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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수명(山紫水明)한 덕대산(德大山)의 산줄기가 남쪽으로 나즈막하게 내려와 구령산(龜齡山), 검암리(儉岩里)로 해서 서말리산과 당말리산에 이른다. 이 산들을 중심으로 해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또 마을 앞으로 낙동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고, 사방으로 탁트인 마을이다. 서말리산 아래쪽에 내서동(內西洞)이 있고, 그 서쪽에 서편동(西便洞)이 있다. 당말리산의 아래쪽에 내동동(內東洞)이 있고, 그 동쪽에 동촌동(東村洞)이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시장 일대에 시동동(市東洞)과 시서동(市西洞)이 있다. 또 낙동강 가에 있는 하남제방(下南堤防) 밑에 대원동(大原洞)이 있고, 그 위쪽 들 가운데에 대평동(大坪洞)이 있다.
수산리(守山里)는 삼국 시대부터 신라의 대서방 진출의 전략 기지였으며, 후에는 천산부곡(穿山部曲)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 와서 수산현(守山縣)이 되어 밀양군(密陽郡)의 속현(屬縣)으로 조선 시대까지 내려 왔다. 이곳은 수산현(守山縣)의 읍치(邑治)로서 계속 존속해 왔다. 오늘날은 하남읍(下南邑)의 소재지로서 발전하고 있다. 옛날에는 수상교통(水上交通)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은 25번 국도(國道)가 통과하고 있으며, 밀양(密陽) 서남쪽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대평리(大坪里)와 병합하여 수산리(守山里)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이때는내동(內東).내서(內西).동촌(東村).시동(市東).시서(市西).대평(大坪).대원(大原).서편동(西便洞) 등 8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2년 7월 13일자로 시동(市東)이 1.2.3동으로 나누어져서 10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은 하남읍의 행정, 교육의 중심지로서 발전하고 있다. 동으로는 백산리, 서로는 초동면 검암리, 북으로는 옛 국농소(國農所)를 사이에 두고 초동면 금포리와 각각 인접해 있고, 남으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창원군과 군계(郡界)를 이룬다. 유적으로는 옛 수산제(守山堤)(국농소(國農所))와 동촌동(東村洞) 지석묘군(支石墓群), 패총(貝塚) 유적 등이 있고, 또 신라왕(新羅王)이 이궁(離宮)하면서 남긴 설화가 곳곳에 남아 있다.
(1) 동촌동(東村洞)
당말리산의 동쪽에 있으며, 앞으로는 넓은 평야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다.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때 서찬(徐澯)이 입촌(入村)한 후 지금까지 이천서씨(利川徐氏) 일파가 세거해 오고 있다. 오늘날은 여러 성씨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1774년에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동호재(東湖齋)가 보존되고 있다. 또 이천서씨(利川徐氏) 일문의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6인의 행적을 현양(顯揚)하기 위해 세운 정문(旌門)인 육절각(六節閣)이 함께 보존되고 있다.
(2) 내서동((內西洞), 농소리(農所里))
서말리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 이름은 농소리(農所里)였다. 조선 시대에 남수정(攬秀亭) 경내에 수산창(守山倉)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에는 세누정(洗陋亭), 덕민정(德民亭)의 유지(遺址)와 남수정(攬秀亭), 수산진(守山津)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옛 수산현(守山縣)의 읍치(邑治)로 추정된다.
(3) 내동(內東洞)
당말리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4) 시동 1리(市東 1里)
수산리의 시장(市場)이 있는 곳에 있다. 하남지서를 지나 황금당과 대동약방 사이에 있는 골목을 기점으로 하여 시동(市東)과 시서(市西)로 나누어졌다. 시동(市東)은 그 동쪽에 해당된다. 1992년 7월 13일에 시동(市洞)도 1.2.3 리로 나누어졌다. 시( 市)東 1이(里)는 덕일산업에서 도로(道路) 오른쪽으로 해서 동명중학교 입구까지 해당된다.
(5) 시동 2리(市東 2里)
동명중학교의 새 정문에서 대원동(大原洞) 쪽으로 동명빌라가 있는 일대가 해당된다.
(6) 시동 3리(市東 3里)
덕일산업에서 왼쪽으로 백산리(栢山里)로 가는 길목 일대가 해당된다. 들마을도 포함된다.
(7) 시서동(市西洞)
수산시장(守山市場)이 있는 곳이다. 황금당과 대동약방 사이에 있는 골목을 기준으로 시동(市東)과 시서(市西)로 나누어져 있는데, 시서(市西)는 그 서쪽에 해당된다. 옛 수산장(守山場)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시장이 있으며 상가도 많이 있다.
(8) 대평동(大坪洞)
시동(市東)의 동쪽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300여년 전에 충의위(忠義衛) 이이백(李而栢)이 입촌(入村)한 후 벽진이씨(碧珍李氏) 일파가 지금까지 세거해 왔다. 오늘날은 여러 성씨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9) 대원동(大原洞)
대평동(大坪洞)의 아래쪽 낙동강 제방가에 있는 마을이다. 본동과 둑넘 두 땀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1반, 2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10) 서편동(西便洞)
서말리산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수산리(守山里)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하남읍과 초동면의 경계를 이룬다.
■ 돌고개
내서동(內西洞)에서 서편동(西便洞)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부싯돌이 많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밤밭(栗林)
수산과 대평동 사이에 있었다. 옛날에 낙동강변에 밤밭이 많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은 옛날 관율수(官栗藪)였다. 이러한 사실은 남수정(攬秀亭) 십이경(十二景)의 시(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용진율림(龍津栗林))
■ 안강(龍津江)
낙동강의 한 지류(支流)로서 동명중학교에서 시작하여 수산제(守山堤)의 수문(水門) 앞으로 해서 양동.대사.파서리를 통과하여 상남면 오산리로 흘러 갔다. 이 강(江)으로 옛날에는 광선(廣船)이 돛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일제 때 낙동강변에 있는 하남제방을 축조하면서부터 개발되어 오늘날은 그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수로(水路)로 이용되고 있다. 이 수로를 개통이라고 한다. 일명 용진강(龍津江)이라고도 한다.
■ 안강들
동촌동 앞에 있는 들이다. 옛날에는 이 앞으로 안강이 흘렀는데, 안강 부근에 있는 들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모산나루
대평동에서 창원군 대산면 모산으로 건너 가는 나루터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 수산장(守山場)
수산리의 시장(市場)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옛 장터는 양동리 자산굼에 있었다고 한다. 이 앞으로는 옛 안강이 흐르고 있어서 옛날에는 상당히 번성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의 위치에 있는 시장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오늘날과 같이 육상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낙동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상당히 번성하였다고 전한다. 1950∼60년대까지도 창원, 김해, 창녕 등지의 낙동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배에 농산물을 싣고 이 장(場)을 이용했으며, 생필품도 구입해 갔다고 한다. 장날마다 50∼60척 이상의 배가 수산나루에 정박하여 장관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 수산나루(守山津)
수산리 관락정 활터가 있는 곳에 옛 도선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수산교(守山橋) 부근이다. 지금은 수산교가 건립되어 폐지되었다. 이곳은 고대(古代)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신라가 가야제국(伽耶諸國)을 정벌할 때 전진기지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창원군 대산으로 건너 갔다. 강가에 덕민정(德民亭), 남수정(攬秀亭)과 같은 수산현(守山縣)의 공(公)해도 있었다. 또 낙동강의 조운을 통하는 나루터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나루터 주변에는 주막집도 많이 있었으며 상당히 번화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정경에 대해서는 남수정(攬秀亭) 십이경(十二景)의 시(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낙강상선(洛江商船), 강시주점(江市酒店))
■ 세누정(洗陋亭)
남수정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신라왕이 이곳으로 이궁(離宮) 유행(遊行)할 때 유숙하던 곳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지증왕 2년 3월에 순장(殉葬)을 폐지하는 법을 제정, 반포하여 오랫동안 내려오던 누습(陋習)을 씻었다고 해서 세누정(洗陋亭)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그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서말리산 정상에 있는 수산배수장의 아래쪽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도 신라왕이 이궁(離宮)하면서 남긴 유적으로 생각된다.
■ 덕민정(德民亭)
내서동 남수정의 아래쪽에 있었던 수산현(守山縣)의 공(公)해 건물이었다. 권람의 덕민정(德民亭) 기문(記文)에 의하면 덕민정은 1448년 이백상(李伯常)이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하여 수산현의 공해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450년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3간(間)의 건물을 지어 현청(縣廳)의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좌(左)·우(右)에 각각 3간(間)씩 붙여 단청을 하였다. 또 건물의 관리상 필요한 부속 건물을 지어 본부(本府)에서 수산현으로 파견한 사람들을 소속시켰으며, 주변의 전답을 개간하게 하여 해마다 수백석의 수확을 거두어 손님 접대 등 현의 경비로 충당케 하였다. 수산현은 지리적으로 밀양에서 50여리 지점에 있다. 현의 남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서 영남의 물산과 조운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현을 지나가는 사명(使命)이나 귀빈(貴賓)이 많았고, 본부(本府)에서 이들을 영접해야 했으나 현(縣)에는 공해가 없어 빈객들은 모두 본부의 객사(客舍)로 안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많았다. 그래서 부사(府使) 이백상(李伯常)이 그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 덕민정(德民亭)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곳에서 수산현을 지나가는 모든 빈객들을 영접하게 하였고, 현의 공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덕민정(德民亭)이라고 부른 것은 덕(德)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기 위해서 세운 공해라고 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창건 이후 덕민정의 흥패(興敗) 사실과 현청(縣廳)으로서의 역사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주세붕(周世鵬)의 남수정(攬秀亭) 기문(記文)에 의하면, 1538년에 부사(府使) 장적(張籍)이 덕민정의 위쪽에 남수정을 새로 지었다. 그래서 덕민정은 현사(縣舍)로서 전용하였고, 남수정은 빈객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1542년에 부사(府使) 박세후가 덕민정의 서북쪽에 현사 10간을 증축하여 공해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렸다. 또 덕민정 옆에 3동(棟) 40여 간(間)이나 되는 창고 건물도 있어서 낙동강 조운을 통하여 수조(收租)하는 곡식도 보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덕민정과 남수정이 다 소실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후 그 유지(遺址)에 남수정과 수산창만 중건하였다. 숙종 때 낙동강의 범람을 관측하여 수산창(守山倉)에 불을 질러 들판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을 구한 영장(營將) 김기(金淇)의 공(功)을 표창하여 덕민정(德民亭).남수정(攬秀亭)의 구허(舊墟)를 그에게 하사하였다. 이후부터 이 일대는 이 지방에 거주하는 광주김씨(廣州金氏) 일문의 사패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 남수정(攬秀亭)
내서동 낙동강 언덕가에 있다. 현재의 남수정은 광주김씨(廣州金氏) 일문의 대종실(大宗室)이 되어 있다. 원래는 수산현에 소속된 누대(樓臺)로서 1538년에 부사(府使) 장적(張籍)이 창건하였고, 1539년 어득강(魚得江)이 후임 부사로 도임하여 단청을 한 후 '남수(攬秀)' 2자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1542년에 부사 박세후(朴世煦)가 10간(間)의 부속건물로 지어 현사(縣舍)로 삼고, 주위에 담장과 대문을 설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다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 뒤에 유허(遺墟) 한 쪽에 수산창(守山倉)을 건립하여 곡식을 보관하였다. 숙종 때 영장(營將) 김기(金淇)가 낙동강이 범람하는 것을 보고, 수산창에 불을 질러 많은 인명을 구한 공으로 이 일대를 하사받아 이 지방에 살던 광주김씨(廣州金氏) 일문의 사패지가 되었다. 광주김씨 문중에서 다시 남수정을 재건하여 강학소(講學所)로 삼았다. 그 후 화재(火災)를 만나 불타고 말았다. 그 유허(遺墟)는 일시 타인에게 양도되었으나, 1865년 진해현감(鎭海縣監) 김난규(金蘭奎)가 소유권을 환수하여 그 자리에다가 남수정을 다시 중건하였다. 또 그 경내에 광주김씨(廣州金氏)의 선조(先祖)인 김기(金淇)의 위업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정(追慕亭)을 중건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해 오다가 1977년 후손들에 의해 현재와 같이 확장 중건하였다. 남수정(攬秀亭) 십이경(十二景)의 시(詩)가 전한다.
■ 수산창(守山倉)
내서동 남수정의 경내에 있었다. 수산현(守山縣)과 상서초동면(上西初同面)의 조세를 수납하였던 곳이다. 조선 전기에는 수산제(守山堤) 즉 국농소(國農所)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보관하였다고 하여 농소창(農所倉)이라고 한다.
■ 임강원(臨江院)
수산리 수산교 입구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양동역(良洞驛)과 수안역(守安驛) 그리고 창원군(昌原郡) 대산역(大山驛)의 중간 지점에 있었던 원(院)으로써 수산현의 원우(院宇)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는 폐지되었다.
■ 수문거리(수문껄)
내동 천우주택 뒤에서 시작하여 수산국민학교를 지나 양동리 도련산 어귀까지 있었던 옛 수산제(守山堤)의 제방(堤防)이 있었던 곳이다. 이 제방으로 사람들이 다녔다고 한다. 안강교 부근에 옛 수산제의 수문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당말리산(堂山)
내동의 뒷산이다. 이 산의 정상에 당집이 있었고, 또 당산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매년 당신(堂神)을 받드는 제향(祭享)을 지냈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다.
■ 섬등 대평동 앞 낙동강가에 있는 섬이다. 20여년 전부터 낙동강의 흐름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지금은 대평동에 속해 있으며, 농지(農地)로 이용되고 있다.
■ 수산제(守山堤, 국농소(國農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수산(守山)의 경계 내에 있다고 해서 수산제(守山堤)라고 한다. 현재는 하남읍과 초동면에 걸쳐서 위치하고 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이미 삼한 시대부터 벼농사를 하기 위하여 축조되었다고 한다. 문헌상으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수산제는 둘레가 30여리이며, 그 가운데에 오산(鰲山)과 죽도(竹島)가 있다고 한다. 오산(鰲山)은 현재 초동면 금포리에 있는 자라목을 가리킨다. 이곳은 신라왕이 이궁(離宮) 유행(遊行)해 와서 배를 타고 유상(遊賞)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주위에는 신라왕이 이궁 유행하면서 남긴 설화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궁대(離宮臺), 어정(御井), 세누정(洗陋亭), 제궁터 등이 그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신라 시대부터는 어느 정도 수산제에 대한 윤곽을 찾아볼 수 있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시대에 김방경(金方慶)이 여(麗).원연합군(元聯合軍)과 함께 일본을 정벌할 시(時)에 수산제(守山堤)의 제방을 증축하고, 군수(軍須)를 마련했다고 한다. 밀주지(密州誌)에서는 군수(軍需)를 마련코자 했으나, 모래땅이라서 성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상반되나 김방경이 처음으로 수산제의 제방을 축조한 것이 아니고, 제방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에는 제방이 다 무너져서 이용을 못하였던 것 같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이미 제방(堤防)이 다 무너져서 다시 복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1450년에 지은 권람의 "덕민정기(德民亭記)"에는 당시 주위에 있는 논밭이 황폐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세조(世祖) 9년(1463)에 논의(論議) 끝에 국농소(國農所)가 되었다. 세조(世祖) 13년(1467)에 다시 밀양(密陽), 청도(淸道), 영산(靈山), 창녕(昌寧), 대구(大邱), 창원(昌原), 현풍(玄風), 양산(梁山), 김해(金海) 등 9개 고을의 장정을 동원하여 제방을 증축하고 물길을 트고, 수문(水門)을 설치했다고 한다. 후에 봉선사(奉先寺)(경기도 남양주군 소재)에 사패(賜牌)를 주었는데, 봉선사(奉先寺)는 거리가 멀어 잘 관리하지 못하여 수문(水門)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성종(成宗) 원년(元年)에는 국농소(國農所)가 혁파되어 그 경작지(耕作地)의 반(半)은 일반 백성에게, 나머지 반(半)은 봉선사에 주어서 경작해 왔다. 그 후에 수 차례에 걸쳐 국농소의 회복이 논의되어 오다가 성종 18년(1487년)에 다시 회복되었다. 중종.명종 때까지도 그대로 이용되어 왔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황폐화되어 이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갈대와 연꽃만 만발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정두원의 이궁대(離宮臺) 팔경(八景) 중의 시(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 후에 국농소로 다시 복원(復元)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밀주지(密州誌)(밀양군향교(密陽郡鄕校), 1933년)에는 고종초(高宗初) 목모(睦某)라는 관원(官員)이 와서 수산제의 제방을 증축하여 수환(水患)을 면(免)하게 하고, 다시 국둔전(國屯田)에 속하게 하였다. 갑오경장 후에는 관유지(官有地)가 되었다. 1910년 이후에 일본인 두산만(頭山滿)이 불하(拂下)를 받았다가 권리금(權利金)을 받고, 당시 이 지방의 지주였던 민병석에 팔았다. 민병석은 국농소를 논으로 개간하였다고 한다. 1949년 농지개혁으로 각 개인에게 불하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상으로 수산제의 유래를 간략히 살펴 보았다. 수산제의 현황을 살펴 보자. 수산제의 주위에는 야산(野山)으로 둘러 싸여 있다. 지금은 다 개발되어 논이 되어 있다. 수산제를 국농늪과 국농소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국농늪은 국농소(國農沼), 국농지(國農池), 국농호(國農湖), 수산제(守山堤), 수산지(守山池), 수산택(守山澤) 등으로 불렀으며, 이곳은 1913년부터 개발되어 지금은 다 논이 되었다. 지금도 큰 비가 올 때는 주위에 있는 산골짜기에서 내려 오는 안수(內水) 때문에 침수(沈水)가 잘 되는 곳이다. 이곳은 저수지(貯水池)로 개발(開發)되었다기보다는 낙동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지형이 변모하여 생긴 천연적인 늪지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밀양 지방에서 널리 불리는 농요(農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980년에 경지 정리를 했으나, 여전히 침수가 되어 1985년에 재차 경지 정리를 하였다. 이 때 장마에 대비하여 새로운 물길을 내고, 침수가 될 때 물을 배수해 내는 배수 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지금은 전천후(全天候) 농사(農事)를 지을 수 있다. 그러면 국농늪을 어떻게 이용했을까? 이 주위에는 많은 패총(貝塚)이 발견되고 있다. 수산리 동촌동, 수문 부근, 귀명리 제궁터, 초동면 금포리의 자라목.모래들 등지에서 발견된다. 이 패총은 먹다 버린 재첩 등이 대부분이다. 특히 동촌동과 제궁터에서는 골편(骨片)과 토기편(土器片)(3∼5세기)이 발견되고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못 가운데에는 마름,세모 마름, 연꽃 등이 가득 차 있다"고 하고, 권람의 덕민정기(德民亭記)에서도 "수산제(守山堤)에는 연꽃이 피어 나고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헤엄치고, 죽도(竹島)에는 대나무가 무성하다"고 한다. 또 밀양 지방에서 널리 불리는 농요(農謠)에서도 국농늪에서 연밭따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수자원(水資源)도 풍족했던 것 같다. 또 이 지방에 거주하는 고노(古老)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이 개발되기 전까지도 물고기도 잡고 연밥도 따고, 연근(蓮根)을 채취(採取)하여 주식(主食)으로 했다"고 한다. 국농소는 농지(農地)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국농소는 수산제의 제방 안에 있는 국농늪 주변의 농지(農地)를 가리킨다. 그 범위는 기축이월(己丑二月) 일밀양부국농소기간전답개양안(日密陽府國農所起墾田畓改量案)(서울대 도서관, 연대 미상)에 의하면 수산(守山), 곡강(曲江), 검암(儉岩), 두암(斗岩), 금포(金浦), 귀명동(貴明洞), 竹島 등지가 해당된다. 이곳은 국농늪의 주변에 해당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시대에 김방경(金方慶)이 여(麗)·원연합군(元聯合軍)과 함께 일본을 정벌(征伐)할 시(時)에 수산제의 제방(堤防)을 증축(增築)하고 물길을 트고 군수를 마련했다고 한다. 밀주지(密州誌)에는 땅이 모래땅이라서 성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김방경이 군수를 마련하기 위해 저습지(低濕地)를 개발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것 같다. 조선 시대에는 세조 9년에 국농소로 편입되었고, 세조 13년에 제방을 중축하고, 이곳을 개발하여 200여결의 농지(農地)를 얻었다고 한다. 이곳은 지세(地勢)가 낮아 해마다 큰 비가 오면 강물이 범람하여 침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 각종 퇴적물(堆積物)이나 유기물(有機物)이 떠내려 와서 쌓여 시비(施肥)의 역할을 해 줌으로서 농경(農耕)에 적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생산량이 많을 때는 8천여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지방에 거주하는 고로(古老)들의 증언(證言)에 의하면 "이곳이 개발되기 전까지도 홍수(洪水)가 끝나면 물을 배수(排水)해 내고, 콩을 심으면 콩이 한 길이나 컸다"고 한다.
수산제의 제방에 대해서 살펴 보자. 밀주지(密州誌)에는 "지세(地勢)가 낮아서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여 가을에는 수확할 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수산제의 제방은 낙동강의 한 지류(支流)인 안강의 물이 범람하여 국농소로 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축조된 것이다. 이 제방이 과연 삼한 시대부터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흥왕(法興王) 18년 봄에 해당 관서(官署)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케 하였다. 이 시기에 신라(新羅)의 영토 내에 있는 제방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낙동강 유역의 수산제이다. 이 때 신라(新羅)의 대서방(對西方) 전략기지(戰略基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이 제방도 수리(修理)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제방이 어떻게 축조(築造)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자연(自然)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이 제방을 어떻게 이용했을까? 안강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군사방어선(軍事防禦線) 역할도 했으리라 추측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변에 있는 지석묘군(支石墓群)과 고분군(古墳群) 등의 유적지를 봐도 알 수 있겠다. 또 밀주지(密州誌)에 전하는 설화(說話)를 보면 이곳은 신라(新羅)와 가야(伽耶)의 격전지(激戰地)였던 것 같다. 이궁대(離宮臺), 정남정(定南亭), 풍류현(風流峴), 파서막(破西幕) 등의 설화(說話)를 봐도 알 수가 있겠다. 이궁대(離宮臺)는 지증왕이 강우(江右)을 병합(倂合)하고자, 이곳에 진(陣)을 치고 서쪽으로 대가야(大伽耶)를 치고, 남으로 가락을 정벌하였다고 하며 법흥왕(法興王) 때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항복을 한 곳이라고 한다. 파서막(破西幕)은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이 가야제국(伽耶諸國)을 멸망시키고 난 뒤 군막(軍幕)을 파(破)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남정(定南亭)은 신라왕이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항복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정자(亭子)라고 한다. 이 정자는 파서리(破西里)에 있다고도 하고, 또 풍류현(風流峴)에 있었다고 전한다. 풍류현(風流峴)은 대사리(大司里)에서 파서리(破西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신라왕이 이궁해 왔을 때 봉선(封禪)하고 제사(祭祀)를 지낸 뒤에 풍악(風樂)을 잡히던 곳이다. 이외에 백산리에 관한 설화도 있다. 백산리는 가야와 신라의 격전지였다고 한다. 가야의 백수장군이 전사하여 이곳에 묻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위의 설화에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이 등장하고 있다. 이 시기는 6세기경이다. 이 때는 신라가 대외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설화가 수산제의 주위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이곳이 신라와 가야가 격전을 벌렸던 격전지였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수산제의 제방은 군사적인 방어진지로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이곳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이 제방이 길로 이용하였으며, 안강교 부근에 옛 수문이 남아 있어서 '수문거리'라고 한다. 수문은 최근에 발굴되었는데 길이가 20m, 폭은 1.4m, 높이는 1.81m이다. 큰 자연석을 굴착하여 뚫은 것이다. 이 수문은 하남제방이 축조되고, 수산제가 개발되면서 폐지가 되었던 것을 최근에 다시 발굴한 것이다. 또 이 제방은 가까운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흔적은 6.25 사변 이후까지 수산국민학교 뒤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경지 정리를 하면서 다 파손되었고, 현재는 지적도에만 남아 있다. 그 길이가 1024m 정도나 되며, 폭은 18-24m정도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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