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顯宗)은 "효종"(孝宗)의 맏아들로 1641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孝宗)이 "선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1644년 귀국했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世子)에 책봉(冊封)됨에 따라
1649년 (仁祖 27)에 9세의 나이로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11세의 나이로 왕세자(王世子)가 되었다.
1659년(孝宗 10) "효종"(孝宗)이 죽자 19세에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올랐다.
"현종"(顯宗)이 재위한 15년간 조선은 "북벌 운동"(北伐 運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문화적 "중화주의"(中華主義)라는 방향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청(清)의 국력이 점점 강성해지면서 북벌 운동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무모해졌기 때문이다.
외침과 내란은 없었지만 전염병과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고통 받자 정부는 경제 재건에 공을 들였다.
재정 부족을 메꾸기 위해 "영직첩"(影職帖)과 "공명첩"(空名帖)을 대량으로 발급했는데,
이후 정부 재정을 보충하는 정책으로 보편화되며 조선 사회의 신분제 해체에 기여했다.
"현종"(顯宗)은 전란에 많은 사람이 죽었으므로 호구 증가를 위해, 양민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사찰에 있는 동자들도 환속했다.
또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관개 시설을 만들어 수리 면적을 늘렸다.
함경도 산악 지대에 "장진별장"(長津別將)을 두어 개척을 시도했고,
두만강 안에 출몰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북변의 여러 관청을 승격하는 등 실속 있는 국방 정책을 견지했다.
나름대로 조선의 실정을 감안한 것이었지만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게 실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1666년에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네덜란드 국적의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대만 해협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중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1653년 8월 제주 남쪽 해안에 좌초해 산산조각이 난 후 침몰했다.
이 배에 승선했던 68명 중 서기인 "하멜"(Hendrik Hamel)을 포함한 34명만 살았다.
"하멜" 일행은 그 후 10개월가량 제주에 억류된 뒤 1654년 5월 강진 해남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서울에서 2년여를 체류했고,
1656년 3월에 전라도로 다시 유배된 후 1663년 여수 좌수영, 순천, 남원 등 세 곳으로 분리 이송되었다.
이 중 여수 좌수영에 유배된 "하멜"을 포함한 8명은 1666년 9월 밤 미리 준비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한국에서 14년 동안 억류된 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하멜"은 네덜란드에 귀환해 그동안의 난파 과정을 담은 "하멜 표류기"를 출간했다.
"하멜 표류기"를 통해 "하멜"은 한국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역사적 인물이 된다.
"하멜"이 병영에 억류되어 있을 동안 보곤 했던 은행나무는 아직도 "강진"(康津)에 살아 있고
현재 네덜란드에서 건립한 기념관도 인근에 세워져 있다.
현종(顯宗)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는 청풍 김씨 김우명의 딸로 효종 2년(1651)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치렀고,
1659년 현종(顯宗)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립되었다.
현종(顯宗)은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後宮)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
1674년 현종(顯宗)이 사망하고 아들인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명성왕후"(明聖王后)와 그의 아버지 김우명은 서인 편으로 당파적 입장을 숨기지 않고
궁내에 있는 남인 세력 추방에 관여했으며 특히 "숙종"의 여인 "장옥정"(장희빈)을 궐 밖으로 내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명성왕후"(明聖王后)는 친정의 배경과 과격한 성격이 겹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조정의 정무까지 간여해 비판받기도 했다.
혹자는 "현종"이 후궁을 두지 않은 이유는 "명성왕후"의 사나운 성격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종"이 "명성왕후"(明聖王后)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또한 힘을 받는다.
왕비가 아무리 시샘한다고 해도 후궁을 두는 것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명성왕후"(明聖王后)에 대해서는 왕대비가 된 후 사망하기까지 악평이 주를 이룬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그녀의 죽음과도 연관된다.
"숙종"이 원인 모를 병에 걸리자 그녀는 "왕대비"임에도 무당을 찾는다.
무당은 "숙종"이 병에 걸린 이유는 삼재가 들었기 때문으로 어머니가 아들을 대신해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고 벌을 서야 한다고 한다.
그녀는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무당의 주문대로 물벼락을 맞는 벌을 선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감기에 걸렸고 결국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숭릉"(崇陵)은 제18대 "현종"(顯宗 : 1641~1674)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 씨(1642~1683)의 능이다.
다른 능은 홍살문 옆에 배위가 있고 참도가 시작되는데 "숭릉"은 홍살문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부터 참도가 시작된다.
배위도 참도가 시작되는 옆에 위치한다.
7년 전에 갔을 때는 우측의 "수복방"(守僕房)이 터만 있었다.
이곳도 좌측에 있어야 할 "수라간"(水剌間)이 없다.
옛날에 있었다면 복원해 놓았을텐데 처음부터 없었는듯하다.
2024년 가을에 갔을 때는 "수복방"(守僕房)을 복원 해 놓았다.
"숭릉" 정자각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이다.
보통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숭릉"은 익랑이 붙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신계(神階)가 훼손되고 있다.
빨리 보수를 해야 할듯하다.
창건된 1674년의 형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고 현재는 "팔작 지붕"은 이곳이 유일하다.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사례로 평가되어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었다.
"숭릉"(崇陵)은 쌍릉(雙陵)으로 조영(造營)되어 있다.
왕릉과 왕비능 모두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난간석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 신"(十二支 神)을 글자로 새겼다.
대부분의 석물(石物)은 민폐를 덜기 위해 1년 전 "현종"(顯宗)이 자신의 아버지(孝宗)능을
여주로 천장(遷葬)하면서 묻어놓았던(동구릉 원릉터) 것을 이용했다.
이때 신하들이 "아버지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아들의 제사를 하지 않는다"라며 반대 상소를 했으나
송시열과 유생 등의 변론에 따라 "숙종"(肅宗)은 그대로 행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
장명등, 망주석, 난간석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문,무인석은 옷 주름을 비롯해 얼굴의 이목구비가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능침을 지키는 석호(石虎)의 꼬리가 배 아래에 양각으로 조각되어 생동감을 준다.
"숭릉"(崇陵)에는 "예감"(瘞坎)이 3개나 있다고 하는데 살펴보지를 않아 다 못보고 말았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또 한 곳이 있다는데 확인을 못했다.
비각 안의 능표에 각인된 비문에는
朝鮮國 (조선국)
顯宗大王崇陵 (현종대왕 숭릉)
明聖王后附左(명성왕후 부좌)라고 적혀 있다.
"숭릉"(崇陵)으로 올라가는 길은 특이하게 두가지 길이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산길로 가는 느낌이고, 왼쪽길은 연지(蓮池)를 보며 가는 길이다.
2017년 대대적인 보수를 하는 중이다.
현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