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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 - 죽어서도 남의 땅에 묻히다 |
경남 중서부의 교우촌 형성 과정
오늘 진주(문산 성당)에서 함안(대산 성당)을 거쳐 김해로 왔다. 박대식 빅토리노 묘가 김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코스로 밀양으로 가서 명례성지를 순례하는 것으로 일과를 마감한다. 경남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박대식 빅토리노 묘의 주소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30(책골). 도로명 주소는 김해시 진례길 223-7.
앞에서도 말했지만 소백산맥 이남 영남, 특히 중서부 경남지역은 천주교 신앙이 비교적 늦게 들어온 지역이다. 이는 초창기 천주교 신자들이 서울과 경기지역에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결과 이동이 쉬웠던 충청, 전라지역에 비해서도 늦은 편이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이유로 마산 교구가 위치한 서부 경남지역에서는 박해 초기였던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때는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국적인 영향을 미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지역은 비교적 안정된 교우 공동체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문산, 함안(대산), 고성, 통영(황리), 진영, 거제도에는 큰 규모의 교우촌이 있었다.
순교자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는 누구인가?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1812-1868년)는 1812년 경상도 김해 예동, 현재의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詩禮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들 삼형제(종립,종반,종철)를 두었다. 그가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입교한 이후 부친 박만혁과 형제 대붕, 대흥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병인 박해를 만났다. 다행히 이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68년 7월 7일 무진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와 그를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이때 형 박대홍과 예비신자인 조카 박수연(47세)도 함께 체포되었다.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는 감옥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이나 심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다.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자 김해 관아에서는 상부 관청인 경상 감영(監營)으로 보내었다. 대구로 압송된 그들은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결국 경상감사는 박대식과 그의 동료들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따라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박대식은 조카 박수연과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박대식의 나이는 56세였다. 한편 박대식 빅토리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순교자의 묘지가 부활되다
경상감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머리를 높이 매달도록 했다. 이를 효수(梟首)라고 한다. 극악 죄인이나 반역자에 해당되는 형벌이었다. 가족들은 순교 소식을 듣고 바로 형장으로 달려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왔다. 그리하여 당연히 선영(先塋)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미 가문에나 향리에서 쫓겨난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관청이나 주위로부터 2차 피해가 따를 것이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책골) 문화 유씨(文化柳氏) 문중 산에 드러나지 않게 봉분 없는 평장(平葬)으로 매장했다.
이렇게 가족들만 알고 무덤을 보존해온 지 90여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은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나란히 이장해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1966년 4월 15일 당시 진영 본당 주임이었던 유창호(劉昌鎬) 토마스 신부의 주선으로 순교자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후손들의 말에 의거하여 세례명을 노렌조’(라우렌시오)로 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 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교회사가(敎會史家) 마백락 클레멘스와 순교자의 4대 손인 박영식 요아킴의 노력으로 2001년 8월 순교자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을 밝혀냈다.
순교자 박대식의 묘는 이곳에 시신을 모신 후 한 번도 이장하지 않은 무덤이다. 대체로는 순교자의 무덤을 발굴하여 연고지로 이전하여 성지로 받드는 것이 보통인데 박대식 빅토리노는 예외를 보여주고 있다. 소박하지만 무덤의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유해를 발굴하여 다른 장소로 옮겨 보기 좋게 다시 조성하거나, 성당으로 옮겨 많은 신자들이 참배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다른 방법으로는 구한선 타대오나, 신석복 마르코의 경우처럼 원래의 묘도 보존하고 옮겨 모시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두 곳 모두 관리하려면 어렵기도 하고 또한 순교자 묘에 대한 관심이 분산되는 문제도 있다. 그리고 유해 없는 빈 무덤이 큰 의미가 있을 리 없다.
박대식 빅토리오 성지를 관리하는 진례 본당에서는 매년 묘소에서 순교자 후손들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고, 마산교구 또한 장기적인 차원에서 성역화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오후 3시경에 순교자 묘지 입구에 도착했다. 달려온 길이 철책으로 막히고 왼편에 성지 안내 표지판이 서있다. 100m 짧은 거리로 안내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훨씬 멀고 마지막 구간은 경사가 급하여 그리 쉬운 길도 아니다.
순교자 묘에 올라보니 그야말로 전통 분묘와 다름이 없다. 많은 순교자의 변형된 묘역 중 이런 곳도 한 곳 정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순교자 부인의 무덤과 쌍분으로 조성되어 외롭지 않아 보인다. 무덤 뒤에는 십자가가 서 있고 상석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 교우의 무덤이라는 정도만 말해 줄 뿐이다. 상석 앞에는 나지막한 탁자형 제대가 있다.
묘비도 세로로 세워진 전통 비석 모양을 하고 있다. 殉敎密陽朴公大植노랜조之墓. 세례명이 비석을 세울 당시의 노렌조(라우렌시오) 그대로다. 성인 라우렌시오는 ‘월계수’라는 뜻인데 초기교회 시대 순교자이다. 따라서 순교자의 본명에 어울리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잘못 되었다니 빅토리노로 바루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박대식 복자 묘 아래에는 몇 기의 분묘가 있다.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상석이 있는 묘도 있어 확인해 보니 學生文化柳公諱興珠之墓 配孺人光山金氏雙封. 문화유씨 유흥주의 묘와 부인 광산김씨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순교자 박대식의 묘가 문화 유씨의 산에 조성되었음이 사실임을 말해준다.
옛글에 석 자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백 년 동안 이 몸을 보존하기 어렵고, 이미 석 자 무덤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백 년 동안 무덤을 보존하기 어렵다.(未歸三尺土 難保百年身 已歸三尺土 難保百年墳) 라는 구절이 있는데 참으로 그렇다 그렇게 몸을 소중히 아끼지만 100년 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며 100년 무덤이 보존 되는 것이 얼마나 될까? 무덤도 언젠가는 파헤쳐지고 그 위에 소먹이는 집 아이가 꼴을 베고 토끼가 굴을 파는 날이 오지 않는가?
그에 비하면 순교자 박대식 빅토리노처럼 한번 잠든 유택이 백년이 넘게 유지 관리되고 순교자로 현양을 받는 것은 어쩌면 기적 같은 영광이다.
4시가 다 되어 다음 마지막 순례지인 명례 성지로 향했다.
명례 성지 -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하소서 |
명례 성지의 주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도로명 주소 -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3).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인 명례 성지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육로와 뱃길이 모두 나 있는 교통의 요지다. 명례(明禮)의 옛 이름은 멱내, 또는 미례였는데 이것이 변음이 되어 명례로 굳어졌다. 명례방 김범우의 묘가 밀양에 있다고 하여 한국 천주교 초기 공동체인 김범우의 ‘명례방’과는 관련이 없다. 한자로는 ‘뇌진(磊津)’이라고 하는데 이는 ‘돌무더기가 많는 나루’라는 뜻이다.
명례 성지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순교 복자 신석복 마르코가 태어난 곳이며 순교 후 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도 순교자의 후손이 이곳에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둘째, 1897년에 본당으로 승격된 명례 성당은 마산 교구의 첫 본당이며, 이는 대구 계산성당(1886), 부산 범일성당(1890), 왜관 가실성당(1895)에 이어 영남지역에서 네 번째 설립된 본당이다. 서울 지역에서 명동 성당에 이어 두 번째 성당인 약현 성당이 1891년에 설립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시기적으로 빠른 가를 알 수가 있다.
셋째, 강성삼 라우렌시오(1866-1903년) 신부의 사목 열정이 녹아 있는 곳이다. 강성삼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45)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1849)에 이어 세 번째 서품된 한국인 사제로, 1896년 4월 26일 서울 약현성당에서, 서품을 받은 후 명례 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본당의 기초를 다지느라 노력했다. 1903년 건강이 나빠 37세로 이곳에서 선종했다.
신석복은 누구인가?
순교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1828년 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더러는 누룩과 소금 행상을 하면서 살았다. 당시 이곳에는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도 정착해서 살았는데, 신석복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되었다고 추정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은 그가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바로 명례에 와서 그의 집을 찾아 들이닥쳤다. 그러나 마침 이때 순교자는 행상을 나가고 집에 없었다. 포졸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가 창원 마포에 장사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돌아오는 길목인 김해 한림면 가산리 길에서 며칠을 기다렸다가 체포하여 즉시 밀양으로 압송했다.
밀양 관아에서 머무는 동안 무수한 형벌이 가해졌으나 배교하지 않자 대구로 압송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안 형제들이 급히 돈을 마련해 관아로 가서 포졸들에게 주고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신석복 마르코는 형에게 “한 푼이라도 주지 말라.”고 했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까지 가는 동안 많은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결국 대구로 압송된 신석복은 경상감영에서 다시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고, 거절하자 교우촌 정보를 얻으려는 관장으로부터 혹형을 받았다. 9일 동안 감옥에 있으며 수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지만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끝내 교수형을 집행했다. 이때가 1866년 3월 31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순교자 묘의 전승 과정
신석복 마르코가 경상감영에서 순교하자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묘지가 소속된 진영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버려져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진영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하여 비석과 제대를 세우고 관리를 해 왔다. 이후 고향 명례에서 성지가 조성된 되자 2018년 다시 유해를 발굴하여 돌아와서 명례성지 신석복 마르코 성당 부활경당에 안치하고 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 많은 싹을 맺는다고 했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로 인해 가족과 형제들은 훗날 모두 입교했다. 신석복 마르코의 미망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고, 아들 신 이냐시오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인 신순균 바오로는 후에 사제가 되었다.(1935년 수품, 1948년 선종) 지금도 순교자의 4대 후손이 명례리 상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명례 성당의 발전과 부침(浮沈)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된 명례에 신자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전남 곡성에서 비롯된 정해박해(1827년) 이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와서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강 건너 김해시 한림면과 생림면에 살던 교우들과도 교류를 가졌으며 병인박해 때 많은 교우들이 잡혀 갔지만 박해 후 다시 모여들었다.
명례 본당은 개항 이후 경남 지역 첫 본당인 부산 본당 주임이었던 파리 외방전교회 죠조(Jozeau,趙得夏,1866~1894, 모세) 신부의 사목 방침에 따라 경남 중부 지역에 본당을 신설해 부산의 서쪽을 전담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신자들의 열망으로 명례 공소는 1897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강성삼(姜聖參, 1866~1903, 라우렌시오) 신부가 발령받게 되었다.
강성삼 신부는 1866년 충청도 홍산 내대(오시대밭)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박해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병인박해 때 양화진에서 순교하였고, 외할아버지와 외숙은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1881년 말레이반도 페낭 신학생으로 유학을 가서 어린 나이에 외국 생활을 하면서 풍토병과 폐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고 1890년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치고 1896년 4월 26일 약현 성당에서 강도영(마르코),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와 함께 외국 아닌 국내에서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부산 절영도(지금의 영도)에서 잠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하였고, 곧 밀양 명례 주임으로 활동하다가 풍토병이 악화되어 1903년 9월 3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강성삼 신부의 묘비는 삼랑진 성당, 언양 성당에 있으며, 묘소는 부산 성직자 묘역에 있다
1903년 초대 강 신부가 선종하자 명례본당은 다시 공소가 되었고 마산 본당에 속했다. 명례 성당은 그 후 본당 소재지가 이전함에 따라 공소가 되었다가 한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성당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1926년 새로 부임한 권영조(權永兆, 1901~1965, 마르코) 신부가 기와로 된 성당을 지어 1928년 축성식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이 성당은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었다. 지금의 성전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이다. 이 건물은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돼 있는 등 전국에 몇 개 안되는 되는 오래된 건물 형태로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느끼게 해 주며 건축사로도 가치가 높다. 지금은 명례 성당 주보를 따라 성모 승천 성당으로 부른다.
명례 공소는 권영조 신부가 부임하며 다시 본당으로 재 설립되기도 했으나 1930년 삼랑진으로 본당 소재지를 이전하며 다시 삼랑진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이후 진영 본당을 거쳐 현재는 수산 본당 관할 하에 있다.
명례 성지의 개발
마산교구는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터 인근에 있는 명례 성당(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을 성역화하기 위해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명례성지조성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를 구성하였다.
이리하여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방문한 신자들에게 명례 성지의 배경과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그에 앞서 2007년 4월 매입한 입구의 한옥을 보수해 그해 8월 강성삼 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했다. 또 2010년 개인 소유의 축사로 변해버린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생가 터와 주변 사유지 일대를 매입하고 8월에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명례 성당과 그 일대를 경상남도 문화재로 신청하여 2011년 2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1월 7일부터는 명례 성지 담당신부가 부임하여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신석복 순교자 생가 터에 있던 축사를 이전 철거한 뒤 6월 10일 사제관과 생가 터 축복식을 가졌다.
2018년 5월 19일 교구장 배기현 주교의 주례로 신석복 마르코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2006년 신석복 복자의 생가 터를 발견한 지 12년 만이고, 2017년 3월 4일 성당 기공식과 함께 새롭게 성역화 사업을 추진한 지 14개월 만의 일이다. 신석복 마르코 성당은 언덕 아래에 낮게 세워졌지만 녹아 사라지는 소금처럼 자연스럽고 드러나지 않게 지역교우들의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오후 4시 반이 거의 되어서 성지 마을에 도착. 성지 바로 밑에 비석 하나가 나타난다. 金節婦孺人濟州高氏之閭(김절부유인제주고씨지려). 김씨 가문의 제주고씨 부인의 정절을 찬양한 정려비(旌閭碑)이다. 남편을 위해서 헌신한 부인을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개중에는 남편이 죽자 핏덩이 자녀를 두고 순사(殉死)한 절부(節婦)도 있어 오늘날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개인을 위한 순사이든, 나라를 위한 순국이든, 종교를 위한 순교이든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한 마음은 동일하다. 이런 절부(節婦)의 마을에서 신석복 같은 순교자가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성지 표시와 신석복 기념성당이라고 붙은 시멘트 기둥에 안에 호젓한 황국화 꽃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안내 표지판이 가지런히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명례 성지에 대한 해설이고 하나는 관내 시설 안내도이다. 꽤 복잡하게 안내되어 있다.
라우렌시오 집
꽃길이 끝나자 처음 나타나는 건물은 강성삼 초대 주임의 본명을 딴 라우렌시오 집인데 식당과 카페, 성물방과 사무실 등으로 사용되는 종합 안내 센터이다.
성모동산
안내 센터를 지나 옛 성지의 중심이 되는 성전으로 가는 도중에 왼쪽으로 드넓은 잔디밭이 있고 한편에 커다란 성모상이 자리한다. 성모당이라고 안내되어 있는데 성모동산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장미로 수놓은 대좌 위의 성모상은 피에타 상의 포즈를 하고 있으나 죽은 예수님을 안고 있지는 않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순례객들을 안으시려는 것 같다.
옛 성전 - 성모승천 성당
앞에서 말했듯 명례 성지의 중심이 되어온 이 건물은 1926년에 지었으나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어 지금의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하여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홑처마 우진각지붕이다. 정면에 어칸(중앙칸)에 현관을 두고 별도의 박공지붕을 부가하여 전체적인 평면은 T자형이다.
평면구성은 좌측부터 제의실 1칸, 경당 4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측에 제대를 두고 내부에는 나무기둥과 인방으로 남녀의 사용 공간을 구분하였고 출입구도 남녀 따로 두었다. 공포 양식은 도리만 있는 민도리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3개 있는 3량가(三梁架)이다. 바닥은 마루로 마감되어 있다.
지금은 성모승천 성당이라는 이름이 걸렸고 성전 앞 성모각 안에 촛불이 꺼지지 않고 성지를 밝히고 있다. 엄청나게 높은 종탑이 성지를 지키고 서 있는데 아직 종치는 줄이 그대로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대가 앞벽에 바싹 붙어 있는 트리엔트식 제대이며 남녀석이 분리되어 있다. 제대 뒤 벽에는 성모상과 예수성심상이 좌우로 걸렸고 높은 천정 꼭대기에 장미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는데 매우 앳되고 소박한 자태이다. 벽에는 액자형 십사처가 걸렸다.
성전을 나오면 위로 십자가의 길로 오르는 길이 있고 커다란 돌 제대와 박해시 고문을 가했던 형구들이 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신석복 마르코 성당 가는 길 따라 왼쪽으로 접어들면 널찍한 야외 미사 공간이 나오는데 있는데, 여기에는 생가터를 제단으로 해서 순교탑, 소금 모양 조형물이 둘러졌다. 순교탑은 하늘나라를 향한 순교자의 믿음의 열정을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었고, 순교탑 옆의 야외 미사 계단식 객석에는 소금처럼 자신을 녹여서 신앙을 지킨 순교한 복자 신마르코의 영성을 12개의 소금 형상의 조형물로 표현하였다.
신석복 마르코 성당
신석복 마르코 성당은 야외성전 순교탑과 소금모양 조형물 아래 있었다.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면 성전이 나타나는데 시멘트를 그대로 살린 짓다만 감옥 같은 건물로 요즈음 유행하는 건축으로 이해해야할 것 같다.
입구 문 옆에는 벽을 뚫고 고개를 내민 듯한 두상 조각이 섬뜩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설명을 보니 순교자의 얼굴과 서로 얽힌 포구나무를 순교의 월계관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언뜻 보기에도 가시관을 쓴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초상화에서 찾는다면 조선 후기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조각상 밑에는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는 순교자의 말이 새겨져 있다.
부활경당
신석복 마르코 성당 옆에 부활경당이 있다. 여기는 순교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십가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성모승천성당 위쪽 언덕으로 오르는 길 따라 조성되어 있다. 마치 목선의 노와 같은 모양이다.
다시 성지 입구 라우렌시오 집에 돌아나왔다. 라우렌시오 집 옆에 아고보의 집이라는 안내 표찰이 붙었는데 임시로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산 성당에서와 같이 신석복 순교자의 유해가 이곳 명례 성지로 이전되었기에 이전의 진영본당 공원 묘지에 있는 순교자의 묘에는 가지 않는다. 따라서 사진으로만 소개한다.
명례 성지 순례를 마지막으로 마산교구의 성지 순례를 마친다. 동시에 마산교구 순교 복자 다섯 분 곧, 신석복 마르코, 구한선 타대오, 정찬문 안토니오, 박대식 빅토리노, 윤봉문 요셉의 순교성지 순례를 마감하면서 마지막 인사로 지금 마산교구에서 실시 중인 교구출신 순교복자 5위의 시성 기도문을 바친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저희 교구의 5위 순교 복자들에게
사랑과 용덕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순교로 하느님과 진리를 증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복자들은 죽어 영원을 선택한 밀알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들의 모범을 본받지 못했고
그들의 순교 정신을 제대로 현양하지도 못했으며,
그들이 전해준 신앙의 유산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저희는 오늘에 발목이 잡혀 내일을 바라보지 못하는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교 복자들의 굳건한 믿음은
저희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세상 안에서 신앙의 진리를 지키려는
저희가 마음을 모아 간구하오니,
저희의 순교 복자들에게 시성의 은혜를 베푸시고
저희도 또한 순교자들의 후예로서 복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24위 복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마산교구 5위 복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