룸에 모인 일행들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
다행히 몸 상태가 크게 나빠 보이지 않고.
옆 테이블에 낮에 상태를 봐준 미국인 의사가 있길래
세계가 놀란 히트상품 "커피믹스"를 몇 개 전해 주며 고맙다고 했더니.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다.
바로 내려보냈다 하니 표정이 밝아지며 "Good Choice" 한다.
"그래 너도 내려보내라고 잘라 말하기 어려웠겠지."
뒤돌아 나오는데 미국 의사 일행들은 커믹스를 하나씩 나누면서 즐거워한다.
"그래 잘한 결정이다."
어둠이 내린 사위는 달빛에 물든 설봉들이 교교하게 서 있다.
아름답다.
"그러나 좋지는 않다."
하얗게 세상을 덮고 있는 눈이 무섭다.
지금쯤 야크카르카에 도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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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
P-2
마실정회동
첫댓글 아, 그날 힘겹고 어려운 하루였지요.
방에서 물 끓인다고 내 사는 것 만 신경쓰고 있었읍니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내 생각 뿐이 드라고요.
늘 하는 말이 지만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돌돌님 부부 그리고 마실님 수고 많이 하셨읍니다
다른 분들도요.
참, 겨울나무님 사과 잘 먹었읍니다. 꿀맛이더라고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네팔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 같습니다.
좋은 여행 경험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ㅋㅋ 실감 나네요 ㅎㅎ 전 이날이 내 생애 가장 귀하고 귀한 보물을 건진 날이랍니다..
사실 올라가면서 내내 가슴을 졸이고 달래고 어떤게 최선일까 머리가 복잡햇구요 .
같이 가자고 데려온걸 후회하기도 하며 힘드어 하는걸 보니 가슴이 찢어진다는것도 알게되고
아! 내가 몰랐던 나의 보물이 내 옆에 있구나 알았으니까 모두가 염려하고 걱정해 주신 덕분이라 생각하고요
텐바 노르지 등 힘들고 위험한길 다시 내려오신신분들 위에서 걱정하신분들. 챈 이라든가 닥터 챈 다시함 더 모두 감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진정 보물이십니다.힘들으셔도 짜증 한번 안내시고 묵묵히 따라 오시는 모습 나도 눈에 선합니다.
요즘 제 또래 친구들 사이에
"일건, 이처,삼재,사사,오우"
이런 얘기 자주합니다.
건강, 집사람, 재물,할일,친구.
나이에 따라 우선 순위가 바뀌겠지만
나도 옛날보다는 집사람한테 잘 하려합니다
사모님께 안부 전해 주세요.
힘들었어도 추억이 되어버린 그때가 자꾸 그리워집니다!
이날 저녁부터 설사를 시작했는데, 그게 사과 때문이었는지 손이 저리도록 찬물에 약간의 빨래를 해서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