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묘역에 대리석 둥근 기둥에 넝쿨 장미 문양을
아름답게 조각한 양화진에서 제일 높이 솟아있는 묘비(墓碑)가 있다.
이 묘비는 인천지역에 거주했던 중국 상공인(商工人)들이
"졸리"를 추모하며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헨리 B. 졸리"(Henry Bencraft Joly)는 1858년
터키의 "스미르나"(Smyrna : 지금의"Izmir"(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외교관인 영사(領事)로 중국 상해에서 근무하다가
구한말 조선의 "주한 영국 부영사"로 부임하여 인천에서 근무했다.
1896년 영국 작가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여사가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는
그의 안내로 조선의 문화를 외국에 바르게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1898년 별세하여 처음에는 "인천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 후 딸 "릴리안"(Lilian)에 의하여 부모의 유해를 1950년대에 양화진으로 옮겼다.
아래의 글은 이 묘비가 서게 된 사연을 찾아 낸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이정희 교수님의 글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묘비의 앞면 위쪽에는 영어로
“SACRED TO THE MEMORY
HENRY BENCRAFT JOLY
BORN1858 DIED 1898”
로 씌어 있다.
묘비 아래쪽에 쓴 글을 다른 분들은
“Now rests in Peace, perfect peace.
not having died but only gone before in 1898" 이라고 했고,
(이제는 평안, 완전한 평안 속에서 안식한다.
죽은 것이 아니라 1898년이 가기 전에 또 다른 여행을 떠날 뿐이다)”
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PEACE PERFECT PEACE,
HE IS NOT DEAD BUT ONLY GONE BEFORE.
(완전한 평안 속에서 안식한다. 그는 죽지 않고 오직 또 다른 여행을 떠날 뿐이다)”
라고 해야 맞다.
아마도 이 분의 사망날자를 기억하기 위해 사망년도를 넣은듯하다.
그런데
"HENRY BENCRAFT JOLY"라면 서양인인데 이 사람에게 왜 중국식 묘비가 세워져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묘비의 뒷면으로 가 보았다.
묘비의 뒷면에는 한자로 다음과 같은 글자가 각자(刻字)되어 있었다.
大英駐韓仁川領事館周驪君墓碑
嗚呼周公 徳業昭彰 惠澤流長
俾我華商 言念不忘 善人云亡
泲泗沱滂 嗚呼周公 美玉善藏
大清光緒二十六年二月吉日
仁川 華商 恭泐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대영 주한 인천 영사관 졸리 군 묘비
오호 졸리 공이여 인덕과 공적이 너무나 커서 그 은혜와 덕택은 유구하리라
우리 화상은 말과 생각에서 (졸리 공을) 잊지 못할 것이라 선인이 서거하니
눈물 콧물 줄줄 흘러내리네 오호 졸리 공이여 아름다운 옥에 고이 잠드소서
대청광서26년(1900년) 2월 길일
인천 화상이 돌에 새겨 삼가 드립니다.
"졸리" 부영사의 인천부영사관 재임 시기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중요한 사료를 찾아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인천항안"(仁川港案)이었다.
이 사료는 1896년부터 1905년 사이의 조선 정부와 인천항 "감리서"(監理署)간의 왕복 문서를 정리해 놓은 것으로,
"졸리" 부영사가 "인천 부영사관"으로 재임한 1897년 9월 9일부터 1898년 6월 23일까지의 기간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기간의 "인천항안"을 찾아보니 "졸리" 부영사가 자주 등장했다.
대부분 인천 "화인"(華人)의 보호 활동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청일전쟁 직후 조선 정부는 일본의 압력으로 청국 정부와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을 폐기함으로써 양국 간 국교가 단절됐다.
그리하여 조선 주재 청국 공관은 모두 폐쇄되었고 청국의 관원들은 모두 귀국했다.
"화인"(華人)은 "무조약국 인민"(無條約國 人民)이 되었기에
이전의 영사 재판권과 같은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영국 영사관이 1894년 7월 말 청국 정부를 대신해 "화인"(華人)을 보호하기로 하고,
조선 정부도 이것을 허가했다.
여기에서 "화교"(華僑)와 "화인"(華人), "화상"(華商)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화교"(華僑)는 "중국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공민"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외국에 살지만 중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반면 "화인"(華人)은 "외국에 거주하며 국적은 해당 국가로 되어있는 중국인의 후손"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러면 위의 "인천 화상"( 仁川 華商)은 "화인"(華人)이 아닌 "화교"(華僑)라고해야 옳을듯하다.
이때부터 양국 간 국교가 정상화되는 1899년 12월 말 "한청통상조약"이 발효 때까지
5년 5개월여 동안 영국영사관이 화인(華人)보호 활동을 맡았다.
"졸리" 부영사는 1891년 중국의 6대 기서(奇書)중 하나로 알려진 "홍루몽"(紅樓夢)을
“Hung Lou Meng: The Dream of the Red Chamber”란 제목으로 출판했으며,
인천에 부임하기 전 중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중국어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천 "청국조계"(靑國 租界)의 유지와 권익 보호, 화인(華人)과 조선인 간 다툼으로
발생한 재판에서 화인(華人)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변론을 전개,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인천 화상(華商)은 1898년 6월 23일 "졸리" 부영사가 격무로 인해 병환으로 사망하자,
1898년 7월 그의 화인(華人)보호를 위한 헌신적인 활동에 감사의 표시로 묘비 제작에 착수했다.
또한 남편을 잃은 "졸리" 부인이 소송에 휘말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졸리" 부영사에 대한 고마움의 간접적인 표시로 금전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총영사관이 이러한 것이 적법한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자 시간이 걸려,
묘비가 "인천 외국인묘지"에 세워진 것은 1900년 2월이었다.
그후 그의 막내 딸 "릴리안"(Lilian)이 1950년대 현재의 양화진외국인묘원으로 이장했다.
이 묘비는 청일전쟁 직후 조선의 영국영사관이 화교(華僑)보호 활동을 했다는 상징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졸리 가족의 묘.
아내 클라라 A. 졸리(Clara Agnes Lillie Joly)는 1860년 1월 1일 출생하였다.
주한 영국 영사 "헨리 졸리"와 결혼하여 인천에 거주하였다.
그는 남편이 별세한 뒤에도 조선에 머물면서 순종(1907-1910)이 왕세자로 있을 때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그녀는 조선에서 1927년까지 살다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 있는 아들을 찾아 1927년 조선을 떠났다.
그 후 "북경"(Peking)에 있는 또 다른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1928년 3월 28일 별세했다.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 아래에는
"THE ETERNAL GOD IS THY REFUGE AND UNDERNEATH ARE THE EVERLASTING ARMS.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영원하신 하나님은 피난처이시고, 그 영원하신 팔로 안으신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릴리안 A. 휘트만"(Lilian Agnes Bencraft Joly Whitman 1896~1968)
"졸리" 부부의 막내딸로 서울에서 석유회사 사무원으로 1920년대까지 일하면서
"휘트만"(Grant Whitman)을 만나 1927년 서울에 있는 영국 성공회 성당(Anglican Cathedral)에서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한ㆍ일 스탠다드 석유회사에서 기독 실업인으로 30년간 일하다가 퇴직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매릴랜드의 "베데스다"(Bethesda)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릴리안"은 1968년 별세하였다.
그가 별세하자 남편 "그랜트 휘트먼"은 부인 "릴리안"의 유해를 양화진으로 운구하여
그 부모가 묻혀있는 "졸리 가족묘지"에 안장하였다.
묘비아래에는
"LORD IN THY MERCY GRAND US SAFE LODGING AND HOLY REST AND PEACE AT THE LAST."
(주여 당신의 긍휼로 우리를 받으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거룩한 안식과 평안을 주옵소서)”
라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