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59)
[에피소드139]
내가 수강했던 과목을 담당했던 교수 중에 L이라는 아주 원칙적이고 고상한 척 했던 분이 있었다. 그 분은 간혹 학생들과 잔디밭에서 야외수업을 하면 바이올린 연주도 할 만큼 멋을 내는 분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내가 집안 사정 때문에 시험을 개별적으로 연기를 해 달라고 사정을 한 적이 있었다. L은 즉시 원칙을 내세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시험을 안 본 나에게 학점을 주지 않았다. 나는 그 과목을 다음 해에 재수강을 해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
그래서 나는 그가 아주 원칙을 견지하는 고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중에 소식을 들었는데, 그가 그의 과목을 수강하는 여제자와 은밀한 스캔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미투 사건의 장본인이었다. 나는 그 후 겉이 번드르르 하고 고상한 척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습관이 생겼다.
[에피소드140]
서정주 시인은 늘그막에 언론인터뷰에서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 고 토로한바가 있다. 그런데 내 친구 중에 C라는 친구는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은 8할이 소주(燒酒)라고 했다. 나의 대학시절을 결산하면 4할이 여학생, 2할이 운동, 2할이 술 담배 여흥이었다. 그리고 나머지가 학군단 훈련이었고, 전공공부는 설교 학을 제외하고는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모교 캠퍼스보다는 주로 E여대 앞 다방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1학년 신입생 때 E대 기독교학과와 첫 미팅을 했는데 파트너인 B라는 여학생에게 마음을 뺏겨 그녀의 집인 부산 동대신동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나중에 소문을 들어보니 “그녀는 일찍 결혼했다가 이혼을 한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다.
졸업 무렵 이화여대 X과와 마지막 미팅을 했을 때 운이 찾아왔다. 친구에게 사정을 해 원래 배정받은 번호를 바꿔 배우처럼 예쁜 여학생을 미팅 파트너로 교제하게 되었던 것이다. L이라는 여학생이었는데 군대시절 그녀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제대하기 전에 인연이 끝나고 말았다. 대학시절 내내 만났던 그 숱한 파트너는 지금 다 어느 하늘아래, 어떻게 살고 있을까?
4학년 말 어느 날 심성이 아주 선하고 어딘가 품위가 있었던 학군단 동기 심종익(전기공학과)군이 학군단 스케줄이 거의 끝나는 시점에 세검정에 있는 자기 집으로 이규선 중대장과 동기 몇몇과 함께 나를 초대 했다. 그의 집은 그 당시 개인주택으로는 근사한 저택이었다. 그날 저녁은 출장 중국요리였는데, 학생 신분으로서는 화려한 만찬이었다. 심종익군의 부친은 당시 산업은행 부총재로 계셨던 금융계 고위직 인사였다. 부친은 그 후 금융통화운영위원, 대우중공업회장을 역임하셨다. 그 때 초대 받았던 동기는 이주영(건축공학과)군은 기억이 나는 데. 나머지는 누군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김용희군(금속공학과)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있었지 않았던가 싶다? 그런데 지금 나의 머릿속에는 심군이 그 좋은 자리에 왜 나를 불러 주었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중대도 아니고, 평소에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인생에는 이와 같이 항상 완벽한 시나리오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것 같다. 때로는 의문스럽고 의외의 일들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말할 수 없이 신비하고,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연구해온, 뇌과학, 유전자공학, 정신분석학, 우주물리학 등 최첨단 지식을 종합, 분석해 보면 의문이 풀리기도 한다. 즉 심종익과 나 사이에 일종의 우호적인 심령현상이 발생했다고 할까. 우주는 소립자 파동으로 이루어지는데 인간은 서로에게 같거나 비슷한 주파수의 Telepathy(일종의 파동현상)를 보낼 때 그 정신감응의 전파는 상대방의 전두엽안의 뇌세포의 수용체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그렇게 발생한 Chemistry(감정의 화학반응 현상)가 서로 감정을 우호적으로 끌리게 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이 현상은 서로가 말이나 동작, 표정이 없이도 오로지 텔레파시와 그 결과물인 케미스트리의 조합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아마 당시 심종익군과 나 사이에는 별로 대화나 만남이 없었지만, 서로가 같은 주파수의 텔레파시의 파동을 일으켜 계속 보내다보니, 그날 우연히 같이 만났지만, 오래된 친구 같은 친숙한 감정을 느껴 그의 집으로 가게 된 것 같다.
어쨌든 심종익 동기의 뜻밖의 호의로 인해 마음이 아주 따뜻해지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지나간 삶을 회고해 보면 심종익이 나를 초청해 준 그 장면은 아름답고 즐거웠던 추억 중 하나로 나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가끔 나의 마음의 공간에 심종익군이 떠오르고 그의 따뜻한 심성이 그리워진다.
심종익 동기는 집안이 좋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하고 좋은 병과를 골라 갈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나와 같이 골병드는 병과인 보병을 지원해 군 생활을 했다. 나는 그를 졸업 후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소문으로는 미국에서 MBA를 하고, LA에서 한국계 은행 현지법인에서 대출업무를 약 7년가량 했다고 한다. 그리고 국내에 복귀해서 현대 종합상사에도 있었고, 대전에서 충남이동통신 사장을 하기도 했고, 나중에 그는 무역오퍼상을 하면서 이대 후문에서 꽤 큰 레스트랑도 운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종익군의 중대장인 이규선 대위는 학군단을 떠난 후 소령으로 전역했다. 그는 전역 후 국민은행 예비군 대대장으로 가서 일하다가 동 은행의 일반 업무를 맡아 지점장까지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와 우연히 예비군 동원훈련장에서 만나 같은 텐트 안에서 자기도 했는데, 그는 동원 예비군 훈련신고식과 퇴소식에서 부대지휘자로 구령을 붙였다. 학군단 시절에도 특유한 발성으로 구령을 잘 붙이기로 소문났는데, 역시 그 때 그 실력이 살아 있었다.
[에피소드141]
나의 대학생활 마지막 년도는 10월 유신의 짙은 그림자로 어둡고 쓸쓸했다. 나는 그 당시 감상한 한편의 감수성 짙은 연극과 한편의 팝음악을 잊지 못한다. 74년 가을 여러 번의 앙코르 공연으로 인기를 독차지한 교내 연극반 “연희극예회”의 카슨 맥컬러스 원작 “슬픈 카페의 노래”는 당시 암울한 시대상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미국 남부의 한 마을에 사는 미스 아밀리아는 6척 장신의 사팔뜨기 여자였다. 잘생긴 미남 마빈 메이시는 그녀와 결혼하여 환심을 사려고 자신의 땅문서까지 다 넘기고도 결국 결혼 10일 만에 그녀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버림받는다. 이후 그는 범죄자가 되어 투옥된다. 그런데 그렇게 마빈에게는 냉정했던 아밀리아이지만, 사촌이자 떠돌이 곱추인 키 작은 라이먼은 이상하게 사랑한다. 그러나 라이먼은 그녀를 업신여긴다. 이후 가석방된 마빈 메이시는 마을에 돌아오는데 곱추 라이먼은 그를 보고 첫눈에 흠모에 빠져 강아지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마빈 메이시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곱추를 병신이라고 하면서 때리지만, 라이먼은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마빈 메이시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런 광경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기이하다고 생각하고 아밀리아는 메이시에 대한 분노를 다시 키운다.
운명의 2월 2일 7시 아밀리아는 마을사람들이 모인 카페에서 메이시와 결투를 벌인다. 엎치락뒤치락 싸움의 끝에 결국 아밀리아가 메이시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는 순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곱추 라이먼은 그녀의 목을 향해 뒤에서 덮친다. 결국 아밀리아는 쓰러지고 메이시와 라이먼은 마을 사람들의 삶의 중요한 곳이었던 이 카페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그녀의 소중한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가 버린다. 아밀리아는 이제 사람들과는 벽을 쌓고 쓸쓸하게 늙어가지만 곱추 라이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황량하고도 쓸쓸한 조지아주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이상하고 기이한 세 인물의 삼각관계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탐색(探索)한다. 평범한 일상과 세계관에 순응하기 힘든 소외된 영혼의 열망과 고독을 주제로 하면서, 인간의 병적인 내면의 무의식 심리상태를 도저(到底)하게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적 경험만이 아니라 혼자만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랑의 독특하고 허무한 어쩌면 기형적(奇形的)인 내면의 풍경을 보여 준다. 또한 너무나 치열하고 험악한 오늘을 사는데 따른 현대인의 왜곡된 정서와 분열된 심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도 든다.
(강광우 자서전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