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5. 화염산과 베제크릭석굴
‘서유기’의 무대 투르판 화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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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제크릭 석굴> |
사진설명: 투르판 동쪽 45km 지점 화염산의 무르툭 계곡에 위치한 베제크릭석굴은 수백년간 잠들어 있다 1989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
실크로드가 동·서 문명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충실히 하던 기원 전·후,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가던 구도자들은 대개 인도 서북부지역에서 출발했다. 파키스탄 간다라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하다’(현재 잘랄라바드 부근)에 도착해 여러 날 머문 뒤, ‘바미얀’으로 넘어갔다. 바미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그들은 험난한 힌두쿠시산맥을 가로질러 ‘발흐’(현재 아프가니스탄 마쟈르-이-샤리프)에 이르러 다시금 피곤한 몸을 뉘였다.
여러 날 쉬거나, 한 철 안거(安居)에 들어 몸을 가다듬은 다음 파미르고원을 타고 ‘카슈가르’(중국 신강성)로 넘어갔다. 카슈가르에 있던 수많은 불교사원은 파미르고원을 넘어오느라 몸과 마음이 허약해진 구도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인도 출발 이후 부닥친 온갖 어려움에 지친 구도자들의 마음은 카슈가르의 사찰에서 안식(安息)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카슈가르에서 중국 말(言)을 어느 정도 익힌 구도자들은 서역북로로 갈 것인지, 서역남로로 갈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언저리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들을 연결한 서역남로의 가장 중요한 도시는 우전국(호탄). 현장스님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장안의 당 태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구도자가 북로를 택한다면 구자국(쿠차), 언기국(카라샤르) 등을 지나 고창국(투르판)에 도착하게 된다.
쿠차지역 취재를 마친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도 천산북로를 따라 2002년 9월22일 투르판으로 출발했다. 22일 저녁을 코를라에서 묵은 뒤 23일 투르판으로 향했다. 날씨는 청명했다. 오전10시가 지나자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언기를 지나 달리길 5시간 저 멀리 투르판분지가 보였다. 당나라 현장스님의〈대당서역기〉를 바탕으로 명나라 때 오승은이 지은〈서유기〉의 무대 중 한 곳인 화염산(火焰山)이 있는 도시 투르판. ‘당 삼장 길을 가다 화염산에 막히고, 손행자(孫行者) 한 차례 파초선을 가다듬는다’는〈서유기〉59회부터 61회까지의 무대가 바로 투르판 화염산이다. 그만큼 더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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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투르판빈관에서 펼쳐진 위구르족 전통 민속춤. |
주지하다시피 투르판은 동서 약 120km, 남북 60km에 달하는 자그마한 분지. ‘아시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타림분지의 동북쪽에 부속물처럼 위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포도로 유명한 투르판은 해면 아래 최저 283m나 되는 낮은 저지대인데다, 강우량도 16.6mm 밖에 되지 않는, 무척 더운 곳. 여름 평균기온 45도, 땅 표면온도 60도 내외, 겨울 영하 20도 내외에 달하는, 여름엔 무척 덥고, 겨울엔 매우 추운 기후조건을 갖고 있다.
지리적으로 (서역 전체 입장에서 보면) 투르판은 동쪽 끝 부근에 위치해 있다. 서역의 여러 나라 가운데 중국의 영향이 가장 파급되기 쉬운 위치에 있다. 때문에 중국 측 역사서에는 투르판에 관한 기술이 적지 않다. 한나라 역사를 기록해놓은〈한서(漢書)〉 ‘서역전’에 의하면 전한 시대 투르판엔 차사국(車師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차사’란 천산을 걸치고 우루무치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명칭으로, 투르판은 그 속의 ‘차사전부’(車師前部) 혹은 ‘차사전국’(車師前國)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책에 등장한다. 물론 처음엔 이곳도 중국 령은 아니었다.
서역 2대석굴로 꼽히는 베제크릭사원
전한 소제(재위 기원전 86~74) 때 흉노는 4천기(騎)의 둔전병을 차사에 두고 있었다. 선제 본시(本始) 2년(기원전 72) 한나라는 다섯 명의 장군에게 서쪽으로 진군하라고 명했다. 기련장군 전광명, 도료장군 범명우, 전(前)장군 한증, 후(後)장군 조충국, 호아장군 전순 등에게 20만 대군을 딸려 원정을 보낸 것이다. “차사전국과 흉노가 결탁해 한의 인척인 오손(烏孫)을 침범하므로 오손을 원조한다”는 것이 출병의 이유였다. 흉노의 둔전병은 재빨리 퇴각했지만, 차사전국은 퇴각할 장소가 없었다. 당시 차사전국의 도성은 현재 유명한 관광지인 교하성(交河城). 한의 대군을 맞아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차사전국은 항복했다.
몇 년 뒤인 지절(地節) 2년(기원전 68). 한나라는 다시 대군을 보내 흉노와 동맹을 맺고 있던 차사전국을 정벌하고, 둔전병을 두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엔 역부족이었다. 둔전병을 늘려달라는 차사전국의 요청을 무시한 한나라는 차사전국의 백성들을 한나라로 옮기고, 둔전을 폐지했다. 결국 흉노가 그 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무렵 흉노도 내분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결국 신작(神爵) 2년, 흉노의 일축(日逐)왕이 한나라에 항복, 한나라는 다음 해 쿠차 동방의 오루(烏壘)성에 서역도호를 두고 서역을 경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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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투르판에 있는 포도의 거리. 포도는 투르판을 대표하는 과일. |
일직선으로 뻗은, 우루무치에서 투르판으로 통하는 드넓은 도로를 계속 달린 끝에 투르판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4시. 간단한 음식으로 점심을 떼우고, 곧바로 투르판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은 의외로 잘 꾸며져 있고, 전시된 유물들도 훌륭했다. 차사전국 시대의 것도 있었고, 고창국 시대(오호십육국시대부터 당나라까지)의 것도 있었다. 투르판빈관에 짐을 풀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포도나무로 그늘을 드리운 거리가 중심가에 있을 정도로 곳곳에 포도천지였다. 도시 교외의 포도밭엔 포도 따는 손길들이 분주했고, 들판 곳곳에 포도 말리는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다음날(2002년 9월24일). 투르판 제일의 석굴인, 화염산 중턱에 있는 ‘베제크릭’(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으로 갔다. 투르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45km 거리에 있는, 화염산의 무르툭 계곡에 자리 잡은 베제크릭 석굴은 1898년 러시아의 클레멘츠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화염산 중턱으로 난 길을 따라 계곡 속으로 들어가니 풍경이 급변했다. 계곡엔 나무들도 보였고, 물이 흐른 흔적도 있었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화염산 풍경과 완전 반대다. 계곡 옆에 조성된 석굴의 외관은 정말 좋았다.
투르판의 베제크릭석굴. 쿠차의 키질석굴과 함께 서역 2대 석굴로 꼽히는 곳. 모두 57개의 석굴이 있는데,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다. 외관은 황폐화됐지만 내관은 매우 잘 보관돼오던 석굴은 20세기 초 이곳에 눈독을 들인 ‘서양의 약탈자’들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 베제크릭석굴을 가장 많이 조사한 사람은 독일의 그륀베델. 190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조사했다. 그에 질세라, 독일의 르 콕, 일본의 오타니, 러시아의 올젠버그, 영국의 스타인 등이 차례로 드나들며 소상(塑像)이나 벽화 등을 마구 뜯어 해외로 반출했다. 중국이 이들을 “서양의 약탈자(洋鬼子)”라고 부를만한 만행을 저질렀다. 유감스럽게도 오타니가 베제크릭석굴에서 뜯어온 벽화 4점이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보관돼 있다.
화염산 중턱에 삼장법사, 저팔계, 사오정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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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화염산 중턱에 있는 <서유기> 주인공들의 조형물. |
입장권을 사 계단을 따라 석굴로 들어갔다. 둥근 돔 지붕이 멋있어 보였다. 4호굴로 들어갔다. 중앙에 정방형의 중당(中堂)이 있고, 주위로 좁은 회랑이 둘러진 형태다. 회랑 벽면에 그려진 갖가지 서원도들이 참배객의 눈길을 붙잡았다. 15개의 주제로 된 서원화인데, 석가모니부처님이 보살일 당시 과거불(연등불)에게 공양을 올려, 미래에 성불할 것을 보장받는다는 줄거리를 다채롭게 윤색한 그림들이다. 카메라 촬영을 엄금해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4호굴을 나와 9호굴로 들어갔다. 9호굴 벽화들은 현재 석굴 안에 없다. 르 콕이 대부분 절취해 베를린박물관에 진열했으나, 2차대전 때 폭격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 천 년 동안 안전하게 내려오던 유물을 약탈해가고, 그것도 모자라 파괴시킨 서양인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바미얀대불 파괴를 비난할 자격이 그들 서양인들에게 있을까. 9호굴 벽엔 실물 벽화 대신 사진들만 걸려있다. 사진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차례로 석굴을 본 다음 빠져나왔다. 시간은 어느 새 정오가 돼 있었다. 사람들로 흥청거리는 석굴 입구를 지나 화염산 중턱에 난 길을 따라 투르판 시내로 출발했다. 화염산 중턱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백마가 조각돼 있었다. ‘서유기공원’이란 간판이 붙어있는데, 자세히 보니〈서유기〉 내용이 조형물로 만들어진 공원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백마 탄 삼장법사를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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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불타고 있는 듯한 화염산. |
차를 타고 화염산 정면으로 나왔다. 불타는 산답게 온 산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다. 불이 너무 심하게 타올라 그런지, 구불구불한 주름이 산 표면에 수없이 많다. 투르판 분지 북쪽, 약 100km에 걸쳐 이어진 화염산을 위구르인들은 ‘쿠즈로다고’라 부른다. ‘빨간 산’이란 뜻. 최고봉은 해발 815m인데, 별로 높지는 않지만 문자 그대로 빨간 산이 계속돼 마치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형세다. ‘염열(炎熱)의 땅’ 투르판의 대명사 화염산. 현장스님이 머물렀던 불교국가 투르판. 타클라마칸 사막의 다른 오아시스 도시들처럼 그곳에도 불교는 없다. “유적과 전설에만 있고, 살아있는 불교가 없다”는 사실에, 화염산 표면의 거친 주름 같은 큰 주름이 내 마음에도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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