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7편 7~11 여호와는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오늘 우리는 이미 시편 147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두 번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을 7절로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시편은 찬송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돌보심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이 시편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라고 노래한 시인은 다시금 7절에서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라고 찬양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8절 이하에서 찬양의 이유를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이 시인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은 더더욱 비와 이슬의 중요성이 농사와 목축과 생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에게 주신 기업의 땅에서는 바로 비와 이슬이 생존의 절대적 요소인데, 그것을 주관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우상 숭배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살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비와 이슬을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불경하고 완악한 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엘리야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말이 있기 전에는 비도 이슬도 내려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 그대로 되었습니다. 불신앙에 빠졌던 그 백성들도 비로소 비와 이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다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늘에서 소박비가 내렸으니 다시 한번 비를 멈추게도 하시고 내리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확실하게 알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몇 개월째 겪어온 이번 가뭄으로 인하여 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절실히 알았습니다. 우리는 비가 풍부한 지역이기 때문에 때로는 비가 내리는 것을 자연현상 정도로 치부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신음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로써 아뢰곤 합니다. 이제 어제 오늘부터 장마비가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심을 하지 맙시다. 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우리 모두 전국적으로 심각한 가뭄 현상이 완전히 해갈되도록 비를 많이 내려주시도록 기도하시고, 또 한편 폭우로 인한 수해도 없도록 기도하십시다. 또한 비가 내렸을 때에 이를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비를 내려주신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를 반드시 하시기 바랍니다.
9절에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물들에게도 그 먹거리를 공급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24에 보면,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고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다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눅 12:24~26)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농사도 짓지 않고 먹을 것을 창고에 보관하지도 않는 까마귀를 하나님은 친히 먹여주시고 길러주신다고 증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그 까마귀의 새끼까지 챙겨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미천한 것의 미천한 새끼까지 하나님은 긍휼히 여겨주시며 살리시고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과 그의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의 삶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약속의 후손들이 이어져나가기를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이 없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애굽 여인 하갈을 첩으로 들인 결과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훗날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 사라 구십세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준수와 그 두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삭이 잘 자라나 젖을 떼는 날에 잔치를 벌였는데, 이스마엘이 동생 이삭을 희롱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쫓아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때 고민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순종한 아브라함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 아기를 데리고 가게 하였습니다.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목말라서 이스마엘은 기진하여 죽어가는데, 하갈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 좀 떨어진 곳에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 그 어린 아이 이스마엘의 울음 소리를 들으셨다고 창세기 21장 17절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보내어 격려하고 샘물을 보여주어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 이스마엘을 다시 살리고 장성하도록 함께해주시고 번성하도록 축복해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의 본류에서 떨어져나간 곁가지 자손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곁가지에 불과한 아브라함의 불신앙의 열매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돌아보십니다. 어린 이스마엘이 브엘세바 사막길에서 목말라서 죽어가면서 뱉어낸 눈물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그를 살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마음은 이처럼 긍휼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하여 늘 안타까워하시며 그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 우리의 무능한 모습, 우리의 지극히 초라한 모습도 감출 것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을 기도로써 간청하기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내쫓지 아니하십니다. 박대하지 않으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품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지극히 보잘것 없는 미물까지 챙겨주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반드시 돌보시고 길러주실 줄 믿습니다.
10절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기뻐하시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여기서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기병대의 군사력이 탁월한 것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보병대의 군사력이 강한 것도 좋게 여기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군사력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군대를 보유했다 하더라도 그 군사력을 의지하면 반드시 패망하게 되어 있고, 아무리 군사력이 부족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은혜를 구하고 도와주심을 간절히 바라는 자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어 승리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다의 아사 왕 때에 쳐들어온 구스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었지만, 아사 왕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이렇게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구스 사람들을 치시니 아사와 유다 군사들이 추격하였는데 그들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고 노략한 물건이 엄청나게 많았고 내친 김에 그랄 지역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는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백만 대군이란 도저히 유다가 방어할 수 없는 대대적인 군사력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 유다가 그들을 완전히 격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차 세계 대전 때에 저 유럽에서 독일, 이탈리아 동맹군은 군사적으로 훨씬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그 군사력으로 폴란드, 프랑스 등이 순식간에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끝내는 불의한 악을 행하면서 군사력만을 신봉하였던 독일 나찌는 패망하였고 군사력은 약했지만 당시 죠지 6세 국왕으로부터 총리, 국회의원, 국민 대다수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도우심을 구하였던 당시 영국은 끝내 독일의 대규모 공격을 잘 막아내고 끝내는 전세를 역전하는 대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33:16 이하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시 33:16~20)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 시편 기자의 굳센 신앙과 앞서 산 수많은 영적 선배들의 증거대로,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쟁을 통하여 승리한 후에 포획한 적군의 수많은 말들을 자기 군대의 전쟁 물자로 가져오는 대신에, 그 말들의 뒷발꿈치 힘줄을 칼로 끊어 놓은 일을 마음에 되새깁시다. 그 행위는 앞으로도 전쟁 중에 군사력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자비만을 의지하겠다는 다윗의 결단인 것입니다.
욥기 7장 1절에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원문은 전쟁, 싸움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아갈 때 종종 심각한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옵니다. 내 힘과 내 경험과 내 자산을 가지고 해결하려 해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도 만나게 되고 또 복잡하여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들은 오늘 본문 말씀의 교훈을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의 힘과 능력과 지혜와 경험만을 의지하여 인생의 싸움을 싸우려 덤벼들지 맙시다. 우리들은 세상 만사를 그 뜻대로 운행하시며 불가능이 없으시며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 11절에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에서 ‘바란다’는 히브리어 단어 ‘야할’은 ‘신뢰, 믿음, 기대, 소망, 인내’ 등을 다 포함한 단어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에게 소망을 두고 우리들을 도우실 것을 기대하면서 끝까지 인내합시다.
시편 130:6,7 말씀에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끈질기게 소망과 믿음 가지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긍휼히 여겨주실 것이요 그 오른 손을 펴사 도와주실 것이요 반드시 깊은 고난에서 구원해주실 것이요 놀라운 축복으로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크신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