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흑돼지(똥돼지)를 아십니까?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친한 사람들과 함께 돼지고기 삼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인정이 넘치고 즐거운 일이 아닐까 해요. 한자, 집 ‘가(家)’ 자를 보면 집(宀)과 돼지(豕)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돼지를 집 안에서 키웠음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돼지는 인류와 오랜 역사를 함께 한 친숙한 가축입니다.
고구려 시대에 중국 북부 지방에서 사육되던 몸집이 작은 돼지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토종 돼지가 되었다고 그래요. 원래 우리나라의 토종 돼지는 몸집이 작고 몸 전체가 빛이 나는 검은 색의 털로 덮여있는 흑돼지였어요. 우리 조상들은 돼지를 아주 귀중한 가축으로 여기고 국가의 중요한 제사나 경사가 있을 때 희생물로 바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은 제사 의식을 치를 때 돼지머리를 제상에 올리고 절을 하는 풍습이 있지요. 이때 희죽 웃는 돼지 머리에 돈을 꽂고 빌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불안 심리도 있지요. 그래서 돼지는 사람의 소망과 하늘의 복을 연결해주는 신령스러운 매개인 셈이지요.
옛날에 세뱃돈을 모아 장날에 돼지를 한 마리 사서 구정물을 주고 정성그럽게 키웠어요. 옛날에는 은행이 도시에만 있으니 시골에서는 돈을 모를 방법이 없잖아요. 장날 돼지 새끼 한 마리 사서 몇 달 동안 잘 기르면 100Kg의 돼지로 커요. 그러면 정성스럽게 키웠던 것이 아쉽지만 내다팔면 돈이 됐어요. 그게 오늘날의 재테크의 한 방법이었어요.
또 우리는 꿈 중에서 돼지꿈을 최고로 쳐주지요. 어느 날 밤 돼지가 갑자기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고 득남을 했다는 이야기나, 돼지 떼가 몰려오는 꿈을 꾸고 복권에 당첨되어 팔자를 고쳤다는 이야기 등은 우리가 얼마나 돼지를 좋아하고 재물을 가져다주는 동물로 여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저금통하면 ‘돼지저금통’이 아닌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재래종 흑돼지가 자취를 감추었고 몸집이 크고 희멀건 하게 생긴 돼지들이 우리들의 식탁을 점령했어요. 그래서 요즘 어린아이들에게 돼지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누리끼리한 흰빛의 돼지를 그린대요. 사실 이런 돼지들은 영국에서 물 건너온 버크셔(Berkshire)나 요크서(Yorkshire) 종류예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돼지고기는 대부분 이것들이죠.
그렇다면 왜 재래종 흑돼지가 사라지고 몸집이 큰 서양 돼지들이 활개를 치고 있을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재래종은 더디게 자라고 살이 잘 안 쪄서 경제성이 없는 반면에, 서양 돼지들을 단기간에 일본의 스모선수처럼 몸집을 불리니 자연스럽게 돼지고기 한 점도 제대로 먹기 어려운 시대에 총아로 떠오른 것이죠. 서민들 모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야 했던 시대에, 모든 게 질보다는 양이었지요. 그래서 흑돼지들이 서양돼지들에게 밀려난 것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 삼겹살이 전 국민의 기호 식품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양보다는 질을 따지고 옛날의 맛을 그리워하지 시작했어요. 아무리 아름다운 아내가 맛있는 요리를 해주어도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맛을 잊을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어요. 나이든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우리에서 키우던 흑돼지 한 마리를 잡아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먹던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어요. 철수네는 앞다리, 영수네는 뒷다리, 정숙이네는 몸통을 미리 주문해서 잡았지요. 돼지 한 마리를 잡으면 버릴 것이 없었지요. 고기는 말할 것 없고 피는 선지로, 내장은 순대로, 뼈는 탕으로 고아 남김없이 먹었던 것이죠. 게다가 돼지 오줌보는 바람을 불어서 축구공으로 사용했어요. 추수가 끝난 논에서 돼지 오줌보에 넣은 축구공 삼아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던 추억이 있지요.
돼지를 삶는 솥을 기웃거리며 당시 먹었던 그 맛은 서양돼지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달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천금을 주고도 쉽게 구할 수 없는 흑돼지의 자취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돼지 마니아들이 사라진 흑돼지의 뒤를 쫓다가 지쳐있을 때, 그들에게 한 줄기의 희소식이 날아왔어요. 남원 지리산의 아영·운봉·산내 일대에서 아직도 흑돼지를 소량이나마 키우고 있다는 얘기였어요. 그들은 다투어 남원으로 달려갔어요. 특히 토종돼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남원에서 흑돼지를 보자마자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어요.
“아! 천만 다행히도 남원 사람들이 토종을 보존하고 있구나. 경제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원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이 아니라면, 토종이 제대로 보존되었을 리가……”
오히려 남원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교수님 무슨 소리여? 우리는 오래전부터 집집마다 똥간에 똥돼지를 키웠는디, 이게 무슨 신기한 일이여?”
그렇습니다. 남원의 산간 지방에서는 아주 먼 옛날부터 변소에 돼지를 키웠어요. 변소의 구조가 이층으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위층에서 볼일을 보면 아래층에 있는 돼지가 인분을 먹었던 것이죠. 이런 풍습은 지리산 일대와 제주도에만 있다고 해요. 이렇게 자란 돼지를 남원에서는 ‘똥돼지’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면 왜 돼지를 변소 안에 가두어 키웠을까요? 여기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산간 지방은 평야 지방과는 다르게 돼지에게 먹일 먹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인분을 이용한 것이죠. 물론 인분만을 먹인 것은 아닙니다. 잔반이나 왕겨, 기타 식물들도 사료로 사용했습니다. 둘째, 돼지를 산중의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00여년 전만해도 지리산 일대에는 호랑이, 늑대 등의 맹수들의 출몰이 아주 잦았습니다. 지금도 남원 산간 마을에 사는 80세가 넘은 어르신들을 만나면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말하곤 합니다. 집안의 보물, 재산 2호죠. 1호는 소이고, 돼지가 재산 2호예요. 재산 중의 재산인 돼지를 지키기 위해서 변소에서 안전하게 키운 것이죠. 셋째, 사람들이 야밤에 볼일을 보러 다닐 때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들은 깊은 산중에서 지내본 경험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달빛이 사라지고 사방이 칠흑처럼 깜깜한 밤에 늑대의 음침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변소를 가는 기분이 어떤지 알겠어요? 담력이 웬만큼 크지 않고서는 차라리 집안에 실례하고 말지, 감히 문을 열고 변소에 갈 용기가 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돼지가 변소 밑에서 ‘꿀꿀’ 거리며 반겨줄 때는 심리적 위안을 받게 되지요. 또 변소 안에서 독사나 독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깜깜한 밤에 독사가 엉덩이를 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대로 황천길로 가야하겠죠. 하지만 돼지는 몸이 두꺼운 지방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독사에게 물려도 안전하며 오히려 독사를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돼지는 고마운 동물이네요.
물론 약간의 불편함도 있습니다. 일을 볼 때 돼지가 아래에서 몸부림을 치면 ‘파편’이 엉덩이에 튀기도 합니다. 또 옛날에 어르신들이 아이들이게 이런 얘기도 했대요.
“얘들아, 변소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돼지가 너희들의 ‘고추’를 따먹는 단다.”
설마하니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제주도의 재래식 변소에는 긴 막대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변을 볼 때 돼지를 가까이 오지 못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돼지를 집안에서 키우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아주 많습니다. 인분이나 음식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먹이로 활용함으로써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똥돼지’에서 나온 배설물들은 최고의 천연 비료였습니다. 밭에 뿌리고 일정 기간을 기다리기만 하면 어른 주먹만 한 감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지요. 정말로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죠.
남원의 흑돼지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재래종 흑돼지로서 혈통이 아주 우수합니다. 산간 지방의 고립된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순수 혈통이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원의 산간 지방은 공기가 맑고 토질에 많은 유기물질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공해가 전혀 없으므로 최상의 사육 조건에서 돼지들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 돼지들을 좁은 우리에 가두어 ‘강제 사육’ 방식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으므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원의 흑돼지는 육질이 쫀득하고 단단하며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근육 안에 지방질이 많아 살코기가 몹시 부드러우며, 콜레스테롤은 낮고 필수 지방산 함량은 높습니다.
지금 남원시는 흑돼지를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영면 인풍리에 ‘흑돼지 홍보전시관’을 개관하여 식당, 육가공시설, 판매장 등을 운영하고 있지요. 외국과의 이른바 ‘FTA’의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고품질에 승부를 걸고 나갈 수밖에 없겠지요.
또 남원에는 흑돼지 연구와 품질 향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박화춘 박사님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네요. 현재 ‘다산육종’ 대표이신 그는 서울대에서 학위를 받고 연구소에서 활동하시다가 고향 운봉으로 내려와 남원의 흑돼지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원 관내에서는 2만3천여 두의 흑돼지를 키우고 있습니다.
음식이란 아무리 광고와 홍보를 많이 해도 맛이 없으면 ‘끝장’입니다. 남원의 흑돼지도 한 번 먹어 본 사람이 마치 마약에 끌리듯 다시 찾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맛있어야 만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 명품이 되지 않을까요? 남원 흑돼지는 이미 명품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일단 맛을 보시라니까요.”
첫댓글 아! 남원 흑돼지에 그토록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미처 몰랐네요. 천하일미, 남원흑돼지, 빨리 기차타고 맛보러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