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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도심 속의 `초가집`이 있기까지..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80 14.08.05 11: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름다운 문화재

 

도심 속의 ‘초가집’이 있기까지...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는 ‘초가집 길’이라는 거리가 있다. 거리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파장동에는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옛 정취를 물씬 풍기는 초가집이 한 채 자리한다. 이 가옥은 다름 아닌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1888년 3월 18일에 건조되었으며,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바깥마당의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이씨(광원군파) 17대 손인 이명회가 처음 살림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1984년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기도 하다.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은 이미 도시화되어 버린 마을 안에서 유일한 초가집이며, 여전히 고식(古式)의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통가옥은 수원지역의 역사를 알리는 대부분의 자료에 인용되고 있다. 이 자료들에서 <월곡댁>은 조선 말기의 민중이 지은 경기도의 전형적인 농가(農家)라는 설명과 함께 볏짚지붕의 아름다움이 강조되고 있다.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이 소재한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은 예전부터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수원 북부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던 이 지역은 조선 시대에 정조 임금이 이곳에 연꽃과 파초를 심었으므로 ‘파(芭)’자를 사용하고 어른이 있다는 뜻에서 ‘장(長)’자를 사용하여 파장동이 되었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파장동은 광주이씨 집성촌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입향의 기원을 대략 16세기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대표적인 가문으로 성장했던 광주이씨는 연산군대를 거치면서 세를 잃게 되며, 이 후 각지로 흩어져 정착한 곳 중에 파장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장동에 살던 광주이씨 사람들은 비록 권력은 잃었지만, 계속해서 부를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토박이들이 조금씩 외지로 나가게 되고, 외지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동족촌의 면모는 사라진다. 현재의 인구구성을 보면 총 21,709 명 중에서 약 100명 정도만이 광주이씨일 뿐이다.  

 

<1937년 가족사진. 가운데가 '월곡댁' 분>

 

한편, 동족마을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인지 파장동에 남아 있는 전통가옥들의 모습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하나같이 ㄱ자와 ㄴ자가 맞대고 있는 튼ㅁ자 구조임을 알 수 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파장동에는 <월곡댁>처럼 사랑채가 안채와 머리를 맞대며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는 튼ㅁ자 집이 대부분이었다.

 

<상공에서 내려다 본 파장동의 전통가옥들. 맨 좌측이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그러나 1970년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을 포함한 대부분의 전통가옥이 지붕을 슬레이트 혹은 양기와로 바꾸게 된다. 또한 이전의 토담이나 싸리나무 담을 시멘트 담으로 교체하고, 도로가 포장되면서 파장동의 전통적 경관은 빠른 속도로 소멸되기 시작한다.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에 살았던 후손들에 의하면, 경수산업도로(1976년 개통) 건설에 따라 이 집이 도로에서 잘 보인다는 이유로 지붕개량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담을 시멘트담으로 바꾸고, 바깥쪽으로 면해있는 사랑채의 지붕은 양기와로 개량했다. 또한 사랑채와 마주하는 헛간채의 지붕재질도 슬레이트로 바꾸었다. 다만 가옥 구조상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안채의 지붕만을 기존 볏짚으로 유지해 왔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 좌측이 1980년대>

 

1980년대에 접어들자 문화재관리국(現 문화재청)은 전통가옥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인멸되어가는 전통가옥을 보존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인 논의 끝에 ‘전국취락 및 전통가옥조사’를 실시하게 된다. 그 결과, 1984년 1월 무려 64건의 전통가옥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다. 현재까지 지정된 전통가옥의 총 수가 150건이라는 사실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전례 없는 대규모 문화재 지정이 이루어 것이다.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도 ‘전국취락 및 전통가옥조사’의 일환으로 1983년 11월 조사되고 이듬 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다. 이 후 1990년대 지방자치제도가 정착되어감에 따라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에 대한 복원사업이, 수원시를 중심으로 경기도청과 문화재청의 보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새마을 운동 시기 동안 바뀌어 버린 지붕과 담 등이 조금씩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아래의 표는 변화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이렇듯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은 1984년 1월 문화공보부가 보도자료에서 발표한 바대로 ‘지역적 특성과 연대가 확실한 고증 및 건축기법 상 우수한’ 전통가옥으로써 ‘우리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민속자료로 지정되고, 건축 당시의 모습을 향해 복원되어 왔다. 인멸되어 가는 전통가옥을 하나라도 더 보존하겠다는 취지에서 발단된 문화재 지정과 복원사업을 통해 현재의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이 도심 속에 자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재 보호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제한을 감내하는 지역주민과 거주자의 고충도 뒤따르고 있다.

강릉단오제를 비롯한 다양한 무형문화재의 경우, 지역주민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반면 파장동의 주민들은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의 이전(移轉)을 요구하는 등 수용을 거부하고 있어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들은 문화재 지정해제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국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국가의 문화재정책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그 자세한 속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다.

2000년 1월 문화재보호법에 ‘문화재보존 영향 검토’ 조항이 신설되면서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의 존재가 화두로 떠오른다. 이 조항은 문화재의 보호를 위해 파장동 지역개발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월곡댁>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파장동에 고층건물을 건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법조항이 제정되면서, 고층건물의 건설이 어려워지자 주민들은 <월곡댁>의 존재가 지역개발을 저해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즉,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에 건설공사를 할 때에는 시·도지사가 문화재청장과 협의하여 정해 놓은 조례를 따라야 한다. 만약 조례의 규정을 초과한 건설공사를 시행하고자 한다면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를 검토 받아야 한다. 그러나 검토를 받기 위한 과정에는 약 400만원이 소요되는데다가, 검토에 통과하는 것 역시 어렵기 때문에 쉽게 엄두를 낼 일이 아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2007년 1월 파장동 주민자치위원장과 통장협의회장 등이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의 문화재 지정해제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탄원서를 제출한다. 이에 따라 수원시와 문화재청에서는 ‘문화재보존 영향 검토’ 지역의 범위를 줄여주는 등 지역주민들과 의견을 조율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거주자와 소유자 또한 나름대로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다. 선대로부터 유지해 온 전통가옥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와 이웃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문명의 편리함을 잘 알고 있는 현대인이면서도 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하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장마철이면 지붕으로 비가 새고, 목욕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옥의 신축이나 보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정책은 세계적으로 널리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덕분에 지난 반세기 동안의 빠른 근대화 속에서도 많은 문화유산을 지켜올 수 있었다. 그러나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의 경우처럼 문화유산을 지켜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적절히 절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문득 마주보게 되는 문화재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문화재를 감상할 때, 이를 보존해 나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헤아릴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박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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