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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호두까기
【앵무새 죽이기】단기고사의 허구성에 대하여......반론 2.
원문: http://blog.daum.net/nero1003/173
글: 대수맥
기자조선에 들어가서 철학*윤리학 책 발간(전부분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본론*심리학*
논리학*도덕경도 우리가 편찬)을 하며 10세 등나 때에 성선설*성악설*무성설 등이 주장
되었다는 문제에 대하여
[해석] 이 또한 후세의 加筆이 역력한 부분이다.
그 당시 학습의 중요한 과목으로 여겨졌던 저서들이 나오는 까닭으로 보아 자명하다.
[덧붙임 글] 어느 분의 글이 적절한 견해라 생각되어 약간 수정하여 옮깁니다.
사실상 현재 제기된 "단기고사"를 비롯한 “환단고기” 등 다른 우리 古書들에 대한 僞書 주장은
가상의 논리를 가지고 시비를 붙자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적 자료와 고문헌을 엄밀히 검토
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송찬식(전 국민대)씨는 대종교의 교리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僞書 시비를 걸었고
박광용(성심여대)씨는 기독교 사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시비를 걸었으며 이기백(한림대)씨는
청동기 시대 국가이론을 근거로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아직도 僞書를 주장하는 견해에는 이런 개념 싸움에 그치는 유치함이 가시지 않고 있다.
어떤 문헌을 僞書라고 비판하는 입장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엄청난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지
않다면 이런 종류의 시비는 그만두고, 역사적 자료를 중심으로 깊이 있고 분명한 근거를 내걸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박광용>씨의 경우 기마종족 연맹의 과거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이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옹호와 연결된다고 하는 주장(역사비평 10)까지 내걸고 있으니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경우 모든 기마종족을 같은 동포라고 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며 실제 그 시대의 현실이 그와 같았으므로 외형상 대동아 공영권과 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의 핵심 논지는 평등한 민족(종족)연맹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종족의 패권주의적
식민체제를 가리키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의 지식이 역사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또한 그런 핵심을 벗어난 논쟁이라면 어떤 비판에도 이들 기록의 진실 됨이
손상되지 않는다.
이 가운데 [환단고기]에 대해 僞書論은 제기하는 어떤 史家들은 [환단고기*단기고사*규원사화]에
서 모순되는 연대기록과 국제관계 기술이 발견되고 국가*문화*인류*세계 등 근대적 용어 사용이나
삼신일체론(三神一體論)*천지창조 개념이 기독교 교리와 유사한 점 등으로 비추어 기독교 사상에
익숙한 근대의 인물이 僞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韓민족사의 역사관의 기반인 神敎문화의 정신세계를 전혀 이해할 줄 모르는 철학
없는 위인들의 短見이라 하겠다.
그들은 현존자료를 놓고도 그 진실성과 의미를 밝히려 한다기보다는 지엽적 허점만 찾아 부각시키
고 핵심적 내용까지 모두 부정하려드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단정적으로 말해 이 책을 취득했거나
엮거나 감수한 사람들이 모두 20세기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 할 때 근대적 언어가 가미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필된 사료만을 가지고전부가 僞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필된 사료를 僞作이라고 한다면 지구상에 僞作 아닌 사료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술어와 연대 상의 고증문제가 제기될 수는 있으나 민족사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始原史와
韓민족사의 국통(國統)은 물론 한(韓)문화 뿌리의 심층구조와 대세적 정황을 관통하여 보는 데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음을 단언하는 바이다.
[앵무새의 주장 2]
우선 인용서적들의 목록을 뽑아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환씨전(桓氏典)*진단기*거칠부 소사*만리원론*고사*탐고사(금국 황자운 지음)*돌궐사
*금국정송기*고구려 유기*만주실록*만주산사
일단 저 중에 고구려 유기가 고구려 역사책이라는 유기라면 그것을 빼고는 듣도 보도 못한
인용서적들의 목록이 됩니다.
序에는 소정방*설인귀가 고구려사와 백제사를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하는데 정사인 유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또 대야발 시절에는 금나라가 있지도 않았는데 금나라 황자운이 썼다는 탐고사가 웬 말이고
금국정송기는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다른 전거를 대느라고 써 넣은 것이라면 최소한 구한말
까지 그런 책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또 만주실록은 청태조와 태종실록으로 알고 있는데 발해시대에 웬 청나라 역사책이 등장한단
말입니까?(비록 뒤져보지는 않았지만 단기고사의 내용이 없으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또 거칠부 소사는 황당한 발명품들의 정당성을 부여하려 인용되었다 쓴 게 틀림없고 돌궐사를
참조하라고 한 내용은 칸트철학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합니다(29세 마간).
또 만리원론은 우주기상학부터 원자론에 이르기까지 설명이 나오는 부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저는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반론]
<단기고사>는 原典 유무가 진위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령 이윤규나 김해암의 필사본은 그만두고 발해의 대문인이었던 황조복의 원전이 있다
해서 5천여 년 전의 역사를 말하는 단기고사가 전부 역사의 진실만을 썼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이는 다음과 같이 비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태양의 표면 온도를 6000c 로 보고 있고 내부온도는 무려 30000c 로 추측하고 있음이
정설인데 누가 온도계를 가지고 태양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단 말입니까?
또 [허블]의 <적색편이>에 의하여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도 정설이지만 누가 우주 밖에 나가 팽창
하는 우주 사진을 찍어 가지고 와! 하는 소리가 아니지요.
그리고 지금 전자 현미경으로는 원자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가 없다 합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그 실체를 하나씩 추적해본 결과 현재는
그 내부를 본 듯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역사서의 진위도 이와 같습니다.
원전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글이 가지고 있는 내용이 사실인가 아닌가? 를 여러 각도로
추적해 입체적으로 분석해보면 진위가 밝혀진다는 말입니다.
僞書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기록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조대기(朝代記)등의 문헌이 전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릅니다.
희귀한 책들을 찾아 모으라고 명령을 내린 조선 세조 때나 성종 때 엄명에 따라 수집한 희귀본 20여
종 가운데 "조대기"라는 책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실로 볼 때 여타 다른 고서들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거나 여러 차례의 수난 과정에서 멸실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울러 위와 같은 사실은 "환단고기"나 "단기고사"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적들이 그 당시
에는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기록물들은 성종 이후 이름을
감추고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왕성하게 일어나던 성리학에 의한 학문 전반의 순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이나 세조가 불교를 숭배한다고 목숨까지 내걸고 반대하던 성리학의 천박한 추종자들이
성리학 이외의 기록과 내용을 배타적으로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흔히 "도가의 역사서"라고 불리는 이 같은 기록물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라지거나
개인 소장가의 장롱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이론적 라이벌이었던 윤휴(尹휴 1617 ~1680)가 사문난적(斯文亂賊)
으로 몰려 정치적 회오리의 계기가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주자와 소중화사상을 배격하고 단군
시대의 역사를 서술한 古書들이 어찌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숨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치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지하활동을 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게 "너희들은 어째 숨어서
활동을 하느냐?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 이들의 주장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결코 지나칠 수 없다고 봅니다.
사실 민족사서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공산당과 좌파 색출보다 훨씬 심했다고들 합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서 예로 든 인용 서적들은 다음 두 부류로 뚜렷해집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대야발이 참고로 삼은 古書들로 짐작되는 환씨전(桓氏典)*진단기*
거칠부 소사*고사*고구려 유기와 후에 원전을 재편집하면서 근거로 한 듯 추정되는
만리원론*탐고사(금국 황자운 지음)*금국정송기*만주실록*만주산사들입니다.
먼저 대야발의 序文을 보면서 이를 추적해 나가보지요.
그는 [단기고사]를 집필하면서 <사해四海에 있는 史書를 수집하고 여러 사평史評을 참고
하여......>라 말하였으며 <각지를 돌아다니며 석실石室에 있는 장서藏書와 옛 비碑와
흩어져 있던 史書를 참고하다가 전에 돌궐국까지 두 번 들어가 고적(古跡)을 탐사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으며......>라고 한 점이 주목됩니다.
이로서 돌궐국에 이르는 異域의 구석에까지 흘러들어간 古書들을 접하고 原典과는 다르지만 이를
채록하거나 필사하여 이름을 붙인 각종 書籍은 물론 수많은 碑文의 각자(刻字)나 탁본을 비롯하여
別稱을 붙여 내용을 수록하고 나름대로 評을 덧붙인 史評까지도 모조리 수집하여 분석한 뒤 기록
하였음이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여 13년이 걸려 비로소 완성되었으니
오호라! 이 글이 어찌 우연히 되었겠습니까?>라는 글로서 고스란히 입증됩니다.
이런 방대한 자료를 입수하고 분류하였기에 그야말로 13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른 것이지요.
따라서 비문과 사평의 형식이나 이역만리에까지 가서 접한 기록물들이나 비록 원전은 소실되었
지만 어떤 경로를 통했든지 전파된 사본이 궁벽 진 구석에 남아 그럭저럭 입수할 수 있었던 정황
이 느껴집니다.
스스로도 환국의 맥을 이은 고구려의 정통 후예로 자처한 발해에서 소실된 귀중한 역사서들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니 아마도 대야발이 명을 받을 무렵엔 그러한 서적들이 유사한 이름
으로 재현되었으리라는 짐작은 무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도외시하는 태도는 조금 가벼운 판단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후세에라도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할지도 모르니까요. 조금 기다려 보는 게 현명할 듯하군요.
혹시 이런 자료나 비슷한 別文으로 書題한 저서들이 발해에 남아 있다가 거란에게 망하면서 훼손*
멸실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필자는 환씨전(桓氏典)*진단기*거칠부 소사*고사*고구려
유기들을 그렇게 이해하며 받아들입니다.
두 번째는 후세에 필사하여 인쇄된 저작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 당시에 현존하던 여러 서적 가운데 비교*검색이나 加筆을 하면서 준거자료로서 인용할만한
부분이 있는 저본들이 많이 참고가 되었을 터인데 바로 만리원론(행성의 이론을 담아 천체天體
의 원리를 알게 한 그 당시 참고서적 이름일 듯하다.)*탐고사(探古史 金國 黃子雲 지음-후後
단조檀朝에서 단군 화상과 단군실기檀君實記를 보냈다는 문구인데 이 사실이 후세 기록인 이 책
에 삽입되었다는 의미이다.)*금국정송기(金國征宋記-불필요한 첨가문인데 아마 이 저서에서
인용한 듯 하다.)*만주실록*만주산사(滿洲散史-백두산의 의미를 기록하기 위해 書名을 거론
한 듯하다)*돌궐사(이 부분도 약간 윤색이 들어간 듯 보인다.)라 보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 부분에 대해서는 玉石을 가리는 마음으로 보다 면밀하고 종합적인 고찰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앵무새의 주장 3]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연대입니다. 단기고사는 갑자를 기록치 않아 알 수 없도록
하였지만 역대 왕들의 연대가 나와 합산하면 일련의 연대표가 형성되고 역사상 확실한
사건이 있던 때를 대입하면 각 왕들의 시대를 판별해 낼 수 있습니다.
기자조선 말년에 위만이 나라를 빼앗았다고 하니 정확치는 않지만(환단고기 194년*중국
기록 불확실) BC 195-190 사이인게 분명합니다.
저는 190에 놓고 역산해 나갔습니다. 그럼 단군조선은 BC 2509년에 건국됩니다.
전 단군조선 1222+후 단군조선 875는 2096년이 되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일치하고
기자조선은 그 다음 세워져 1097년이니 멸망이 BC 190년이라면 여기에 1097을 더하면
BC 1287년에 후단군조선이 성립하고 여기에 다시 1222를 합하면 BC 2509년입니다.
자! 단군세기와 역년은 같지만 연대는 영 딴 판입니다.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론]
단군조선 立國년도(신단민사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BC 2333*환단고기 단군세기
BC 2357 비왕裨王-BC 2333 立國*삼국유사 唐堯 50년인 경인庚寅 BC 2283(정사丁巳가
맞는 듯하다?)*단기고사 ?)의 기준이 되고 있는 당요(唐堯)의 세력장악은 학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연대가 동작빈 BC 2333년*낙빈기 BC 2357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金文에서 가장 먼저 문자의 기록으로 나타나는 上古金文의 해석을 따르는
게 좋다고 보나 통설대로 2333년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단기고사를 보면 몇 가지 이상한 면들이 보여집니다.
1) <단기고사>는 前檀朝 1214년*後檀朝 875년으로 檀君朝를 2089년이며 기자조(奇子朝)를
1052년간이라 기록했다. 후단조와 기자조는 분명히 동시에 시작된 것으로 되었으니 문제는
영고탑으로 옮긴 단군기원 1240년과 단군기원 1214년의 불일치이다.
▶후 단조 제1세 단군 솔나는......단군기원 1240년 7월 15일에 영고탑에 천도하셨다.
<단기고사 제2편 후단조선>
▶제 25세 단제 이름은 솔나이며 39년간 재위하셨다......39년에 단제께서 길림에서 영고탑에
이도하셨다.
전 단조 제1세 단제로부터 25세 단제 솔나 재위 39년까지 무릇 25대 역년이 1214년이다.
<단기조사 전조선 마지막 부분>
▶기자의 성은 환씨이며 이름은 서여이다......전 단조 25세 39년에 보위에 오르시고 평양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셨다. <단기고사 제3편 기자조선 첫 부분>
▶제1세 기자로부터 제42세 기자까지 역년 1052년이다. <단기고사>
2) 단군기원과 전 단조 역년이 일치하지 않으니 단군조선의 기원부터 시작해도 전
단조 25세 39년이라는 기준 시점이 몇 년인지 어지러워진다.
3) 기자조선이 분명히 殷 멸망 시기인 bc 1122년에 동래하여 조선후로 봉해졌다면
역사상 통설인 위만조(衛滿朝) 건국 시점인 BC 194년을 빼면 928년이 되어 역년이
전혀 안 맞는다.
이 같은 사실은 어떻게 해서 벌어진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였을까?
해답은 전혀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문제를 명확히 풀어내기 위한 좋은 연구 자료인
<박병섭>님의 <기자조선과 전*후단조의 역년>을 소개하면서 그분과 조금 분석 시각이 다른 곳
에서는 내 의견을 가미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먼저 著者는 [神人 단군 왕검]의 세력기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바로 단허국(檀墟國-墟란 이름을 쓰는 小國은 단 몇國 뿐이다. 즉 귀허鬼墟와
곤륜허崑崙墟 등...그만큼 두드러진 强國이었다는 반증이다) 출신으로서 단군이란 작위
(爵位)를 이어오던 정황을 이해하였기에 신인 왕검의 비왕(裨王) 시절 24년을 더하면
두 가지의 단군역년이 무리 없게 된다.
여기에서도 [환단고기]의 정확성과 사료적 가치성이 입증되는 부분이다.
- 두 번째. 은(殷)의 멸망이 BC 1122년인데 역사상 통설인 위만조(衛滿朝) 건국 시점인
BC 194년을 뺀 다음 <소강절>이 연대를 축소했다는 124년(은 멸망과 맞추면 드러나는
차이)을 더하면 정확히 단기고사의 역년 1052년이다.
즉 여기에서 [단기고사] 원본을 편찬한 찬자(撰者)의 연도 계산이 드러난다.
역년의 재구성에서 만큼은 [환단고기]류 와 상이한 까닭이 서술의 핵심은 기자(箕子)조선
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이 차이 때문에 기자(奇子)조선 원년을 기자(箕子)와
는 무관하게 1122년에 124년을 추가하여 BC 1246년으로 하고 기준왕의 멸망시기인
BC 194년은 그대로 인정하면 역년은 <단기고사>의 1052년과 일치한다.
※ 하지만 전*후 단조를 구분하는 시점에 있어서는 殷 멸망(BC 1122)을 기준으로 동일시기에
재위한 단군 솔나(BC 1150-1063)를 택한 듯하다.
또한 [앵무새]의 역년 계산방법은 처음부터 조금 잘못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전단조의 역년은 1240년과 1214년 가운데 1214년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異說이 없는 후단조 875(단기고사의 실제 왕들의 재위기간을 더해도 일치함을 알게
된다.)를 합하면 2089년이 됩니다. 환단고기와는 다만 7년의 차이이므로 단군조선의 존속
기간에 있어서는 <전 단군조선 1222+후 단군조선 875는 2096년이 되어 환단고기 단군세기
와 일치한다> 하는 주장이 대체로 옳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군요.
기자조선의 역년도 혼동하고 있는데 실제 합산해보면 1093년간이지만 42왕의 재위 기간
에서 이중 계산된 40대를 빼면 [단기고사]에서 말한 1052년과 정확히 부합합니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대부여(大夫餘)로 國號를 바꾼 시기에 종말을 고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단군수명(역년) 1908년의 입장과는 확연히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부분
입니다.
하지만 [단기고사]는 前檀朝의 기점을 2333+124인 BC 2457년(신인 왕검 裨王시절)으로
잡고 있으며 1214년간 지속되다가 奇子朝鮮 등장(BC 1246년 즉 殷 멸망 시점 1122+124)
이후 3년 뒤인 BC 1243년(2457-1214)에 後檀朝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875년간 지속하다가 BC 368년(1243-875)에 비로소 막을 내리는 것으로 역년을
구성합니다.(그러나 사실 각 제왕의 재위기간을 합산하면 1222(4?)년이라고 하니 역년을
계산하는 와중에 착오를 일으켰던지 왕위 계승 시점에서의 이중적용이 있었을지도 모르
는 여지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틀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런데 [앵무새]는 기자조선의 멸망까지(BC 194)를 단군조선의 종말로 보고 역년을
역 추적하고 있는 듯합니다. 箕子가 단군조선 강역 전체를 강탈하였다는 [부일사대
모화주의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걸까?
※ [삼국유사]의 경우 단군기원 BC 2333년에서 대부여로 國名이 달라진 BC 425년을 빼면 정확히
1908년이며 이는 [응제시주]의 단군역년 지수의 주장과도 부합하고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삼조선
명칭 변경 시점인 단군 구물(丘勿)의 제위(帝位) 탈취 기간 (BC 426)과도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단기고사]는 箕子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단군조선과 奇子조선의 병존체제를 원칙으로 삼아
기록되었다고 보여 집니다.
아울러 [환단고기]와도 상당부분 합치점을 볼 수 있는데 <단군의 제왕명>이 비슷하며 <태백일사>
번국番國 왕명과 <단기고사> 기자조선의 기자명이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은 이 두 사료가 같거나
유사한 저본에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환단고기]와의 역년차이는 [단기고사]의 원저자인 대야발의 생각이었던 그 후 편찬자들의
입장에서였든지 간에 箕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시각에서 약간 손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듭니다.
[단기고사]의 후대 부분에서 상당수의 王名이 삭제되어 있는 게 주목되기 때문이지요.
[환단고기]의 기후(69대)-기욱(70대)-기석(71대)-기윤(72대)이 삭제되었으며 燕나라의 자객에게
피살된 해인(환단고기 67대)이 없고 마한(단기고사 42대)이 추가된 이유는 후예가 馬韓과 연결
되어 감을 간접적으로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아울러 기준을 왕이 아니라 태자로 표현하여
재위 년수에서 뺀 것이 특이하게 여겨집니다.
[앵무새의 주장 4]
다음에는 외국과의 교류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처음부터 설명을 해 보지요.
1)...2세 부루는 우임금과 동시에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동작빈의 계산에 따르면 우가 왕위에 오른 해는 BC 2183년이 됩니다(여담이지만 삼국유사 기록
대로 단군 치세가 150년이었다면 우 임금이 자리에 오른 2183+150은 딱 2333이니 아마도 단기고사
의 저자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기고사의 계산법으로는 부루가 왕위에
오른 것은 BC 2416년이 됩니다. 200년 이상 차이가 나지요.
2)12세 아한 38년에 하가 멸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때는 BC 1972년인데 역시 동작빈의 계산법으로는 BC 1751년이므로 2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3)23세 아홀 12년에 돌궐 사신이 왔다고 하는데 돌궐은 545년에 건설된 유목제국입니다.
742년 멸망하지요. 그런데 이때는 BC 1108년입니다. 너무 빠릅니다. 그때에도 돌궐족이
있었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럴 확률은 별로 없고 원래 부족 명은
‘궐’ 알타이어로는 ‘큘’이라 합니다.
당대의 돌궐제국도 자신들을 쾩튀르크 제국‘이라 불렀습니다.
4)24세 연나 8년에 월남만이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대에 월남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반론]
1) 단군조의 入國을 2333년으로 보면 제위가 93년이라고 하였으므로 2240년(2333-93)
이 됩니다. 이는 [환단고기]와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독단적인 판단으로 기자조선 멸망까지를 단군조선조의 종말로 본 관점에서 역산
해 나온 2509년에 맞추어 2416(2509-93)년이라 하고 억지로 년대 차이를 강조하면서 <단기고사>를
폄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분명히 93년이라는 재위기간을 기준으로 삼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점
입니다. 그런데 禹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이번에는 단군치세 150년이
라는 이중 잣대를 사용하고 있군요. 이유가 뭘까? 무척 궁금합니다.
2333(2183+150)년에 맞추어 단군과 동시에 오른 禹의 년대만큼은 중국 史書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걸 강조하려고 그랬을까?
기왕에 단군 개국을 2509로 <단군세기> 찬자撰者가 알고 있었다면 禹의 년대도 2359년
(2509-150)으로 추정할 터이니 전혀 다른데도 말입니다. 이는 거꾸로 단군세기의 撰者는
전혀 모르는데 이 사람이 혼자서 다람쥐 체 바퀴를 너무 돌린 듯 하게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단기고사>에서 보는 단군개국은 동작빈의 2333년(단군 역년 1240으로 보면
낙빈기의 2357)이 맞으며 禹는 <부루>의 등극인 2240년과는 다른 동작빈의 2183년(낙빈기
는 2311년)이 맞다고 해야 합니다.
※ 참고로 문맥을 잘 읽어보면 분명히 이런 면이 두드러진다.
부루임금이 왕위에 오른 同年에 우가 올랐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고 다만 부루와 같이 우도
순의 뒤를 이었다는 의미가 더 짙기 때문이다.
▶임금께서 태자되었을 때에 백우(伯禹)와 더불어 친선하다가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니
禹도 舜의 자리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단기고사>
※ 여기에서 핵심은 위 반론에서 제기하였듯이 [환단고기]는 솔나 39년이 BC 1112년이지만
[단기고사]는 분명히 BC 1246년으로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서 역년의 기준이 되는 시점의
연도를 잡아 낼 수 있으며 그 上代에서 재위 년수의 조정이 일어나야 함을 알게 된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
2) 단군개국을 2333년으로 보면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의 역대 제왕 재위 년수나 王系는
<아한>에 이르러서도 일치하므로 38년은 BC 1796년이 됩니다.
그러나 秦夏의 기록은 BC 1766년이 통설인데 다음 대인 <흘달>이 BC 1782년에 자리를 이었으니
아마도 착오가 생긴 듯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앵무새]가 말한 200년의 차이는 오산이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억지로 단군조선 개국 년대 수를 끌어 올린 탓이기 때문입니다.
3) 만몽(滿蒙)지대는 선사시대부터 민족적*문화적으로 중원지방과는 전혀 다른 강역으로서 오히려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지속해왔습니다.
광활한 초원과 낮은 구릉지대를 산개하여 살아온 유목부족들의 영원한 본거지였던 것입니다.
초원지대에서 생활하던 부족들은 그 기원이 무척 오래되었고 부족의 이합집산이 비일비재하면서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우리 기록에서는 23세 단군 아홀 무렵 돌궐 사신이 온 기록이 보이는데 BC 1225년 무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만몽(滿蒙)의 유목지역에 있을 법한 부족들의 한(汗)을 우리 기록을 통하여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BC 2177(6)년 요동태수(列陽열양) 색정(索靖)이 덕스럽지 못하여 弱水로 유배시켰더니 나중에
흉노족(匈奴族)이 되었다. <단기고사*환단고기 3세 단군 가륵조>
▶ BC 2175(4)년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니 지백특(支伯特-티베트 부근이라 하나 더 고찰할
있다)에서 토벌하셨다. <단기고사*환단고기 3세 단군 가륵조>
▶ BC 2173년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해 추장
소시모리(蘇尸毛犁)의 목을 베게 했다. 지금은 그 땅이 우수주(牛首州)가 되었다.
<환단고기 3세 단군 가륵조>
▶ BC 2137년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蒙古里) 왕(汗한)으로 삼으니 자손이 몽고족(蒙古族)
이 되었다. <단기고사*환단고기 4세 단군 오사구조>
▶ BC 2076년 갈모후(葛毛侯)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군사를 보내어 잠잠하게 하였다. <단기고사
6세 단군 달문조>
▶ BC 1991년 달돌(達突) 사절이 들어왔다. <단기고사 8세 단군 우서한조>
▶ BC 1984년 청해후(靑海侯-감숙*청해 지방) 간촉(干促-우착于捉) 난을 일으켜 임금이 상춘
(常春)으로 피난하였다. <단기고사*환단고기 9세 단군 아술조>
▶ BC 1941년 엄년(嚴年)이 쳐들어오니 지간속(支干粟)을 보내 물리쳤다.
<단군세기 10세 단군 노을조>
▶ BC 1806년 청아대부(菁莪大夫) 한불배(韓不倍-비신丕信)와 옥저대부(沃沮大夫-서옥저)
고사심(高士深-고사침高士琛)과 맥재부(貊大夫-맥성貊城) 신돌개(申突盖-돌개突蓋)에게
명하여 제후로 삼았다. <단기고사*환단고기 12세 단군 아한조>
▶ BC 1712년 만고후(晩考侯)가 반란을 일으키니 오성(吳成)을 보내 평정하였다.
<단기고사 14세 단군 고불조>
▶ BC 1698년 현육(玄育)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토벌하였다.
<단기고사 14세 단군 고불조>
▶ BC 1622년 아우인 벌심(伐心-代心)을 달단왕(達但王-남선비南鮮卑 大人)으로 삼았다.
<단기고사*환단고기 15세 단군 벌음(대음)조>
▶ BC 1550년 엄년이 쳐들어 와 군사를 보내어 쳐서 멸하였다.
<단기고사 17세 단군 여을조>
▶ BC 1465년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환단고기 18세 단군 동엄조>
▶ BC 1435년 아우인 종선(縱鮮)을 청아왕(菁莪王)으로 삼았다.
<단기고사 19세 단군 종년(구모소)조>
▶ BC 1377년 북흉노(北匈奴)가 변방에서 어른 노릇을 하니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단기고사 20세 단군 고홀조>
▶ BC 1287년 아우인 홀나(忽那)를 회을왕(回乙王)으로 삼았다. <단기고사 21세 단군 소태조>
▶ BC 1250년 변방 장수 신독(神督-申督)이 군사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임금은 영고탑에
피신하였다. <단기고사*환단고기 22세 단군 색불루조>
바로 이들과 더불어 나타나는 일군국(一群國)*양운국(養雲國)과 같은 <한>들이
서북지역 유목부족들의 元祖로서 추정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돌궐은 515년 어느 날 문득 탄생하였거나 별안간 하늘에서 떨어진 부족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古來로부터 꾸준히 이어온 민족의 맥이 있었으며 다만 그 시기에 이르러 웅비하여
크게 세력을 얻은 것뿐입니다. 이를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 됩니다.
아무튼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 지대에서 이름을 세운 부족들 모두는 최초에 우리 기록
가운데 보이는 族名들을 가지고 있었음직도 한데 漢族들은 거주지역이나 출몰 시기에
따라 나름대로 다양하게 명칭을 바꾸어 불렀습니다.
예컨대 산융山戎*험윤獫狁*훈죽葷粥(사기 흉노열전)과 같이 말입니다.
북방의 만지(蠻地)라고 표현 된 몽골지역에 근거를 두고 낙수(洛水) 부근까지 출몰하는
기록이 무수한 걸 보아도 그렇고 각각 흩어져 유목을 하며 산개하다가 이합집산을
하는데 100여의 戎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흉노匈奴의 흥기興起로(사실 여기에서도 秦夏人들의 이중적 태도가 드러나는데
전국시대까지 호胡로 통칭하여 동쪽을 동호東胡 서방을 임호林胡라 했다가 강력하게 일어서자
흉노匈奴로 고쳐 불러 우리 민족의 갈래에서 없애버리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흉노의 일파인
남흉노계의 부족에 강거융羌渠戎이 있는 걸 보아도 충분히 짐작된다. 또한 흉노 선우가 스스로
를 호胡라고 칭하는 국서를 보아도 그렇다.) 조선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복종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오랜 삶을 함께 이어온 이들 부족집단내의 세력부침이 일어나는데
선비-유연-돌궐-위구르-거란-여진-몽골의 잇따른 각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은 카프카즈에서 몽골초원에 이르는 광대한 중앙아시아 초원의
금속문화와 기마궁사집단의 발현 형태는 엄청난 문화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발전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 돌궐족을 포함한 서북지역 유목부족의 원류는 모두 투르크-몽골계로 분류되는데 돌궐이
이름을 얻은 때는 오래도록 지배를 받던 <유연>의 그늘에서 벗어나고부터 였다.
그래서 부족명도 <강하다>는 뜻인 유연(몽골)어 <튀르크>의 복수형인 <튀르퀴트>이다.
만지에서 위명을 떨쳤던 세력들의 원류를 추적해보면 가장 먼저 흉노가 주목되는데 훈죽葷粥-
土方*鬼方*馬方(주례*역경)-면저緜(言+者)*의거義渠*곤융緄戎*원豲*대려大荔*오지烏氏*
구연朐衍*임호林胡*루번樓煩의 戎-흉노匈奴로 이어지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뒤를 이어 선비-유연-돌궐의 부침이 발생하고 있다.
- 匈奴는 戰國 중기인 BC 318년 한*위*조*연*제의 연합군이 秦을 공격하여 참패할 때 북쪽에서
협격하다 패주하는 북방이민족의 통칭으로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강성한 흉노 선조를 하후씨
夏后氏의 자손인 순유淳維라던가 하걸夏桀의 아들 훈죽獯粥이라는 說은 모두 史記 첫머리에 등장
하는 순유선조설의 영향인데 어디까지나 漢族과는 다른 몽골계라는 게 통설이다).
- BC 4C에 이르면 중국의 북방을 이루는 강역에서 모든 부족들이 서변에서 감숙은 의거부족*
몽골지역은 흉노부족*동북 지대는 동호부족의 아래로 三分되어지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 남에는 大漢이 있고 북에는 强胡가 있다. 胡는 하늘의 총애를 받는 아들이다.
<BC 89년 흉노의 호록고 선우가 한무제에게 보낸 國書 중>
- BC 3C 경 유목부족의 형세는 몽골지역의 흉노를 중심으로 동방은 동호*서쪽은 우씨禺氏
의 월지(하서회랑에서 감숙)*바이칼호 남부의 정령(丁靈,丁令,丁零-철륵鐵勒의 전신)*남방엔
내몽골과 오르도스지대에 루번樓煩과 백양白羊 그리고 靑海지구에는 강羌과 저氐*예니세이강과
셀렝가 강 사이엔 격곤鬲昆(堅昆-키르키즈)*혼유渾庾*굴사屈射*신리薪犁가 감숙에서 북서편에
호게呼揭(烏揭-위구르 9부족을 통합한 오구즈Dokuz Oguz의 전신)와 오손烏孫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돌궐의 부족명이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족의 전신(前身)이 유연의 일 부족
으로 활동하고 있는 듯하다.
흉노(晋書 北狄匈奴傳에는 각기 자체 부락을 가진 19種으로 기록함)는 월지를 쳐부수고 강성해져
누란樓蘭*오손*오환*선비 등 26개 나라를 평정하였다 하니 이 가운데 돌궐의 전신부족 정착지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 부족들이 최고로 강성하여 이름을 드러내고 위세를
떨쳤을 때만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한 민족의 원출자와 발전 경로 그리고 이동
정착과 근거지를 추적하는데 치명적인 결함을 빚어내게 된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돌궐도 처음에는 다른 부족연합체의 세력 판도에 따라 혹은 복속하고 어느 때는
이탈하면서 비록 마지막으로 융성할 때의 부족명과는 다르거나 비슷할지는 몰라도 꾸준히
맥을 이어왔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6C 초에 나타나는 기록을 보면 알타이 평원에서 유연의
그늘 아래 부족 명조차 제대로 형성치 못하며 야금(冶金-대장장이)에 종사하며 명맥을 유지함도
눈에 뜨인다)
이윽고 돌궐(수령 土門BUMIN)이 제대로 이름을 드러낸 계기는 같은 투르크계 반항의 핵심
인 고차(庫車)의 끈질긴 반란을 같은 種임에도 불구하고 몽골계 <유연>의 카칸에게 밀고
한 때문이지요.
- 부족 연맹의 결과물로서 집단명칭으로 전화한 대부족연합의 前身名을 살펴보아도 몽골은
庫莫奚*奚*실위悉(室)韋*거란은 선비의 갈래(선비를 따라 같이 생활하며 단석괴 때까지(AD 182)
선비라 했는데 그 후 若洛廆에 이르러 모용씨 燕이 생기면서 부족이 나누어져 우문씨와 고막해와
거란의 3종이 되었음)*여진은 물길이나 말갈*오환과 선비는 동호의 한 갈래부족*흉노는 훈죽
葷粥이었다가 후일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훈족이 된다.
- 유연(柔然)의 전신은 선비족이나 흉노족의 일분지(一分枝)로 추정되며 후일 두 부족이 융합된
종족으로 새롭게 변신하였는데 처음에는 北魏를 세운 탁발선비의 屬民이었으나 AD 393년 욱구려
(郁久閭) 씨족이 중심이 되어 사륜가한(社崙可汗) 때 독립해 막북(漠北)인 외몽고 지역으로 옮겨
북방 유목민인 정령(丁零)을 정복하면서 급속히 세력이 커졌다.
- 북위(北魏)를 세운 탁발씨(拓拔氏)는 고구려 산상왕 4년(AD 200)에 처음 이름을 드러냈는데 그
전에는 부족이 갈라져 이름을 내지 못한 채 다른 부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후 始祖로 삼은 모립(毛立)이 부족장의 이름을 빛내었고 중조(中祖)인 인립(隣立)까지 14대를
거친 후 중흥조인 역미(力微58)부터 점차 부족연합을 이루더니 실(悉9)-작(綽7)-불(弗1)-녹관(祿
官13)-울율(鬱律5)-하욕(賀(亻+辱)5)-흘나(紇那5)-의괴(醫槐7)-양(煬3)-의로(猗盧9)-십익(什翼39)
까지 12대 162년간 이어지다가 비로소 業을 이루었다.
아마도 호쇼Khosho 차이담Tsaidam의 퀼테긴 비문을 보고 이야기하는 듯 하군요
(쾩 튀르크란 이름). 이 무렵엔 투르크계 돌궐이 절정을 구가할 때의 이름과 활약을
서사시로 읊은 글입니다. 하지만 그 비문의 글 가운데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나는 많은
傳來的 사실들이 있습니다. <부민과 이스테미 카칸이......보위에 앉아서 투르크 부족민의
나라와 법을 통치하고 정비하였다......부족민들을 자리 잡게 하였다.
두 경계사이에서 아무런 조직도 없이 살았던 쾩 튀르크인들을 수습하여 그렇게 다스렸다.>
로 미루어 돌궐부족이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대목입니다.
※ 유목족들의 특성상 가장 좋은 초지(草地)를 찾아 수시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남긴 기록은
매우 적었다.
그나마 전해지는 것들도 비로소 연합을 이루어 초원의 지배자가 되거나 다른 집단들을 굴복
시키면서 제국의 중심지로 불리는 오르콘 강 상류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이 대부분이다(투르
크계인 흉노-몽골계인 선비와 유연-투르크계인 돌궐과 위구르와 키르키즈-몽골계인 거란과
케레이트와 나이만-몽골계인 몽골 등).
이처럼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는 집단의 움직임이 명확하나 母集團이 원래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었는지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만주-시베리아-몽골초원-투르키스탄을 징기스칸이 몽골이란 깃발 아래 대통합을 이루기
전까지는 고래로부터 꾸준히 삶의 기반으로 삼은 영역으로 활동하였음은 충분히 감지된다.
아무튼 이들 세 집단(투르크*몽골*퉁구스)이 과거로부터 아시아 동북부의 광범한 지역에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정착하였음은 사실이며 첨언하자면 세 계통 중 몽골어가 가장 고대적
(N. Poppe와 V.V. Barthold)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월남만(越南蠻)이 방문한 시기는 BC 1154년입니다.
기록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어느 지역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유의할만한 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前代인 아흘 시기에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회淮*대岱의
땅을 넓혀 포고씨蒲古氏를 엄奄으로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임명하니......>란 구절이 눈에 뜨이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지대가 후일의 오吳*월越지역이며 람국(藍國)의 侯가 入朝할 때 완전히 강역의
통치체제를 매듭지었다는 의미로 새로 획득한 영역의 한(汗)들을 이 무렵에 들어서야 동행시킨
것이 아닌가도 싶다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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