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은 오직 무부무기이며 다섯 가지 변행이니 계(界)와 지(地)에서 다른 업력을 따라서 생하느니라.
性唯無覆며 五 (편)行이니 界地에 隨他業力生이라.
제8식에는 5변행인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가 작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행상 즉 작용이 미세하여 알기 어려우며, 수행에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부(無覆)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원경지에서 진여본성을 증득하고서 보면 무부가 아니라 유부(有覆)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부라고 한 것은 작용이 너무나 미세하고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8식은 삼계구지(三戒九地)에서 각기 다른 업력에 따라서 생하는 것입니다. 삼계구지는 미혹에 빠진 유정들이 윤회하는 세계를 말하는데, 크게 나누면 삼계가 되고 자세히 나누면 구지가 됩니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말하며, 구지(九地)는, 욕계의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의 욕계오취(欲界五趣)를 합한 하나의 지[一地]와, 선정의 차이에 따라 구분한 색계의 네 지[四地]와 무색계의 네 지[四地]를 합한 것입니다. 모든 생류들은 각자의 업력을 따라서 이 삼계구지의 어느 곳엔가 생하며, 그때의 주체가 바로 제8식입니다.
이승은 요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미혹하여 집착하니 이로 말미암아 능히 논주들의 쟁논을 흥기하였느니라.
二乘은 不了因迷執하니 由此에 能興論主諍이라.
제8아뢰야식의 행상(行相)이 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이승(二乘)인 성문과 연각은 잘 모르므로 미혹하여 제8아뢰야식을 근본진여로 집착합니다. 그러므로 후대에 와서 유식파의 여러 논사들은 이 아뢰야식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했던 것입니다.
「해심밀경」에서 부처님이 "이승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아뢰야를 이승에서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아뢰야의 행상이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이승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여로 집착하므로 그것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인도에서도 이승들은 아뢰야의 존재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다고 주장했지만 대승논사들은 분명히 있다고 주장하면서 갖가지 증거를 보이고 있으며, 유식론(唯識論) 등을 보면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이러한 논쟁을 취급함에 있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합니다. 즉 대승논사들이 논쟁을 하기는 했지만 아뢰야가 꼭 있다고는 입증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이론으로는 아뢰야의 존재 증명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아뢰야의 주장과 전생 또는 윤회에 대한 교설은 전적으로 방편에 불과하다고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실험심리학의 전생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논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합니다. 만약에 전생이 입증된다면 제8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히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실험심리학에서는 전생의 존재가 증명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존재는 부정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전에 이미 여러 큰스님들께서 아뢰야가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많이 증명했습니다만 그 증명하는 방식이 다소 철저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후세학자가 그에 의거하여 아뢰야를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것인데, 사실 그 난점은 아뢰야식 그 자체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고 미묘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광대한 세 가지 장(藏)은 끝을 다할 수가 없으며,
活活三藏은 不可窮이며,
아뢰야는 장(藏)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장에는 능장(能藏)·소장(所藏)·아애집장(我愛執藏)의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물론 아뢰야식은 이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뢰야식이 너무나 넓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에 따라 편의상 나누어 넓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에 따라 편의상 나누어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능장(能藏)이란 제8아뢰야식과 종자와의 관계에서 아뢰야식이 일체만법을 낳는 종자를 간직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소장(所藏)은 만법의 종자가 아뢰야식에 갖추어져 있다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애집장(我愛執藏)은 아뢰야식이 끊임없이 계속 이어져서 중생의 주체가 되므로 제7말나식이 이것을 잘못 알고 나[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러한 세가지 의미를 포괄하는 아뢰야식은 그 뜻이 깊고 넓기 때문에 그 궁극을 범부로서는 가히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원이 깊어서 전7식은 물결이며 경계는 바람이 되고,
淵深하여 七浪境爲風하고
제8식의 근원은 매우 깊어서 전7식(前七識)인 제7식과 전6식은 제8식의 바다에서 파도와 같고 그 경계는 바람과 같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훈습을 받아 종자와 근신과 기계를 지니며,
受熏하여 持種根身器하며
'훈습을 받는다' 함은 아뢰야식이 전7식의 모든 훈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제6식이 죄를 지으면 자연히 제8식에 훈습되어 제8아뢰야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에 상응하는 종자와 신체[根身]와 자연계[器界]가 나타나게 됩니다.
갈 때는 나중에 가고 올 때는 먼저 와서 주인공이 되니느라.
去後來先하여 作主公이라
갈 때란 죽을 때를 말하는 것이고 올 때란 새로 몸을 받아서 태어날 때를 말하므로 이것은 곧 생사윤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의식이 전부 그치고 제7식은 작용을 못하지만 제8아뢰야식만은 생명을 마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생명이 끊어질 때, 즉 윤회할 때 최후까지 남아서 따라갑니다. 또 사람이 다시 몸을 바꾸어 환생할 때에 제6의식이나 제7식은 작용하지 않지만 제8아뢰야식은 제일 먼저 와서 그 중생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동지 이전에 이미 장식(藏識)을 버리고
不動地前에 재捨藏하고
제8지인 부동지 전인 7지가 되면 훈습된 번뇌종자를 함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장식(藏識)이란 명칭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동지에서부터는 장식 대신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금강도 후에 이숙식이 공(空)해지며
金剛道後에 異熟空하며
금강도(金剛道)는 등각보살이 금강대정(金剛大定)에 들어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숙식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금강도후, 즉 대원경지가 현발할 때에 비로소 이숙식이 완전히 공해지는 것입니다. 이숙식이란 선악의 업(業)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과보로서 이 이숙식이란 명칭은 범부로부터 금강도의 보살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며, 오직 불과(佛果)인 묘각(妙覺)에서만 그 명칭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대원경지에 이르러서야 제8아뢰야식의 근본이 완전히 공해진다는 말이 됩니다. 그만큼 제8아뢰야식은 행사이 미묘하고 깊어서 알기 어렵고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등각 후인 묘각(妙覺)에 가서야 이숙식이 공함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원경지와 무구식이 동시에 발생하여
大圓無垢가 同時發하여
대원(大圓)이란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말하는데, 유루(有漏)의 아뢰야식이 전환될 때 나타나는 청정하고 원만한 지혜입니다. 그리고 무구(無垢)란 유루의 아뢰야식이 무구식(無垢識) 또는 백정식(白淨識)이 되는 것, 즉 진여를 뜻합니다. 이 둘은 동시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제8아뢰야식이 무구식 즉 백정식이 될 때 대원경지가 나타나며, 대원경지가 나타날 때 바로 무구 백정식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발생한다'고 하여 대원경지와 무구식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둘은 말만 다를 뿐 그 자체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발생할 때 부처님의 경지인 묘각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널리 시방의 모든 세계를 비춘다.
普照十方塵刹中이로다.
아뢰야식이 전환하여 대원경지를 이루고 그 광명이 널리 시방의 모든 세계를 두루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자고로 고불고조(古佛古租) 중에서 옳게 공부하여 참 조사노릇을 한 이들은 모두가 미망(迷妄)의 뿌리가 완전히 빠진 자리에서 견성했다고 말했지, 어느 한 사람도 아뢰야식의 뿌리가 빠지기 전에 견성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산스님도 「팔식규거통설(八識規矩 通說)」 마지막 부분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식이 그대로 있을 때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의식이 완전히 끊어져 제7지 보살의 경지인 무상정(無想定)이 될 때에도 제7말나식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완전한 색자재(色自在)의 멸진정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몽중일여(夢中一如 )로 꿈속에서는 일여(一如)하지만 오매일여(寤寐一如)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7말나식의 근본이 완전히 빠져버리게 되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에는 숙면에서도 일여가 되어 오매일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경록」이나 「유식술기」등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공부를 완전히 성취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제8마계(第八魔界)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무심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재보살로서 색자재(色自在)하고 심자재(心自在)하고 법자재(法自在)하지만 제8지·제9지·제10지·등각보살들도 공에 빠지고 적멸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心空滯寂]아직 아뢰야 마계에 있는 것이 되므로 자성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장식(藏識)이라는 이름은 버렸지만 아직도 이숙식(里熟識)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색자재 이상에 가서 이숙식이 완전히 공한 대원경지를 증득해야만 공부를 바로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니 이숙식이며 일체종자이다. 가히 알 수 없는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이니 항상 촉·작의·수·상·사와 상응하느니라. 오직 사수(捨受)이며 무부무기이니 촉(觸)등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항상 전변함이 폭포수가 흐르는 것과 같아 아라한의 지위에 서 버리느니라.
初는 阿賴耶識이니 異熟이며 一切種이라. 不可知執受處와 了니 常與觸作意受想思와 相應하니라. 唯捨受요 是無覆無記니 觸等亦如是라 恒轉與瀑流하여 阿羅漢位에 捨하니라. [大正藏 31 p. 60중 제2송-4송]
이 글은 유식삼십송에서 아뢰야식을 설한 것인데 마음을 심층에서 표층을 향하여 능동적인 입장에서 고찰하면 제일 처음이 초능변(初能變)이라고도 불리는 아뢰야식입니다. 이 아뢰야식을 인과 상속의 관계에서 보았을 경우 이숙식이라고 부르며 일체제법과의 관계에서 보았을 경우 종자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여기에는 일체의 훈습된 종자가 함장되는 곳이기도 하고 무몰식(蕪沒識)이라고 하듯이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일체의 원인과 결과를 갖추고 있는 근본적 장소 또는 중심체로서 우리가 알기 어려운 미세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뢰야식은 51가지 마음작용 중에서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의 5가지와 상응하여 작용할 뿐이며, 그 감수하는 성질은 선·악·무기 중에서 무기이며 특히 번뇌가 없는 무부무기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무부라고 하는 것은 번뇌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는 너무나 그 존재형태가 미세하여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이처럼 미세하여 알기는 어렵지만 그 작용은 마치 폭포수가 간단없이 흘러내리듯이 끊임없이 작용하며 존재하는 것으로 아라한(阿羅漢)의 위치에 가서야 비로소 없어지는 것입니다.
능엄경에 그러한 비유가 있듯이, 물이 아주 깨끗하면 그 물이 폭포수같이 흘러내려도 그 행상을 모르는 것처럼, 아뢰야식도 이와같이 그 행상이 극히 미세하여 중생들은 이것을 알 수 가 없습니다. 아라한의 자리에서 없어진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 의미를 좀더 세분하면 아라한의 자리에서는 장식 즉, 아뢰야식이라는 이름만 버릴 뿐 이숙식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제8식 자체가 다 없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뢰야식이라는 명칭을 버리는 아라한의 자리는 삼승(三乘)의 무학위(無學位)인 아라한을 뜻하지만, 여기에는 제8지 이상의 대승보살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집을 영구히 끊어서 아뢰야식의 명칭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삼승의 아라한과 제8지 이상의 보살만이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