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25:13-16, 온전하고 공정하라. 20.12.30, 박홍섭 목사
오늘 짧은 본문 속에 온전하고 공정하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주의 백성들의 일상 중에 온전하고 공정한 삶의 태도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은 말 그대로 온전하다, 순전하다는 뜻이고 공정함은 ‘체데크’, ‘정의’, ‘올바른’ 그런 뜻입니다. 온전한 정의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과 더불어 율법의 핵심입니다. 아니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실천적인 모습이 바로 올바른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앞선 신 16:18-20에서 재판의 공정함으로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고 본문에서는 상거래의 정의, 공정함을 말씀합니다. 가장 올바르고 정의로워야 할 일상의 영역이 바로 사법과 경제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저울과 되를 속여 경제의 온전함과 공정함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여호와께 가증하게 여기신다고 함으로 이 부분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증(可憎)함은 역겨울 정도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만 아니라 주의 백성들이 저울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십니다. 역겨울 정도로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죽어도 안 하겠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왜 저울을 속입니까? 저울추는 무게를 재는 도구입니다. 저울의 눈금 하나를 조작하거나 저울의 추의 무게를 조금만 조작해도 많은 양을 다루는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상거래의 공정함을 위해 원래 저울추의 무게는 규격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인들은 규격화되어 있는 저울추를 속여 가벼운 추와 무거운 추 두 개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물건을 사들일 때는 무거운 추를 사용하여 같은 값으로 더 많은 분량을 사들이고 팔 때는 가벼운 추를 사용하여 같은 값으로 물건을 적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면 훨씬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죠.
14절에는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라고 했는데 되를 속이는 경우도 똑같습니다. ‘되’는 곡물과 소금 같은 생활의 일용품을 측정하는 기구로 부피를 재는 데 사용합니다. 악덕 상인들은 무게를 재는 추만 아니라 부피를 재는 되도 속였습니다. 살 때는 큰 되를 사용하고 팔 때는 작은 되를 사용했습니다.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이렇게 불의하고 거짓된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사기 치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3절에 “넣지 말라”고 하셨고 14절에는“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5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겠다고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는 약속까지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백성들이 저울을 속이고 되를 속인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며 나아가 이런 약속과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큰 죄입니다.
만약 이 약속을 무시하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멸시하여 저울추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면 그 이익이 영원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삶은 이웃만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고 멸시한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보시는 삶이기 때문에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어 나중에 그 새가 날아 가버리듯이 부정하게 모은 재물도 날아 가버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가증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암 8:4-6을 보십시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 밀(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월삭은 매달 첫날을 하나님께 예배하며 쉬도록 한 날입니다.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처럼 모든 상거래도 중지하고 노동도 중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상인들 중에 월삭과 안식일 때문에 장사를 못해서 불만인 사람이 생깁니다. 이들이 불만만 가지고 끝내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월삭과 안식일 때 하지 못한 장사를 거짓 저울과 추로 속여서 저들의 더러운 욕심을 채웁니다. 팔아서는 안 될 찌꺼지 밀을 팔아서 부당한 이익을 챙깁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이런 행위를 가난한 자를 삼키고 망하게 하는 소위라고 하셨고 이들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이들의 소위는 사람을 속이는 비열한 짓일 뿐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멸시하는 더러운 짓입니다. 이들은 사람을 속여 부당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라도,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마 22:34-40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하시면서 이 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을 기억나십니까? 그러므로 이웃을 속이면서 자신의 더러운 욕심을 채우는 것은 이웃을 속인 것만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이웃에게 공정하고 온전하게 대하는 것을 어떻게 같이 취급하고 계신지를 보십시오. 렘7:1-7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곳에 너희를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곳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바른길과 행위가 무엇입니까?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과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들 사이에 행해야 할 정의가 무엇입니까?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으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공정하지 않은 재판과 공정하지 않은 상거래입니다. 일상의 모습이 정의와 공정을 무시하고 불의한 재판을 하고 거짓 저울과 추로 자기의 더러운 욕심을 채우면서도 하나님의 전에 와서 온갖 종교적 열심을 쏟아붓는 것이 하나님께 통하겠습니까? 사람은 속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아무리 여호와의 전이라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나와 종교적 열심을 내면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하든지 다 용서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에게 정의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 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웃에게 어떻게 하느냐가 하나님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느냐와 직결됩니다. 사람을 속이면 그 사람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됩니다. 정의와 공평의 출발은 이런 의식에서 시작됩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사랑은 인본 적인 휴머니즘에 불과하죠. 그러나 이웃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도 광신이나 미신적인 우상 신앙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 열심을 내면 일상에서 이웃에게 어떻게 하는지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여호와의 전은 여호와의 전이 아닙니다. 그런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전에 한국교회가 참 많이 실수했던 것 중에 이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방음시설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금요 철야와 주중의 예배 모임과 기도회 시간에 이웃들이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찬송하고 기도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북치고 장구치면서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주변 이웃들이 시끄러워서 많이 힘들다고 항의하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데 열심을 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이 일을 하고 있는데 감히 너희들이 방해를 해?”라고 하면서 “하나님 저들을 이사가게 해주세요”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무례하고 무식했는지 모릅니다. 왜 이런 생각이 가능하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직결됨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개를 추를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 개의 저울과 되를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꼭 상거래에만 적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과 이웃을 보는 눈이 다른 것도 두 개의 저울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보는 눈과 이웃을 보는 눈이 다른 것도 두 개의 추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한결같은 추와 저울을 가지고 살아가는 온전하고 공정한, 올바르고 정의로운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은혜를 구하는 기도의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