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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승자의 저주>의 줄거리:
겟세마네의 기도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어떨까요? 즉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영원한 모델 대신에 예수님의 극심한 심리적 고통에 촛점을 맞춰 봅니다. 그러면 승자의 저주가 보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온통 승자의 저주를 결과하는 긍정오류로 가득찬 것을 깨닫게 됩니다.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
(막14:32-42)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승자의 저주>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잘 아시겠습니다마는 ‘Winners Curse’라는 영어 단어에서 나와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승자의 저주’
이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경위를 잠깐 살펴보면, 1950년대에 미국 멕시코 만의 석유개발 사업을 놓고 수십 개의 미국의 석유종합개발회사들이 입찰경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보신 분들, ARCO라고 하는 주유소 보신 적 있으세요?
Atlantic Richfield 라고 하는 회사가 그 과열된 경쟁을 뚫고 시추권을 따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1971년에 이 회사에 속한 세 명의 엔지니어가 논문을 하나 발표하게 됩니다.
그 동안 속사정을 몰랐었는데 20년이 지나서 발표된 논문 속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가 하면, 1950년대에 이 ARCO 회사가 멕시코 만의 시추권을 따낼 때만 해도 석유매장량을 측정하는 기술이 그렇게 발달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과열된 경쟁 속에서 그 당시 돈 2천만 불을 시추권 입찰비용으로 제시해서 따냈는데, 정작 개발을 하고 보니까, 다 해봐야 1224개 중 불과 18%에 해당되는 곳 외에는 석유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 18%에서 천만 불 어치의 석유매장량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2천만 불을 들여서 입찰에 성공하여 시추권을 따냈는데 개발할 수 있는 맥시멈이 천만 불 어치였으니까 천만 불이 그냥 날아가 버린 겁니다.
이 상황을 이 세 명의 엔지니어가 자기들의 논문 속에서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승자의 저주>라고 말을 합니다.
그 후에 이 얘기가 경제계에서 아주 유명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경제학자에 의해서 <승자의 저주>라고 하는 책도 나오게 되었지요.
이 승자의 저주가 어떨 때 쓰이느냐 하면 기업인수 합병 M&A라고 하는 것, 예를 들면 작년에 CJ가 대한통운을 인수하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CJ가 인수회사로 정해졌는데 CJ가 대한통운을 인수하겠다고 할 때의 가격이 어떻게 계산된 가격이었냐 하면 대한통운의 주식을 21만 원이 넘는 가격으로 계산을 해서 인수하겠다고 제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에서 대한통운의 신용을 강등시키고 하면서 주식이 7만 원 대로 떨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주당 21만원인 회사를 사들였는데 정작 내 회사로 된 다음에는 7만원으로 떨어져버린 거예요.
이게 승자의 저주라는 겁니다.
이기긴 이겼는데 이 회사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금호 아시아나 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합병 함으로써 기업 전체가 흔들려버립니다.
그 인수합병에 들어간 비용의 이자를 갚느라고 강남터미널이라든지 하는 금호 아시아나의 노른자위 회사들을 매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게 바로 승자의 저주라는 겁니다.
이 승자의 저주가 나타나는 이유가 뭡니까?
멕시코 만에서 ARCO가 계산을 잘못한 거예요.
이걸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긍정오류’라고 합니다.
사실은 참이 아닌데 참으로 오해를 해버리는 거예요, 이익이 남을 거라고 오해를 해버립니다.
2천만 불을 들여서 시추권을 따내면 이익이 남을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게 바로 긍정오류라는 얘깁니다.
긍정오류라는 것은 통계학에서 나온 단어인데 이것을 각계에서 사용합니다.
경제계에서 심리학에서 여러 분야에서 사용하고 있어요.
긍정오류, 계산이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오늘 유명한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 겟세마네 사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어요.
언젠가부터 이 점에 착안을 하게 됩니다.
어떤 점인가 하면, 33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라는 말씀.
놀라셨다, 대체 무엇에 놀라셨을까요? 주님이 놀라셨다는 이 말.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이렇게 마음이 고통스러워하시는 이유가 십자가에서의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34절 가만히 들여다보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이 말에서 ‘죽게 되었으니’라는 것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직접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내가 지금 마음의 고통이 너무나 커서 죽을 지경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사건 이전에 마음이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죽게 되실 것에 대해서 인간이시기 때문에 괴로워하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착안하는 것은,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돌을 들고 와서 내리찍는 거예요, 돌로 친다는 의미는.
그렇게 돌로 치는 고통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고통에 80%는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그런데 스테반이 천사와 같은 얼굴로 그들을 용서하며 죽습니다, 물론 주님도 용서를 하십니다만,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내일 아침 참수형이 결정되었을 때 정말 깊이깊이 잠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40일을 금식하시고도 떡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이셨던 분이고,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사람의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제자들처럼 경악하고 죽겠다고 아우성칠 텐데 잠을 주무십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제자들은 자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죽게 될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십자가사건이 말할 수 없이 괴롭지요, 우리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박혀도 괴로운데 말할 것도 없지요.
이 십자가 고통의 100분의 일도 당해보지 않은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닙니다만 스테반이 죽는 모습, 사자 밥이 되어 죽고, 불에 타서 순교하던 사람들의 평강한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괴로워하시는 것은 이상하다 이겁니다, 이렇게까지.
또 예수님은 보통 순교자들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나치게 과민하시며 괴로워하시는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상하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심히 놀라셨다’, 왜 놀라시는 겁니까?
우리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사건의 의미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고,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는 말씀까지 하셨어요.
그런데 심히 놀라신 이유는 다 이해하고 계시고 알고 계셨지만 실제로 인간들이 처한 상황, 그 저주 속으로 던져지셨기 때문입니다.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주님의 이 지상에서의 삶은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끊임없는 교통 가운데 계셨고, 아버지께서도 주님을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때마다 주님께 들리도록 천둥소리와 같은 말씀으로 해주셨습니다.
계속해서 성령님을 통하여 천국과 주님의 마음이 교통하고 있었고, 천국의 기운 안에 있었고, 아버지 앞에 계셨습니다.
심히 놀랐다는 얘기는,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가려집니다, 천국의 기운이 차단됩니다.
갑자기 주님의 마음이 저주 속으로 던져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신 겁니다.
머리로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될 거라는 걸 알고 계셨지만, 실제로 저주 속에 던져지자 깜짝 놀라버리고 마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은 사흘 뒤에 부활하실 것 또한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통이 극심해도 3일 뒤에는 끝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괴로워하신 이유는 저주로 떨어져버리신 것 때문입니다, 마음이 저주로 던져져 버리신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난리를 치시는 겁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아이가 3살부터 7살 되었을 때, 제가 아이에게 벌을 주는 방법이 두 가지였는데, 매를 들고 때리든지 아니면 방에 넣고 문을 잠가버리는 겁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매를 들고 때릴 때도 무서워서 새파랗게 질렸지만, 그때는 매를 치는 나는 무섭지 않아요.
그런데 아이를 방에 가두었을 때, 그 아이가 방에 갇혀진 상태에서 울고 발악할 때는 제가 무섭습니다, 아이가 저러다가 정신이 이상하게 될까봐 겁이 날 정도로 그렇게 방에 갇혀서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안 보이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주님이 지금 그런 경기를 일으키고 계시는 겁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가려지는 것, 이게 바로 저주 아닙니까?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지고 천국의 기운이 가려진 것, 이게 바로 저주인데, 그 저주 속에 던져진 상태가 주님께서 이렇게 경기를 일으키신 상태가 됩니다.
그 아이를 문에 가두었을 때 집사람은 입술이 바들바들 떨립니다.
애가 그렇게 요동질 하는 게 무서운 거예요, 저도 무섭고.
얼마나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하는 거예요.
주님이 바로 그런 상태가 된 겁니다.
지금 주님의 심리상태가 미쳐버릴 정도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차단되고 천국의 기운이 차단된 상태, 이게 바로 저주의 상태지요.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기가 막힌 일.
저주가 그렇게 주어졌다고 해서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개벽이 되는 게 아니에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제자들이 잠을 자고 있는데, 이 제자들이 잠자고 있는 상태가 바로 주님이 이제 비로소 깜짝 놀라시면서 떨어지신 저주의 상태, 주님의 마음이 떨어져버린 그 저주의 상태입니다.
이들이 저주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좋아하기까지 하는 이 세상의 형편,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얼굴 뵙지 못하고 천국 기운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 상태, 우리가 너무나 편안하게 느끼고 모든 인간이 이 속에서 행복하기를 원하고, 입찰경쟁에 뛰어든 회사들처럼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원하고 일등 하기를 원하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주님께서는 단 3일을 견디지 못해서 정말 마음이 미쳐버릴 정도로 괴로워하시는 상태이더라 이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괴로워하는 그 상태를 우리는 긍정오류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등 하는 게 잘사는 거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게 잘사는 거다, 입찰경쟁에 뛰어든 바로 그 회사가 2천만 불을 들여서 멕시코 만 시추권을 따내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일등 하면 잘사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이 세상에 진짜 석유매장량이 어느 정도 되는가가 측정되는 거예요.
주님께 물어봅니다.
‘주님, 그렇게 괴롭습니까?’
이상한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편한데…
이렇게 편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좋은데,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모르고도, 천국을 모르고도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게 잘사는 거고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면 잘살고 행복할 줄로 알고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아버지 얼굴이 안 보이고, 천국의 기운이 끊어진 상태를 어느 정도로 괴로워하시느냐 하면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시는 그런 상황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해가 되지요.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히운 바 되었다’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마음이 천국을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승천하신 주님을 느끼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면서 왕이 된 자와 총독이 된 자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합니다,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
아그립바 왕, 승자에요, 승자, 이 세상에서 승자,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승자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승자의 저주처럼 보이는 거예요.
긍정오류, false positive,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면 잘되는 줄로 알고 있는 그런 긍정오류.
어제도 오순절 계통의 어느 목사님의 설교원고를 한번 보게 되었어요.
또,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는 주제의 말씀을 하시며, 내세와 금세를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금세 안정, 내세 복락’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성령운동을 하는 그런 분들입니다, 잘 이해가 안 가요.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은 교회부흥이 아니에요, 기적이 아니에요.
그것은 성령의 부전공 중의 부전공이고 성령님의 전공은 하나님을 우리 마음이 보게 하는 겁니다.
천국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성령 받아서 이제 이 세상에서도 무병장수하고, 돈 잘 벌고, 사업 잘되고, 가난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에서 잘산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교인들에게 위로가 될 거라고 전달하는 그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성령을 받아서 천국을 본 자들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의 질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얼굴이 차단된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을 3일 동안도 견디지 못하셔서 괴로워하시면서 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무서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지긋지긋한 것으로 여기고 계시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얘기하면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하는 말이 ‘죽은 다음에 천국 가자’고 합니다.
주님은 3일을 못 견디십니다, 3일을.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실 것이고 아버지와의 교통이 다시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3일을 못 견디셔서 괴로워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까지 말하시는데, 우리는 이 상황이 그렇게 편하고 좋은 거라서 무병장수가 복이고 죽은 다음에 천국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아요.
선교사님들 말씀 들어보면, 중국에 대도시에서 한 두 시간만 들어가면 거의 움막 수준의 집을 짓고 사는 곳이 많은데, 그 움막 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모든 형제들, 그리고 그 집에서 키우는 개, 닭, 돼지까지 다 같이 산답니다, 한 집 안에서.
화장실도 돌 두 개 놓고 그 위에 올라서면 화장실이 된다는 거예요, 어디든지 간에.
자, 대한민국 강남의 타워팰리스에서 태어나서 열두 살이 되도록 그곳에서 자란 아이가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그 중국의 움막에 툭 떨어졌습니다.
타워팰리스에서 살던 삶을 알고 있던 이 열두 살짜리 세상모르는 아이에게는 기절할 일입니다.
엄마 아빠도 안 보이고 환경도 타워팰리스에서 중국의 움막으로 변했는데, 얘가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가겠습니까?
천국을 느끼시고 아버지와 교통하고 계시는 주님, 우리는 아버지와 교통한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얻었다, 이런 얘기를 자꾸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하나님께 나갈 길이 열렸다.
하나님께 나갈 길이 열렸으면 타워팰리스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타워팰리스를 아는 사람이 이 움막 같은 세상에서 잘살아보겠다는 겁니까?
그럴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께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교리일뿐이지 진짜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을 힘입어서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를 느껴본 적도 교통해본 적도 없다는 거예요.
아직도 이 세상에서 뭔가 잘살아보고 싶다면 그런 마음이 있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인간이셨지만 천국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고 계셨던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3일 동안을 아버지를 못 보시고 천국 기운이 끊어진 상태를 견디지 못해서 땀에서 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살아보기를 원합니다.
세상이라는 것에 대한 긍정오류, 이것이 바로 승자의 저주와 같이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겠다고 성공하겠다고, 형통하겠다고 뜁니다, 그것이 승자의 저주인 것도 모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겪으신 이 괴로움의 이유를 우리가 알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근본적인 긍정오류,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면 행복하고, 무병장수하면 행복하고, 형통하면 행복해 하는 이런 긍정오류에서 아예 완전하게 벗어나게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에서는 일등 해도 일등의 저주요, 승리해도 승리의 저주일 뿐입니다.
주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그렇게 괴로워하신 저주의 상태에 익숙해져서 저주의 상태를 좋아하고 저주의 경계 안에서 성공하겠다고 발버둥치는 긍정오류의 삶을 중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