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쁨도둑>의 줄거리:
예복 입지 않은자가 왕의 아들의 결혼잔치에서 쫒겨납니다. 기쁨을 도둑질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복을 안입었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상한 도둑질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 중에, 즉 예수님으로 인해 열린 천국잔치 초대에 응하여 참여한 자들 중에 기쁨도둑들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도둑은 용서하셔도 이 기쁨도둑은 절대 용납 안하십니다.
기쁨도둑
(마22:8-14)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기쁨도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금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예수님께서 천국 연관되는 일들을 비유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국은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열어놓고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해주시는데, 오늘 비유의 관심의 초점은 하반부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쫓겨난 사실에 맞춰집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쫓겨났다’
그러면 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쫓겨났으며, 또 예복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 말씀을 우리가 기쁨이라는 단어로부터 한번 출발해서 살펴봅니다.
왜냐하면 이 혼인잔치 비유의 핵심요체는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잔치, 그것도 이 세상에서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라고 비유하신 것은 아들 때문에 기쁘고, 그 아들이 결혼할 때 그 기쁨이 배가되는 기쁨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고, 왕의 잔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기쁨이 왕만의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 왕의 통치권 아래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기쁨이 돼야 되고 실제로도, 이조시대 같은 때는 세자가 혼인한다든지 할 때나 왕이 혼인할 때는 온 나라의 기쁨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왕이라고 하는 이름을 갖다 건 것은 그 왕의 기쁨이 내 기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포인트를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기억해야 합니다.
뭐냐 하면 기쁨은 하늘의 언어입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신으로부터 하늘의 신들의 소유물이었던 불을 훔쳐다가 이 땅 위에 사는 인간들에게 가져다줍니다.
그것으로 제우스신의 분노를 사서 청동사슬로 묶이고 하는 고초를 받게 되는데, 이건 신화예요, 신화.
불이라는 것이 원래 하늘에 있는 신들의 것이었는데 훔쳐옵니다, 마찬가지예요.
기쁨은 원래 이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입 명품가방처럼 하늘에서부터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쁨이라는 감정을 갖게 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본래 어떻게 지어졌느냐? 욕구의 덩어리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영어로 말하면 desire, 욕구 자체가 나쁜 게 아니죠, 욕구가 뭡니까?
무엇인가, 어떤 일인가를 원하고 성취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원하는 것이고 바라는 것이고 갈망하는 겁니다.
그 갈망의 에너지 적 인격이 바로 인간이라는 거예요.
기쁨이라는 것은 어떻게 발생하느냐,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 욕구가 채워질 때 기쁨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 축구경기 할 때 자국 팀이나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한 골만 넣기를 얼마나 깊이 바랍니까?
너무 강렬하게 바라다보니까 한 골 들어가게 되면 몇 만 명이 동시에 “와~” 하고 함성을 지르게 됩니다, 그 욕구가 채워지기 때문에.
그런데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기쁨을 가능하게 하는 욕구, 그 욕구의 대상도 하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볼 때, 인류역사상 기쁨이라는 단어가 제일 발생한 곳이 에덴이에요.
‘에덴’이라는 이름이 ‘기쁨’이니까.
그곳에서 아담이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과일나무가 많고 강이 흐르고 금과 호마노와 보석이 많아서 기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에 기뻤다는 거예요.
그리고 타락 이후에는 기쁨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이 땅에서는 원래 기쁨이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이야기는 이 땅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말인데, 이 땅이라는 곳은 원래 기쁨이 없는 곳이에요.
이 땅에서 기쁨을 찾는다는 것은 이제부터 어떤 작업이 필요한가 하면 기쁨이라는 말을 도둑질해야 되고, 기쁨을 밀조해 내야 된다는 겁니다.
밀조란 법으로 허가가 안 나는 것을 몰래 숨어서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한 마디로 짝퉁기쁨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치듯이 하늘에 있는 기쁨을 훔쳐온 것은 아닙니다만, 가짜기쁨을 밀조해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너무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욕구의 내용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이런 얘기가 있어요.
아브라함 매슬로우라고 하는 미국의 심리학자,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과 거의 붙어 다니는 아주 유명한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욕구의 5단계 설’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욕구위계이론’이라고도 합니다, 위계라고 하는 것은 hierarchy of needs, 욕구의 hierarchy를 얘기해요.
욕구가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 사람의 이론에 따르면 욕구가 다섯 단계로 계급제 식으로 서열이 매겨집니다.
제일 하위 욕구가 뭐냐 하면 생리적인 욕구, 먹는 것과 자는 것, 아니면 종족번식의 욕구, 그런 것들.
두 번째 단계가 뭐냐 하면 안전에 대한 욕구, 위험이나 재난이나 위기나 아니면 추위,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은 욕구.
세 번째는 애정과 소속의 욕구, 뭔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속에 소속되어서 그들과 서로 교제하며 사랑받고 싶어 하는 그런 욕구.
네 번째가 자기 존중의 욕구, 그런 단체 내에서 자기가 인기 있고 권력을 차지하게 되고 존중을 받게 되기를 원하는 그런 욕구.
마지막으로 자기의 모든 잠재력을 다 인식해서 그 잠재력을 마음껏 꽃피우는 자기계발의 욕구, 이렇게 다섯 단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위계질서로 세워놓았는가 하면, 맨 아래의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두 번째 안전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는,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될 때 상위단계의 욕구로 발전하게 된다’라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대통령이 되어도 드라마에서 누가 짜장면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짜장면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자기계발의 마지막단계인 욕구가 충족되어서 재벌이 되어도 싱건지에 밥 싸먹는 모습을 보면 재벌 사모님께서 싱건지에 밥 싸먹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이것은 hierarchy 식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보면 이 다섯 개의 욕구가 반복 순환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가 위계질서로 세워놓은 것만 잘못이다’라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위계질서로 세워놓은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반박이 됩니다.
‘어떻게 그게 꼭 하위단계가 만족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단계로 가느냐? 그렇지 않다, 1단계와 5단계가 병행해서 존립할 수도 있는 것 아니야?’
그렇죠,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라, 5단계의 단계만 제해버리면 다섯 종류의 욕구로 구분하는 것에 모두가 다 동의하고 있다는 거예요.
심리학자가 철학자가 아니라도 이 다섯 가지의 욕구를 다 공감할 수 있는 얘깁니다.
사람이 나타낼 수 있는 욕구인 이 다섯 가지를 다 포괄할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믿고 있는데, 이게 바로 오해이고, 속고 있는 것이고, 자기도 모르게 사기 치는 것이고, 더 크게 말하면 기쁨을 도둑질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왜 하고 있지요?
이 혼인잔치 비유의 핵심코드가 기쁨이기 때문에, 그 기쁨은 욕구가 전제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욕구 이야기를 하는데, 욕구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이겁니다.
욕구에 대한 어떤 오해가 있느냐?
생리적인 욕구, 먹고 마시는 것, 잠자는 것, 종족번식의 욕구, 이런 것들은 본래 욕구의 에너지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있어서 욕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 안전이라는 것은 욕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 땅 위에서 안전하기를 원하고 이 땅 위에서 종족번식을 하기 원하고,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맛있게 먹기를 원하는 욕구가 정말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라고 한다면, 기쁨은 하늘에 속한 것도 아니고, 최초의 인간이 죄짓기 이전에 살던 땅이 기쁨이라는 뜻의 에덴이 될 필요도 없었던 것이에요.
죄를 짓고 난 이후에도 욕구가 그런 것들로 인해서 채워지면서 기뻐질 수 있는 거라면, 죄를 짓고 안 짓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돼버린다 이겁니다.
사랑과 자기 계발, 이 모든 것들은 욕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욕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의 마음을 욕구하는 에너지로 만들었어요, 무언가를 바라고 그 마음속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욕구 에너지체인 인간에게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 당신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인간의 욕구에 유일한 대상이기 때문에 그 욕구가 채워질 때 나타나는 기쁨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기쁨이라는 게 만들어질 수가 없는데, 타락 이후에 기쁨이 있는 유일한 곳인 에덴,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고 하나님과의 동거가 있었던 그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욕구로 만들어진 자기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끌어들인 욕구의 대상들이 바로 매슬로우라는 심리학자가 규정해 놓은 이 다섯 가지 욕구라 이겁니다.
이건 원래 욕구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갖고 싶다, 우리 마음 안에 채우고 싶다’라는 욕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 인간에게 욕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 마귀가 그 욕구의 대상을 이 땅에 있는 것들로 바꿔놓아 버린 거예요.
자식이 잘돼서 기뻐하기를 원하고, 돈 벌어서 기쁘기를 원하고, 무병장수해서 기쁘고, 성형수술해서 예뻐짐으로 기쁘기를 원하는 식으로 다 바꿔놓아 버린 겁니다.
그러면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바로 초대에 응했어요, 초대에 응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었다는 얘기예요.
예수님을 믿어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의 무리 속에 섞여 교회에 들어왔는데, 그 교회 안에 들어와서 마음이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마음은 욕구의 에너지체예요, 욕구의 에너지 덩어리인 마음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욕구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고 욕구를 채우기 위한 목표물을 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어서 욕구를 채워야 되겠다’고 한다면 마음이 돈을 옷 입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리적인 욕구부터 시작해서 자기계발의 마지막 단계까지의 다섯 종류의 욕구로 옷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위한 잔치, 하늘에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잔치를 위하여 전혀 준비된 자세가 아니라는 얘기예요.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가만 보거나,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실 때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우리 마음이 욕구해야 될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욕구해야 될 대상인 하나님을 욕구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원함으로 하나님으로 채워진 기쁨이 충만해질 때, 그 기쁨에 젖어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마치 결혼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피로연으로 다섯 코스로 되어 진 음식을 내어주시듯이 우리에게 다섯 코스로 된 음식으로 인생에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내 계발을 한다든지 내가 어떤 인간으로 이 땅에서 살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내 하나뿐인 유일하고 제대로 된 욕구인 하나님을 마음속에 채워 넣었을 때, 예복을 바로 입었을 때, 그러니까 혼인잔치에 참여한 자로서 잔치의 주인인 왕의 기쁨에 동참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그 기쁨을 마음속에 갖게 될 때에,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피로연의 코스요리에 불과한 것이지, 그걸 마음으로 욕구하는 것은 왕이 준 예복을 입지 않은 것과 같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마음이 왕의 기쁨에 동참하려는 의지가 없는 거라는 겁니다.
이 예복이 뭡니까?
욕구의 내용이 욕구의 목표물이 곧 우리 마음의 옷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 교제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옷은, 다시 말해 내 욕구의 내용은 예수님의 자리에 서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채워 기뻐하시듯이 그렇게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욕구하면서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생기는 기쁨으로 충만한 것, 이게 바로 예수 믿는 거라는 겁니다.
욕구의 내용을 하나님으로 갖는 것, 이게 바로 예복을 입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여전히 욕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의해서 목표가 정해진다면 마음의 옷이 하나님이 주신 예복을 입는 게 아니라는 거죠.
내 멋대로의 옷을 입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뭘 해주는 거냐 하면 내 마음의 옷을 벗어버리는 것, 이 세상 것을 목표로 해서 기뻐하려고 하는 것, 내 마음의 기쁨을 밀조해내려는 도둑의 심보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겁니다.
하여간 이 땅에서는 기쁨이 없어요.
기쁨을 찾으려 하면 다 기쁨의 도둑들이 되고, 모든 도둑은 하나님이 다 용서하시지만 끝까지 기쁨을 도둑질하는 것, 기쁨을 밀조하려는 것, 내 마음의 기쁨을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욕구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만들어내려고 하는 이 기쁨 밀조업자들은 절대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알고 믿자 이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연합하면 기쁨을 밀조해내려는 도둑놈이 죽고,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에 따라 마음이 같이 따라 올라가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리에 함께 예수님과 연합해서 그리스도 안에 서있게 됩니다.
그때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서로 교제하시면서 하나님을 need 욕구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나도 같이 채워지면서 기쁨을 누리는 이 하늘기쁨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될 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욕구라고 말하는 그런 욕구의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와 사랑과 은혜를 따라서 우리에게 코스요리를 내주시듯이 허락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기쁨도둑으로 사는 것을 십자가로 끝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욕구의 대상을 자의적으로 선정함을 통해 기쁨을 밀조하는 도둑들이 되지 않게 해주시고,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내 마음에 이 세상 것들이 욕구되어 질 때마다 십자가를 먼저 바라보게 해주시옵시며,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하여 하늘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하늘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욕구불만으로 하루하루가 지나다 보니
닭쫓던 개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