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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재와동포 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응모]
제목 1.Humanitarian Immigration(인도주의 이민)
2.바이올렛(영원한 사랑 , 영원한 우정)
[시놉시스]
1서두
2확장
3위기
4절정
5결말
[주제]
뉴질랜드에서 노모를 모시며 살고 싶은데, 이민법 철 대문으로 굳게 잠겼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인도주의 이민 카테고리로 철 대문 빗장을 슥 열었다.
[로그라인]
뉴질랜드 이민 27년차. 10년간의 생선가계. 10년간의 모텔 사업.
한국에 두고 온 어머님. 여행차 아들집에 오셨다가 쓰러져 병원행.
두달을 병원에서 치료 후, 호전 없어 한국으로 추방될 위기에 처함.
병명:Mental Disorder.분노 조절이 문제였다.
24시간 보호자를 필요로하는 위험한 병 증상.
수소문 끝에 유능한 키위 변호사 팀을 만나 인도주의적 이민 신청.
1년 반 줄다리기 후 1차 기각. 1년 반 서류보완 2차 신청후 승인.
새벽 집을 나서 직장으로 출근하다 어머니 요양병원에 들러 도시락.
연말 고백성사시 신부님께 면담하다 목놓고 울다가 나옴. 신부님 위로.
10년을 요양병원과 호스피스 병동에 있다가 선종. 국가가 장례 대행.
1서두
진구가 성당밖 철조망을 붙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뉴질랜드 여름 12월은
녹색의 계절이었다. 방금 고해실에 무릎 꿇고 신부님께 고해하다 그만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도저히 억제하지 못해 그만 고해실을 튀쳐나왔다.
신부님도 수단을 입은채로 나와서 철망 옆 진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알수 없는 격정의 분출은 활화산 마그마처럼 뜨겁게 온 몸을 녹여냈다.
이민생활, 갈곳 모를 노모의 불법체류(?), 쉼없이 세븐데이로 일하는 노동,
어디로 돌팔구를 찾아야 할지 막막해 한계를 느낀 몸통이 그만 터졌다.
2확장
진구 부부가 뉴질랜드 이민 4년차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우여곡절 끝에 조그만 생선가계를 인수해 자리를 잡았나 싶었다. 하나 있는 딸아이는 성심껏 공부해 키위들 속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더니든에 있는 의과대학에 다녔다. 그 곳 기숙사에 기거했다. 딸과 진구 부부는 두세달에 한번정도 만났다. 주로 방학 때였다.
머\의대 전학년 과정 6년간을 떨어져 살게 되었다.
고국에 두고온 어머님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자영업이라 누구하나 자리비우기가 어려웠다. 밤새 고민 끝에 아내 혼자 고국에 가서 잠깐 보살피기로 했다. 진구는 아르바이트 연변 남자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보름여 돌보다가 어머니가 차도를 보이자 뉴질랜드 아들을 보고싶다해서 아내가 모시고 왔다.
어머니는 3달짜리 여행비자로 들어온 것이다. 생선가계도 나와서 구경도 했다. 된장국 저녁밥을 차려놓고 기다릴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소일거리를 찾아 손보셨다. 잘 모시고 왔다고 위안을 느꼈다. 가계에서 고단해도 덜 피곤했다.
3위기
일주일째, 사달이 벌어졌다. 아내와 종일 일하고 퇴근해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 표정이 울그락 붉으락 했다. 급기야 도마를 내 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데크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아내의 손등에 검붉은 피가 솟나났다. 진구가 어머니를 등뒤에서 감싸안았다. 어머니가 거세게 뿌리쳤다. 어찌나 힘이 장사던지 진구가 내동댕이 쳐졌다. 어머니는 실성한 채로 목놓아 울부짖었다. 광란의 상태로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옆집 키위가 뛰어와 보더니 위급상황을 진정시키려고 111 에머전시에 신고했다. 얼마후 경찰차와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어머니는 경찰과 구급요원의 손에 제압되었다. 바로 구급차에 실려 노스쇼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여러 검사와 응급 치료가 병행되었다. mental disorder로 판명이 났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다 분노 충동이 일면 조절이 불가한 상태라했다. 가족이나 이웃에 해를 끼칠수 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어 24시간 집중 관리와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한달이 다 돼갔다. 진구 부부는 생선가계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여행차 와서 이런 변고를 치른지라 까마득했다. 병 중상이 차도도 별로 없었다. 병원비 청구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가 세달이 넘으면 한국으로 추방된다고도 했다. 영어하나도 안되는 어머니가 병원 시설에 갇혀 치료를 받는다는 게 힘들어보였다. 새벽 6시에 북쪽 알바니 집을 나서서 하버브리지를 건넜다. 센트럴 다운타운 시마트 옥션장에 들러 싱싱한 횟감 생선을 골라 큰 플라스틱 박스 두 개에 가득 담아 나왔다. 이어 서쪽 뉴린에 있는 특수 요양 병원으로 향했다. 하루 먹을 음식 세끼분을 넣어드렸다. 간호원한테 끼니마다 잘 챙겨 드리라고 간곡한 부탁도 했다. 먹을 것을 우리 음식으로 매일 갖다 대며 얼굴이라도 보니 조금은 로사가 위안을 삼는가 싶었다.
생선가계는 오클랜드 남쪽 지역인 오타라에 위치해 잇었다. 섬나라 사람들과 원주민 마오리들이 많이 살아 풍성한 음식이 잘 팔렸다. 진구 부부의 하루 동선 거리가 오클랜드 전체를 통과했다. 하버브리지 북쪽 집에서 오클랜드 중심 다운타운 시마트 경매장까지 이른 아침에. 시마트에서 서쪽 요양병원까지. 그리고 서쪽에서 남쪽 생선가계까지. 종일 일하고 모터웨이를 타고 남에서 출발해 하버브리질르 건너 북쪽 집으로 퇴근했다. 고생을 해도 일단 돈이 벌렸다. 그맛에 그나마 어느정도 피로감이 누그러졌다.
버는 만큼 세금 신고도 제대로 했다. 주변에 보면 돈 잘 버는 자영업자들이 세무신고 누락으로 몇 년후 세금폭탄을 맞곤 했다. 지난 달에도 스시가계를 10여년 하면서 지점까지 몇 개 낸 사람이 급기야 IRD로부터 거의 백만달러 이상의 벌금이 강제 추징되었다. 은행에 있는 잔고가 어느날 다 빠져 나간 거였다. 향후 5년간 자신의 이름으로 비즈니스도 못하고 은행 어카운트도 못 열게 되었다. 당사자에겐 천지가 무너지는 고통이었다. 이민자들이 하는 소규모 업체도 칼날이 다가왔다. 식당, 빨래방, 여행업체, 건강식품점등이 세금 폭탄을 맞고 줄줄이 도산되었다. 과도한 욕심은 화를 불러왔다.
뉴질랜드는 세무를 담당하는 IRD(In Rand Avenue)는 한국의 국세청과 같았다. 막강한 조직과 체계를 갖춘 터라 불의를 과감히 척결하고 정의를 바로 세웠다. 온 국민로 부터 신뢰받는 정부 기관이었다.
4절정
이른 아침내내 생선가계에서 진구는 허리펼 새 없이 생선을 손질하며 횟감을 떴다. 현지인 키위들과 원주민 마오리들이 주로 찾는 생선 횟감이었다. 스네퍼, 가와이, 트래블리 등이 대상이었다. 우리말로 치면 도미, 고등어, 존도리였다.
신선도 높은 횟감은 한쪽에 진열돼 단골들에게 팔렸다. 나머지 생선은 포를떠서 피시 앤 칩 음식으로 만들었다. 그 일은 아내 엘 리가 맡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진구가 간밤에 잠도 잘 못잔터에 피곤이 몰려 잠시 밖에 나가 쪼그려 앉아 냉수를 들이켰다.
단골 손님인 피터가 가계에 들어오다 깜짝 놀란 얼굴로 진구에게 물었다. 어디 아프냐고. 진구는 겸연쩍게 웃었다. 피터가 여러번 채근하기에 진구가 그간의 어머니 사정을 이야기했다. 한달 지나면 세달 여행자 비자 기한도 만료되는지라 추방당하는 건 아닌지. 추방돼도 한국에서 치료해줄 돈과 보호자가 마땅치 않았다. 두 여동생이 있는데 큰 여동생은 최근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중이었다. 둘째 여동생은 나약한 몸으로 병을 달고 살았다. 자기 몸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가 뉴질랜드 영주권을 받기를 원했다. 생선가계 둘이 하면 어머니는 모시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뉴질랜드는 노약자들한테는 아주 정성을 다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어 믿을 만했다. 피터가 한참을 듣고 나더니 한마디 툭 내뱉었다.
-Humanitarian Immigration!
진구가 귀를 쫑긋하며 물었다.
-Humanitarian Immigration?
피터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모든 형제들이 뉴질랜드에서 영주권 받고 살면 부모를 초청 이민으로 할 수 있는데, 진구한테는 그게 해당안된다. 여기에 다른 방법이 딱 하나 있다고. 바로 인도주의적 이민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단다. 우선 한국 이민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라고 했다. 피터도 수소문해 알아보겠다고 했다. 진구 눈이 번쩍 뜨였다. 스내퍼, 도미 횟감 1kg을 주문한 피터에게 1kg을 더 얹어 주었다. 교민지 맨 뒷부분 직업란에서 이민 변호사를 찾아보았다. 일일이 전화를 했다. 자신있게 해보겠다는 이민알선 업체가 없었다. 마지막이다 싶어 전화한 회사에서 할 수 있다며 다음날 약속을 잡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날 일 중간에 시간을 내서 그 업체를 방문했다. 뚱뚱한 몸에 뱃살이 볼록 나온 이가 명함을 건넸다. 이민 컨설턴트 대표라 써있었다. 모든 이야길 듣더니 딱 조건을 걸었다. 할 수 있다며 조건을 바로 제시했다. 선수금 $8천. 총 진행 비용 $4만. 기각될 시 $4만. 돌려 주겠다. 우선 $4.8만을 입금하라. 진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일도 해보기전에 $4.8만을 먼저 달라고. 뭘믿고. 만약 받고 튀면. 교민지와 교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내며 요란을 떠는데, 결과와 실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성공 실 사례가 없었다. 실망한 채 면담비로 $200을 던져주고 사무실을 터덜 터덜 걸어 나왔다. 근처 구멍가게에서 산 시원한 콜라를 들고 공원 나무아래에 앉았다.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수지않고 계속 마셨다. 한 병을 다 목 안에 털어넣었다.
5결말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피터한테 온 전화였다. Humanitarian Immigration 변호사를 찾았단다. 자기 나라 아일랜드 출신 변호사라고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귀뜸해주었다. 진구 가계와 10분도 안걸리는 거리였다.피터 소개로 만난 이민 변호사 안드레아는 2m가 넘는 후리후리한 키에 얼굴도 시원스러웠다. 옛날 기아농구단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장신 한기범 선수를 연상케했다. 기린처럼 선한 눈매에 신뢰가 묻어났다.
진구의 사정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이후 진구가 간략하게 정리한 서류를 건네자 꼼꼼히 살폈다. 10여분 기다리라 하고선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룹 팀 회의를 한 모양이었다. 팀원들의 의견과 경험을 듣고 나와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이민성에 인도주의 이민을 신청해 좋은 결과를 안겨드리겠다고. 간절한 아들의 효성을 격려도 해주었다. 하늘의 도움도 필요할 거라 덧붙였다. 착수금으로 $2천을 제시했다. 나머지는 그대 그때 일하며 시간당 비용청구를 하겠다고. $2~300정도를 생각하라고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었다.
결과가 승인될 때도 좀 추가 청구를 하겠다고. 진구는 흔쾌히 승낙했다. 믿음이 갔다. 진행하며 과정별 수고비를 내는 것, 합리적이라 생각이 들었다.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 알려줬다. 관련 서류도 한국에서 떼서 영어로 공증해 제출했다. 무엇보다도 한국민의 정서를 파고들어 인도주의적 선처를 호소했다. 무려 1년 6개월. 모든 서류를 올려 이민 신청을 마무리했다. 결과를 기다렸다. 기각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변호사 팀도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상심이 깊던 며칠후, 피터가 가계에 찾아왔다. 안드레아 변호사로부터 소식을 접했다고.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의사를 들었단다. 진구를 독려했다.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보완해가기로 했다. 한국 어머니로서 겪은 일제치하 식민지 생활, 625 전쟁 참화, 아버지가 북한 군의 총을 맞아 다리를 잃은 아픔, 당시 참상을 담은 흑백 사진도 덧 붙였다. 인도주의적 접근에 최선을 다했다.
뼈빠지는 고생으로 일구어낸 가정.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홀로 아들과 두 딸을 키우며 고생한 이야기. 두딸이 어머니를 모시기 어려운 여건, 병원기록과 진단서 그리고 의사 소견도 첨부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 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풍습, 아들에게 의지한 어머니의 고독. 인생말년에 아들과 살다 마무리 하고픈 심정등등... . 참고 자료지만 정성껏 준비했다.
어느날, 요양병원에서 불안에 화병이 도진 시어머니 생각에 속이 아팠다. 그 생각에 그만 엘 리가 펄펄 끓는 기름통에 밀가루 양념한 생선을 튀기다가 기름이 튀어 완쪽 얼굴에 작은 화상을 입었다. 가계 한쪽에 있는 화분에서 알로에를 잘라 그 즙으로 얼굴에 문질렀다. 화상약도 발랐다. 따가웠다. 순간 눈물주머니가 툭 터져버렸다. 그때였다. 여성 손님이 들어서다 눈이 퉁퉁 부은 엘리를 보자 다가와서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흐느끼는 엘리를 의자에 앉히고 그간의 어머니와 관련한 인도주의 이민 신청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만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키보드로 뭔가를 쉴새없이 쳐 내려갔다. 진구 가계 켬퓨터에 USB를 꼽더니 프린팅을 했다. 아래에 서명을 하고는 진구에게 건넸다. 2차 이민 신청시 레프리, 추천 서류로 추가하라고 알려주었다. 진구가 얼떨떨한 채 서류를 받아보니 서명 위에 IRD 스탭이라고 적혀있었다.
한국인의 정서, 특히나 아들을 의지하는 노모의 심정을 간절히 알려주었다. 진구가 먼저 한글로 장문의 글을 썼다. 그걸 신춘문예에 당선된 한국 친구에게 주어 고쳤다. 긴 문장을 줄여 짧고 감명깊게 다시 썼다. 이것을 오클랜드 대학 교수인 성당 교우에게 영문 번역을 부탁했다. 또 한번의 과정을 거쳤다. 키위 영문 번역을 한 뒤 공증 변호사의 서명을 받아 추가 자료로 제출했다. 이민 변호사의 꼼꼼한 검토와 보완 후, 거의 완벽한 상태로 이민성에 접수했다. 그날, 진구는 생선 가계 근처에 있는 키위 성당에 가서 무릎꿇고 간절한 마음을 올렸다. 사람이 할 수있는 일은 다했다. 나머지는 신께 맡기는 심정이었다.
최종심 결과를 기다리며 또 다른 준비도 구상했다. 만약 이번에도 안되면 뉴질랜드 총리인 헬렌클라크에게 호소문 탄원을 넣기로 마음먹었다. 딴 생각을 하며 진구가 생선손질하다 그만 칼이 빗나가 팔을 찔려 엄청 많은 양의 피를 쏟았다. 황급히 연락받은 111 구급요원과 앰뷸런스의 출동으로 오클랜드 남쪽에 위치한 미들모어 에머전시 병동에 후송되었다. 응급조치후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팔에 붕대를 감은채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했다. 마음급히 달려온 이민 생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할 일은 많은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어머니는 ? 가계는?
병실 문이 열리며 아내가 들어왔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어머니 인도주의 이민 승인 서류였다. 벌떡 일어났다. 신의 은총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리는 12월이었다.
그날, 이민 신청을 처음 상담한 아시아 이민 컨설팅 회사가 파산 신청을 내고 호주로 종적을 감췄다고 교민신문에 큰 뉴스로 떴다. 이민 신청을 볼모로 사기당한 교민들이 엄청난 절망과 낙담에 빠졌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간절한 심정으로 이민 신청을 원하는 이들에게 거액의 선수금을 받아챈 뒤 잠적한 대표 얼굴이 악마로 떠올랐다. 진구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며칠후, 옆가계 중국로스터 포크 식당 여주인이 울먹이며 들어섰다. 10년을 함께 일해온 식당이었다. IRD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세금 폭탄을 맞았다고 망연자실했다. 그동안 쎄 빠지게 일해 번 돈이 다 날라갔다고 울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가계에서 일하던 종업원이 주인이 임금을 제대로 안주고 일만 혹사시키고 세금을 제대로 안내고 착복한 것을 IRD에 신고했다는 것. 엘 리가 끓는 기름에 얼굴 화상을 입은 날도, 그 가계에 암행순찰을 왔던 것이다. 손님으로 가장해 음식을 시키고 카드 영수증을 받아가고. 나중 세무신고 때 제대로 하나 확인하고. 그러기를 무려 6개월간 지속했다고. 그러면서 옆 가계와 비교하려고 세금 납부 내역을 두 가계것을 미리 확인했단다. 진구네 생선 가계는 성실 신고한 것으로 판명됐고, 중국 로스터 포크 식당은 터무니없게 축소 신고했다는 것. 두 가계가 천지 차이였다. 진구가계에 들러 써준 레프리 추천서가 이민성 제출 서류에 포함돼 좋은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되었다. 똑같은 사람의 판단 기준이 한 가계는 세금 폭탄을 투하했다. 다른 가계는 엄청 큰 지우너화력이 되었다.
#1 요양병원에서 노모의 소일거리
진구 어머니, 로사는 요양병원에서 말을 잃었다. 시도때도 없이 불쑥 치솟는 분노와 경련에 에너지를 다 쏟았다. 팔순 나이에 몸도 맘도 기력이 빠져갔다. 처음 몇 달은 서구식 식단이 너무 낯설었다. 빵과 우유 그리고 과일은 보기만 해도 이골이 났다. 음식을 못먹으니 몸이 버텨날 수가 없었다. 다행이 그 뒤로 아들과 며늘이 매일 생선가계에 출근하다 들러 전해주는 한국 음식에 그나마 정을 붙였다. 매일 쓰는 생활영어를 한 개씩 익혔다. 떠듬떠듬 입을 뗐다. 며느리, 엘리가 수첩에 한글로 영어발음을 써준 걸 로사는 중얼거렸다. 굳모닝, 워터, 토일렛, 핸드, 헤드, 푸드... . 모르면 그림으로 그려서 마음을 전하면 키위들이 알아듣는다고 며느리 엘 리가 한 말을 써먹기도 했다. 옛날에, 로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광주리, 보따리 장사하며 빌려준 쌀과 돈을 자신만 아는 방식으로 그림으로 적어두었다. 쌀이 몇 가마니인지, 마늘이 몇근인지, 고추가 몇부대인지 등등... . 그 기억을 살려 말하고 싶은 것을 수첩에 그림으로 그려 간호사나 같은 병상에 있는 인도, 중국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대충은 의사소통이 되었다.
#2 그림자 놀이
빨간 벽돌 단층짜리 요양병원. 다른 세상이었다. 로사가 현관 앞에 나왔다. 벤취에 앉아 우두커니 화단과 나무를 바라봤다. 비스듬히 퍼져오는 햇살을 쬐었다. 한국에서 늦은 나이에도 바스락대며 일하던 습관 때문인지, 일어나 주변을 왔다갔다했다. 서성거리는 모습에 간호원이 나와서 끌어다 벤취에 앉혔다. 불쑥 화가 도질뻔했다. 하는 일이 제지당했다고 생각했다. 간호원이 두손을 꼭 쥐어줘서 간신히 누그러졌다. 간호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일어나 서성거렸다. 오후 해질녁이라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를 밟으려고 바삐 움직였다. 그림자는 앞서 도망갔다. 화단 끝 모퉁이에 이르러서 땅에 쪼그리고 앉았다. 떨어져있는 나무 이파리를 주워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양새였다. 가드닝하고 가던 정원사가 흘리고 간 이파리였다. 뭐드라~? 아~! 바이올렛이었다. 고국에서 바이올렛 잎을 따서 꺾꽂이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로사 침대 옆 작은 테이블위에 놓인 종이컵을 들고나왔다. 그 컵에 화단 흙을 파서 담았다. 그 위에 이파리를 눌러 심었다. 물을 끼얹었다. 침대 머리맡 테이블위에 컵을 올려놓았다. 매일 바라보며 물을 줬다. 가끔 밖에 내다 놓기도 했다. 햇살과 물 그리고 손길이 주어졌다. 며칠이 지나자 이파리 아래로 뿌리가 뻗쳐 내렸다. 새싹이 한 잎 두잎 솟아났다. 로사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새 생명 기운이 로사 몸과 맘에도 뻣쳐 올랐다
#3. 아일랜드 출신, 안드레아의 동병상린
이민 변호사인 안드레아는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부모님이 아일랜드에서 영국 식민통치하에 말 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은터였다. 한국이 일제 식민 지배를 당한 심정을 이해했다. 버모가 겪은 참상은 트라우마로까지 번졌다. 가족을 제외힌 모든 외부 사람은 두려웠다. 어떤 해꼬지를 당할지 몰랐다. 결국 죽으나 사나 가족밖에 없었다. 죽 사는 동안 함께 먹고 자는 거스 죽을 때 곁에 있어주는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였다. 그런 정서로 자랐기에 진구와 노모 로사가 한 집에 살수 있도록 돕는 일이 미션, 사명이라도 된 듯이
혼심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주 생생한 내 이야기처럼 모든 문건을 정리하고 검토했다. 최종 자료와 함께 2차 신청 서류를 이민성에 올렸다. 안드레아 역시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98%까지는 사람이 한다. 나머지 2%, 화룡점정은 하늘 몫이었다. 하늘도 감동하면 역사가 쓰여질거라고 믿었다.
6.에필로그
진구가 노스쇼어 메모리얼 파크에 차를 갖다 댔다. 수많은 가족 묘들이 다소곳이 자리해있었다. 어머니 묘소앞으로 걸어갔다. 준비한 소주한병과 장미꽃을 제대앞에 올렸다.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묘역 주변에 부었다. 어머니께서 힘들고 적적할 때 홀로 마셨던 소주였다. 몇잔을 계속 따라 묘소 둘레에 다 적시게 부었다. 술 냄새가 났다. 마지막 남은 반 잔은 진구가 들이켰다. 속이 확 올라왔다. 옆 잔디에 그대로 누었다. 팔베개를 했다. 하늘에 양털 구름이 노닐었다. 어미양 옆에 어린양이 기대어 누운 형상이 보였다. 새들이 날아와 지저겼다. 옆에 놓인 장미송이를 갖다 코에 댔다. 빨간 장미. 진한 핏빛 향기가 났다. 이어 노란장미. 가을 걷이 냄새가 올라왔다. 마지막 하얀장미. 겨울 눈 냄새가 배어나왔다. 스르르 잠이들었다.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며 갈매기처럼 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