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의 儒敎를 다시 생각한다
-南冥과 退溪의 사상을 중심으로-
儒敎(유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사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런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왕조 500년 또한 세계의 왕조사상 드물게 길기만 했지 한심하고 볼품없는 시대로 여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본과 중국 등 이웃나라 사람들만 보더라도 자기들에게 불리한 역사를 왜곡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미화하며 억지 자존(自尊)이라도 세우려 혈안인데, 우리는 이렇게 조상들의 사상과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고 폄하하는 못난 후손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교와 조선시대 역사에 대해 과연 얼마나 올바르게 알고 있는가? 유교는 결코 단순한 사상이 아니다. 조선시대 역시 어설픈 논객들이 왈가왈부할 만큼 그리 간단한 역사가 아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로 또는 어설픈 책 몇 권을 읽고서 유교를 논단해서는 안된다. '유교는 천(千)의 얼굴을 가진 문화현상'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사상이다.
유교는 식민사관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상당수 학자들의 인식처럼 그렇게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니다. 조선 유고는 주자학 일변도의 독선도 아니고, 조선을 문약(文弱)으로 이끈 사상적 주범도 아니다.
유교가 역사상 혁명적 실천기능을 담당했던 예는 조선시대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명(南冥)의 역동적인 유학정신은 조선 유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을 일거에 깨고도 남는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사화(士禍)로 얼룩진 16세기 조선의 위기와 혼돈의 시대를 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한국정신사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退溪와 달리 南冥은 오랫동안 잊혀진 사상가였다. 그것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초래한 역사적인 비애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남명학이 우리 정신사의 무대에서 퇴출되지 않았더라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그만큼 남명의 유학정신은 주자학의 범주를 넘어 불교와 노장,양명학,법가적 요소를 두고 포괄했을 만큼 개방적이었고, 당시 주자학의 논의가 관념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여 유학의 본령인 실천성을 강조했다.
남명은 '下學人事 上達天理'(아래로 사람의 일을 먼저 배운 다음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해야 한다)의 신념으로 제자들에게 율력과 형법,천문,지리,의학,군사 등 실용학문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가르쳤다.
병법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임진왜란 때 그의 문하에서 50여명의 의병장이 나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영남의병대장 정인홍 그리고 김면,조종도(大笑軒公) 등의 의병장이 그들이다.
누가 조선의 유학을 문약하다 하는가! 남명의 유학정신은 혁명적인 성격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백성이 물과 같다는 말은 예로부터 있어 왔으니,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는 민암부(民巖賦)의 대목은 가히 민중적 지식인의 풍모까지 내비친다.
남명은 '칼을 찬 유학자'로 불릴 만큼 협객의 이미지도 지녔다. 유명한 을묘사직소(1555)에서 조정의 실정을 통박한 예를 봐도 그렇다.
TV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대단한 여걸로 등장한 당대의 최고 권력자 문정왕후를 구중궁궐의 '일개 과부'로, 명종 임금을 선왕의 대를 이은 '어린 아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해 일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상소문의 비판의 강도와 표현의 수준이 당시로서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준엄하고 직설적이었다.
'宮抽太白 霜拍廣寒流 斗牛恢恢地 神游刃不游'(불 속에서 하얀 칼 뽑으니, 서릿발 같은 빛 달까지 흐른다, 북두 견우성 떠있는 넓디넓은 하늘에, 정신은 놀아도 칼날은 놀지 않는다).
남명의 문도들이 펴낸 남명집 첫 장에 등장하는 이 오언절구는 남명의 청고(淸高)한 선비의 기상과 강의(剛毅)한 유학자의 정신을 대변하고도 남는다.
남명의 이같이 불의를 향한 서릿발같은 칼날은 스스로의 내면으로 향했을 때는 삼엄한 경(敬)이 되었다. '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義)이란 남명의 패검명(佩劒銘·칼에 새긴 글)을 봐도 그렇다.
성리학의 주요 주제인 이 敬을 중심으로 보더라도 남명의 유교는 실천철학이요 마음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남명의 실천성은 세계의 변혁을 지향하고 있지만, 외부세계의 변혁 못지 않게 인간주체인 자신의 혁신문제에도 주목하고 있다.
남명의 이 敬義는 사상에 있어서 실천성 하면 떠오르는 마르크스주의와도 또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세계의 변혁에 있어서 마르크스가 언급하지 못한 '인간의 문제'를 그 중심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남명이 준거하고 있는 성리학의 사상체계는 인간과 세계를 관통하는 이론이다. 남명의 실천은 '인간과 세계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남명의 등장으로 주자학 일변도의 정태적 경향으로 인식되고 있던 한국정신사가 역동성과 다원성 그리고 개방성 획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어떤 논자는 ‘남명학이 없는 한국정신사는 반쪽의 정신사요 불구의 정신사일 뿐’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또한 남명과 방법론상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한 혁신사상가였다.
퇴계는 조선의 대사상가이다. 자신이 마주친 조선의 현실에 대해 깊이 고뇌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꾼 역사적,실천적 인물이었다. 퇴계는 결코 理와 氣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있던 공리공담론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적극적인 실천성에 대비해 퇴계의 소극성을 지적하면서, 53회나 거듭되는 관직에서의 사퇴원을 떠올린다. 퇴계는 과연 왜 그렇게 무수한 사퇴행위를 했을까?
그것은 개혁의 화신이었던 정암 조광조의 실패(기묘사화)로 부터 얻은 교훈이 아니었을까. 소수 엘리트의 의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방식만으로는 세상을 바꾸는데 현실적인 한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다음 시대를 기약하는 온건적이고 근본적인 방식을 추구했을 것이다.
철학적인 작업을 통해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고 바람직한 공동체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개혁의 명분을 강화하고, 교육을 통해 새로운 철학으로 무장한 신세대 젊은이들을 양성함으로써 개혁세력의 저변확대를 도모했던 것이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통해 퇴계는 시대의 새벽은 그리 쉽게 오는 것이 아님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차원으로 실천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 바로 학문과 교육이었다.
퇴계가 주자학에 몰두한 것도 주자학의 대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혁을 위한 퇴계 나름대로의 방편을 찾기 위해서였다. 질곡의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논리를 모색하기 위한 교과서가 주희의 저작인 ‘주자대전’이었다.
퇴계가 살았던 시대는 한 마디로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주자학의 이기론적(理氣論的) 표현으로 하면 ‘氣强理弱’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16세기를 황폐화하고 있던 氣强理弱의 훈구파시대를 넘어 理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망을 주자학 속에서 읽었던 것이다.
퇴계는 위기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주희의 ‘氣發理乘’이란 미지근한 논리를 ‘理發氣隨’(理가 發하면 氣가 뒤따른다)로 수정,보완하기까지 했다. 주자학의 창조적 변용이다.
理의 능동성을 인정함으로써 주자학의 무기력한 理개념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 퇴계의 理發說을 그래서 사림세력이 무기력에서 벗어나 내공을 다지고 역량을 강화해 타락한 훈구파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주도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8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을 두고도 공리공담이라는 지적이 많다. 퇴계와 고봉은 정말 쓰잘데없는 논변을 8년 동안이나 지속했을까? 사단칠정논변은 외래사상을 이해하고 수용하는데 있어서 노선대립과 같은 것이었다.
‘원전의 맥락에 충실할 것이냐, 해석을 통한 창조적 수용을 할 것이냐’에 대한 오랜 논변의 파급력은 마침내 성리학을 조선의 시대정신으로 도약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논변은 사화(士禍)라고 하는 어지러운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대문제의 본질을 ‘인간’으로 보고 理氣論을 인간의 심성에 적용할 때 드러나는 논점에 대해 치열하게 고뇌하고 논박했던 것이다.
당대에 가장 절실한 학문을 ‘실학’(實學)이라고 정의했을 때, 사화가 빗발치던 16세기의 황폐한 인간시대의 실학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17,18세기의 실학이라는 것도 결국은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토대의 변화에 따라 유학이 적응해 간 것이다.
퇴계학파인 기호 남인들 중에서 서양종교인 천주교 신자가 많이 나왔고, 동학(東學)의 시조인 수운 최제우가 퇴계 학문의 맥을 이은 영남 유림의 종착지였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운의 아버지는 퇴계의 학문을 이은 적통 유학자였다.
전세계 천주교 역사상 선교사를 통하지 않은 서적을 통한 신앙의 유입은 조선의 경우가 유일하다고 한다. 천주교 교리와 퇴계 철학간에 보편적인 유사성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근본적으로 퇴계의 理와 천주교의 上帝는 하나가 아니었을까. 敬은 성인이 되기 위한 실천론이지만 신학적 의미에서는 종교적 실천을 뜻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임하듯, 敬의 수련을 통해서 理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결국은 理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퇴계의 학설이 유학과 천주교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동학도 19세기 어느날 느닷없이 솟아오른 사상이 아니다.
퇴계사상이나 동학이나 우리 전통의 ‘하늘 신앙’이 시대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며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수운 사상의 핵심인 侍天主(한울님을 모신다)는 퇴계의 理發說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사상가는 시대의 아들이다. 시대가 변하면 사상도 변하기 마련이다. 퇴계의 사상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풍운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16세기 퇴계의 사상은 17,18세기 실사구시의 요구에 적응해 實學으로 흘렀고, 서구와의 만남으로 西學(천주교)으로 흘렀으며, 19세기 격동의 시대에는 민초들의 함성과 함께 東學으로 나타났다.
제국주의가 이 땅을 유린하던 20세기 전반에는 독립운동의 동력이 되었으니,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과 만주 동북지방의 독립투사 일송 김동삼, 신간회의 동산 유인석, 항일 민족시인 육사 이원록, 의열단의 추강 김지섭 등이 퇴계의 고장 안동이 낳은 인물이다.
지식정보화 시대라고 부르는 오늘 이 시대에 남명과 퇴계의 철학과 사상은 어느 뜨거운 가슴 면면을 흐르고 있을까. 누가 조선의 유교를 남명과 퇴계의 사상을 시대착오적인 공리공담이라 치부하는가.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물게 500년이나 존속했던 문화국가 조선의 실체를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산업화 시대에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문화가 경쟁력인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를 맞아 한류(韓流)의 물결이 해외로 파급되는 오늘의 긍정적인 현실도 한문과 교육의 가치를 강조했던 조선 유교의 전통이 내재된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의 내면과 사상을 지배했던 유교를 얼마나 알려고 애를 썼는가. 영어 공부의 1/100만 투자를 해도 편견과 오해로 가득한 상식적인 유교관을 떨쳐버리고 유교의 본질을 직접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를 정면에서 응시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유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포착하고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정신적 사상적 토대로 재활용해야 한다.
조선의 유학(儒學)은 바람직한 공동체의 이상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실천철학이었음을 이해해야 오늘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부터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배우고갑니다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