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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ire de la philosophie(철학사),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제14장 프랑스에서 사회철학(연속): 생시몽과 생시몽주의자들 La philosophie sociale en France: Saint-Simon et les Saint-Simoniens 740-750
제1절 상시몽 Saint-Simon 740
상시몽 백작(Claude 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 1760-1825)은 1760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 때까지는 장교였다. 1789년에서 1813년까지는 주식투자에 전념하다가 파산했다. 1813년부터 그는 당대의 수학자들과 생리학자들과 대화에서 수집했던 인식들에 근거하여, 선전가가 되었다. 1814년부터 1817년까지, 그의 작품들과 소책자들에는 그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그의 비서인 띠에리(Augustin Thierry, 1795-1856)의 서명이 적혀있다. 1819년에는 협력자로서 꽁뜨(Auguste Comte, 1798-1857)를 얻었다. 꽁뜨는 산업가들의 교육문답(Catéchisme des industriels, 1823-1824)의 셋째 노트에만 서명했다. 그는 1825년에 세상을 떴다. (740)
완전히 구별되는 두 가지 주제들이 과학들에 관한 상시몽의 여러 고찰들 속에 들어 있다. 이는 과학[학문]의 통일성에 관한 주제와 과학들의 필연적 이행에 관한 주제이다. 첫째 주제에 대하여 보면, 그는 그 자신의 저술인 18세기 과학적 작업들의 입문(Introduction aux travaux scientifiques du XVIIIesiècle)(1807-1808)에서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의 예비적 담론을 다시 다루었고, 이 주제를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 주제에 대하여, 인식이 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인 추측의 상태에서 실증적 상태로 이행이다. 이 둘째 주제는 의학 박사 뷔르당(Dr. Jean Burdin, 1765-1835)과 한담들로부터 그에게 온 것이다. (740)
이 두 주제는 잘 타협되지 않는다. 첫째 주제는 그를 일반과학에 대해 데카르트적인 이상(理想)으로 향하게 한다. 그 일반과학이란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을 동시에 포함하며, 뉴턴(Newton)과 로크(Locke)를 재통합하는 것이다. 그는 뉴턴의 중력법칙을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사정들(les choses)에 응용하면서 그 중력법칙을 일반화하려고 시도했다. 둘째 주제는 그를 아직은 “실증과학”에 도달하지 못했던 과학들의 사정들 때문에, 보다 특별하게 인간의 과학으로 향하게 했다. 그는 이 과학을 1812년에 까바니스(Cabanis, 1757–1808)의 방식으로 생각했다. 까바니스는 심리학을 생리학의 한 분과로 만들려고 했었다. 1814년부터 그는 이 과학[인간과학]을 특히 “실증정치학”에 위치시키고자 했다. 그는 이 개념을 1820년에 발명했고, 꽁뜨가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741)
첫째 주제는 과학들의 대상들 사이에서 진실로 본질적인 구별이 이루어지 못했다. 반대로 다른 주제는 수학과 물리학을 생리과학과 인간과학으로부터 매우 많은 힘을 들여서 분리했다. 상시몽은 조금씩 둘째 주제를 위해 첫째 주제를 내버려 두었다. 1813년부터 그는 천연 물체들(les corpa bruts)의 과학들과 인간과학 사이에서 지금까지는 그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 사회적 가치의 차이를 보았다. 상시몽은 이 주제에서는 근대시대가 멀리했던 중세적 생각에 빠졌다. 그것은 한 과학의 존엄성이 한 과학의 대상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천연의 물체보다 더 상위인 만큼이나, 인간을 다루는 과학자는 “천연자원가들”(brutiers, 초보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 천연자원가들이, 인류의 평화적 이상에 반대로 나가면서 전쟁의 병기들의 진보에 작업했다는 것을 덧붙여 보십시요. 이 평화의 이상은 제국의 전쟁들[나폴레옹 전쟁을 의미] 이후에 그에게 필수부가결한 것이었으며, 그는 1814년에 나폴레옹 몰락 후에 평화를 조직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기를 원했다. (741)
유럽 사회의 재조직화(De la Réorganisation de la société européenne, 1814년 10월)에서 그는 평화를 마치 확실한 것처럼 생각하였는데, 만일 각 민족의 독립이 선언됨과 동시에 유럽이 하나의 정치체를 형성한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전권사절들의 회의에 의해서, 이런 통일성을 1815년에 실현할 것을 시도했을 것이다. 이런 회의가 다소 임시적이긴 하지만 유럽의 균형에 도달해야 마땅했다. 이 회의가 영속적으로 된다고 할지라도, 생시몽은 보편적 평화를 만들어야만 하는 독립성과 통일성의 조합을 확신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지 못했다. 상-삐에르 수도원장(l'abbé Saint-Pierre, 1658-1743) 또는 칸트(1724-1804)의 영구평화론의 기획들과 자신의 기획을 구별하였는데, 이런 생각은 그가 산업의 지도자들(산업가들)을 대사들의 지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의 이익들에 대한 협업(협동)이 평화의 조건들을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산업가들이 정치적 위계질서에서 이들의 사회적 영향에 상응하는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741)
그에게 있어서 유럽 정치에 대한 통합의 생각[이념]은 1816년부터 보다 일반적 이익의 예비적 탐구에, 즉 산업의 사회적 주도권의 증명작업에, 한발자국 양보하였다. 게다가 산업은 과학과 완전하게 분리될 수 없다. 산업은 과학의 응용작업이고, 과학은 그자체로 마치 일종의 산업처럼 고려되었는데, 예를 들어 상업과 제조업에 연결된 문학과 과학의 산업(L'Industrie littéraire et scientifique liguée avec l'industrie commerciale et manufacturière, 1816 12월-1817 3월)의 제목을 단 간행물들 속에서 쓰고 있다. 조직자(L’Organisateur, 1819-1820)에서 말하기를, 사회의 옛 체계는, 나라가 위정자들 자신을 위하여 나라를 행정 제도를 다루는 위정자들의 세습재산이라는 생각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사람들은 정치적 체계가 지배받는 자들의 행복에 맞게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고 현실적으로 믿었다. 그 행복이란, 말하자면 신체적이고 도덕적인 필요에 만족이다. 그런데 이런 만족은 이번에서 기예들과 직업들의 발전에 의존한다. 매우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최소한의 임의적인 것이 없어야 하고, 또한 사회적 조직화의 문제들은 “실증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산업의 이익은 모든 사람들의 이익에 일치한다. 부라는 것은 진보의 인자(un facteur)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쟁들은 이웃나라들의 부를 탐하는 인민의 가난에 기인한다. 새로운 정치적 체계 속에서, 과학자들은 이제까지 성직자에 귀속되었던 정신적 방향을 가져야 할 것이고, 산업가들은 물질적 이익들에 대한 경영(la gestion)의 방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규정된 기능을 채워야 할 각자의 능력은 명증되어야한다. 사회 정의의 정식들(이 정식들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유명한 정식들을 상기시킨다), 즉 “각각에게 자기의 능력에 따라, 각자 능력에 맞게 자기의 작업들에 따라”라는 정식들은 진실한 의미를 회복한다. (742)
그러나 옛 체계의 파괴와 새로운 체계의 정립 사이에, 그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전이[변환]의 시대이다. 봉건제와 성직들의 몰락하기로 되어 있었던 힘[권력과 권세]들은 자기들의 현존을 위해 투쟁한다. “형이상학자들”과 입법가들(말하자면 혁명가들)은 그것을 대체할 것을 찾지 않고서도 옛 조직화들을 폐기하면서, 충분히 행할 것이라고 믿었다. 정부는, 질서를 유지하면서 경찰의 기능들에 만족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하부적이고 부정적 역할이다. 산업체계(Du système industriel, 1822)에서 생시몽은 그의 시대의 사회적 상태와 로마의 퇴폐적 상태를 접근시켰다. 18세기의 봉건제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통일성의 종말, 프로테스탄티즘과 함께 신념의 통일성의 단절, 그들만으로 신성동맹에 토대를 이룬 시대적 지도자들에게 정신적 권력의 종속화 등은 퇴폐의 징후들과 매우 비슷한 징후들이었다. 이 퇴폐가 우리 시대의 초기 세기들에서도 크리스트 사회의 형성작업을 앞서 진행했다. 유비에 의해서, 생시몽은 크리스트교의 개혁과 완전히 닮은 사회 개혁을 상상했다. 그가 사회 개혁의 메시아가 될 것이다. (743)
그가 꿈꾼 “새로운 크리스트교”는 그것의 바탕에서 옛 크리스트교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크리스트교의 영속적인 토대는 이익을 주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크리스트교는 몇 가지 교직적인 제도에 아직 덜 연결되어 있었다.그것은 오직 (동시대를 겨냥하여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과 같은 도덕적 규칙 속에 있었다: “당신들은 서로들을 서로 사랑하라.” 이 규칙은 전적으로 단번에 이해되었지만, 진보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트교의 소멸할 수 있는 측면, 그것은 규범들을 실천하게 하는 여러 제도들이 통과하는 형식들이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는, 그것이 사회에 필요들에 응답하는 한, 무오류(infaillible)이다. 그것이 사회에 더 이상 봉사하지 못하게 되자마자, 그것이 가장 가난한 계급의 이익에 작동을 그치게 되자마자, 그것은 대체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생시몽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크리스트교의 종교들은 그들의 임무의 의미를 상실했다. 우선카톨릭 종교에서, 선호도는 세속인들에게 성직자에게 의존하게 했던 의례와 교리(독단)에 맞는 종교 교육 속에서 주어졌다. 반면에 도덕적 이념들은 거기에서 매우 듬성듬성 심어져 있고, 학설의 형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독설들에 멈춰져 있는 신학에서 특히 교육받은 성직자에게서는 크리스트교의 본질적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과학자들, 예술가들, 산업가들이 이를 넘어서게 내버려두었다. 종교재판의 제도는 크리스트교의 정신에 반대였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교리(독단)와 의례에 반대하는 부정행위[경범자]에게만 단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제수이트 교단도 마찬가지였다.그 교단은 사물[사정]들의 새로운 상태에 반대하여 개방된 투쟁 중이었다. 결국 생시몽은 카톨릭주의를 마치 반동의 후원자[비호자(庇護者)]처럼, 즉 왕정복고에 알맞은 과거의 힘들의 지지라고 보았다. [다음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에 관하여, 루터주의는 결국 생시몽의 견해로부터 후퇴였다. 루터주의는 크리스트교를 출발점에까지, 즉 정치 사회적 조직화의 바깥에 완전히 남아 있었던 예수의 크리스트교의 국면에까지 역행하게 했다. 그 당시 크리스트교는 순수하게 도덕적 요구사항이었으며, 그 도덕적 요구사항이 노예상태의 억압적 체제와 로마도시의 애국주의를 남겨 놓았다. 마찬가지로 루터주의도 정치적 권력의 의존 하에 있는 종교로 남았다. 생시몽은 그 종교를 예술적[기예적]감정이 없다고, 다시 말하면, 인간들을 통합하는 수단이 없다고 비난했다. (744)
“새로운 크리스트교”는 복음의 교훈에서 얻어진 새로운 힘에 의해서 오로지 사회를 재조직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운동의 주도권은 이득을 보게 되는 자들로부터, 즉 가난한 계급들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시초에서부터 크리스트교의 확산은 민중 운동에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마치 사도 바울처럼 “로마인”에게 빚을 지고, 마치 순교자 폴리왹트(Polyeucte de Mélitène ?-259)처럼 세습귀족들에게 빚을 졌다. 생시몽은 마찬가지로 “자선가들(philanthropes, 박애주의자들)”을 고려했는데, 자선가들의 교육과 설교가 나중에 군주들에게 향할 것이고, 그들의 진솔한 이익들이 귀족과 성직자의 이익과는 반대로, 과학자들과 산업가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고려했다. 그는 너무 귀족정 이었기에, 그가 작업하는 인민이 자신의 개혁을 위한 어떤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었다. 1789년 대혁명 그 자체는 민중의 운동으로부터 왔다기보다 형이상학자들과 입법가들로부터 온 것이다. 새로운 왕정복고시기에, 모든 것은 왕과 과학자들과 산업가들의 대표하는 “박애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어나야 했다. 국가의 형태를 변화하게 하는 것보다, 과학을 성직자의 지위에, 그리고 은행과 더불어 산업을 귀족의 지위에 놓는 것이 중요했다.새로운 권력들과 가난한 계급의 이익들 사이에 충돌이 있는 수 있다는 것, 그러한 것은 그의 정신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고유한 의미에서 사회적 문제는 없었다. 왕에게 연설들, 선언의 기획, 법무부장관에게 편지, 은행가들에게 편지, 이러한 것들 그에게 행동의 수단이었다. 인민에게 새로운 조직화의 토대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술원에 의해 작성된 국민적 교리문답, 산업가들에 의해 투표된 예산, 귀족의 자격들의 폐지, 사병들에 의해 장교들의 선거와 더불어 국민 민병대의 재조직, 의회의 해산, 자신의 개혁들을 부과하기 위한 독재체재의 선언, 이러한 것들은 그의 기획들이다. 만일 그가 민중적 동의를 거부한다면, 그는 루소로부터 독자적인 입법가의 필연성의 관념을 간직한 것이다. “새로운 체계의 개념작업은 단일(unitaire)이어야만, 다시 말하면 하나의 머리에서 형성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그에게서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그의 관념들 속에서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수단]은 이런 경구에서 발견된다. “시민 권력은 정치권력의 유일한 토대이다.”시민 권력은, 다시 말하면 그의 유명한 비유법(parabole)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과학자들, 예술가들, 산업가들의 3천명의 손에 달려 있다. 이들이 사라진다고 가정하면, 프랑스 사회는 종말이다. 반면에 프랑스 사회는, 국가를 이끌고 행정을 맡았던, 그리고 시민 권력과는 독립적인 정치권력의 변칙(anomalie)을 구성한, 3만명의 비명횡사에 의해 겨우 충격을 받았다.생시몽의 정의는 두 가지 경구들로서 요약된다. “각각에게 자기의 능력에 따라, 각자 능력에 맞게 자기의 작업들에 따라” 이 정의는, 정치의 역할 해야만 하고, 그리고 분배적 정의의 설교에 의해 평등의 혁명적 설교를 대체해야 하는, 이상적인 시민법전의 원리가 아닌가? (745)
제2절 생시몽주의 Le saint-simonisme 745
생시몽주의는 1825년에서 1851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역사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설교와 선전, 신문을 통한 광고, 반향을 일으킨 소송들, 이 모든 것은 정신 상태의 창조에 이르렀다. 그런 정신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여러 경향성들과 소신교환하면서, 상당한 실천적 영향을 행사했다.
[생시몽주의의] 초기 시절들은(1825-1832)생시몽주의에 대한 학설의 위대한 생산들로 표시되었다. 말하자면 꽁뜨(1798-1857), 로드리그(Olinde Rodrigues, 1795-1851), 바자르(Saint-Amand Bazard, 1791-1832)에 의해 작성되었던 신문 생산자(Le Producteur)가 있다. 또한 1828년 12월 17일부터 앙팡땡(Enfantin, 1796-1864)의 집에서 그리고 따반(Tavanne)거리에서 열렸던 강연의 강의들이 있고, 이 강의들은 까르노(Hippolyte Carnot, 1801-1888)에 의해 작성되어, 학설의 설명(Exposition de la doctrine)의 이름으로 1828년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조직자(L’Organisateur, 1819-1820)의 논문들도 있다. 새로운 시기는 1829년 12월 31일[년말]에 열렸다. 그날 생시몽주의자는 위계질서를 구성하였고, 이로부터 바자르(1791-1832)와 앙팡땅(1796-1864)이 “최고 신부들”이 되었고, 반면에 신봉자들은 형제들이라 불렀다. 이 찰나에 그리고 7월 혁명이후에, 이 참여자들은 많았는데, 특히 옛폴리테크니크 학생들 중에서도 지원하였다. 앙팡땅은 그러한 정열들을 자극하였고, 브뤼노(Bruneau, 1794-1864)같은 장교들, 레이노(Jean Reynaud, 1806-1863)같은 기술자들, 크뢰조의 주물공장의 지배인인 푸르넬(Henri Fournel, 1799-1876) 등은 그와 가까이서 고정되어 일하기 위하여 각자의 직분들을 포기 했다. 글로브(Le Globe)라는 자유주의 신문은 1830년부터 생시몽주의로 통했다. 파리에는 네 곳의 중심지가 있었고, 거기에서 학설이 설교되었다. 프랑스 나머지 지역에서 여섯 교회가 있었으며, 브뤽셀과 리에쥬에도 교회들이 정초되었다. 이 시기에 죠루쥬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인디아나(Indiana, 1832)를 썼다. 그 소설에서 지배하는 낭만주의는 우리들 사회에서 여성이 감당해야하는 억압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다. 거기에 앙팡땡이 까르노, 바자르, 로드리그가 분개했던 방식으로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셋은 이 학파에서 손을 뗄 것이다. (746)
이러한 탈퇴에도 불구하고, 생시몽주의는 앙팡땡의 일(사정)이 되었다. 그에게는 여전히 90명의 제자들이 남아있었다. 이제 학설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중적 선전과 [선교] 행전들이다. 1832년 4월에글로브(Le Globe)지는 전적으로 물질적 이익의 기획들로 채워졌다. 기획들이란, 파리의 위생 정비, 대도시간의 철도 노선의 창설, 아프리카에서, 즉 우선 이집트와 알제리에서 유럽 문명의 수입 등이다. 교회는 희극들과 가면무도회들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앙팡땡과 그 제자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 인민에게 “고상한 굳은살의 흔적을 지닌” 손을 만들기 위하여, 수공업 작업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의복을 발명했는데, 뒤에서 단추를 끼우는 조끼는 형제의 도움으로만 입을 수 있다. 즉 형재애의 위대한 상징이다. 그들은 결혼, 어린이들의 양자, 장례들을 위한 특별한 의례들(예식)을 가졌다. 집회들에 관한 법에 반대되는 불법행위[경범]로 추적 받은 그들은 1832년 8월에 중죄법정에서 실형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1833년 4월에는 동일한 불법행위인데 방면되었다. 이 후자의 판결은 생시몽주의에게서 종교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들의 집회들은 법의 판결아래 무너지지 않았다. (746)
생트 뻴아지(Sainte-Pélagie)구치소에서 여러 달을 보낸 후에, 앙팡땡은 자신의 행동을 다시 시작했다. 1833년에서 1838년에, 그는 파나마 협부[운하]에 앞서서 수에즈 협부[운하]를 뚫을 의도 가지고 이집트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나일강에 댐을 작업하였다. 1839년에 그가 문명을 확장하기를 원했던 알제리에 있었다. 프랑스로 되돌아와서, 그는 자신의 기획들을 실현하기 위하여, 왕[루이-필립12세]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인 오를레앙 공작(duc d'Orleans, 1810–1842)과 오말 공작(duc d’Aumale, 1822-1897)에게 부탁을 했다. 1848년 이후에는 그는 직업적[전문적]인 교육을, 공제조합과 신용조합의 설립을, 노인들의 구제를, 조직화하기 위하여 나폴레옹 3세에게 부탁을 고려했다. 그에게서 이런 사회적 문제들은 혁명적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분리되어있었다. 마치 1830년에 생시몽주의가 7월 혁명에 거의 무관심하였던 것처럼, 사람들이 행동하기만 한다면 그는 1849년에 언론, 연설, 집회의 자유에 대해 거의 근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치 동시대에 오귀스트 꽁트처럼) 1851년 쿠데타의 주역[루이 보나파르트]에게 매우 관대했다. 그가 쓰기를 “1861년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지적인 권위이다.” 자유는 그에게 수단일 뿐이다. 심지어 메헤메트 알리(Méhémet-Ali, 1769-1849)의 통치하의 이집트에서 그가 보았던 하급노동자들(les fellahs, 농민들)의 강요된 노동은, 그가 보기에, 허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만일 1830년에 그는 상업의 자유와 더불어, 숭배[예배]들의 자유,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요구했다. 그것은 단지 그의 학설들을 널리 퍼트리기 위한 수단들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일반적 방식으로 그 시대의 정치에서, 생시몽주의자들은 국가 개입의 찬성자들이다. 1848년에 한 생시몽주의자인 로랑 드 아르데쉬(Laurent de l'Ardèche, 1793-1877)는 국가에 의해 모든 철도회사들을 되사기를 요구했다.(747)
자연주의적 도덕, 사회적 학설, 실천적 기업들과 같은 요란한 요청의 기묘한(bizarre) 혼합 속에서, 마치 본질적 요소처럼, 조직화와 종합의 흐름 과이 시대에 모든 학설을 특징지우는 행동의 근심 사이를 분간하는 것이 가능하다. (747)
한 생시몽주의자에게서 보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인간 활동의 모든 양태들을 포함하는, 그리고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을 부여하는, 사유에게만 이 명칭[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이름을 감당할 철학적 학설들도 없었듯이, 마찬가지로 인류의 일반적 상태들도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왔다. 그런데 규칙적인 사회 질서의 현상은 우리가 속한 문명의 계열에서, 즉 고대에서와 중세에서, 두 번이나 제시되었다. 우리가 미래를 위하여 알리는 새로운 일반 상태는 이 연쇄의 셋째 고리를 형성할 것이다.” (생시몽 사전(Doctrine de Saint-Simon, 1824), éd. C. Bouglé(1870-1940)et E. Halévy (1870-1937), p. 126, 1924.). (747)
따라서 철학의 용어는 유기적 시대와 비판적 시대 사이의 구별에 의존한다. 생시몽주의자들에게서 “철학”은, 18세기에 통상적으로 보는 방식에 따라, 그 철학이 시작하는 바로 그 찰나에서 끝난다. 그것은 방향이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그리스의 밀레토스 학파, 유럽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그들에게서 철학의 쇠퇴의 시초이다. 그 쇠퇴에서 자유롭고 개별적인 탐구, 서로 무지했던 따로 떨어진 과학들로 이루어진 정신의 분산, 이러한 것들(탐구와 분산)이, 그리스의 다신론의 시대를 대신하든지, 중세의 시대와 봉건제의 시대를 대신하든지, 이 정신적 통일을 그리고 유일한 목표로 향한 모든 인간들을 안내하는 집단적 사유를 계승했다. (748)
“자기와 동류인간과 연관하여 인간의 사명(destination)이 어떤 것인가? 우주와 연관하여 인간의 사명이 어떠한 것인가? 그러한 것들은 항상 제시해왔던 인류성의 이중 문제의 일반적인 항들이다. 모든 조직적인 시대들은 각각이, 이 문제들에 대해 적어도 임시적인 해결책을 가졌다. 그러나 곧바로 이런 해결책의 도움으로, 다시 말하면 이 해결책에 따라 확립되었던 사회적 제도들의 보호아래, 작업된 진보들은, 문제 자체를 불충분하게 다루었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들을 불러왔다. 비판적 시대들은, 논쟁들, 항의(protestation), 기대[예상], 과도기(transition, 변천)의 각 찰나들은, 그 당시에 의심[회의]에 의해, 큰 문제들에 비추어서 무차별[무시]에 의해, 이기주의(l’égoïsme)에 의해, 간격을, 즉 의심과 무차별에 강요된 귀결들을 채우러 왔었다.” (생시몽 사전, p. 195)
공리주의의 학설만큼이나 정신주의의 학설은 이기주의의 결실들이며,생시몽주의자들은 이기주의를 개인주의와 혼동하고 있다. 의식의 직접적인 충동도, 잘 이해된 이익의 계산도 개인을 조직화의 상태에 인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조직화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항상 이익의 희생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생시몽의 철학은 자의적이고 무용한 구축물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 철학은 세상[사람들]이 기대했던 계시이다. 생시몽주의자들은 여기에서 메스트르(Maistre 1753-1821)와 역사순환((palingénésie)의 생각을 지닌 발랑쉬(Ballanche, 1776-1847), 모든 계시주의자들(les illuministes)을 재발견하다. 고전적 영감에 적대적이고(469), 과학에 의해 검증할 수 없는 영감들을 믿는(p. 466-467) 낭만주의의 참여자들은, 종교 속에서만, 추론보다 감정의 우월에서만, 구원을 보았다. (748)
따라서 생시몽주의는 그 구성원들에게 종교의 희생과 군인의 복종을 요구하는 상층의 사회적 조직화이다.이러한 교육은, 마땅히 해야만 하는 내적 성향들을 각각의 회합에 부여하는 교육의 개혁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불충분하고 마찬가지로 편협한 교육의 두 가지 형식이 현존한다. 인간적 자질들을 일반적으로 발전시키기를 원하는 고전적 교육과 직업에 한정된 기술적 교육이 그것이다. 한 생시몽주의자가 이해하는 교육은 사회적 교육이며, 그 교육은 어린이를, 그가 살아가야 할 사회의 형식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은 조직화의 시기들에서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고대에서는 시민적이고, 중세에서는 종교적이다. 우리 시대와 같은 비판적 시기의 표시(le signe)는 교육의 첫 두 부류들에게 정당하게 한정되어 있다. (749)
생시몽의 이상은 경쟁 대신에,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대신에 연합단체를 대체하는 것이다. 교육 덕분에 각자는 자기의 자질을 드러낼 수 있고, 이렇게 표출된 자신의 자질은 연합단체에서 자기 자리를 표시한다. 그런 방식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면서, [또한] 그는 그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이리하여 각자의 직업은 진실로 공적인 기능이 된다. 이런 이론은 인간의 자연적 자질들과 사회의 기능형태의 필연성 사이에 일종의 섭리적인 조절을 가정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마도, 푸리에에 반대하여 생시몽주의자들이 그러한 상호소통의 자발성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그들은 노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그리고 심지어는 마치 메헤메드 알 리가 하급노동자들(les fellahs, 농민들)들을 노동에 종속시켰듯이, 노동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국가에게 훈육의 역할을 맡겼기 때문이다. (749)
그러나 이런 훈육의 조건, 그것은 재산[소유]이 절대적 특성을, 즉 소유자들에게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권리를 부여하는 절대적 특성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시몽주의자들은, 마치 자주 고발당했던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전혀 유토피아주의자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은 미래의 이미지보다 현재에서 효과적인 조치들을 찾는다는 것을, 이미 주목했다. 이들은 재산[소유]이 사회 기능이 되고, 그리고 이기주의의 방편이 되기는 것을 그만두기를 원하면서, 이들은 유산상속에 관한 법률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국가가 방계 친족인 모든 계승자들에서 보다 원칙적 유증자임을, 그리고 다른 한편 각자는 그의 자식들이 [아직 어려서] 그 재산을 처리할 수 없을 경우에 유증자[후견인]를 채택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게다가, 국가는 노동 도구들을 필요로 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 도구들을 제공하기 위하여 신용조합은행을 창설해야한다. (749)
노동은 자연적 힘들에 대한 인간 유용화 작업(l’untilisation, 이용화)이다. 사람들이 생시몽주의자들에게 발견하는 노동과 산업에 대한 일종의 신앙은 낙천주의이며,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되어있는 자연의 선함을 믿고 있다. 이런 낙천주의는 생시몽주의의자의 종교의 토대를 구성한다. 생시몽주의자는 마치 크리스트교의 신비처럼, 살(육신)을 정신에 희생시키기를 원하지 않고, 마치 이교도주의처럼 정신을 살에 희생시키기도 원치 않는다. 모든 실재성은 신적이다:
Dieu est tout ce qui est 신은 있는 것 모두이고
Tout est en lui, tout est par lui, 모두는 그 속에, 그에 의해 있고
Nul de nous n’est hors de lui 우리 중 누구라도 그의 밖에 있지 않고
Mais aucun de nous n’est lui 그래도 우리의 누구도 그가 아니며
생시몽주의자들의 찬교가(찬송가)는 (마지막 구절을 유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범신론자라고 고발하게 한다. 이 찬교가는 노동과 더불어 앙팡땡을 이끈 낙천주의의 표현이며, 인간을 위해 저주하기를 그만두는 표현이다. 이런 낙천주의로부터 앙팡땡은 노동과 더불어 여성의 예속화를 대체해야 하는 성별들의 연합을 재확립하고자 한다.이는 부정작용도 없고 또한 금욕주의 없는 순수하게 긍정적인 일종의 종교인데, 이 종교는 완전한 사회적 조직화가 자연적 인간 본능에 어떠한 폭력도 가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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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Bibliographie 750.
I.
Saint-Simon(1760-1825), Oeuvre de Saint-Simon et d’Enfantin, 46 vol.; 1865-77; Oeuvres, Anthropos, 1966…
H. Gouhier(1898-1994), La jeunesse d’Auguste Comte et la formation du posivivisme, t. II, Saint-Simon jusqu’a la Restauration, 2e éd., 1964.
II.
Doctrine de Saint-Simon, exposition, éd. C. Bouglé(1870-1940) et E. Halévy(1870-1937), Paris, 1924.
Michel Chevalier(1806-1879), Le Système de la Méditerranée, éd. J. Walch, Revue philosophique, 1964, p. 421-439.
S. Charléty(1867-1945), Histoire du Saint-Simonisme. 1931.
P.-M. Schuhl(1902-1984), Henri de Saint-Simon, Revue philosophique, 1960, pp. 441-458.
J. Walch(1926-?), Bibliographie du Saint-Simonisme,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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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 생-시몽(Claude 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 1760-1825) 프랑스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며, 1819년에 협력자로서 꽁트를 만났다.
1806 슈발리에(Michel Chevalier, 1806-1879), 프랑스 정치가, 경제학자. 에콜폴리테끄니크 출신.
1867 샤를레띠(Sébastien Charléty, 1867-1945), 프랑스 역사가. Histoire du Saint-simonisme: 1825-1864, 1931.
1870 부글레(Célestin Charles Alfred Bouglé, né à Saint-Brieuc, 1870-1940)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소르본과 ENS 교수. 꽁뜨 계보. 공화파로서 드레퓌스 사건등에 참여하는 운동가이다. 사회학과 철학(Sociologie et Philosophie, 1924), 사회학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평화주의, 여성주의, 협동조합(De la sociologie à l'action sociale : pacifisme, féminisme, coopération, 1931).
1870 알레비(Élie Halévy, 1870-1937), 고등학생 철학 경시대회 1등, 1890년 ENS, 레옹(Xavier Léon, 1868-1935)과 부글레(Célestin Bouglé, 1870-1940)와 어울렸다. 프랑스 철학자, 자유주의 역사가. 영국 사상 전공이다. 어머니를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종교에서 자랐다. 일차대전에 나이가 많아 징집이 아니었으나, [페기처럼] 간호병으로 지원했다. 철학적 급진주의 형성(La Formation du radicalisme philosophique (1901-1904) / 동생 다니엘 알레비(Daniel Halévy, 1872—1962) 프랑스 역사가 수필가, 프로테스탄트로 자랐다. 프루스트와 친구이다. 페기의 Cahiers de la Quinzaine의 협력자이다. // 이 두형제가 벩송과 연관이 있을 듯한데 언급이 없다. 프로테스탄트 개종 때문인지 모르겠다. // 아버지 뤼도빅 알레비(Ludovic Halévy, 1834-1908), 유태인 출신, 프랑스 드라마 작가, 가극각본작가, 소설가.
1898 구이에(Henri Gouhier, 1898-1994), 프랑스 철학자.
1902 쉴(Pierre-Maxime Schuhl, 1902-1984) ENS, 철학교수자격, 프랑스 철학자. 고대철학사 전문,
1926 발쉬(Jean Walch, 1926-?), 물루즈 태생, 생시몽 문헌(Bibliographie du Saint-Simonisme, 1967)과 ‘슈발리에(1806-1879의 “경제학자 생시몽”’으로 철학 박사학위, CNRS 연구원, 오스트리아 린츠 대학 부교수(en 1990), - 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a civilisation Structures matérielles, 1981. / Les maîtres de l'histoire / Jean Walch, 1986. - Historiographie structurale / Jean Walch, 1990 * 발쉬(Jean Walch, 1926-) 편집자이기도 하다. (57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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