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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여자고등학교 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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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창회소식방 스크랩 [人+間] 47. 부산이 낳은 세계적 발레리노 이원국
전미애*6 추천 0 조회 30 14.06.01 0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독한 연습' 남들은 미쳤다고 하지만 마흔넷, 나는 아직도 꿈꾸는 발레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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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시절 이원국 발레리노의 모습. 무용수의 몸은 그 자체가 예술 표현의 수단임을 증명하듯 아름답다. 이원국발레단 제공

 

사랑 그리고 열정은, 간혹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한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랬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스무 살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가출과 일탈을 일삼던 문제아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를 만난 뒤 그는 딴사람이 됐다.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같았던 그는 어느새 기품 있는 왕자님으로 변해갔다. 내 이름은 발레! 그의 이름은 이원국이다. 그렇다.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발레리노, 그 이원국(44) 씨 말이다.

밥 먹듯 가출, 고교 휴학 그리고 방황
스무 살에 어머니 권유로 만난 발레
환상적 턴·우아한 매력 운명처럼 끌려…
남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혹독한 연습
동작 안 되면 하루에 몇 천 번이고 반복
'완벽한 점프' 대한민국 발레의 교과서로

# 어머니의 중매?

우리의 첫 만남을 말하자면, 그의 어머니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1986년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나를 만났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그는 안 해 본 게 없다고 했다. 피아노, 미술, 서예, 축구, 수영, 보디빌딩……. 습득 능력이 뛰어난 그는 뭐든 곧잘 따라했지만, 그 무엇도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진 못했다. 무엇이든 쉽게 싫증을 냈고, 매번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이런 그이 때문에 적잖이 속을 끓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타고난 예술가의 심성이라고 할까? 밥 먹듯 가출을 했고, 나이트클럽과 롤러스케이트장을 주요 활동 무대로 했다. 머리도 길렀고, 여학생도 만나러 다녔다. 1983년, 결국 그는 부산 동명공고를 휴학하기에 이른다.

"그땐 나를 만족시키는 게 없었어요. 부모님 잔소리도 듣기 싫었고, 간섭 받는 것도 싫었어요. 술, 담배를 즐기고 못된 애들이랑 어울려 다녔죠. 내가 부모님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방황하고 반항하고…."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그에게 제안했다. 춤을 추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부산의 한 발레학원을 찾게 된 그는 나에게 그만 첫눈에 반해버렸다. 발레. 그는 나의 우아한 매력에 홀딱 빠지고 만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대학 졸업식 사진.

'춤이라고는 나팔바지 입고 나이트클럽 다니면서 춘 게 전부였는데, 이럴 수가.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다르잖아.'

스무살 그의 눈에 턴(turn·돌기) 동작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발레의 예술적 라인(line·선)은 또 어떤가?

그는 몸을 움직이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수영과 보디빌딩으로 다져진 몸매, 잠깐이지만 음악과 미술을 배우면서 기른 예술적 감각도 뒷받침이 됐다. 무엇보다 눈썰미가 있어 한두 번 보면 그대로 따라해 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통 넓은 나팔바지보다 몸에 딱 붙는 발레복이 더 좋아졌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가 돼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사랑하게 되거든요. 연습을 하면 할수록 발전의 과정이 눈에 보이니까요. 전 발레를 알고 성취감이란 걸 처음 느끼게 됐죠. 칭찬이란 것도 받아보고. 그 전까지 난 그저 노는 게 자유라고 착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나를 타락시키는 일일 뿐이었는데 말이죠."

나를 만난 뒤로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아낄 줄 알게 됐다. 그리고 1987년, 스물한 살의 나이로 그는 고3 복학생이 됐다. 

# 완벽에 대한 갈망… 지독한 연습벌레

그는 점점 더 나에게 빠져들었다. 완벽해지고 싶어 했고, 나를 정복하고 싶어 했다.

"남들보다 늦게 발레를 시작했으니 더 독하게 연습했죠. '를르베'라는 동작이 있어요. 발끝으로 몸을 들어올리는 동작이죠. 전 처음에 이 동작만 하루 1천 번씩 연습했어요. 무식하게 했죠. 너무 심하게 하면 종아리 근육이 못생겨질 수 있기 때문에 사실 권장할 만한 연습 방법은 아니에요."

그에겐 초등학교 때 축구를 하면서 다져진 체력과 지구력이 있었다. 그는 지독한 연습 벌레가 됐다.

20대 초반 때 일이다. 어느 날부턴가 허리가 심하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괜찮겠지 하고 참으면서 1~2주 정도 연습을 계속했다. 그런데 나중엔 아예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부산에 봉생병원이라고 있죠? 거기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약을 타서 먹었어요. 약을 먹으면 괜찮고, 연습하면 또 아프고. 6개월 정도 약으로 버텼어요. 나중에 의사 선생님이 보니까 뼈에 미세하게 금이 가 있었대요. 전 그것도 모르고 미친 듯이 연습한 거죠. 그 사이에 뼈는 저절로 붙어버렸고요."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운 이들과 달리 20대가 돼서야 나, 발레를 접하게 된 그에게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하루는 다른 사람의 2~3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연습에 매달렸다.

1988년, 그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중앙대 무용학과에 들어갔다.

"학원에 다닐 때 중학생, 고등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받아야 했어요. 그날 배운 건 그날 소화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 다음 번에는 뭘 시키시겠구나 감이 오더라고요."

피나는 노력으로 테크닉이 좋아졌다 싶었더니, 그 다음엔 유연성이 문제가 됐다. 겨우 테크닉과 유연성, '두 마리 토끼'를 잡고 나니, 이번에는 몸의 라인(선)이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것 아닌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라인에 신경을 쓰다 보니, 나중엔 또 테크닉이 모자라고. 거기다 표현력이나 예술적 감각까지 보태야 했죠."
원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였다는 발레리노 이원국 씨. 그러나 춤을 출 때면 표정부터 달라진다. 그는 매일 서울 노원문화예술회관 연습실로 출근, 이원국발레단 단원들과 호흡을 맞춘다. 박희만 기자 phman@

사람들은 그를 '한국 발레리노의 교과서'라고 부른다. 모든 동작에 완벽을 기하기 때문이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그는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저에게는 휴일이 없어요. 요즘도 전 매일 연습실에 나가요. 단원들이 쉴 때도 혼자 연습해요. 남들은 미쳤다고 하지요. 하지만 저는 완벽에 대한 갈망, 그 끈을 놓을 수가 없어요. 자면서도 말이죠. 어떤 날은 꿈 속에서 힘을 하나도 안 들이고 10번 이상 돌아요. 그때의 쾌감이란…. 어떨 땐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나 좌절을 맛볼 때도 있어요."

어느 발레리나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혼을 그린 영화 '블랙 스완'을 기억하는가? 아, 나는 이 사람 이원국이 가끔 소름끼치도록 무서울 때가 있다.

은퇴 후 발레단 직접 창단
춤추랴 안무하랴 경영하랴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
발레는 일이자 취미이자 연인
몸이 허락하는 한 무대 설 것

발끝으로 살아가는 인생
그의 도전에 마침표는 없다

# 최고령, 그러나 핵폭탄 같은 열정

발레리노의 발.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을 상상하며 촬영을 부탁했는데, 남자 발 치고는 오히려 예쁜 편이라 놀랐다. 박희만 기자
국내 '1세대 발레 스타'인 그는 해외 유명 발레리노의 비디오와 책, 사진을 보며 독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설적인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영화 '백야'의 주인공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스승 삼아 화려한 테크닉을 몸에 익혔다.

"전설적인 발레리노 누레예프는 죽을 때까지 춤을 췄어요. 50대까지도 무용수로 활동했죠. 저도 몸이 허락하는 한 마음속 예술의 샘이 마르는 그날까지 무대에 서고 싶어요."

그는 1992년 대학교 4학년 때, 국립발레단 초청 객원 무용수로 모차르트 '레퀴엠'의 주역을 맡아 일찌감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93년 유니버설발레단을 시작으로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루마니아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했다. 그동안 1천 회 넘게 무대에 섰다.

"2년 전에 어느 증권사 광고를 찍은 적이 있어요. 안면도 모래밭에서 춤추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1995년, 1996년에 루마니아에서 활동하던 때가 생각났어요. 실제로 매일 저녁 해변에서 점프 연습을 했거든요. 모래에선 뛰어오를 때 탄력을 받을 수 없어서 힘을 키우는 훈련을 하기에 좋아요."

나중에는 2㎏짜리 모래주머니를 양쪽 발목에 달고 뛰는 연습도 했다. 모래주머니가 몸처럼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 다리에 묶은 채 잠들기도 했다. 그렇게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 그는 마침내 최정상의 자리에 섰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그는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했다. 수석단원과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지난 2004년 은퇴한 뒤로는 '이원국 발레단'을 창단해 경영하랴, 춤추랴, 안무하랴, 오히려 더 바빠졌다. 하지만 요즘도 단원들과 하루 7~8시간씩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발레리노의 정년을 보통 35~40세라고 하는데, 그는 아직도 무대에 선다. 어느새 국내 최고령 발레리노가 된 그.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그가 내게 보여준 열정은 변함이 없다.

"발레는 내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루 종일 연습실에 있으니 별다른 취미 생활을 할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 발레가 일이기도 하고 취미이기도 하고. 또 친구이기도 하고 연인이기도 하죠."

그는 아직도 180㎝에 78㎏의 몸매, 그리고 복근을 유지하고 있다. 나, 발레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여전히 불태우고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그가 나를 떠나 다른 사람들처럼 배 나온 중년 아저씨가 된다면 슬플 것 같다.

"발레를 하면서 외모에 대한 열등감도 사라졌어요. 예전에는 거울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자신감이 생겼어요. 친한 친구 중에 성형외과 의사가 있는데 제가 그런다니까요. 나는 손댈 데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하하."

그에게는 핵폭탄급 무기(?)도 하나 있다. 동영상 전문 사이트 유튜브에서 '이원국&핵폭탄'을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다.

"제가 개발한 세계 유일의 발레 동작이에요. 역으로 2회전을 하는 거죠. 주변에선 이 동작을 '핵폭탄'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알고 보면 발레는 아주 과학적이에요. 어느 TV 프로그램 실험에 따르면 발레리노가 점프할 때 발끝이 지면을 치는 힘은 코끼리 무게의 3배 정도라고 하더군요."
이원국 씨가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스파르타쿠스` 공연 모습. 3시간가량 춤을 추고 나면 몸무게가 4㎏이나 줄어들 정도로 대작이다. 이원국발레단 제공

# 기차역에서의 프러포즈

그는 요즘 나, 발레를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란다나? 나를 위해서라면 TV 출연도, 길거리 공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깊은 애정에 감사한 마음이지만, 때론 그가 안쓰러울 때도 있다.

지난 2008년 시작된 국내 최초 대학로 소극장 상설 발레 '이원국의 발레 이야기' 공연 때 일이다. 한 번은 관객이 두 명밖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지인 한 명, 그 지인이 데려온 동료 한 명이었다.

"지인이 미안하니까 그냥 오늘은 공연하지 말고 소주나 마시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도 공연을 했어요. 발레 단원은 10명인데 관객은 달랑 2명이었죠. 요즘은 안 그래요. 지난 주엔 관객이 50명 들었어요. 날이 좋을 땐 100명 가까이도 옵니다. 90% 이상이 유료 관객이고요."

대학로 상설 발레는 젊은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그가 기획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의 상상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연말이면 인기가 치솟는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 태권도를 접목시키는가 하면, 민요 '옹헤야'에 맞춰 발레 공연을 하기도 한다.

"발레는 비싸고 어려울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바꾸고 싶어요. 그래서 지난해에는 SBS TV '스타킹'에 출연해 '옹헤야'와 '생활발레'를 선보이기도 했죠."

콧대 높아 뵈는 나, 발레에 대한 편견을 바꾸겠다며 발로 뛰는 그는 지난해 5월 서울역 공연으로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이 공연을 통한 홍보로 그는 발레 '돈키호테' 공연 제작비 500만 원 모금에 성공, 국내 첫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특정 프로젝트에 다수의 사람들이 소액을 후원하는 자금 조달 방식)' 달성자가 됐다.

"예전의 저처럼 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있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꿈을 찾는 걸 포기하지 말라고. 제가 일생을 두고 사랑할 '발레'라는 꿈을 찾은 것처럼. 그리고 잊지 마세요. 이 세상에는 당신이 잠든 그 순간에도 당신을 사랑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제게 맞는 길을 찾아 주려 애쓰셨던 저의 어머니처럼 말이죠."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약력


1967년 부산 출생

1988년 중앙대 무용학과 입학

1993~1996년 유니버설발레단, 러시아 키로프발레단,루마니아 국립발레단 활동

1997~2004년 국립발레단 수석단원, 지도위원 역임

2004년~ 이원국 발레단 운영

2008년~ 대학로 소극장 상설 발레 '이원국의 발레 이야기' 공연

2009년~ 노원문화예술회관 상주 단체

2011년 국내 최초 크라우드 펀딩 달성

부산일보 | 12면 | 입력시간: 2012-01-28 [1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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