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불날, ‘역사적 바울의 도전’ 세 번째 강의도
대면, 비대면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던
바울. 바울이 서신을 통해 성도들과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권면하며 사용했던
용어들은 저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해방자’ ‘구세주’ ‘세상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 ‘성육한 하나님’ 등 . . .
그런데, 이러한 용어들은 이미 바울이 살았던 로마
제국 시대의 제국신학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용어
라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 시대, 그리고 제국신학에서
황제를 찬양하고 절대시하는 용어들을 전략적
으로 ‘차용’ 하여 제국신학에 반대하고
(이로 인해 박해, 순교의 구실이 되었다고
목사님은 강의하셨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설파합니다.
제국신학이 만들어 놓은 그 인식의 범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는데 매우 유용한 전략이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되요.
바울은
로마 제국신학의 용어를 활용하여 그들이 말하는
‘힘(권력, 전쟁)에 의한 평화’ 와 황제의 절대
권력을 ‘신격화’ 하는 허구를 일갈하며 예수님의
‘정의, 공평, 사랑에 의한 평화’를 외칩니다.
서슬퍼런 창과 칼의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며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를 외쳤던 바울의 절개에
머리 숙여집니다.
이어진 강의에서 목사님은
존 도미닉 크로산의 ‘바울과 누가’ 그리고 ‘로마
기독교로서의 미래’ 부분을 소개하며 말씀해
주셨어요.
누가는 바울 사후 약 50여 년 후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하는데 원래 이것은 하나로
연결된 복음서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길이가
충분치 않아서 두루마리 2개로 나누어 기획하게
되었다지요.
누가는 1개의 연결된 복음서(누가복음, 사도행전
2권으로 나뉘게 된)에서 핵심 Keyword 로
‘성령’을 꼽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세례 때에 예수님께 오시고
성령께서 오순절 때에 공동체에 오시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을 통해(바울을 내세워)
기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나아가야하는
’크리스천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크로산 교수의 의견을 전해 주셨습니다.
‘크리스천이 진정한 유대인이고 유대교의
진정한 상속자이다’ 라는 로마제국을 향한
누가의 주장이 인상적입니다.
누가는 그 시대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유대인의 질시, 이교도들의 왜곡 등으로
조작된)을 바로잡고 기독교를 수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전략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로마 기독교로서의 미래’ 라는
설정이다 라고 크로산 교수는 전합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 교수가 말하는
누가의 전략적 아젠다 ‘기독교의 미래는 로마
기독교’ 라는 방향성은 향후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로 이어지는 역사적 계기가 되는
부분이 주목됩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제시한
기독교의 핵심 가치 - ‘정의와 사랑에 의한
온전한 평화’ 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누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욕망하는 인간들의 죄성과 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힘(권력, 전쟁승리)에 의한 평화‘ 로
변질, 둔갑되는 과정에 마음 아팠습니다.
소위 기독교 국가라 자칭하는 강대국들이
십자군 전쟁, 식민지 지배, 이념 전쟁,
자본/무역의 세계화 등에서 여실히 보여준
극한의 폭력적인 민낯, 인류사의
질곡들이 묵직하게 묵상되었습니다.
일상에서 나의 계획, 나의 욕망 위해
인위적으로 예수님의 새 언약, 새 질서의
본질을 왜곡하고 악용하는 부분 없는지
돌아보게 되었고,
목사님의 ‘전도(기독교 전파)라는 목적을
위해 기독교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마음 속에 많이 남았습니다.
첫댓글 사도행전에 나온 바울의 모습은 세계 전도를 위한 누가 공동체의 의도로 인해 반로마, 반제국주의 색체를 많이 희석한 것이다. 성서 편집 순서대로 읽어서 선입견을 가지게 되고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1차 해석된 색안경으로 바울을 보는 문제점이 있다. 바울의 본 모습, 역사적 바울의 모습은 훨씬 반제국주의적이며 급진적인 평등 평화주의자일 거라는 추측이 벌써부터 생기는 군요. 바울이 인식한 예수의 하나님나라와 바울이 꿈꿨던 공동체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 삶에 그것은 어떤 복음을 전하는 것인지 우둔한 머리로 더듬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