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야기 1편---인간 김시민(金時敏)
아들아, 아빠는 네게 쓰는 역사이야기를 통해 충무공하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다들 떠올리지만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은 이는 조선시대에만 9명에 이른다고
네게 얘기한바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충북 괴산 충민사)
우리 진주가 자랑하는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 장군의 시호도 충무(忠武)니까
김시민 장군도 그 9명의 충무공 중의 한분인 셈이지.
그래도 우리가 진주에 사는 사람들인데 그런 도리로 김시민 장군이 충무공인 것도
알아야 하고 다른 이보다 좀더 특별하게 생각해 줘야 하지 않을까..
한번 그런 생각을 해봤다.
진주성과 남강 유등축제
진주에서도 진주성을 정비하고, 7년 조일전쟁의 중심에 섰던 1592년 10월 진주대첩
그리고 계사년 1593년 6월의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널리 알리고..
이와 관련해서 5월엔 논개제를 10월엔 남강 유등축제를 통해 그를 기억하고 있단다.
고 진주성 병풍도와 김시민 장군 선무공신교서 (국립진주박물관)
이뿐이냐.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일본에 발견된 것을 국민의 힘으로 환수해온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선무공신교서가 있고,
그분을 배향한 창렬사에서는 전몰장병과 함께 기리는 향사(享祀)도 받들고 있으며
김시민대교와 충무공동이란 지명(地名)으로도 그런 기억을 이어 가려는 노력을 한다.
다만..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7년 조일전쟁 최대의 승리라는 진주대첩이
한산대첩과 행주대첩에 묻혀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덜 알려졌고,
그 전투를 이끌었던 충무공 김시민 장군도 짧은 생애와 활약했던 기간 그리고
기록의 부족으로 생각만큼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그 위상에 걸맞는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겠다.
진주대첩과 계사년 진주성 전투에 대해 네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자세히 다루었으면서도
정작 그 대승리의 역사를 이룬 주역인 김시민 장군에 대해선 깊이 다루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미치더구나.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떻게 싸움을 준비하고 싸워 이겼는지..
우리는 그에 대해 깊이 제대로 알지 못하였으니..
당연히 그의 진면목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아빠의 시선에 담긴 인간 김시민, 명장(名將) 김시민을 말하려 한다.
괴산 충민사와 충무공 김시민 장군 묘소
아들아, 아빠, 엄마는 너와 함께 진주성과 진주성 내의 국립진주박물관, 창렬사
그리고 충북 괴산의 김시민 장군 묘소와 그를 배향한 충민사를 찾아 참배하면서
그의 흔적을 따라 갔었다. 너도 그 기억을 되살려 보면 더 이해가 잘될 것 같구나.
충무공 김시민(忠武公 金時敏, 1554~1592)장군의 관향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출생지는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백전촌이었다.
김시민 장군상 (충남 천안시)
아버지 김충갑(金忠甲, 1515~1575)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문인으로 언론간쟁과
감찰을 담당하는 사헌부(司憲府)의 여러 벼슬을 역임했지만 조광조 선생이 희생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오랜 유배생활을 했던 인물인데..
김시민 장군은 김충갑 선생의 셋째 아들이지.
숙부인 김제갑(文肅公 金悌甲,1525~1592)선생은 7년 조일전쟁 당시 원주목사로
원주 영원산성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했던 인물로 괴산 충민사에 김시민 장군과 함께
배향된 인물이란다.
또 아우인 김시약(金時若, ?~1627)장군도 7년 조일전쟁 때 괴산에서 창의한 의병장으로
시작하여 7년 조일전쟁 때 군관에 발탁되어 군공을 세웠으며
후일 정묘호란 때 평안도의 창성부첨절제사로 후금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던 인물이다.
이렇게 보면..충의가 남다른 대단한 명문가로서 면모를 보여준 집안의 모습이라,
이런 가풍의 집안에서 성장한 것도 김시민 장군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퇴계 이황 선생의 문인이자 정통 성리학자의 길을 갔던 아버지 김충갑 선생과
숙부 김제갑 선생을 봐도 김시민 장군의 집안은 문인집안이고
그런 분위기를 감안하면 아마도 김충갑 선생은 김시민 장군도 그분처럼 문과에 응시해서
문인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를 내심 원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기골 장대하고 무인기질을 보이는 아들 김시민이 장손도 아닌 셋째 아들이니..
게다가 넷째 아들 김시약도 문(文)보다 무(武)에 소질을 보이니..
어쩌면 김충갑 선생은 아들들이 소질있고, 그들이 원하는 길을 가도록 지켜봐주는
아버지 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은 고려 때 명장으로 이름 날린 김방경 장군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집안이 문인의 길을 걷지만 그 속에 내재된 무인의 피가 발현된 후손이
바로 김시민 장군이었다 볼 수도 있겠구나.
사사처 (충남 천안 병천면)
김시민 장군이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했다..
전쟁놀이하면 늘상 대장 노릇하였고, 천안의 고향에 사사처(射蛇處)라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히던 이무기를 퇴치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그냥 그랬구나 하고 생각하면 되지..
크게 의미를 둘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김시민 장군의 성격이 상당히 강했던 모양이야.
초반 벼슬살이가 평탄치 않더구나.
충무공 김시민 장군
1578년 나이 스물 다섯에 무과에 급제하고, 종6품 훈련원 주부에 보임 되었다면
아마도 무과 입격 성적이 거의 최상위급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리고 겨우 3년 후 부평부사가 되어 있는데..부사는 종3품인 고위 무관이지.
그런데 1581년 부평부사로 있을때 구황(救荒)에 진력하지 않았다는 경기어사의
상소로 파직되었다는 기사가 조선왕조 선조실록에 나온다.
1583년 함경도 두만강 일대의 육진(六鎭)을 최악의 위기로 몰아 넣었던 대사건..
야인여진(野人女眞)이 일으킨 니탕개의 난(尼湯介의 亂)이 발발했고,
야인(野人)으로 지내던 그는 도순찰사가 되어 난을 진압군을 이끌게 된 나암 정언신
(懶庵 鄭彦信,1527~1591)의 휘하 장수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복직했단다.
그리고 복직해서 맡게 된 종5품 훈련원 판관의 자리도 오래가지 못했어.
이번엔 상관인 병조판서와의 충돌이 문제가 되었지.
무관으로서 병장기가 녹슬어 쓸만한 것이 드물고, 군기(軍紀)가 해이 해져서..
유사시 큰 화가 될 것이 염려되니 대비테세를 갖추자고 시정할 것을 건의했더니
병조판서가 건의를 물리치며 태평성대에 민심을 혼란케 한다고 오히려 책망했고
김시민 장군은 이에 반발해서 그대로 사직서를 던지고 나왔다고 하는구나.
아니..전해지기로, 그분은 아주 격렬하게 상관에게 맞섰지.
김시민 장군이 이때 격분해서 '장부가 어찌 이런 모욕을 받을 수 있는가'하고는
병조판서 앞에서 전립(戰笠)을 벗어 발로 밟고 그대로 사직했다고 하니..
자존심 강하고 굽히지 않는 강한 소신과 불같은 성격을 가진 천상 무인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진주성 촉석루 전경
또다시 복직해서 군기시(軍器寺) 판관을 거쳐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어
진주에 부임했는데, 진주판관은 영남의 대읍인 진주목을 관할하는 정3품 지방관인
진주목사를 보좌하고 행정과 군정에 참여하는 중요한 자리로 진주목의 사실상 2인자에
해당하는 중요한 자리였지.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풀어 보자면..
김시민 장군이 앞에서 봤듯이 상관에게도 굽히지 않는 강한 성격이라 다루기 힘든
인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심상찮은 일본의 상황에 비추어 능력있는 무관을 차출하여
남쪽으로 보내는 이때에 ..
전쟁지역이 될 것이 유력한 남해안의 대읍이자 경상도와 전라도 중간의 요지인
진주를 맡겨도 좋을 만큼 능력있고 일 잘한다고 조정이 인정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충장공 정운 제독
비슷한 사례의 인물이 바로 또다른 충무공인 당시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그의 휘하에서 녹도만호(鹿島萬戶)로 활약했던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1543~1592) 제독이란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래도 문인의 면모를 많이 가진 충무공 이순신 제독보다는 6년 먼저 군문에
들었으면서도 강한 성격으로 상관들과 충돌이 잦아 평탄치 않은 벼슬살이를 한 탓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수하에 있게 되었지만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고 인정받아 녹도만호에 제수된 충장공 정운
제독과 더 비슷한 유형의 인물같아.
재미있는 것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충장공 정운 제독은 모두 전날 함경도
북방에서 니탕개의 난 당시 여진을 토벌하는데 활약하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했다는 것도
공통점이구나.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7백척이 넘는 일본 군선이 나타나며 7년 조일전쟁이
발발하였고, 부산진과 동래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영남이 무너졌다.
영남지방의 고을을 책임진 수없는 지방관과 지방의 중요한 진과 군영을 맡은 장수들이
도주하고 자멸하는 이 시점에 진주목사 이경은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그곳에서 병환으로
곧 사망했어.
진주목사 이경을 따라 지리산으로 피신한 것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 같다만,
김시민 장군이 이때까지 보여온 성격과 그 행보가 비겁하거나 무책임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학봉 김성일 선생의 명으로 공석이 된 진주목사 직을 대리하고, 이후 행적을 보면
군비를 갖추고, 군사를 부려 전쟁을 수행해 가는 그 모든 일처리가 막힘이 없음을 볼때
평소 준비한 바가 많았고, 그를 따르는 군민의 모습을 봐도 또 그렇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첫번째 이야기는 인간 김시민에 관한 것으로 그의 출생과 가계,
출사 후 부터 7년 조일전쟁 직전까지 행적을 중심으로 풀어보았다.
다음 이야기는 김시민 장군의 7년 조일전쟁 기간 행적..명장 김시민 장군의 모습을
좀더 깊게 다루어 볼 생각이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