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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71)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 밤 '상편'
다음날 아침, 조반을 얻어 먹은 김삿갓은 곽호산 훈장에게 금천의 산천을 두루 돌아 보겠다고 말을 하고 떠났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곡산에 가 있었다.
그의 발길은 곡산을 향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곡산을 가기 위해서는 신계를 거쳐야 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걷던 김삿갓의 눈에, 신계를 앞둔,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에
'臍生堂藥局' 이라고 쓴 커다란 간판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삿갓은 그 간판을 잘못 보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보니, 틀림없는 '臍生堂藥局' 이었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음을 웃었다. 간판 글자가 터무니 없는 글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약국은 생명을 다루는 곳이다. 따라서 약국은 '생명을 건져' 준단 뜻에서 흔히 '濟生堂' 이라고 써온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간판은 건널 제(濟)가 아닌, 배꼽 제(臍)자를 약국 이름으로 쓰지 않았나?
(저 약국 주인은 한문에 어지간히 무식한 모양이군.)
빈수레 끄는 소리가 사뭇, 요란하고. 못생긴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하는 법이다.
그러려니 돌팔이 의원이라고 별다른 일이 있을손가, 생각 된 김삿갓이 의원 앞으로 가보니, 의원 집은 별로 크지도 않았는데, 지붕위를 가로질러 올려놓은 간판은 지붕 보다 더 커보였다.
김삿갓은 간판 글자가 잘못된 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간판이 잘못된 것도 알려 줄 겸, 오늘 저녁은 저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자!)
김삿갓은 약국문을 열고 주인을 찾았다.
약국 주인은 나이가 60가량 되었을까, 구렛나루를 허옇고 탐스럽게 기른 것이 풍채가 그럴듯한
사람이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무슨 병으로 왔는고?"
그는 김삿갓을 환자로 알고 반가운 어조로 맞았다.
"저는 환자는 아니옵고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과객이 무슨 일로 약국에 들렀는가?"
"이 댁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기에, 그것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제생당의 '제'자는, 건널 제(濟)자를 써야할 것을, 배꼽 제(臍)자로 잘못 쓰셨기에 그것을 알고 계신가 하여 여쭤봅니다."
약국 주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역시, 김삿갓의 예상대로 간판 글자가 잘못 된 것을 주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약국 주인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내가 워낙 눈이 어두워 간판을 친구에게 써달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글자를 잘못 쓴 모양이구먼.
그러나 어쨌건간에 '제생당' 이라고 읽히기만 하면 될 게 아닌가?"
약국 주인은 되지도 않은 억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일장 훈계조의 말을 늘어 놓았다.
"무슨 일이나 귀공처럼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네. 그러니 귀공도 오래 살고 싶거든
매사를 둥글둥글하게 보아 넘기게."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려 보였다.
그런 김삿갓의 모습을 본 약국 주인은 아래와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통에 더욱 기가 막혔다.
"귀공은 의원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데는 배꼽처럼 중요한 것이 없네. 어린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도 배꼽줄을 잘라 주어야 살게 되거든! 어찌 그뿐인가?
""배꼽에 어루쇠 붙인 것 같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명의는 환자의 배꼽만 보아도 그 사람의 뱃속에 어떤 병이 들었는지 환히 안다는 소릴세.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제생당의 제 자는 건널 제 보다, 배꼽 제를 써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될 것이야!"
상사마(相思馬) 궁둥이 둘러대듯, 능구렁이 같은 약국 주인의 변명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판 글자가 잘못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승강이는 이제 그만 접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제가 몰라서 부질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그렇고, 날이 저물어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 하고 화제를 얼른 바꿔 버렸다.
주인 늙은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김삿갓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귀공은 학식이 많은 모양이니, 오늘 밤은 쉬어 가시게나. 그 대신 내가 눈이 어두워 읽지 못하는 의서가 있으니, 그 책이나 좀 읽어 주게."
주인 늙은이는 안으로 들인 김삿갓에게 '동의보감' 한 권을 내놓으며 첫장부터 자세히 읽어 달라고 한다. 김삿갓이 생각컨데, 주인 늙은이는 눈이 어둡다는 것은 핑계이고, 워낙 까막눈이어서, 의원이라면 통달했어야 할, '동의보감'조차 읽어 본 일이 없었을성 싶었다.
김삿갓이 정좌세로 앉아 동의보감을 읽자, 마주 앉아 이를 듣던 주인 늙은이는 점점 자세가
꼬부라지더니 이내, 비스듬히 다리를 뻣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듣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 말고 한마디 하는데,
"자고로 명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명의를 들라치면 중국에는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허준(許俊)과 안찬(安瓚), 양예춘(楊禮春) 정도가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들도 명의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명의가 되었거든, 그러니 명의란 칭호는 치료 과정에서 실수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칭호밖에 안되는 걸세."
자기도 명의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려고 한 말 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주인 늙은이도 어쩐지
사람을 많이 죽였을성 싶었다.
그때 마침,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환자 한 사람이 찾아 왔다.
나이는 사십 가량 되었을까 , 얼굴에 살이 붙어 두 볼이 볼기짝처럼 생겨 먹은 장년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고?"
제생당 주인은 부랴부랴 책상다리로 꼬고 앉으며, 턱을 들어 새삼스럽게 위엄을 떨쳐 보였다.
그러자 환자는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제가 요새 몸이 몹시 불편합니다. 선생께 진맥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어디, 팔을 내밀어 보게."
제생당 의원은 환자의 팔을 잡아당겨 맥을 짚어 보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맥을 짚어 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꼽을 들여다 보시죠 ! )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는 없었다.
제생당 의원은 진맥을 하고 뒤로 물러앉으며 말했다.
"맥으로 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군그래."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 그럼, 자네는 어떻게 괴로운지 증상을 자세히 말해 보게."
"웬일인지 밥을 먹으면 뱃속이 까닭없이 평소보다 불룩해 오고, 잠시후 달걀만한 덩어리가 뱃속, 위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뱃속에서 달걀만한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면서, 자네를 괴롭힌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놈의 달걀 덩어리가 위로 올라왔을때, 혹시나 입을 크게 벌리면 나와 줄까 싶어서 입을 크게 벌려 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내, 아래로 다시 내려가 버려, 사람을 괴롭히니, 아마도 병중에서도 보통 병이 아닌가 봅니다."
"음 ...."
제생당 주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이제야 알았네. 그것은 병이 아니라, 방귀가 탈출구를 찾지 못해 뱃속에서 방황을 하는 현상일쎄.
자네 얼굴이 볼기짝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귀조차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찾지 못해,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이야. 내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을 세 첩 지어
줄테니, 그것을 달여 먹도록 하게. 그러면 방귀가 제 갈길을 알아차려서, 병이 깨끗히 나을 걸세."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북받쳐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고 배꼽을 움켜잡았다. 얼굴조차 빨개졌고..
김삿갓은 조위승기탕이라는 약이 어떤 병에 쓰는 약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뱃속에 방귀를 몰아 내는데 약을 쓴다는 말조차, 들어 본 바가 없었다.
환자가 약 세 첩을 지어 가지고 인사를 하며 돌아가자, 김삿갓이 제생당 의원에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한약에는 뱃속에 가득찬 방귀를 몰아내는 약도 있습니까?"
"있지! 있구 말구! 조금 전에 환자가 지어 간 약이 바로 그 약이라네."
제생당 의원은 눈썹조차 까딱않고 태연 자약하게 배짱 좋은 대답을 한다.
그러자 김삿갓은 무시당한 것 만 같아서 다시 캐고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어떤 의서에 그런 처방문이 나와 있지요?"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별안간 너털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하 ...귀공은 사람이 왜 이다지도 고지식한가. 속이 복깨는 것은 필시 위장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런가? 그러니 소화가 잘되는 약을 먹게 되면 위장이 좋아져서 자연히 방귀가 절로 나올 것 아닌가?"
"앗차!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과연 그렇기는 하군요."
김삿갓은 한 대 단단히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제생당 주인은 훈시라도 하듯이 다시 말을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약국을 하고 있지만, 사람의 몸이란 신비롭기 짝이 없어서, 병이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낫게 되어 있는 것이네,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조금만 불편하면 부랴부랴 의원을 찾아 오거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약이란 것이 병자의 마음만 안심시켜줄 뿐이고, 약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일세. 죽을 병에 걸린다면 세상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수 없는 것이야, 만고의 명의였던 화타나 편작, 허준 같은 사람도 처방문이 없어서 죽었겠나? ..."
"어때? ... 귀공은 내 말 뜻을 알아듣겠나?"
김삿갓은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귀공이 내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다니 고맙네. 그렇다고 노상, 의원을 멀리 하라는 말은 아닐세.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지팡이가 필요하듯, 병자에게는 의원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야.
그러니 나 같은 엉터리 의원도 먹고 살아가게 되는게 아닌가?
안그래? 하하하 ... ! " 하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선생님 계세요?"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30십 중반으로 보이는 가난한 가정 부인이 들어선다.
이번에는 또 어떤 환자일까 하고 김삿갓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병으로 왔는고?"
제생당 주인은 여자 환자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쓰고 있었다.
60이라는 나이 탓도 있지만 ,어쩌면 환자에게는 반말을 써야만 권위가 선다고 생각한 탓인지도 모른다.
대소사(大小事)에 긴박한 일을 맞아 굿을 하는 사람이나, 길흉 화복을 점치는 무당들이나 처사들은 자신의 고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내뱉는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긴박과 곤궁에 처한 고객의 우위에 서서, 자신의 허술한 처방이나 미약하기 이를데 없는 방법의 정당성을 역설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김삿갓은 잘 알고 있었다.
환자는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꺼리는 듯 김삿갓을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말한다.
"선생님, 혼자 여쭤 볼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아랫방으로 내려가세 그려!"
주인 영감은 여자 환자를 아랫방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그러나 아랫방이라야 장지문 하나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어서, 숨소리 조차 송두리째 들려 올 정도였다.
찾아 온 여자 환자가 윗도리를 활짝 벗어 부치고, 의원에게 진찰을 정확히 받아 보려는 것이라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랫방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 보면 그건 것은 아니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그러는고?"
의원이 그렇게 묻자, 여인은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
"저는 병이 있어 온 것은 아니옵고, 실상은 태기가 있어서 ...."
"태기가 있어서 왔다고? ..."
주인 영감은 약간 실망하는 어조로 여인의 말을 듣고 나서,
"남편이 있으면 젊은 나이에 태기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가?"
제생당 의원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혹시 남편이 없는데, 태기가 있어서 걱정이란 말인가?" 하며 서슴없이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펄쩍 뛸 듯이 놀라 말을 하는데,
"선생님!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남편도 없이 제가, 어떻게 애가 생기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 그렇다면 내가 안 할 말을 했구먼, 남편이 있고 태기가 있다면 그런 경사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약국을 찾아왔단 말인가?"
여인은 또다시 한동안 말을 주저하는 듯 싶더니,
"실상인즉 저는 이미 아이가 열 이나 있사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열한번째의 태기가 있으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선생님을 찾아 온 것은 그 때문이옵니다."
"자식이 열 명이나 되는데, 그중에 머슴아이는 몇 명이나 되는고?"
"열 아이 모두가 머슴아이 뿐이옵니다."
"저런! 저런! 이제 알고 보니 ,자식 복을 무던히나 타고 났네그려, 게다가 또 태기가 있다니 이번에도 또 아들이 낳을 것은 분명하지 않겠나? "
여인은 딴생각이 있어 찾아온 모양인데, 제생당 의원은 눈치도 없이 딴전만 부리고 있었다.
여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용기를 낸듯이 말을 하였다.
"선생님! 없는 살림에 머슴아이가 연년생으로 열 명이나 있으니, 먹이기는 무엇을 먹이며, 입히기는 무엇을 입히옵니까. 그래서 이번 애기만은 숫제 떼어 버리고 싶어서, 선생님을 찾아온 것 입니다."
제생당 의원은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어조로 대답한다.
"허어, 뱃속에 들어 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애기는 삼신 할머니가 점지해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맘대로 떼어 버린단 말인가. 행여 그런 생각 말고, 집에 돌아가 몸 간수나 잘하게."
"아니옵니다. 이번 아이만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떼어 버려야 합니다. 지금도 굶다시피 살아가고 있는데, 게다가 또 하나 낳게 되면 무엇을 먹이옵니까?"
"모르는 소리 그만하게.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에는 제가 먹을 것은 모두 타가지고 나오는 법이야,
그런 것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네."
"어르신네들은 흔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어떡합니까.
다섯 아이가 있을 때와 열 아이가 있을 때와는 먹고 살아 가기가 하늘과 땅처럼 다르옵니다.
제 몫을 타고 나온다는 어른들 말씀을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저의 집 식구들을 살려 주시는 셈치고.
이번 아이만은 꼭 떼어 버리게 해주시옵소서. 선생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사옵니다."
살림살이가 어지간히 궁색했던지, 여인의 부탁은 간곡하기 이를데 없었다.
"허어 ... 이런 변고가 있나. 이 사람아, 약국이라는 데는 애기를 못 낳는 여인에게 약을 써서 애기가
생기게 하는 곳이지, 뱃속에 들어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는 곳은 아닐쎄. 그런 것도 모르는가?"
"제가 그런 것을 왜 모르겠사옵니까. 그러나 저의 집 사정은 남 다르오니 뱃속의 아이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있는 아이들 만은 살려 내야 하겠습니다. 그런줄 아시고 제발 부탁합니다."
여인이 하도 간청을 하니까, 의원 영감도 어지간히 딱했던 모양이다.
"어허, 그것 참! 세상에 이런 학질이 있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온식구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선생님께서 저의 집 식구들을 꼭 좀 살려 주십시오."
제생당 의원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문득 어떤 결심을 했는지,
"이번 애기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떼어 버리고 싶단 말이지? " 하고 단호하게 따져 묻는다.
제생당 주인이 이렇게 단호하게 따지듯이 묻는 말투로 보아서는, 임신부가 그렇게 소원한다면 뱃속의 아기를 낙태시켜 줄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 왔다.
왜냐하면 뱃속의 애기를 섣불리 낙태 시키다가는 모태조차 희생되기 쉽기 때문이었다.
(돌팔이 의원인 저 늙은이가, 어쩌자고 무모한 짓을 하려 하는가!)
김삿갓은 제생당 늙은이가 괘씸하게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선생님, 꼭 좀 부탁합니다! 이번 애기만은 꼭 좀 없애 주십시오."
임신부의 태도는 시종 일관 확고 부동 하였다.
"잘 알았네. 소원이 그렇다면 자네 소원대로 해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선생님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임신부는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이는 모양이더니, 이번에는 약값 걱정을 한다.
"약은 몇 첩이나 쓰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약 값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대해 제생당 의원은 태연 자약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먹을 것도 없다면서 약 값이 무슨 약 값인가! 약을 먹지 않고도 애기를 떼어 내는 방도가 있으니,
그 방법을 쓰기로 하세."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삿갓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약을 쓰지 않고도 뱃속의 아이를 어떻게 떼어낸 단 말인가 ? 혹시, 저 엉터리 의원이 몽둥이로 임신부의 배를 두드려 패기라도 할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조차 가득 들어차며,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다음 대화에 귀날이 쫑긋해졌다
72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72)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 밤 '하편'
여인은,
"약을 먹지 않고도 뱃속에 애기를 떼어 버릴 방도가 있기는 있사옵니까?" 하고 다시 물어 본다.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자신 만만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약을 쓰지 않고도 애기를 떼어 버릴 비방이 있지! 그런 비방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를 걸세."
"선생님! 그렇다면 저한테만은 그 비방을 꼭 좀 알려주시옵소서."
"자네는 약 값을 낼 형편도 못 된다니까, 싫든 좋든 간에 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김삿갓도 그 비방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어,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만약 제생당 의원이 남이 모르고 있는 그런 비방을 알고 있다면, 그야말로 이곳 제생당 의원이야 말로, 천하의 명의임이 틀림없다고 생각 되었던 것이다.
제생당 의원이 임신부에게 다시 말한다.
"그러면 자네한테만 특별히 그 비방을 쓰기로 하겠네. 지금 자네는 임신한 지 몇 달째 되는가?"
임신부가 대답하는데, "석 달전에 경도가 있고 나서 그쳤으니, 달 수로 치면 석 달째 되는 셈이옵니다."
"석 달이라 ... 그러면 묻겠는데 , 요즘 소변은 하루에 몇 번이나 보는가?"
"임신을 한 탓인지 소변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럴테지. 소변을 자주 본다고 했는데, 하루에 몇 번이나 보는가?"
"일일이 헤아려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하루에 열 번 정도는 되지 않는가 싶사옵니다."
"그럼 됬네. 약을 쓰지 않고도 애기를 간단히 떼어 버릴 수 있는 비결을 말해 줄테니, 꼭 그대로하게."
"선생님! 그런 좋은 방법이 정말 있사옵니까?"
"있구 말구! 아주 간단한 방법이네. 오늘부터 열흘 동안 소변을 일체 누지 말도록 하게. 그러면 뱃속의 아기가 아직 헤엄을 칠 줄 모를 테니까, 물에 빠져서 절로 죽어 나오게 될 걸세."
옆방에서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옅듣고 있던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소리를 내지않고 대굴대굴 굴렀다.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
김삿갓은 설마하니, 제생당 늙은이가 그와같은 엉터리 비방을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러나 임신부는 자신에게는 그 말이 엉터리로 들리지 않았던지,
"선생님! 소변을 참는데도 한도가 있지, 어떻게 열흘 씩이나, 참고 견디옵니까?" 하며 심각한 어조로 반문한다.
"제생당 의원의 대답은 또 한번 걸작이었다.
"열흘을 못 참겠거든 닷새 동안 만이라도 참아 보게나. 뱃속의 애기가 아직 활동력이 미약해,
닷새 동안만 오줌을 참아도 효력이 나타날지 모르네."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만해 보이는 대답이었다.
"소변을 닷새 동안만 참아내면 애기가 정말 떨어지게 됩니까?"
"물론이지. 늙은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내 말을 철썩같이 믿고 어서 집에 돌아가 그렇게 해보게."
제생당 의원은 이렇게 뱃속의 아이를 떼는 방법을 설명하고 임신부를 밀어내다시피 쫒아냈다.
그리고 옆방으로 옮겨 오더니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음 ... 내가 오늘은 진땀 뺐는걸."
김삿갓은 제생당 노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자,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
"이 사람아! 웃기는 왜 웃는가?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가? "
"선생! 오줌을 닷새간 참고 견디면 뱃속의 아기가 절로 떨어져 나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김삿갓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제생당 의원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태연스러웠다.
"자네는 내가 환자에게 들려준 말을 죄다 들은 모양일세그려?"
"그렇습니다. 사람이 과연 오줌을 닷새 동안이나 참고 견딜 수 있을까요?"
김삿갓은 이 돌팔이 의원을 단단히 혼내 주려고 엄숙한 표정으로 따지고 물었다.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김삿갓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혀를 차며 말을 하는데,
"자네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내가 자네에게 먼저 하나 물어보세.
자네는 사람이 닷새 동안이나 오줌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없다고 생각 하는가?"
순간, 김삿갓은 허(虛)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기로, 닷새 동안이나 오줌을 참을 수는 없겠지요."
제생당 노인은 그 대답을 듣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잘 알고 있구만그래. 그 처럼 잘 알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물어 보는가?"
김삿갓은 농락을 당하는 것만 같아, 울화가 '욱' 하고 치밀었다.
"선생은 조금 전에 찾아왔던 여인에게 오줌을 닷새 동안만 참으면 애기가 절로 떨어져 나올 테니, 닷새 동안만 참아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환자에게 불가능한 처방을 알준다는 것은 혹세 무민 (惑世誣民)이 아닙니까?"
김삿갓은 홧김에 혹세 무민이라는 말까지 들고 나왔다.
"혹세 무민? 하하하."
제생당 노인은 별안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자네는 알만한 사람이 왜 그런 어리석은 소리만 하는가?
나는 의원의 본분으로서 뱃속의 생명을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자꾸만 낙태를 시켜 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대지않던가?
그래, 할수 없이 결코 가능하지 않은 단서를 달아, 뱃속의 생명도 살리고 무식한 여인도 쫒아 보내기 위해 그럴듯한 허툰수작을 부린것 뿐인데, 그런 내막도 모르고 나더러 혹세 무민을 저지르고 있다고?
이사람이 보기보단 어리숙한 사람이네! 하하하."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삿갓은 "아차! " 싶었다.
제생당 의원은 여인을 쫒아 버리기 위해 지금까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왔는데,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자신이 핏대를 올려가며 나선 일이 무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님 ..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제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그렇다고 사과까지 할 건 없네. 많은 환자들을 만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거든, 멀쩡한 건강체이면서도 아프다고 꾀병을 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염려증 = 꾀병) 아픈 곳도 많은데, 돈과 가족을 걱정 하느라고, 아프지 않는척 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의원이란 사람은 병자의 병을 고쳐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자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임기 웅변으로 다뤄 나가야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해! 그래서,
조금전 처럼 환자를 잘 다루는 일도 의술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김삿갓은 돌팔이 의원인 줄만 알았던 제생당 노인의 입에서 그와 같은 명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의자의야 "(醫者意也) 라는 말이 있다.
의술은 환자에 따라 방문(方文)을 달리 하는 오묘한 이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보면 제생당 의원이야말로 진정한 명의가 아니던가 ?
이렇게 생각이 된 김삿갓, 고개를 수그려 제생당 노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73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73~고향 가는길
오애청산도수래
(吾愛靑山 倒水來)
신계에서 곡산까지는 높고 가파른 산길로 백여리를 가야 한다.
김삿갓이 어린 시절을 보낸 천동 마을은 곡산 읍내에서도 다시, 산속으로 60여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첩첩 산중, 감둔산 (甘屯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곡산으로 가는 길 조차, 산이 높고 길이 험해,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천동 마을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지루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김삿갓은 눈 앞에 펼쳐지는 산천을 정답게 바라보며 걸어가다가 문득 구양수의 시를 떠 올렸다.
산빛은 멀고
가까움에 다름이 없어
하루 종일 산만 보며
걸어 가노라
보이는 봉우리 모양은
제각기 다르고
그 이름조차
나그네는 알 길 없어라.
고향이 가까워져가자 ,김삿갓은 험한 산길을 걸어가면서, 30여 년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철부지 시절, 해 지는줄 모르고 즐겁게 뛰놀며 장난을 치던 불알 친구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 천방 지축으로 까불대던, 까불이는 지금은 철이 들었겠지..
머리통이 유난히 컷던 대갈장군은 아직도 천동 마을에 그대로 살고 있을까 ?
또,합죽이, 막동이와 땡굴이, 땅꼬마는 지금은 애 아버지가 되어 있겠지..
옥수수 처럼 얼굴이 길쭉해서 불렸던 옥쇄기는 지금 보게 되더라도 금방 알아 볼 것 같고, 조조와 참새, 제제는? 계집애들 꽁무니를 아직도 쫒아 다니고 있을까 ? ..
예쁘장 했던 곱단이는 애 엄마가 되어 있겠지, 얼굴이 넙적해서 세숫대야로 불리던 계집애는 애는 몇이나 낳고 살고 있는지 ?
말을 할때 마다 고개를 살랑살랑 젖던, 부채는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겠지 ..)
본명은 잊어버렸지만 아명(兒名)만으로도 그들의 얼굴과 뛰놀던 모습이 눈 앞에 떠올라서, 김삿갓은 흐뭇하기 그지없는 고향가는 길이었다.
산길은 가도가도 끝이없이 이어졌다.
곡산이 심심 산골임을 모르는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찾아와 보니 너무도 깊은 산골이었다.
김삿갓은 깊은 산속을 마냥 걸어가며, 문득 영월에 계실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철없는 자식들을 죽음에서 구해 내려고 첩첩 산중으로 둘려싸인 곡산으로 도망을 오셨던 것이 아니었던가.
(철없는 우리 형제를 곡산까지 데리고 오시느라고, 어머니는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그 일을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 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를 회상해 본들 무슨 소용이랴.)
김삿갓은 오늘날 어머니 슬하를 떠나, 방랑길을 떠도는것 조차도,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업보이고 숙명이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산속으로 깊이 들어 갈수록 주위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간간히 새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나 , 그로 인해 오히려 적막감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한없이 걸어가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이제는 잠자리를 구해야 할 판이건만, 도데체 인가는 어느 곳 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를 더 가다 보니, 저 멀리 나무 그늘에 말 한 마리가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말이 있다는 것은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이기에, 김삿갓은 안심하고 다가갔다.
김삿갓이 가까이 다가가자 누워 있던 말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몸을 부르르 떨면서 먼지를 털어 낸다.
찬찬히 살펴 보니 어지간히 늙어빠진 말이었다.
그래도 산중에서 사람들과 가까이 생활하는 말을 보니 정다운 마음이 앞섰다.
그리하여 가까이 다가가 말의 콧등을 두두려 주니, 말은 사람의 정을 알아보았는지, 발굽질을 하며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김삿갓은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말의 등허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늙은 말 (老馬) 이라는 옛 시가 한 수 기억 났다.
늙은 말이 소나무 그늘에 누워 있네
천 리를 달리던 옛 꿈을 꾸고 있는가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 바람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석양이 저물고 있네.
老馬枕松根 (노마침송근)
夢行千里路 (몽행천리로)
秋風落葉聲 (추풍낙엽성)
驚起斜陽暮 (경기사양모)
이렇게 말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삿갓, 산 머리에 초승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도 말 주인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김삿갓 시 한수
깊은 산중에서 갑갑했던 김삿갓은 시 한수를 읊어댓다.
오두막집 저녁
연기는 사라지고
해는 저물어
새는 깃으로 돌아가네
나무꾼은 하늘에 걸린
초승달을 바라보고
어디쯤 에서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겠지.
바로 그때,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나무꾼이 나무를 짊어지고 말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나무꾼에게 말을 걸었다.
"늦게까지 수고가 많으시오."

나무꾼은 김삿갓을 보자, 적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산중에 웬 사람이오 ? "
"나는 지나가던 과객이오. 천동 마을에 가다가 길이 저물었는데, 어디서 하룻밤쯤 자고 갈 데가 없을까요 ? "
"천동 마을 ? 천동 마을이라면 옛날, 나의 외갓집이 있었는데, 그런 깊은 산골에는 뭣하러 가시오 ? "
나무꾼은 김삿갓에게 천동 마을과 자신의 연관을 말하면서 경계심을 감춘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천동 마을에서 자랐지요. 그래서 지금 천동 마을을 찾아 가다가 날이 저물었군요."
"그래요 ?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고향이 그리운 것이지요."
"외가는 아직 천동 마을에 계신가요 ? "
"웬걸요. 외조부님 돌아가신후 외가 식구들은 모두, 해주(海州)로 살림을 옮겨버려서 지금은 아무도 없다오."
"그러시군요."
"그나 저나 반갑소이다. 나의 옛날 외가집 마을이 고향이라니..
그리고 이 산골에는 인가라고는 우리 집 밖에 없어요.
날도 많이 저물어서 길을 갈수도 없을 것이니 우리 집으로 내려 갑시다."
인심이 순박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무꾼은 무거운 지게를 짊어진채로 말은 맨몸으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 하는데,
김삿갓이 옆에서 보기에는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짐을 말에게 실을 일이지, 무슨 고생을 못 해 직접 짊어지고 내려가시오 ?" 하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를 변 서방이라고 말을 한 나무꾼은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 집 말은 너무 늙어서 나는 부려먹을 수가 없다오."
김삿갓은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 하였다.
"아니, 부려먹을 수가 없도록 늙어 버린 말이라면 아예 팔아 버리거나 없앨 일이지, 무엇 때문에 고생스럽게 키운단 말이오 ? "
"그건 노형 생각이지, 나는 그럴 수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단 말이오? "
"말이 동물이기는 하지만,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의리라는 것이 있어요.
저 말로 이를것 같으면 할아버지때 부터 함께 살아오고 있는 우리 집 식구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많아 밭도 갈지 못하고 짐도 나르지 못하게 되었지만 우리 집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 말에게 은혜를 너무도 많이 져왔다오."
"말에게 은혜를 졌다구요 ? "
"물론이지요. 이 말이 어린시절 부터 젊었던때 까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아주 잘 도와 주어서 오늘날까지, 우리 집이 생활을 할수 있게 해줬지요.
이렇게 저 말로 하여금 조상때 부터 오랫동안 은혜를 입어왔으니, 이제는 그 은혜를 나라도 갚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 "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도록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아울러 말 못하는 미물인 동물과 인간의 교감과 신뢰가 어떻게 대를 이어 전해질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한참만에 산을 내려오니, 변서방네 집은 절간처럼 조용하였다.
변서방은 나무짐을 내려놓고, 말을 외양간에 들여매며 말한다.
"공교롭게도 마누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고 없어서, 오늘 밤은 나 혼자예요.
말에게 먹이를 주고 저녁을 지어 올 테니, 방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구려."
변서방은 김삿갓을 방으로 안내하고 등잔불을 켜주었다.
살림 살이라고 방 한복판에 화로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는데 그나마도 마누라가 없는 탓인지, 화로는 불이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한참만에 변서방은 삶은 감자 한 소쿠리와, 네 다리 소반 위에 죽그릇을 놓아 가지고 들어왔다.
"많이 시장하셨지요 ? "
"괜찮습니다. 말에게도 먹이를 주셨나요 ? "
"그럼요, 말도 우리 집 식구인데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나만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변서방이 들고 온 소반 위에는 죽이 한 그릇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
"아니, 사람은 둘인데, 죽은 왜 한 그릇만 가져 오셨소 ? "
변서방은 계면스런 웃음을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한다.
"나는 평소에도 감자만 먹고 살아요.
그러나 손님에게는 감자만 대접하기가 미안스러워, 오늘은 쌀독 밑바닥을 긁어 가지고 죽을 한 그릇 쑤워 왔지요.
그런데 쌀이 몇 알밖에 없어서, 죽이란것 조차도 맹물에 조갯돌 삶은것 처럼 되어 버렸군요. 그러니 죽을 자시고 나서 감자를 더 잡수세요."
김삿갓은 주인 양반의 성의가 너무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오가다 만난 사람에게 이처럼😂 따듯한 정성을 베풀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 것인가.
아닌게 아니라 죽그릇을 들여다 보니, 죽이란 것이 정말로 맹물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인 양반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럼, 미안하게도 죽을 혼자만 먹겠소이다."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죽그릇을 아무리 휘저어 보아도, 쌀알이라고는 몇 알갱이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을 자시고 나거든 감자를 더 드세요." 변서방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인다.
"고맙습니다. 죽을 다 먹고 나거든 감자를 더 먹지요."
김삿갓이 죽을 몇 숟갈 떠먹다 보니, 죽은 맑은 물과 같아서, 죽그릇 속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이었다.
("허어, 정성은 고맙지만 기가 막히는군" ...)
김삿갓은 변서방이 쑤워 온 죽을 한숟갈 한숟갈 떠 먹으면서 ..
다음과 같은 운치 있는 즉흥시를 한 수 읊었다.
사각송반 죽일기 (四脚松盤 粥一器)
천광운영 공배회 (天光雲影 共徘徊)
주인막도 무안색 (主人莫道 無顔色)
오애청산 도수래 (吾愛靑山 倒水來)
네다리 소반에는
죽 한그릇 뿐인데
하늘과 구름이
같이 비치는구나
주인은 무안해하는데
괜찬소 나는원래
물에비친 산을 좋아
한다오
74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74)
*드디어 도착한 천동마을. '상편'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아침을 얻어 먹기 미안해서 변서방의 집을 일찍 나섰다.
밤사이 첫 눈이 내려 발을 뗄 때 마다 뽀드득 소리가 연이어 났다.
(오늘은 드디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리워했던 천동 마을에 가게 되었구나! )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 김삿갓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흥분이 일었다.
그러다보니 눈으로 얼어버린 길도, 제법 쌀쌀해진 산 속의 추위도 관심밖의 일이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까맣게 잊어 가던 기억속의 희미한, 눈에 익은 산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장난꾸러기 친구들과 어울려 50 리가 넘는 곡산 장거리에 몇 차례 다녀 본 길이 아니던가.
이렇게, 눈에 덮힌 험한 산 굽이를 돌아 갈때 마다 옛날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김삿갓이 산길을 정신없이 한참 걷다보니, 문득 눈앞에 장승 한 쌍이 우뚝 마주 보였다.
얼굴과 몸뚱이가 시뻘건 천하 대장군과, 얼굴과 몸뚱이가 새파랗게 색칠된 지하 여장군이었다.
(아! 장승이 아직도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구나! )
김삿갓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던 장승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하도 기뻐,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 배례를 하였다.
"장승님들! 안녕하시오. 옛날 친구였던 밤나무집 둘째가 천동 마을을 다시 찾아 왔소이다."
장승!
우리네 조상들은 통일 신라때 부터 고려조와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절에 가는 길목이나 촌락 어귀에 사람들의 우상인 장승을 세워 놓았다.
장승은 시대를 통 틀어서 사찰과 마을의 경계를 가르는 이정표 역할을 해왔고, 동구 앞에 세워 놓은 장승은 모든 악귀와 질병의 침입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때로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천하대장군의 코를 베어다 달여 먹기도 하였고, 남몰래 찾아와 간절한 소망을 빌기도 하는 우상인 것이다.
장승앞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며 합장 배례를 하고 있노라니, 마침 저 만치서 사십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지게위에 봇짐을 하나 얹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승앞에 서 있던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김삿갓은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들고 다가오는 사내에게 목례를 해보이며 물었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이 동구 안이 천동 마을이 틀림 없습니까?"
그러자 사내는 김삿갓의 얼굴이 눈에 익은지, 대답은 안 하고 빤히 쳐다만 보았다.
김삿갓도 사내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보아 온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서로의 얼굴을 잠시 말끄러미 마주보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김삿갓은 별안간 사내의 두 손을 와락 움켜 잡으며 소리쳤다.
"여보게! 자네는 조조라고 부르던 친구 아닌가! 나는 밤나무집 둘째일세, 자네 나를 모르겠나?"
사내는 그제야 생각이 나는지, 김삿갓의 두 손을 힘차게 흔들며 큰소리로 외친다.
"맞다 맞다! 자네는 밤나무집 둘째가 틀림없으렸다? 이게 얼마만인가! 그동안 어디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오는가 ? "
만나는 첫 순간부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그들이었다.
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도 죽마고우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삿갓은 조조와 함께 마을로 들어오며,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소식을 하나 하나 물어 보았다. 그중에는 이미 죽은 친구도 둘 씩이나 있었지만 대부분 천동 마을에 그냥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자네는 지금 아이를 몇이나 두었는가?"
"나는 할 일이 없어서 아이만 만들었네, 머슴아와 계집아이를 모두 합해 자그마치 일곱이나 두었다네."
"이 친구, 어릴때도 계집 아이 꽁무니를 어지간히 쫒아 다니더니, 결국은 자식 복이 넉넉하군그래,
아이를 일곱이나 만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는걸, 하하하."
"이 사람아! 만들고 싶어 만든 것은 아닐세. 여편네 궁둥이를 두드려 주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거야, 하하하 ... 자네는 아이가 몇이나 되는가?"
"나? ... 나는 오나가나 내 몸 하나뿐인걸. 마누라도 없고, 자식도 없는 외톨박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놓고 떠돌아 다니는 덕분에, 자네를 만나게 된 것 아니겠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길어질 것 같아, 김삿갓은 적당히 거짓말을 꾸며 대었다.
"그래? ... 자네는 어렸을 때 글 읽기를 좋아했기에, 지금쯤은 커다란 감투라도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글쎄, 운이 닿지 않아서인지, 팔자 소관인지? 여간, 내게는 등용문(登龍門)이 열리지 않는구먼."
김삿갓은 이것조차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윽고 30년 만에 천동 마을로 들어서는 김삿갓은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 옛날 고작해야 열 채가 될까 말까 하던 집은, 지금은 얼핏 보아도 20채가 넘어 보였다.
"그동안 집이 많이 늘었네그려."
"그래 ... 자네가 살때 보다는 많이 늘었지?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디 묵을 작정인가?"
김삿갓의 잠자리를 걱정하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어렸을 때 자라던 고향 산천이 그리워 천동 마을을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천동 마을에 일가붙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 각별히 기댈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대답을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글쎄 ... 나는 어차피 떠돌이 신세니까, 잠이야 아무데서나 자면 어떤가."
조조는 김삿갓의 말을 듣고나서 대뜸 이렇게 말을 한다.
"그래? 그러면 밥은 우리 집에서 먹기로 하고 잠은 모임방에서 자면 되겠네."
"모임방이라니? ... 이 마을에는 그런 것도 있는가?"
"그래! 동네 사람들이 저녁마다 모여서 미투리도 삼고, 새끼도 꼬는 공동 사랑방이 하나 있지,
거기에 가면 옛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게야."
"그거 참 잘됐네그려. 나는 옛날 친구들을 만나 보고 싶어 왔거든!"
"자네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나.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에는 마을 사람들을 모임방에 오도록, 우리 집 아이를 시켜 사발 통문을 돌려 놓겠네."
조조의 우정이 눈물겹도록 지극 하였다.
이윽고 조조네 집에 당도해 보니, 그의 집은 옛날과 다름없이 초라하였다.
"자네 집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일쎄, 이제는 아이들이 많아서 집도 늘려야 하겠구먼."
"허긴 그래, 아이가 하나 씩 생길 때마다 늘려야지 늘려야지 하면서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먼."
"여보 마누라! 이리 와서 인사드려요. 이 친구가 옛날에 나에게 '조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던 '밤나무집 둘째'라는 친구야." 조조가 자기 마누라를 불러 내 김삿갓에게 인사를 시킨다.
"애기 아버지한테서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애기 아버지에게 조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가,
시아버님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셨다구요? 호호호."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불현듯 조조의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참, 자네 어르신께 인사를 올려야지, 어르신 어디 계신가 ?"
그러자 조조는 얼굴빛이 별안간 숙연해지며,
"아버지는 이미,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자네가 찾아 온 것은 30년 만이 아닌가."
"뭐야? 어르신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구? .. 그래,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왔구먼 ...."
김삿갓은 일순,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김삿갓이 저녁밥을 먹은 뒤, 조조와 함께 모임방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이미 2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급히 모이라"는 사발 통문을 받고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김삿갓을 모임방 가운데 내세워 놓고 말한다.
"여보게들! 자네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나? 이 사람은 지금부터 삼십 년 전에 우리들의
불알 친구였던 밤나무집 둘째라네! " 하고 소개하자,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알겠네. 내가 땡굴인데, 내 얼굴을 알아보겠나?"
"그럼,그럼! 저기 앉아 있는 친구는 대갈 장군과 옥쇄기가 아닌가?"
김삿갓이, 생긴 모습이 남달라 한 눈에 띄는 대갈장군과 옥쇄기를 가르키자, 좌중에는 "와하" 웃음꽃이 피었다.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소개하며 김삿갓과 제각기 손을 움켜 잡으며 알아보는 통에, 김삿갓은 눈물겨운 감격을 느끼면서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개중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나는 초면이기는 하오만, 노형의 말씀을 많이 들었소. 또래 친구들에게 조조니, 참새니 하는 엉뚱한 별명을 지어 주었다가, 어른들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하고 말하는 바람에, 좌중에는 일시에 폭소가 터지기도 하였다.
김삿갓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이렇게 자기를 기억하고 열열히 환영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하여 자리에 앉으며,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오늘처럼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 보기는 처음일쎄, 우리들 모두가 죽지 않고 다시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 인지 모르겠네.
우리네 인간살이에서 우정보다 더 소중한 것이 뭐가 있겠나. 나는 자네들과의 기쁜 재회를 함께
나누고 싶어 술이라도 한잔 사기로 하겠네!"
그러면서 개풍 군수 강호동이 몰래 넣어 주었던 전별금(錢別金)중 그동안 쓰고 남은 스무 냥을
송두리째 내놓았다.
그러자 제제가 성큼 앞으로 나앉으며, 김삿갓을 호되게 꾸짖는다.
"야, 임마! 너 정신이 돌았냐? 내일 부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너는 고향을 찾아온 손님이고 우리들은 주인 아니냐! 그러니 손님이 술을 산다면, 주인인 우리 꼴이 뭐가 된단 말이냐.
너를 환영하는 술은 우리가 살테니, 그 돈이랑 썩 집어 넣어라!"
그 바람에 모두들 "옳소!" "옳소!" 하며 박수를 보낸다.
천동 마을에는 대동계(大洞契)가 있어서 경조사를 맞았을 때 서로 도와주는 제도가 있었고 그 계장은 제제였다. 제제는 김삿갓이 내놓은 술값을 억지로 집어 넣어주고 나서, 계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삼십 년 동안이나 헤어져 지내던 죽마고우가 돌아와서, 환영주가 한 잔 없을 수가 없는데, 오늘 밤 술값은 곗돈으로 쓰면 어떨까?"
그러자 계원들은 모두가 쌍수를 들어 찬성한다.
"물론 그래야지. 그건 계장이 알아서 하게, 그리고 술만 많이 먹게 해주게."
"막걸리 두 말쯤 사오면 되겠지?"
"아따, 이 사람아! 두 말이고 서 말이고 어서 가져오도록 시키기나 하게.
"그래, 그래..그러면 재무(財務)막동이가 막걸리 서 말하고, 북어 두쾌만 사오너라. 그리고 합죽이네
김치가 매우 맛이 좋으니, 합죽아! 오늘은 자네집 김치 좀 꺼내다 맛 좀 보여줘라."
재무 막동이는 술을 사오려고, 합죽이는 김치를 가지러, 문밖으러 나서려다 둘이서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어이구! 눈이 오시네! 어느새 제법 많이 쌓였는걸 ... "
그러자 모두들 문 앞으로 우루르 몰려와 밖을 내다 보았다.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펄펄 내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은세계로 바뀌고 있었다.
"야아! 눈 한번 탐스럽게 온다. 명년 농사는 풍년이 들겠구나!"
"옛날 친구가 눈까지 몰고 와서 오는 밤 술 맛은 기막히겠다."
이윽고 막걸리 서 말이 도착되었고 김삿갓을 맞는 환영연이 성대하게 시작되었다.
제제가 대동계 계장으로 첫 잔을 김삿갓에게 따라주며 말한다.
"여기 친구들은 모두가 호주가(好酒家)들이라네, 자네 술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그래? 나는 지고는 못 가도 마시고는 가는 사람이니, 오늘 밤은 맘대로 따라주게!"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 갈채를 보낸다.
"그렇다면 오는 밤 멋지게 어울려 보세. 술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이렇게 술자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술자리가 어울려 오자, 옛 친구들은 앞을 다투어 김삿갓에게 술잔을 권하였다.
이렇게 취홍이 도도해져오자 땅꼬마가 큰 소리로 외친다.
"술이 있는데 가락이 없을 수 있는가? 까불아 너, "나무 타령" 한 곡조 뽑거라!"
"그래,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까불아 ! 퍼떡 일어나서 나무 타령 하거라."
모두가 박수를 치며 까불이에게 시선이 모아지자, 까불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머리에는 일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바지춤을 일부러 비틀어 당겨 입더니, 허리를 반 꼬부려 병신 시늉을 하면서 나무 타령을 부는다.
품배 품배 품배야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천 냥 주고 배운 소리
한두 푼에 팔린다
얼시구 좋다 엄나무
한다리 절뚝 전나무
이 산 저 산 소나무
오다가다 오동나무
가다오다 가닥나무
님의 손목 쥐염나무
칼로 푹 찔러 피나무
달 가운데 계수나무
방귀 뀌었다 뽕나무
십 리 절반 오리나무
열아홉에 스무나무
돈이 많아 은행나무
돈없으면 박달나무
방긋 웃는 복사나무
배를 타라네 배나무
휘휘칭칭 버드나무
물고 늘어지는 물구나무
75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75)
드디어 도착한 천동마을(중)
까불이가 어깨춤을 박수 소리에 맟춰 엉거주춤 찌긋찌긋 춰가며 나무 이름을 거침없이 엮어 나가자, 좌중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김삿갓은 허리를 움켜잡고 웃다가 술잔을 내밀어 주며 덕담을 했다.
"이 사람아! 병신육갑한다더니 제네 꼴이 영락없네.
까불이 자네는 어디를 가더라도 밥을 굶지 않겠네."
"예끼 이 친구야, 삼십 년 만에 만난 처지에 나를 보고 각설이 패가 되란 말가?"
이렇게 까불이가 익살을 부리는 바람에
좌중에는 또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또다시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친다.
"이번에는 "장타령"을 한번 듣자! 뭐 하냐? 땅꼬마!"
그러자 땅꼬마로 불린 친구가 쭈볏쭈볏,
빗발치는 독촉에 마지못해 일어서며 말한다.
"밤나무집 둘째, 듣거라. 삼십 년전 불알 친구가 먼길 마다 않고 찾아 오니 내 너무도 반가워 장타령을 한 곡조 부를터이니 잘 듣거라."
땅꼬마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머리에는 각설이 패나 쓸 법한 낡은 초립을 쓰고, 손에는 두렁박과 지팡이까지 들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좌중이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자
땅꼬마는 두렁박을 지팡이로 퉁퉁 두드려 가며,
장타령을 구성지게 뽑아 나갔다.
얼~~~럴 ~~널이 ~~~
각설이패가 왔구나
각설이라 역설이
동지섣달 대목장에 각설이가 왔구나!
팔도 강산 돌다 보니 장거리가 내집일쎄
이 술 잡수 안주장, 술맛 좋다 청주장,
초상났다 상주장, 능수버들 천안장,
신라 통일 경주장, 명태 옆에 대구장
얼 ~~~럴~~널이 ~~~
함평도로 넘어간다. 기생 좋은 평양장,
미인 많은 강계장, 해주 해주 해주장,
박아라 박아 박천장, 안고 춤추는 안악장
초당 짓고 배운 소리, 실수도 없이 잘한다
목구멍에 불을 켰나, 환하게도 잘한다.
뱃가죽이 두꺼운가, 거침없이 잘한다.
대목장에 목쉬겠다. 청산 유수로 잘한다.
박수소리와 환호성에 방안이 들썩였다.
몇 몇이 장타령 신바람에 일어나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고
땅꼬마는 더욱 신이나 첫 소절 부터 한바퀴 더 돌려 장타령을 뽑았다.
장타령이 끝나자 좌중에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일동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워낙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다가 별안간 조용히 술만 마시려니 좌중 분위기는 갑자기 따분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집에 초상났나?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한고!"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조조가 한마디 하거라!" 하며 부추긴다.
조조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한다.
"나는 워낙 명창이라, 이런 시시한 자리에서는 죽어도 못한다."
"허긴, 조조가 한 곡조 하는 날이면 밤나무집 둘째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고 말게다."
제제가 이렇게 말을하자 조조가 음치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친구들이 두 손을 마주치며,
"맞다, 맞아!" 하며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제제가 말하는데,
"이렇게 자진해서 노래를 불러줄 사람이 없어서야 흥이 나겠나? 그렇다면 대갈 장군과 합죽이가 함께 나와,
"변강쇠와 옹녀" 연극이나 한 판 벌려 보면 어떻겠나?"
제제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좌중은 별안간 쌍수를 들며 "와하!" 하는 함성에 덮혔다.
김삿갓은 변강쇠와 옹녀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산골에서 땅이나 파먹고 사는 옛 친구들이 설마하니 '가루지기' 타령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자네들이
가루지기 타령이라는 책을 읽은 일이 있었던가?"
"아따 이 사람아!
자네는 우리들을 뭘로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지난번 추석 명절때 대갈이와 합죽이가 변강쇠와 옹녀 분장을 해가지고 가루지기 타령을 연극으로 했던 일도 있다네.
그 연극이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소문을 듣고 곡산 읍내에서 구경꾼이 백여명 몰려온 일도 있다네.
그러니 오늘 밤에도 대갈이와 합죽이가 멋지게 연극해 보일테니, 한번 구경하게."
제제는 거기까지 말하고 대갈이와 합죽이를 다그친다.
"뭐하냐, 어서 옷을 갈아 입고 나오지 않고?"
대갈이와 합죽이는 옆방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키가 크고 몸집이 큰 대갈이는 변강쇠로 분장하고,
키가 작고 몸매가 여자 처럼 애리애리한 합죽이는
분홍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돌려 쓰고 나와 영락없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그럴듯한 남녀로 분장을 하고 나오자,
방안에서는 또다시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야아, 고놈의 계집년, 너무도 예뻐 사람 미치겠구나."
"정말로 계집년인가, 사타구니를 한번 만져보자."
제각기 난잡스러운 실랑이를 한마디씩 떠벌이는 바람에,
방안은 잠시 난장판이 되었다.
김삿갓도 그들의 능숙한 분장술에 박수를 보내며 한마디 찬사를 보냈다.
"야아, 옹녀의 분장은 정말 기가 막히네.
자네들은 농사는 짓지 않고 연극만 하는 모양일세 그려."
제제가 얼른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이 사람아! 그런 재미도 없으면 이런 산 속에서 기나긴 겨울을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나? 제법 재미가 있을 것이니 두고 보게. 어서들 연극을 시작하거라."
방안에는 기대와 환희의 빛이 가득 넘쳤다.
일동은 연극을 구경하기 위하여 술상을 옆으로 밀어 놓고,
모두들 아랫목으로 몰렸다.
이렇게 웃목은 자연히 무대가 된 셈이었다.
옹녀로 분장한 합죽이가 변강쇠로 분장한 대갈이에게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며 고혹적인 미소를 보내자
76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77) 나무아미타불의 본뜻.
김삿갓은 천동 마을에 찾아와서 부터는 마음이 편하고 즐겁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매일 밤이면 친구들이 모두
김삿갓이 거처하는 모임방으로 몰려와
기나긴 겨울밤을 이야기로 보내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모임방에서는 어슷비슷 둘러앉아 미투리를 삼거나 새끼를 꼬거나
때로는 덕석이나 멍석등을 짜면서 제각기 제멋대로 늘어놓는 음담패설을 들어 보는 것은 다시없는 즐거움이었다.
밤에 모임방으로 모여드는 사람은 김삿갓의 옛날 친구만은 아니었다.
천동 마을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감둔산 동쪽 골짜기에 반석암盤石庵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는데,
그 암자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일휴一休스님도 밤이면 가끔 놀러오는 단골 손님 가운데 하나다. 일휴 스님은 나이가 70이 넘은 대머리 스님이었다.
그는 젊은 중생들에게 불법을 깨우쳐 주기위해 모임방에 자주 온다고 하였지만, 김삿갓은 일휴 스님이 모임방에서 강설講說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은 없었다.
그러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모임방에 온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이고, 어쩌면 마을 사람들이 제멋대로 씨부려대는 음담패설을 들으려고 찾아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그 증거로, 마을 사람들이 음담패설을 떠들어댈 때면
일휴 스님은 누구보다도 신바람 나게 박장대소를 하곤 하였는데
이럴 때는 스님으로서의 체면 같은 것에는 일절 개의치 않는 일휴 스님이었다.
언젠가 누가 일휴 스님에게 "스님은 돌중이지요?"하고 농담을 걸은 일이 있었는데 일휴 스님은 농담을 건넨 사람을 나무라지도 않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하하하. 내가 돌중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내 머리통을 보라구!
머리통이 돌덩이 처럼 생겨 먹은 것만 보아도
내가 돌중이라는 것을 알수 있지 않은가!"
이렇듯 젊은 사람들이 심한 농담을 걸어와도
결코 나무라는 일이 없는 일휴 스님이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70이 넘은 그를 친구처럼 대해 왔었고,
일휴 스님 자신도 노소동락老少同樂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공언해 왔었다.
김삿갓은 일휴스님의 활달한 기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한 번은 "산속에 혼자 사시기가 적적하시죠?"하고 물었더니
일휴 스님은 이렇게 대답 하는 것이었다.
"혼자 살기가 심심하니까 이렇게 가끔 사바 세계에 내려와
음담패설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누가 힐난 하듯이 한마디했다.
"스님이 염불은 안 외고 잡소리만 즐겨하시면, 수도는 언제 하시오 ? "
"수도 .... ?
마음을 구름 한점 없이 한가롭게 가지면 그게 바로 수도인걸!
극락 세계가 법당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도 모르는가?"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짖궂게도 이렇게 물어보았다.
"신도들 중에는 젊은 여자들도 많고, 또 예쁜 여자가 눈앞에서
아양을 떨 때면 아무리 스님이라도 색정이 동하겠지요?"
그러자 일휴 스님은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중은 사람이 아닌가?
중도 속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은 죄다 가지고 있는걸!"
"스님! 그 물건이 예쁜 여신도를 보고 색정이 발동하게 되면
스님은 어떻게 하시오 ? "
"그런 경우라면 "나무아미타불"을 연신 되뇌우지."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符籍조차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무식하기 짝이 없는 그 물건이 염불을 왼다고 곱게 말을 들어 줄까요?"
"그게 바로 속인들과 중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야.
불도佛道를 어느 정도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일시적으로 색정을 느꼈다가도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염불만 외면 대개는 흥분이 가라앉게 되는 법이야."
"도데체 스님들이 입버릇 처럼 외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오?"
"자네는 정말로 무식하네 그려.
나무아미타불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단 말인가?"
"모르니까 물어 보는 게 아니오?"
"자네들이 정말로 모른다니 설명을 해주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부처님은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계시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해 극락 세계로 보내 주는 부처님이시고,
나무南無라는 말은 극락 세계에 가서 영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과 염원이 담긴 뜻이라네, 알겠나?"
일동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갸우뚱하였다.
"그러면, 아침부터 밤중까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 외면
누구든지 극락 세계에 가서 영생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러자 일휴 스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염불을 외다고 모두가 극락 세계에 가는 것은 아니야.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도, 마음이 쟂밥에 가있다면
그런 돌중놈이 어떻게 극락에 갈 수 있겠나?"
"스님은 조금 전에 자신을 돌중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그렇다면 스님은 아무리 염불을 외어도 극락 세계에는 못 가실게 아니오?"
"모르는 소리.
나는 머리통이 돌덩이같이 두루뭉슬로 생겨 먹었기에
돌중이라고 말했을 뿐이지 진짜 돌중은 아니야."
"그러면 여자가 옷을 벗고 덤벼들어도,
스님은 제대로 접수하실 수도 없겠네요?"
누가 그렇게 놀려대자 방안에는 별안간 폭소가 터졌다.
일휴 스님도 같이 어울려 웃으면서 말했다.
"예끼 이 사람아 !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자네는 바라경이라는 경문을 꼭 들어 봐야만 알겠는가?"
"바라경" .... ?
김삿갓은 바라경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관음경觀音經과 반야경般若經 같은 경문이 있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지만, 바라경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 경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석에서 일휴 스님에게 물어 보았다.
"스님! 불교에는 바라경이라는 경문도 있습니까?
저는 처음 들어 보는 경문인데 그 경문의 내용은 어떤 것이옵니까?"
일휴 스님은 대답할 생각은 안 하고 빙그레 웃기만 하다가,
"반야경과 관음경은 부처님께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진리를 설파하신 귀한 경문이지.
그러나 바라경이라는 것은 그런 신성한 경문은 아니야."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바라경이 신성한 경문이 아니라구요?
경문에도 신성, 비신성이 있습니까?"
"있지 있구말구!
바라경이라는 경문은 신성하지 못한 대표적 경문일쎄!"
"그렇다면 바라경은 누가 지어 낸 경문이기에
신성치 못하다는 말씀입니까?"
"궁금한 것은 못참는 김삿갓,
더구나 바라경이란 것이 자기가 모르는 불교의 경문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캐어 물었다.
그러자 일휴 스님이 대답하는데,
"바라경이라는 것이 말이 경문이지, 실상인즉
어느 돌중놈이 어떤 여자로부터 해괴망측한 질문을 받고,
즉흥적으로 꾸며낸 잡설에 불과한 것이야.
그 유래를 설명 할테니 들어 보려나?"
그리고 일휴 스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옛날 어떤 절에 음흉하고도 익살스러운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 신도가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스님에게 이렇게 물어 본 일이 있었다.
"스님들은 여자와 한 이불 속에 누워 있어도
관계를 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질문을 받은 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중이로서니, 사지가 멀쩡한 사내로서
여자와 관계하는 방법을 모를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인이 중을 유혹하려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중의 체면으로서는
그런 질문에 말로 상세하게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중은 마치 경문을 외우듯이 이렇게 염송念誦하였다.
"줘바라 줘바라 못 하나 줘바라 ...
줘바라 줘바라 정말 못 하나 어디 한번 줘바라."
78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78)
*도루아미타불의 본뜻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세상사람들은 그 경문을 "바라경"이라고 불러 오게 되었다고 일휴 스님이 말하자, 좌중은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리고 일휴 스님에게 다시 묻는다.
"하하하, 스님은 마치 남에 일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바라경을 지은 사람은 일휴 스님 자신이 아니오?!
그러자 일휴 스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나는 남녀 관계를 모르지는 않지만, '바라경'을 지은 사람이 나 자신은 아니야."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바라경을 내가 지었다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고백할 일이지 왜 거짓말을 하겠나? ..
불경에 보면 남을 속이는 것도 죄악이라고 했거든."
이같은 일휴 스님의 태도로 보아, 바라경의 작가가 일휴 스님 자신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나이가 70을 넘으면 감정을 초월한 탓인지, 일휴 스님이 무슨 말을 해도 천박해 보이거나 야비해 보이지는 않았다.
"스님들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염불만 외는 것 같은데, 도대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하루에 몇 번이나 외시오?"
"하루에 몇 번이나 외는지 헤아려 본 일은 없지만, 염불은 많이 욀수록 좋은 것이야. 그래야만 극락에 갈 수 있거든. 자네들도 극락에 가고 싶거든 오늘부터라도 염불 외는 습관을 길러요."
"도루아미타불이라는 염불도 있던데, 나무아미타불과 도루아미타불은 어떻게 틀리오?"
"예끼 이 사람! 또 무식한 소리를 하고 있네. 도루아미타불이 무슨 놈에 염불이란 말인가?"
"옛? ... 도루아미타불은 염불이 아니라는 말씀이오?"
김삿갓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도루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자네들은 그 유래도 모르는가?
그렇다면 내가 설명해 줄 것이니 잘들 들어요."
일휴 스님은 도루아미타불의 유래를 말해 주려고, 큰 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잡는다.
김삿갓도 도루아미타불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지만, 그 말의 유래를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김삿갓도 일휴 스님이 말하는 도루아미타불의 유래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일휴 스님이 말한 도루아미타불의 유래는 다음과 같았다.
옛날 어떤 소금 장수가 절에 소금을 한 바리 실어다가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 가려면 강을 하나 건너야 하는데, 때가 마침 늦은 겨울이라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말을 끌고 강을 건너기가 매우 위험하였다.
"아침에 강을 건너오며 보니, 얼음이 녹기 시작하던데, 지금쯤 강을 건너려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소금 장수가 주지 스님에게 그렇게 물어 보자, 주지 스님이 웃으며 말하는데,
"강을 건너가면서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을 끊임 없이 외우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오."
소금 장수는 불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강을 무사히 건너, 집으로 돌아 가기위해서는 싫든 좋든 간에 염불을 열심히 외는 수 밖에 없었다.
소금 장수는 얼음판을 건너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외었다.
그리고 염불을 열심히 왼 덕택으로 강을 무사히 건너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강을 무사히 건너오고 생각해 보니, 마음에도 없는 염불을 열심히 왼 일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길헐..! 나무아미타불이 뭔 개수작이야."
이렇듯 한 마디 씨부리고 난후, 문득 강 건너를 쳐다보니,
"아뿔싸!" ...
소금을 싣고 갔던 말이 강 건너편에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소금 장수는 행여 얼음판이 꺼질까? 하는데만 정신이 팔려, 말을 그냥 내버려 두고 혼자만 건너온 것이었다.
"에구 에구 쯔쯧 ...!"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소금 장수는 말을 가지러 강을 다시 건너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소금장수는 위험한 강을 다시 건너며 이번에는, 염불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 생각나지 않자,
"도루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도루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 된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휴 스님은 도루아미타불의 유래를 거기까지 말해 주고 나서,
"도루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때 생겨난 말이야, 위험할 때는 부처님을 의지했다가도, 위험에서 벗어난 뒤에는 부처님의 고마움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게 인간이거든.
이처럼 교만한 것이 인간이니까, 자네들은 그런 점을 잘 깨달아서, 평소에도 염불을 열심히 외도록 하라구!"
하고 제법 스님다운 설교를 들려 주었다.
그러자 누군가 웃으며,
"위험에 부딪치면 그때 가서 소금 장수처럼 도루아미타불이라고 외치면 될 게 아니오!"
하고 말하자 일휴 스님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도루아미타불은 염불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염불은 반드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야!"
김삿갓이 천동 마을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많은 친구들이 저녁마다 모임방에 몰려와 재미있는 이야기로 밤을 지새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한 달 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낮의 시간만은 지극히 한가하였다.
따라서 별 일이 없을 때는 김삿갓은 늙은이들이 모이는 이풍헌 댁 사랑으로 찾아가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었다.
장기는 조그만 것을 주고 큰 것을 낚는 재미가 있어, 결국에는 마지막 끝내기에서 결과가 얻어지기 싶상이다. 그러나 바둑은 첫 점부터 착점을 잘하여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
인생을 사는 것도 장기판과 바둑판 같다고 생각한 김삿갓, 인생의 결과는 한 판의 장기나 바둑처럼 짧지 않고, 다시 무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79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79)
*질긴 인연의 시작
해(年)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김삿갓은 이날도 이풍헌 댁으로 바둑을 두려고 모임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조조가 술을 한 병 들고 찾아왔다.
"여보게! 오늘은 어디 가지말고 나하고 술이나 한잔 하세 ! 이 술은 어떤 여자가 자네한테 보내 온 특별한 술일세! " 하고 집을 나서려는 김삿갓의 발길을 잡았다.
술이라면 어떤 술도 마다할 김삿갓이 아니다.
"술이라면 먹세그려. 그런데 어떤 여자이길래 나한테 술을 보냈단 말인가?!
"왜, 궁금해? 그런 사람이 있어 ! 하하하."
조조는 술상 앞에 앉으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김삿갓이 물었다.
"이 술이 어떤 술이란 말인가? 또 어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고 했는데, 그 여자는 또 누구인가?"
"왜?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니까,궁금하지?"
"아따, 이 사람! 더 궁금하게 하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우선 술맛부터 알아 보기로 하세. 자네가 한 잔 마셔보아서 술맛이 자네 입에 맞으면, 내가 어떤 여인이 보냈는지 말해주지."
"술이 입맛에 안 맞으면?"
"아따, 이 사람! 언제, 삿갓 입맛에 맞지않는 술도 있었던가?"
"그랬던가? 하하하!"
김삿갓은 술잔을 손에 들고 조조와 얼굴을 마주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김삿갓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닌걸. 이 사람아! 이런 좋은 술이 어디서 생겼는가?"
김삿갓은 40 평생을 살아오며 술이라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마셔왔다.
그러나 술맛이 좋고 나쁜 것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셔 본 술은 국화 향기가 그윽한데다가, 술이 혀끝을 톡 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술을 다시 한 번 마셔보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 술은 맛으로 평가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보다는 신선들이나 즐길 수 있을 것 같구먼그래."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 칭찬하자, 조조도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을 한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고 해서, 자네가 무슨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닌가?
술은 다 마찬가진데 쏘기는 뭐가 쏜단 말인가!"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좋은걸 좋다고하지, 아무렴 나쁜 것을 좋다고 하겠나? 정말이지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야. 대관절 이 술을 빚은 여인은 누구길래 이렇게도 기막힌 술을 빚어 냈을까."
김삿갓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술맛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조조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한다.
"이 술을 빚은 여자의 정체를 알고 나면, 술맛이 대번에 뚝 떨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일세."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술을 빚은 여인이 누구인가는 막론하고, 이렇게 기막힌 술을 빚을 수 있는 여인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겠는걸."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 칭찬하자 조조는 어이없어 하면서,
"자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대로 말해 줌세. 실상인즉, 이 술은 취향정(醉香亭) 주모가 보내온 술이라네. 자네는 며칠 전에 그 여자를 만나 본 일이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취향정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 하였다.
"뭐? 취향정? 내가 언제 취향정 주모를 만나 본 일이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 왜, 지난번 제제네 집에서 생일 술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에 이 차로 취향정이라는
술집에 갔던 일이 있지 않은가, 이 술은 그날 밤 만났던 수안댁(遂安宅)이 자네에게 특별히 보내 준 술이란 말일세 !"
조조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집 주모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좋은 술을 공짜로 보내 주었단 말인가?"
"수안댁이 자네에게 왜 술을 보내주었는지, 궁금하겠지, 그렇다면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해 줌세."
그러면서 조조는 수안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황해도 수안 태생인 수안댁은 열여섯 살 때.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 신랑에게 시집을 왔었다.
남편은 밥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는 모주망태였지만, 수안댁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남편을 하늘처럼 정성스럽게 받들어 모셨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수안댁이 시집온지 5년째 되는 여름에 남편은 독주(毒酒)를 잘못 마시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수안댁은 장사를 지낸 그날로 남편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삼년상을 꼬박이 치렀다.
그런 뒤에는 자기 집에 돌아와 "취향정"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자식이 한 명도 없는 그녀에게는 재혼을 권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지만 수안댁은 모두 거절하고 술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동네 노파들이 "아까운 나이에 재혼은 안하고 하필이면 술장사를 하냐"고 충고를 했지만, 수안댁은 그때마다, "내 남편은 나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느 집이나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하겠기에, 나는 술꾼들에게 좋은 술을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대접하고 싶어서 술장수로 나서는 것이예요." 하고 대답했다.
이와같은 수안댁의 결심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수안댁은 술을 직접 빚어 팔아 오기를 14,5년, 계절에 따라 앵두주, 두견주와 국화주 등
꽃잎과 과일로 만든 술도 썩 잘 빚어 왔지만, 대중적인 막걸리와 소주 조차, 빚어 놓은 술의 맛과
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손 맛이 탁월했고, 시간이 더해갈 수록 양조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에게는 남 모르게 탄식할 일이 하나 있었으니, 술을 아무리 정성스럽게 빚어 팔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 주는 진짜 술꾼을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술꾼들은 하늘에 별처럼 많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
수안댁은 날마다 술을 팔아 오기는 하면서도, 술맛조차 모르는 술꾼들을 내심,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어느날 저녁, 조조가 친구들을 4,5명 데리고 술을 마시러 왔다.
제제네 집에서 생일 잔치를 얻어먹고 돌아가는 길에, 한잔 더 마시려고 들렀다는 것이다.
일행 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수안댁은 손님들에게 술을 손수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조차 모르는 초면 손님만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별안간 호들갑스럽게 놀라 감탄사를 지르는데,
"아니! 이 집 술맛이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 "
수안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띄였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을 쳐다 보았다.
그는 오늘 처음 온 김삿갓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어느 친구가 김삿갓을 놀려대는데,
"여보게 삿갓! 술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진데. 이 집 술맛이 뭐가 좋단 말인가."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모르는 소리 말게, 삿갓이 음흉스럽게 수안댁 환심을 사려고 일부러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지!"
김삿갓은 친구들이 놀리는 말을 하자, 이렇게 나무라 주었다.
"이 못난 친구들아! 자네들은 술맛을 그렇게나 모른단 말인가? 정말이지 이 집 술맛은 보통 술맛이 아니야! "
수안댁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연방 술만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일행이 돌아가 버리자, 수안댁은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삿갓이라는 사람이 술을 마셔가며" 이 집 술맛은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막히지?" 하고 연실 감탄하던 소리가 자꾸만 귓전에 울려 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삿갓이라고 하던 그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술맛을 그렇게도 잘 알아 줄까.)
조조 일행과 네니 내니 하는 것을 보면, 마을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임은 분명해 보였으나, 그의 행동거지를 보아서는, 마을 사람들처럼 우매한 농부는 아닌 것 같고 ..)
수안댁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밤은 깊어 오는데 잠은 못자고 계속
뒤척이고 있었다
80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80)
*비장의 술 추로백 (秋露白)
(우리 집에는 남 모르게 비장해 놓은 추로백(秋露白)이란 술이 있는데, 그 김삿갓이란 사람에게 그 술맛을 한번 보여주면 얼마나 놀랄까...)
수안댁은 몇 해 전에 어떤 고승으로부터 명주(銘酒) 담그는 비법을 배워 가지고, 추로백이라는 술을 한 항아리 담가 놓은 것이 있었다.
양조법을 배우다가 시험삼아 한번 담가 본 것으로서, 돈을 받고 팔기 위해 담가 놓은 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삿갓이라는 사람이 술맛을 그렇게나 잘 알고 있기에, 그 사람에게는 추로백의 맛을 꼭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수안댁은 며칠을 두고 망설이다가, 어느 날 마침내 용기를 내어 술 한병을 들고 조조를 일부러 찾아왔다.
"며칠 전에 우리 집에 들렀던 삿갓이라는 분에게 이 술맛을 보게 해 주세요.
이 술은 "추로백" 이라고 하는데, 그 양반에게 이 술맛을 한번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하여 조조가 문제의 술병을 들고 지금 김삿갓을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조는, "수안댁이 이렇게 좋은 술을 보낸 것을 보니,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을 기회로 수안댁과 잘 사귀어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면 어떻겠나?" 하고 말을 하였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결혼을 못해 환장한 사람인줄 아는가?"
사실 김삿갓은 처자식이 엄연히 있는 몸이어서 새장가를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턱 없는 조조는 두 사람을 어떡하든지 결합시켜 주고 싶어했다.
"자네가 돈이 없어 결혼을 겁내는 모양인데, 그러나 조금도 걱정을 말게, 수안댁이 돈은 먹고 지낼만큼 벌어 놓았으니 자네가 한 푼도 벌지 않아도 될 것이야."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던간에 나는 결혼 할 형편이 안되니 그 문제는 이제 그만하게!"
"자네도 우리들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야 우리 마을에서 함께 살게 될 것 아닌가.
수안댁은 그만하면 인물 좋겠다, 마음씨도 곱겠다, 살림살이 걱정도 없겠다, 술장수라고 덮어놓고 싫어할 것은 없지 않은가?"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수안댁이 술장사를 하기 때문에 결혼을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그 점만은 오해하지 말아 주게."
"그러면 자네는 언제까지나 홀아비로 늙어 죽을 생각이란 말인가?"
"나는 자네들에게 말을 안 했다 뿐이지, 홀아비는 아닐세. 영월에는 처자식이 버젓하게 있는걸."
김삿갓은 마침내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해 버렸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날 조조는 친구들과 그 문제로 상의했는데,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 친구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장가를 가려고 하지 않을 걸세,
그러니 장가를 보내려면 우리들이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네."
"삿갓도 삿갓이지만, 수안댁의 말도 들어 봐야 할 게 아닌가?"
"그건 그래! 모르는 과부라면 한밤중에 보쌈을 해 올 수도 있지만, 수안댁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우선 수안댁의 마음을 넌즈시 떠보기로 하세."
친구들은 암암리에 그 문제를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친구들은 술을 마시자고 하면서 김삿갓을 취향정으로 끌고 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을 결합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취향정 문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게 수안댁, 어디 갔는가? 이 친구가 자네 집 술맛이 하도 좋다고 하기에, 오늘은 일부러 이 친구를 모시고 왔네."
수안댁은 무심코 나오다가, 일행중에 김삿갓이 끼어 있음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놀란다.
"어머! 삿갓 어른도 오셨네요."
김삿갓은 스스럼없이 마루로 오르며,
"일전에는 술에 취해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해 미안하게 됐네. 참, 자네가 보내 준 술은 조조와 함께 잘 마셨네. 어쩌면 술맛이 그렇게도 좋게 빚었는가? 고맙네.."
그러자 수안댁이 크게 기뻐하며,
"제가 술장사 20년에 술맛 좋다는 칭찬을 들어 보기가 처음이어서, 무척 기쁘옵니다."
그러자 조조가 너스레를 치고 나오는데,
"이 사람아! 수안댁이 우리한테는 나쁜 술만 먹이고, 자네한테만 좋은 술을 먹이니까 술맛이 좋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 수안댁이, "마을 양반들은 아무리 좋은 술을 대접해도 칭찬해 줄 줄을 모르니까, 화가 동해 그랬지 뭐예요."
"옳 ..아 ! 이제야 자네 마음을 알겠네. 좋은 술은 아껴 두었다가, 사랑하는 낭군님에게만 대접하고 싶어 그랬단 말이지?"
그 바람에 좌중에는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김삿갓도 덩달아 웃으며,
"아닌게 아니라, 일전에 자네가 보내 준 술맛은 정말로 좋았네. 그런데 술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그 술은 추로백이라는 술이었습니다."
"추로백....?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걸! 그 술은 마셔보니 혀를 콕 쏘는 맛이 있는데다, 향기가 그윽한 점이 더욱 좋던데, 그 술은 어떻게 빚은 술인가?"
그러자 옆에 있는 다른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이 사람아! 우리는 술을 마시러 왔지. 술 빚는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은 아닐쎄.
그런 애기라면 이따가 단둘이 이불 속에서 하고, 우선 술이나 빨리 가져오게!"
"어마! 아무리 농담이라도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사람아! 우리들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을 하고 있는거야. 이 사람이 자네하고 하룻밤 같이
지내고 싶다고 하기에, 우리들이 이 사람을 일부러 데리고 온 거야.
그런줄 알고, 어서 들레술이나 가져오게!"
수안댁은 대답을 못 하고, 얼굴을 붉히며 부랴부랴 술상을 차리러 달려나간다.
수안댁이 부엌으로 나가 버리자, 친구들이 김삿갓에게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한다.
"여보게 삿갓! 수안댁이 자네가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네. 지금까지는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길길이 뛰던 수안댁이 오늘, 자네 앞에서는 새색시처럼 얌전해졌구먼 ...."
"오랫동안 혼자 살아오다가 맘에 드는 짝을 만났으니 그렇겠지, 그나저나 수안댁이 자네가 얼마나
좋았으면 추로백이라는 술까지 보내줬단 말인가?"
"수안댁의 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지. 젊은 나이에 20 년이 되도록 독수공방으로 살아오다가, 이제야 마음에 드는 사내를 만난 셈이거든!
친구들이 한마디씩 씨부려대는 바람에 김삿갓은 어이가 없었다.
"허허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이 친구들은 앞서 김칫국을 마시고 있구먼 ..."
그러자 조조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김삿갓을 나무라는데,
"자네가 수안댁의 마음을 믿지 못하겠다면, 우리가 자네 앞에서 수안댁의 내심을 직접 물어 봐 주면 될 게 아닌가."
그때 수안댁이 술상을 들고 들어와, 술을 손수 한잔씩 따라준다.
"안주가 벤벤치 못해 죄송해요. 어서 한 잔씩 드세요."
그러자 조조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수안댁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이 술을 들기 전에, 수안댁에게 한 가지 꼭 물어 볼 말이 있네."
"제게 무슨 말씀을 물어 보시겠다는거예요?"
"우리가 무슨 말을 묻든간에 자네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어야 하네. 그런 약속이 있기 전엔 물어 보지도 않을테야."
"무슨 애기인데 대단스럽게 나오시니까 겁이나네요."
수안댁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김삿갓을 건너다 보았다.
81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