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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차박할래?
하나.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직장일과 지역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어도 여름방학 겨울방학마다 여행을 빼먹은 적이 없다. 여행을 하면 아들의 생각과 삶이 단단해지리라 기대했다. 세상 보는 안목도 달리질 것이라 믿었다. 정치인들이나 재벌들처럼 돈과 권력은 물려주지 못해도 건강한 생각과 삶만큼은 물려주고 싶었다.
아마 첫 여행은 지리산 둘레길 걷기였을 것이다. 그 뒤로 설악산에도 올랐고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에는 전주에서 공주까지 농민군의 진격로를 따라 걸었으며, 여수, 순천, 고창과 순창도 여행했다. 자전거를 구입한 뒤에는 충주 이화령길과 제주도 일주도로를 라이딩했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 여행을 했지만 아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다녀온 곳조차 기억하지 못했고 생각이 단단해지기는커녕 무엇 하나 스스로 해내지도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는 대학입시 준비 때문에 그마저도 중단됐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친구들과 노느라 아빠와의 여행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다가 올해 코로나사태가 닥치면서 아들은 졸지에 사이버대학생이 되었다. 더구나 나까지 명예퇴직을 하면서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함께 밥해서 나눠 먹고 청소도 함께 하고 분리수거, 빨래하고 너는 것도 나눠 하면서 관계가 한결 돈독해졌다. 평소 부정적으로 보였던 부분도 함께 살다보니 긍정적 요소가 많았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대화의 폭도 넓어졌다. 군입대 문제와 복수전공 변경문제, 장래 진로문제, 친구문제와 이성 친구 사귀는 문제도 자연스럽게 나눴다. 사방을 둘러봐도 이야기 나눌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효과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우선 아빠와 엄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자신에 대해서도 가족과 가정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던 아이가 부모의 처지와 엄마 아빠가 하고 있는 일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도우려 했다. 장래를 위한 구체적 고민도 하고 있는 듯했다.
아들의 변화에 용기를 얻어 불쑥 ‘아들 차박 할래?’라고 던졌다. 아들은 생뚱맞은 표정으로 ‘차박이 뭔데?’라고 대답했다. ‘임마 요즘 핫한 차박도 모르냐.’ 그렇게 해서 차박 여행이 결정됐다. 하지만 구체적 날짜를 잡지도 않았고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백수 과로사’라고 퇴직하고 났더니 밀려드는 일들은 왜 이리 많은지. 지난 주 사나흘 동안 남양주 학술조사를 다녀온 뒤로는 더 이상 미뤄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 아들에게 ‘내일 차박 가자?’라고 말했다. 아들은 아무런 사족도 달지 않고 ‘알았어요’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저녁에 퇴근한 아내에게 ‘아들과 1박 2일 동안 차박을 다녀올까 해’라고 말했더니 뜬금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장비도 없이 어딜 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다 준비하고 가면 재미없어’라고 받아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들 녀석은 평소처럼 늦잠을 잤다. 여행 전의 설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도 평소처럼 아내와 아침을 챙겨 먹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우리 모습이 이상했던지 아내가 한 마디 했다. ‘아침 일찍 차박 간다며 뭐해?’ 그 때서야 아들을 깨우고 쇼핑백에 주섬주섬 몇 가지 도구를 주워 담았다. 짐이 몇 가지 없을 줄 알았더니 시장가방 두 세 개가 가득 찼다.
둘
딱히 어디로 가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요즘 차박 여행의 성지로 떠오른 곳이 어딘지도 아는 바가 없었다. 자동차에 짐을 실으며 ‘아들, 어디로 갈래?’라고 물었더니 선뜻 ‘지난번에 친구들과 동해를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서해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선뜻 자기 생각을 밝히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집 근처 캠핑용품점에 들러 남포등과 로프, 부탄가스, 간이의자를 구입했다. 캠핑용품점은 오전인데도 인산인해였다. 상점주인은 코로나사태로 해외여행이 금지되면서 가족캠핑을 가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서산·태안에서 차박하기 좋은 곳을 검색해보라고 말했더니 어렵지 않게 ‘신진도-마도’를 찾아냈다. 이곳이 마니아층 사이에서는 차박의 성지라고 했다.
서산, 태안 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부안·선유도 일대도 고려했지만 거리상으로나 청정함에서 태안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한 시간쯤 달렸더니 서산이다. 이마트에 들러 늦은 점심과 저녁에 먹을 고기와 라면을 샀다. 세수할 때 사용할 물통도 구하고 싶었지만 어디에서도 팔지 않았다. 서산에서 태안으로 나가는 32번 국도를 달리다가 603번 지방도로 바꿔 달렸다. 이 도로가 서산에서 태안을 거쳐 안흥항과 신진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도로에는 차량이 많지도 적지도 않다. 아무래도 평일 프리미엄일 것이다. 평소 여행할 때면 핸드폰에 코를 박던 아들은 어쩐 일인지 창밖을 응시한다. 덕분에 함께 주변도 관찰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는 서산, 태안지역은 참 깨끗하고 포근하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근래 서해안 개발 붐에서도 난개발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서산으로 낙향할까!’ 10여 년 뒤 부여로 낙향하려던 마음이 심하게 흔들린다.
안흥을 지나 신진대교를 건너니 별세계가 펼쳐진다. 이탈리아 소렌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마음마저 푸르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대교(大橋)를 건너자마자 ‘국립태안해양유물관’으로 향했다. 국립태안해양유물관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보존센터’ 부설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에는 고려와 조선시대 악마의 해협 천수만과 안흥 연안에서 난파한 조운선과 무역선의 수중유물을 발굴 전시하고 있었다. 발굴된 유물들은 송나라 자기와 도기가 많았고 조운선에서 발굴한 미곡(米穀)도 많았다. 관람객도 없는 박물관을 여유롭게 답사하며 아들과 역사이야기, 한일관계, 우리와 중국관계에 관한 생각을 나눴다.
국립태안해양유물관에서 나와 고개를 넘었다. 신진도 반대편의 또 다른 안흥항이다. 안흥항은 신진도와 마도 일대의 모든 포구를 관할하는 듯했다. 마도는 신진도 안흥항유람선선착장에서 작은 다리 너머에 있었다. 너무 작고 낮아서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연도교임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도 주차장에는 차박하려는 차량으로 가득 찼다. 한쪽 구석에 차를 세우고 차박할 장소를 물색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가 주차한 곳만큼 좋은 장소를 찾을 수 없어 그냥 짐을 풀려고 하는데 아들이 마뜩찮은 표정이다. 아무래도 텐트를 치고 술을 마시며 떠드는 이웃사람들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마도와 신진도를 나왔다. 해협도 복잡하고 곳곳에 백사장도 많아서 작고 아늑한 차박 장소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안흥 근처를 지나다 ‘길음이 해수욕장’ 팻말을 본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향을 잡았다. 이곳이 안 되면 내가 좋아하는 신두리 해변과 파도리 해변도 있고 근처에 연포나 몽산포도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다.
해수욕장은 작은 마을과 비포장길을 지난 곳에 있었다. 예상대로 손바닥 만한 작은 해변인데 울창한 솔밭이 인상적이었다. 좀 일렀지만 풍경이 마음에 들어 차박 하겠다고 했더니 관리인이 차박은 안 되고 캠핑은 된다고 했다. 더구나 캠핑을 하려면 입장료와 주차료 1만 5천 원에 추가로 1만 5천원을 더 내야 한다는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솔숲과 해변이 사유지여서 비싸지만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3만원을 내고 입장했다. 신두리나 파도리로 이동해도 마땅한 차박장소를 찾는다는 보장이 없고 보면 안전하고 아름다운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도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짐을 내렸다. 다행히 비상용으로 준비한 백 패킹용 2인용 텐트가 있어 하룻밤 잠을 자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솔밭은 먼발치로 봤을 때보다 훨씬 좋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해변도 마음에 들었고 솔밭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도 무척 시원했다. 솔밭 캠핑장에는 드문드문 야영하는 텐트들이 있었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어 코로나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야영장은 화장실과 샤워장 식수대도 갖춰진데다 가로등도 있어 안전하고 편리했다.
바닥에 넓은 방수포를 깔고 2인용 텐트를 쳤다. 별도의 넓은 공간에 짐들을 올려놨어도 취사와 휴식공간까지 확보되었다. 거드는 아들에게 텐트 치는 법과 야영할 때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솔깃한지 바짝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대충 정리를 한 뒤 아들에게 바닷가 산책을 다녀오라고 하고는 저녁준비를 했다. 우리가 준비한 저녁은 소고기 구이에 라면이다. 아들은 소나무사이로 저녁놀이 붉게 물들 때쯤 돌아왔다. 버너를 꺼내 불을 붙였다. 소고기를 굽고 라면을 끊여 맥주를 반주삼아 저녁을 먹었다. 행복한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야외용 간이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바다를 응시하는데 늦은 저녁에 도착한 가족이 텐트를 치느라 낑낑댄다. 식수대로 양치질을 하러 가다가 도와줘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반색한다. 젊은 아빠는 처음 쳐보는 텐트인데 잘 모르겠다며 난감해 했다. 텐트 치는 것은 자신이 있어 호기롭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요즘 텐트는 그렇게 호기를 부릴 게 아니었다. 아들까지 불러 설치를 시도했지만 샤프한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치라고 당부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셋
밤 10시쯤 잠을 잤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살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 정말 심심하다. 눈도 침침한데 핸드폰만 들여다볼 수도 없고 아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난감한 것은 일찍 잤더니 새벽 3시가 되자 눈이 뻔쩍 뜨이는 거다. 뒤척이다 소변을 누고 다시 돌아와 누웠지만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텐트 밖으로 나가 의자를 펴고 하늘의 별을 감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극혐하는 모기가 못살게 한다. 그렇게 두 시간 넘게 안절부절 사투를 벌이다보니 동이 터 온다. 바닷가로 나갔다. 해무가 짖은 바다는 또 다른 감성을 자극한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거닐다 달맞이꽃하고도 이야기 하고 모래밭을 달리는 작은 게들과도 대화를 했다. 심심하니 별짓을 다한다 싶어 혼자 피식 웃었다.
6시쯤 잠에서 깬 아들과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아까 보지 못한 해식동굴에도 들어가 보고 아들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속이 거북하다는 아들을 굶기고 혼자 빵으로 아침을 때운 뒤 일찍 텐트를 걷었다. 아들에게는 ‘바다는 볼만큼 봤으니 육지 맛 좀 보자’고 했다. 아들도 산길이든 바닷길이든 걷고 싶다고 했다. 자동차에 짐을 실은 다음 티맵에 ‘태안 부석사’를 찍었다.
안흥과 근흥을 벗어나 태안방면으로 달리는데 정신이 몽롱하다. 순간 깜박 졸기도 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난 후유증이다. 이러다 사고 나겠다 싶어 공터에 차를 세우고 10분쯤 잤다. 그렇게 쪽잠을 두 번씩이나 자고 부석사에 도착했다.
부석사는 서산시 부석면 도비산 중턱에 있었다. 일주문 앞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랐다. 잠을 제대로 못잔 다리로 가파를 길을 오르려니 정인이 부른 ‘오르막길’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꺼야.’ 정말 웃음기가 사라졌다.
영주 부석사가 완만한 경사면에 축대를 쌓고 절을 지었다면, 태안 부석사는 가파른 언덕에 축대를 쌓아 높고 웅장했다. 경내에서 만난 전 서산문화원장님은 ‘서산 부석사가 삼국통일 직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1년 뒤에 이 절을 창건했다고 말했다. 부석사의 주불전은 극락전이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한국인 관광객은 없고 인도인 가족 관광객이 기도를 하고 계단을 내려온다. 극락전 앞을 지나 산신각에 올랐다.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흡사 극락에 오르는 길처럼 정갈하고 아름답다. 길섶의 작은 3층 석탑도 격조를 더한다. 아들에게 부석사라는 이름의 의미와 산신각을 세우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데 산신각 안에서 ‘산왕대신’을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가 간절하고 우렁차다.
산신각을 거쳐 마애불 답사까지 마치고 절 입구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아들에게는 뜨거운 차로 속이나 풀자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의 맛과 멋을 느껴보게 하고 싶었다. 바람이 시원한 창가에 앉아 녹차를 시킬까 하다 아침부터 뱃속이 좋지 않다던 아들의 말을 상기하며 대추차 두 잔을 시켰다. 찻집 창밖으로는 저수지와 들판이 내다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솔숲을 따라 올라온다. 참 좋다. 아들도 찻집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듯 분위기에 젓는다.
절을 내려오며 비로소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곧 점심을 먹을 거라고 했더니 수덕여관 한정식을 적극 권한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눈곱도 떼지 않은 아내를 납치해 수덕여관 누마루에 앉혀 두고 점심을 먹었던 일들이 생각났나 보다. 아내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우리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는 ‘서산 불고기.’ 생선을 지독히도 못 먹는 편식쟁이 아들을 배려한 메뉴다. 서산불고기집은 서산의 맛집 명소인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겨우 자리를 잡고 특불고기 2인분을 시켰다. 정갈한 상차림이었지만 상추에 숯불로 구운 불고기를 얹어 쌈 싸 먹는 제미가 사라진 입맛을 돋운다.
오후, 당진 솔뫼성지를 갈까 하다가 다시 바다를 보고 싶다는 아들의 바램에 대호방조제 방면으로 차를 돌렸다. 당진 시내에서 대호방조제까지는 30분소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벽촌이었던 대호지면이 방조제와 공단조성으로 상전벽해를 이뤘다. 우리는 길가의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장고항 바닷가와 방파제에서 바닷바람도 맞으며 쉴멍놀멍 평택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2020.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