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는 조금 무더위가 일찍 찾아왔다.
7월 초부터 무척 더워 예비군 훈련때도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갑자기 새로 보충된 병력이 원래 있던 병력보다 많아서 한 내무반에서도 누가 누군지 모를 지경이였다.
훈련소에서 새로 온 신병부터 월남 파병에서 돌아 온 병사까지 있었지만 서로 바빠서 누가 누군지 알아 볼 시간도 없었다.
나야 내가 맡은 병기계만 잘 보면 되니까 그리 신경쓸 일도 없어 매일 기관총 한 정을 창고 앞에 놓고 분해해 놓으면 됐다.
기관총을 판초우의를 펴고 분해해 놓으면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하루는 조금 떨어진 일종창고 앞에서 보급관과 식당 식사관이 가끔 내쪽을 보면서 한참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참 있다 나를 오라고 부르더니 나보고 일종계를 맡아 보란다.
솔직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창고를 열고 쌀이나 부식을 내어주는 일은 싫었다.
싫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할 줄 모른다고 했더니 무조건 하란다.
일종계는 두 명인데 사수였던 병장(월남에서 귀대한)이 뭔가 사고를 쳤는지 얼굴도 익히기 전에 다른 부대로 가버렸다.
조수였던 한상병이 나보고 제가 알아서 다 할테니 걱정말고 맡으란다.
결국 병기계와 일종계를 모두 맡는 꼴이 되었다.
내무반에서는 힘들겠다고 걱정을 하는데 나는 한상병이 있기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관구에 가서 주,부식을 수령해 오는 것은 모두 한상병이 하고, 나는 그것을 취사장에 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였다.
취사장 사람들은 나와 친했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일종계를 맡은 것을 좋아했다.
훨씬 후에 내가 일종계를 맡게 된 사유를 알게 되었다.
고집은 있지만 내가 고지식하고 좀 멍청해 보여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였단다.
매일 하루 세 번씩 창고문을 열고 쌀과 보리쌀, 그리고 가끔 고추장,된장 등을 무게를 달아서 보내준다.
그런데 며칠 안가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쌀은 80k로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에 들어 있었다.
이것을 정량으로 저울에 달아서 내 주었는데 한 가마니를 다 내 주면 정확히 3k가 부족했다.
처음 한 가마니때는 내가 실수를 했나? 했는데 두 가마니째 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조수인 한상병도 모르겠단다. 여지껏 문제 없었단다.
옛날 우리집이 신당동 중앙시장에서 쌀 도매상을 했다.
어릴 때부터 보아 왔던 80k 짜리 쌀가마니다.
당시 시골에서 쌀을 사다가 가게 안에서 다시 정량을 재어서 담아 내는 일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 당시 시골에서 쌀을 팔 때는 80k보다 조금 더 넣어서 묶었다.
이것을 다 풀어서 80k정량을 만들어 팔면 2~ 3k의 쌀이 수익이 되는 것이였다.
그러면 쌀 80k와 가마니 무게를 합치면 대략 83k가 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후 한 상병이 쌀 수령을 해 왔을 때 나는 저울을 가져다 쌀 한가마를 재어 보았다.
딱 80k가 표시되었다.
나는 군생활에서 처음으로 욕을 했다.
"너 이시키! 똑바로 말해. 쌀 80k 가져왔지? 그런데 가마니 무게를 더 하면 80k가 더 나와야 하잖아!!"
나는 처음엔 한상병이 수령을 해 오면서 때어 먹은 줄 알았다.
한상병은 펄쩍뛰며 자기는 모르는 일이며 관구에서 주는 대로 받아 왔을 뿐이라고 한다.
나는 보급관을 불러 이 사실을 보고하며 나는 이것 못하겠노라고 말을 했다.
한 가마당 3k씩을 내가 왜 변상해야 하느냐며,,,,,,,
물론 아주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한상병이 자기가 알아서 다 처리 할테니 그냥 하던대로만 하시라고 애원을 한다.
결국 은근히 또 한번 '고문관'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일 때문에 내 일은 조금 수월해지고 책임은 없어졌다.
그리고 동원예비군이 입소했을 때 자연스레 이 일이 해결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