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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34-42절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시되 사도로서 천국 복음 전파를 위하여 세우신 자들에게 특별히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명령 아래서 말씀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런 권능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원리 아래서 그런 권능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열 두 사도가 부름을 받아 보냄을 받고 있는 것은 단지 권능을 행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천국 복음 전파를 위하여 세우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권능을 받은 것도 복음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원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저 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런 복음에 대하여 전파하는 것 역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원리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을 때 금이나 은이나 동, 그리고 배낭이나 옷, 신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부활 이후에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기 때문에 마태복음 10장에서는 한시적인 의미에서, 한시적이기 때문에 좀 더 활동성 있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채우실 것을 의심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때 사도들은 어디를 가든지 평안을 빌어주는 자로 있어야 하는데, 단지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저들이 하나님과 화목 되기를 바란다는 차원에서의 평안, 다시 말해 복음을 전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이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며, 특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셨고, 이리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박해한다 할지라도 지혜롭게 대처하면서 순결함을 잃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복음 때문에 어떤 일까지 일어난다고 말씀하셨느냐?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 내 주며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는 일까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 적대적인 것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사도들이 양으로서 이리 가운데로 보냄을 받는다고 할 때 저들이 이리이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의 목자이신 이상 이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 저들이 복음을 대적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복음은 반드시 드러날 것이며, 혹 그것 때문에 박해를 한다고 할 때 육신을 죽이는 일까지 있을지라도 영혼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고 누구 앞에서든지 복음을 시인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분명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이지만 오늘날 성도와 무관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사도들과 관련해서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거주 받았으니 거저 주는 원리라든가, 아니면 평안하기를 빌어주는 내용,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식이나 순결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 나아가 사람이나 세상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먼저 34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미 21절 이하를 보면서 확인한 바 있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다툼과 분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 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스가랴 9장 10절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복음은 언제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기 때문에(벧전2:7-8) 화평이 아니라 검, 즉 화평과는 반대되는 다툼과 분쟁과 같은 일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다툼이나 분쟁을 위해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을 위해 오셨고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본성의 문제로 다툼과 분쟁이 생길 뿐입니다. 때문에 34절을 오해하셔서 예수님은 다툼과 분쟁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5절과 36절을 보시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그러니까 복음을 받은 자와 복음을 받지 않는 자 사이에는 아무리 물보다 피가 진하다고 할 수 있는 가족 관계일지라도 거기에 불화가 생길 수 있으며 결국에는 원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족의 가장 기본 구성 단위인 부부를 생각해 보자면, 성경은 부부를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가르칩니다(마19:6). 그러나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다시 말해 한 편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됨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할 때, 그리고 다른 한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고 할 때 과연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부부라는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하나는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원리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에 보면 ‘불화하게 하다’(dicavzw[디카조])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떨어뜨리다’, ‘가르다’, 혹은 ‘두 부분으로 자르다’, ‘절단하다’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후서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있느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6:14)는 말씀까지 있습니다. 특히 이 말씀과 관련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제24장 3항)은 어떤 해석까지 내 놓느냐? 일단 고린도전서 7장 39절과 함께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만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동시에 고린도후서 6장 14절과 그 외 몇몇 구절을 근거로 어떤 고백까지 하느냐? “참으로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불신자나 교황주의자나 기타 우상숭배자들과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합니다. “또 경건한 사람은 노골적으로 범죄생활을 하는 자나 정죄를 받은 이단자들과 결혼을 함으로써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메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합니다. 왜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 부부는 하나를 이루는 것인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교리적으로 너무 다른 자들이라면 그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결혼했을 때 다툼과 분쟁과 같은 일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만났을 때 항상 다툼만 있고, 분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진정한 의미에서는 하나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교회의 몸이라면, 다른 한편은 그 안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그리스도가 그의 머리가 아니라, 악한 영이 그의 머리로 있기 때문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6:14-16)
그러므로 주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이상, 그리고 복음 안에 있지 않는 이상, 좀 더 나아가 동일한 교리의 내용으로 있지 않는 이상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화평이 있을 수 있느냐?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검이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다툼과 분쟁, 나누어지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 관계라 할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7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우리는 가끔 물보다 피가 진하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만큼 가족이라는 관계는 끊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경도 역시 이웃 사랑의 정신과 관련해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가족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만이 아니라 자녀들, 그리고 형제지간에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내려놓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족관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즉 신앙을 배반해도 좋으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계명을 요약할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처럼 율법은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도 없지만, 성도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율법을 다 이루는 방향으로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분명 율법을 다 이룰 수는 없지만 우리의 방향이 바로 그러한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이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엡1:4),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롬8:29). 그러므로 율법의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을 빌미로 이웃 사랑, 특별히 부모에 대한 공경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기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그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1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막7:11-13) 하나님 사랑이 우선시 되다 보니까 율법을 해석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면 이웃 사랑은 좀 소홀해도 되는 것처럼 그들의 전통을 만들어 냈던 겁니다. 그것을 책망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 때문에 부모에 대한 공경을 미루거나 멈추는 것은 성경이 명하고 있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 사랑 때문에 이웃 사랑이 폐해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것은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사랑 때문에 하나님 사랑이 멈춰지거나 폐해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바는 뭐냐?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무엇이 우선하는 가를 가르친다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중요하지만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하나님 사랑이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에 있어 하나님 사랑이 우선하기 때문에, 또한 오늘 본문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하기 때문에 원수와 같은 그들을 미워해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원수같이 여겨질 수 있는 가족일지라도 그들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내려놓도록 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의 근거하는, 그리고 기본이 되고 바탕이 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보면 같은 내용이지만 좀 더 강한 어조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여기 보면 미워하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미워하라고 말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 때문에 주님은 마치 혈육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려야 할 것처럼 해석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 역시 마태복음의 맥락과 같습니다.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지를 알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나 형제나 자녀에 대하여 어떤 도리를 행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에 대하여 마땅히 행하여야 할 우리의 본문을 저버리거나 하나님의 어떤 명령을 어김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우리는 육신의 부모나 형제나 자녀에 대한 도리를 저버리더라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본분을 다하는 쪽을 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매튜 풀).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막는다면 이것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칼빈). 그만큼 갈등이요 어려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38절을 보시면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여기 보면 십자가를 지라고 되어 있는데, 십자가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받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 환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 고통, 갈등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에 대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지지 않는 성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방금 살핀 것처럼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한편이 예수를 믿고 다른 한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과 어려움이 십자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 관계 속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겪게 되는 모든 관계 속에서의 어려움, 나아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갈등들 역시 십자가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성화 문제, 즉 “왜 이렇게도 성화가 되지 않는가? 왜 이리도 성화는 더딘가?”에 대한 문제로 이런 저런 말들이 오고 갔지만, 그런 내적인 갈등 역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고민하게 되는 십자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런 십자가를 벗어 버리고 가도록 하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 주를 따르라는 것이고 , 내적으로도 많은 갈등이 있지만 그런 갈등 속에서도 주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는 이런 단어까지 덧붙여져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 보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매일 매일 각자에게 주어지는 그 십자가를 지고 어떻게 주를 따를 수 있는가? 쉽게 말하자면 힘들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연약성을 따라 생각하자면 쉽게 지칩니다. 그리고 실상 우리 삶 속에서 지칠 때가 있습니다. 자주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금 확인하게 되겠지만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위로로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여러분, 예수님 안에는 분명 안식이 있습니다. 쉼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해서 아무런 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짐이 있다고 해서 무거운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내 멍에는 쉽게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왜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 어려워하는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만 마태복음 11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그리스도로부터 짐을 지는 법을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지난주에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해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29-30)라는 말씀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분명 하나님의 뜻 가운데 펼쳐지는 역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위 우연이라고 말하는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기 때문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빨리 마음을 정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뜻에 대한 항복보다는 좋지 못한 일과 관련해서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하고 원망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섭리를 말할 때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합니다. 요셉의 경우 형들이 싫어하여 그를 팔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종살이를 해야 했을 때, 거기서도 순결함을 지키다가 감옥에까지 보내지는 그런 억울한 일들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요셉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우리가 하나님 섭리 안에서 취해야 할 자세가 바로 이런 자세여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한 원수를 만났을 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일이 분명 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요셉을 팔았는데 판 자가 악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하지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먼저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런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큼은 선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 비록 고통 속에 있고 어려움 속에 있고 또 그것 때문에 좌절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이 바로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아는 것.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항복하는 것,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악에 대하여 악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으로 내 놓는 것,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이 이런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그 마음에 두고 있지 못했다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체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뻔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부터 짐을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우리의 사고를 옮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생각하는 그런 것입니다. 인간론 중심이 아니라 신론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무엇이 나타나는가?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일하시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되었으면 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느냐?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까지 하나님 앞에서 항복해야 하는가?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로 항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라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목숨까지 내 놓는다는 것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가져 가신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원망,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욥이 그러했던 것 아닙니까! 동방에서 부유했던 사람으로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자녀들도 다 죽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요, 소위 머피의 법칙이라고 해서 좋지 않은 일이 연속으로 터졌던 겁니다. 이 정도면 원망할 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쉽게 나올 수 있는 고백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도 내놓을 수 있다는 각오, 그런 모습이 비춰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 앞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야고보서에서 욥의 인내를 말하지만 결국 누가 드러나느냐? 욥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자비가 드러난 것처럼 욥의 고백을 통해서도 분명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사실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무엇을 주셨느냐? 죽음까지라도 내놓을 수 있는 각오까지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9절을 보시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미워한다고 해서 말 그대로 나를 미워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자학하라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생명을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생명보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해야 할 자들입니다. 본성적으로 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딤후3:1-2) 이런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값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을 우리 대신 죽이시기 위해서 인성을 취하도록 하셔서 산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죽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고린도전서 7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2-23)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 자들인가?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해서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사도들과 관련하여, 저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고 또 그들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초를 당하게 되겠지만,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몸을 죽여도 영혼은 능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영혼을 받아주시며 마지막 날 부활이 있기까지 안식하도록 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자기의 것을 버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것을 예비해 두십니다. 혹 목숨까지 내 놓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은 영원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생명까지 요구하시는 일들이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각오는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또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했을 때 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40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16절 이하에서 말씀하시는 내용, 즉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과는 달리 너희를 영접하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어느 정도 위로함을 더하시는데,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10장 16절에 보면 좀 더 분명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영접한다는 것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인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사도들을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일만 있느냐? 방금 본 누가복음에서는 저버리는 일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을 저버리는 것은 복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그들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 마태복음 10장은 사도들을 보내시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주체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자의 뜻을 따라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초반부에서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병든 것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할 때 그 능력으로 자기를 알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 10장 마지막 단락에 와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어떤 면에서 이런 정신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 사도들을 영접한다고 해서 사도들이 잘나서 영접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주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영접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분명 위로함을 더하고 계십니다. 박해만 있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물론 박해만 있을지라도 우리는 앞서 살핀 말씀처럼 목숨을 잃을 각오로서 주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영접한다고 해서 너희가 주체가 아니라, 너희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진정한 주체가 누구인가를 다시금 확인하도록 하십니다. 미워하고 저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저버리는 모양으로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진정한 주체란 너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주체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실 때 사도와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이 마치 동일시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복음 25장 최후 심판의 자리에서 더욱 더 드러난다 할 수 있는데, 31절 이하에 보시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여기 보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냐?
먼저 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부터 보시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여기 보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어떤 자가 상속 받느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릴 때 먹을 것을 준 자,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준 자,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한 자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를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들은 어떻게 인식하는가? 37절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여기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염소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데,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행한 것이 지금 누구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느냐? 심판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자와 누가 동일시되고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시되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대해 종종 의문을 가질 때 “이 말씀은 행위구원을 말씀하시는 건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해당 본문을 살필 때 좀 더 자세히 보겠지만 분명한 것은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시는 내용과 맞물려 있습니다(마7:2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바로 이 말씀과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의 구원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아니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때가 되어 부르실 때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할 때 그 믿음은 결코 죽은 믿음이 아니라는 측면이라는 것입니다.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요, 그렇기 때문에 감사로서 이웃 사랑의 실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이웃 사랑을 통해 나타나더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통해 나타난 그 사랑을 어떻게 여기시느냐? 마치 나를 사랑한 것처럼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 무조건 하나님 사랑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앙 안에 들어와 있지 않는데도 이웃 사랑의 실천이 하나님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 하나님 사랑이라고 했을 때 그것 자체로 주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는가?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이 완벽한 사랑의 실천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점과 흠이 있지만 그리스도 자신의 공로로 인하여 완전한 것처럼 여겨주시고, 받아주실 뿐입니다.
특히 의인들의 경우 “우리가 언제 주께 그렇게 대접했습니까?”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어떤 행위들에 대하여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까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의미상으로는 직접적으로 주님을 대접한 일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웃 사랑의 실천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공로로 여기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웃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상까지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지금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살핀 것처럼 사도와 그리스도, 심지어 하나님까지 동일시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들을 영접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곧 누구를 영접하는 것이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란 겁니다.
이것 자체만 생각해 본다면 사도들이 주의 일을 행하는 것, 얼마나 놀랍고도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앞선 말씀에서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다고 하셨는데(마10:25)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주께서 마치 사도들을 그런 식으로 대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느냐? 있습니다. 주님과 같다는 말 자체가 분에 넘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 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사도의 상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그들의 사역에 있어 주의 일을 행하는 것으로 감사함이 있지만,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들 역시 사도들과 동일한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사도와 동일시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41절에서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이라고 할 때 분명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 그리고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 그리고 의인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지만, 그것이 공로에 의한 상급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영접했다고 할 때 성경은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은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은혜라고 말하기 때문에 공로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25장에서 본 것처럼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말하는 것, 다시 말해 공로로 여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합당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마태복음 25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며, 또한 친히 상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은혜로 끝나는, 은혜의 과잉의 역사만 있는 것입니다.
사도와 선지자, 의인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 42절에서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소위 크다고 일컬어지는 자들만이 아니라 작은 자 중 한 사람에게 작은 것,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마치 나에게 한 것처럼 여겨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는 분명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할 때 자기의 목숨까지 주를 위해 내놓겠다는 각오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난 뒤 영광을 취하신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의 삶 역시 고난 가운데 있지만 장차 영광을 소유할 자로 있기 때문에 위로와 감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다만 이 때 우리의 삶은 어떤 자로 있어야 하는가? 주께서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부분에 있어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작은 자 중 한 사람에게 작은 것이라고 주는 자, 단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자, 내 이름 때문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뜻이 아닌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자, 바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힘든 싸움 가운데 있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더욱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한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와 같은 것들을 활용함으로서 주께로 나아가는 그 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고백을 하느냐? 빌립보서 3장 13절, 14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 역시 이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