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定順王后)와 송비(宋妃)
허보님이 보낸것을 약간 편집합니다.
조선 역대 27왕과 왕비들 가운데에서 가장 불행한 2사람을 고를 때 당연히 제6대왕 단종(端宗)과 그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를 손꼽는데 주저하지 아니한다.
단종 임금은 1441년(세종 23년)에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아들로 태어나 이름이 홍위(弘暐)였다. 1448년(세종 30년)8살에 왕세손(王世孫)에 봉해지고, 1450년 2월 세종(世宗)이 승하(昇遐) 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10세에 세자에 책봉, 병약 하여 겨우 39세로 1452년 5월 재위 2년만에 승하한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즉위했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그를 보필하던 김종서(金宗瑞), 황보 인(皇甫仁)등이 참살당하고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이 국권을 장악하면서 유명무실한 왕 이 되었는데, 1455년 대군의 측근 이던 한 명회(韓明澮), 권남(權擥) 등이 선위(禪位)를 강요하자 겨우 15세로 왕위를 숙부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고, 1456년 사육신(死六 臣) 들이 그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발각되어 주륙(誅戮)된 후 1457년 17세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寧越)에 유배(流配) 되었다. 이 해에 금성 대군(錦城大君) 유(瑜)가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賜死)되자 서인(庶人)으로 내려지고 자살을 강요당하여 재위 3년째에 생을 마감하였다.
비록 너무나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1453년 양성지(梁誠之)를 시켜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를 편찬케 하고 이듬해 황극 치평도(皇極治平圖)를 간행, 1455년에는 의약서(醫藥書)를 구입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즉위한 다음해에 이징옥(李澄玉)의 반란이 있었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사사(賜死) 등 사건도 있었다. 1681년(숙종 7) 대군(大君)에 추봉(追封), 1698년(숙종 24) 복위 (復位)되어 영월에 소재하는 능침(陵寢)의 묘호(廟號)가 추증(追贈)되어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정순왕후는 1440년(세종 22)생으로 단종보다 1살이 위인데, 여산 송씨 11世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송현수(宋玹壽)의 딸이었으며 단종 2년 (1454)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세조1)의덕 왕대비 (懿德王大妃)로 봉해졌으나 사육신 사건으로 1457년 단종이 노산 군으로 강등되자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친정아버지 송현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대간(臺諫)의 건의로 당초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어릴 때 친구며 동문수학한 세조의 두둔으 로 무사했다. 그러나 1457년 금성대군이 사사되자 정창손(鄭昌孫) 및 양사(兩司)의 주장으로 결국은 주살(誅殺)되기에 이르렀다. 숙종대에 이르러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추증,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추봉
(追封)시호는 정민(貞敏)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사사되면서 궁궐에서 추방되어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숭인근린공원 내) 기슭에서 살다가 중종 16년(1521)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정순왕후는 살고 있던 동대문 밖 산에 올라 아침저녁으로 유배지인 동쪽을 보며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려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산의 봉우리는 왕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정순왕후가 힘든 생활 속에서도 세조(世祖)가 내린 집과 식량을 끝끝내 받지 않았고, 초가집을 짓고 평생 흰옷만 입었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을 정도로 淸貧(청빈)하게 살았다. 죽어서는 여인네들의 한을 달래는 토속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후사 (後嗣)없이 승하(昇遐)함에 부왕(夫王)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공주 (敬惠公主)의 시가(媤家)인 해주정씨가(海州鄭氏家)의 墓域(묘역)에 장례하였다. 따라서 묘호(廟號)가 회복되기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 봉사(奉祀)도 정씨 家(가)에서 하여왔다.
단종보다 5살이 위인 경혜공주(1436~1473)는 1450년(세종 32) 해주 정씨 참판(參判) 정충경(鄭忠敬)의 아들 정종(鄭悰, ?~1461, 寧陽尉)과 혼인하였다. 정종은 단종 초에 형조판서가 되어 신임을 받는 처지 였는데, 1455년(단종 3) 수양대군 제거를 도모한 금성대군(錦城 大君)과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이해에 수양대 군이 즉위,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는 점이 참작되어 양근(陽根)으로 옮겼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수원(水原)을 거쳐 통진(通津)에 안치 당했다. 뒤에 광주(光州)에 안치 되었다가 1461년 중 모반을 꾀하였다고 하여 결국 능지처사(陵遲處死) 되기에 이르렀다. 훗날 영조 때 신원(伸寃)이 되어 시호(諡號)가 헌민
(獻愍)으로 내려졌다.
남편 정종의 죽음과 함께 경혜공주도 공주의 신분을 잃고 전라도 순천의 관비(官婢)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 때 이미 정미수 (鄭眉壽, 1456~1512)를 회임(懷妊)한 상태였다고 한다. 정미수의 자는 기수(耆壽), 호는 우재(愚齋), 형조참판 정종의 아들. 문종의 딸인 경혜공주가 어머니. 아버지의 유배지 광주에서 출생. 아버지가 사사 (賜死)되자 1461년 세조(世祖)에 의하여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소환되어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잠저(潛邸) 때의 성종 (成宗)을 시중하다가 돈령부직강(敦寧府直講), 형조정랑(刑曹正郞)등의 직임을 역임하였는데, 죄인의 자식으로서 임관 되었다 하여 잦은 탄핵을 받았으나 세자의 무마로 무사했다. 1476년 중부참봉(中部參奉), 이듬 해 선전관을 지내고 1504년(연산군 10) 참찬(參贊) 겸 판의금부사 (判義禁 府事)를 지냈다. 1506년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중종반정(中宗 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에 능하였고, 시호는 소평(昭平)이었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묘소 사릉(思陵)은 바로 위 해주정씨 해평부원군 정미수 묘소의 우측 곁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정순왕후에게 정미수는 곧 시누이의 아들로 생질(甥姪)의 관계이다. 숙종 24년(1698)에 魯山君 (노산군) 이 단종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고 무덤은 사릉(思陵) 이 라는 능호(陵號)를 받았다. 처음에 민간인 신분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해 단출하고 간소한 것이 특징이다.
영월의 장릉(莊陵)
단종대왕(端宗大王) 사릉(思陵)의 정순왕후(定順王后)
권력(權力)의 피바람
인륜(人倫)도 끊어 놓네
13세의 새신랑
14세의 새색시
영도교(永渡橋)의 피눈물
영겁(永劫)의 한(恨)이 되어
임 그리는 동쪽 하늘
솔가지로 붉어지고
청령포(淸泠浦) 흐르는 눈물
마를 날이 없구나.
세세손손 의분(義憤) 의열(義烈)
오늘에 이르나니
광릉(光陵)의 세조(世祖)여 !
여기 사릉(思陵)에 분향(焚香)하고
한 잔 올리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