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유원(樂遊原)에 기회(期會)하다
양승상이 부중(府中)에 각각 거처를 정할새, 경복당(景福堂)에 대부인이 살고, 연희당(延禧堂)에는 좌부인 영양공주가 머무르고 봉소궁(鳳韶宮)에는 우부인 난양공주가 머무르고, 응향각(凝香閣)과 청화루(淸和樓)는 승상이 거처하며 때때로 잔치를 베풀고, 연현당(延賢堂)은 승상이 손을 응접하는 집이요. 심홍원(尋紅院)은 진숙인 채봉의 방이요. 영춘각(迎春閣)은 가유인 춘운의 방이요, 상화루(賞花樓)와 망월루(望月樓)에는 계섬월과 적경홍이 각각 한 누씩 차지하고서 궁중기악(宮中妓樂) 팔십 인이 다 천하에 자색이 드러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인데, 이를 동·서로 나누어 동부 사십 인은 계량이 주장하고 서부 사십 인은 적량이 맡아 가무를 가르치며 풍악을 공부시키며 매월 청화루에 모여서 동 · 서 양부의 재주를 비교하니, 승상이 대부인을 모시고 두 공주를 거느리며 누각에서 관상할새, 이기는 자는 석 잔 술로써 상을 주고 머리에다 꽃 한 가지씩을 꽂아서 영광을 빛내고, 지는 자에게는 한 잔 냉수를 벌로 먹이고 먹 붓으로 이마에 한 점을 찍어서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하는고로, 모든 기생들의 재주가 날로 점점 성숙하니 위공부(魏公府)와 월왕궁(越王宮)의 여악(女樂)이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어, 비록 이원(梨園)의 악공이라 할지라도 이 두 악공을 따르지 못하겠더라.
하루는 두 공주가 모든 낭자들과 대부인을 모셨는데 승상이 글 한 봉을 가지고 들어와 난양공주에게 내주며 이르기를,
“이는 곧 월왕 전하의 글월이외다.”
공주가 펴보니 씌었으되,
<화창한 봄날 승상궁 댁내는 골 만복하시나이까? 지난 적에는 나라에 일이 많고 공사(公事)에 매어 낙유원(樂遊原)에 말을 머무르게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곤명지(昆明池) 머리에 다시 배를 대는 즐거움이 없으니, 마침내 가무를 즐기던 잡풀이 마당을 이룬지라 장 안에 노인네들이 매양 열성조(列聖朝)이 성덕으로 번화했던 옛일을 그리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자 있으니 이는 자못 태평한 기상이 아니외다.
이제 황제 폐하의 은덕과 사해(四海)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락하며 다시 개원(開元)과 천보(天寶)때와 같이 즐거운 일을 치르는 것이 곧이때요, 또 봄빛이 저물지 아니하고 날씨가 화창하여, 고운 꽃과 부드러운 버들이 능히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기쁘고 평안케하니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 구경이 또한 이때 있는지라. 승상과 더불어 낙유원 위에 모이어 혹은 사냥하는 것을 보며 풍악을 들어 태형한 기상을 돋우고자 하오니, 승상의 마음이 이에 있거든 곧 일자리를 정하여 회답을 주어 과인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시면 다행이로소이다.>
글월을 보고 난 공주가 승상께 여쭙기를,
“상공께서는 이 월왕의 뜻을 아시나이까?”
하니 승상이 대답하기를,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소유의 생각으로는 꽃놀이에 불과한 듯하니 실로 귀공자다운 풍류렷다!”
하니 공주가 다시 여쭙기를,
“상공께서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하시나이다. 월왕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바는 오직 미녀와 풍악이오라, 그 궁녀 중 절세의 미녀가 한 둘이 아니었는데, 요즈음의 새로운 청첩(寵妾)이 무창(武昌)의 명기로 꼽히는 만옥연(萬玉燕)이니 월왕궁의 미인들이 옥연을 한 번 보자마자 스스로 무염(無鹽:제나라 선제의 왕비, 지극히 못생긴 얼굴)과 마모(못 생긴 왕비의 대명사)같이 아리땁지 못한 여자로 자처한다 하오니 옥연의 자색과 용모가 세상에 견줄 바 없음을 가히 짐작하옵는데, 오라버니가 우리 궁전에 미인이많다는 말을 듣고, 아마도 왕개(王愷: 전나라의 대장군)와 석숭(石崇:진나라의 큰부자)의 비교함을 본받자 함이로소이다.”
하니 승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나는 범연히 보았거늘 과연 공주가 먼저 월왕의 뜻을 알았소이다.”
영양공주가 이제 곁들여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한때의 놀이이기는 하되, 남에게 져서는 않될 것이렸다.” 학고,
경홍과 섬월에게 눈짓하여 일러두되,
“군사를 비록 십 년 기르나 쓰기는 하루 아침에 있는 법이라, 어떤 놀이의 승부는 오직 두 교사의 수중에 달렸으니 모름지기 힘쓰기를 바라노라.”
섬월이 대답하기를,
“전첩은 아무래도 대적할 재주가 없음을 염려하나이다. 월왕궁의 풍악은 천 명의 악공이 일제히 나서고, 무장의 옥연은 구주에 그 이름 떨쳤는데, 월왕 전하께서 이미 이렇듯 많은 풍악과 미인을 두셨으니 이는 천하에 대적할 자 없겠나이다. 첩들은 이를테면 재주가 적은 군사로서 기율(紀律)도 밝지 못하고 기치(旗幟)도 제대로 갖추지 못함과 같사오니 염려되어 싸우기에 앞서 갑자기 도망칠 생각이 먼저 나지나 않을까 하오니, 첩들의 가소로움은 족히 괘념할 것이 없사오나 다못 승상부의 수치가 되올까 두렵나이다.”
승상이 말하되,
“내 계량과 더불어 처음으로 낙양(洛陽)에서 만났을 적에 청루에 절세 미녀가 셋이 있다고 일컫는데, 옥연의 이름이 그 가운데 있더니 필시 이 사람이렸다. 그러나 청루의 절색(絶色)이 세 사람 뿐일진데, 내 이제 항우(項羽)의 한가지로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을 얻었으니 어찌 범증(范增)을 두려워 하리오?”
섬월이 말하기를,
“월왕궁의 미녀들은 팔공산(八公山)의 초목이 아닌 것이 없다.(적병을 치려다가 팔공산의 초목이 모두 군병같이 보여 지례 겁을 먹다)하리 만큼 저들의 겉치장이 화려한지라 군사들이 지례 겁을 내어 다만 달아날 뿐일 터이니, 우리가 어찌 감히 대적할 수 있사오리까? 바라옵건데 공주마마게서는 계책을 적랑에게 물어보소서. 첩은 담약하여 이 말씀을 들으매 문득 목이 잠겨 제대ㅑ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겠나이다.”
경홍이 분연히 나무라기를,
“계낭자의 그 말이 참말이뇨? 우리 두 사람이 관동(關東) 칠십여 고을을 돌아다니며, 이름을 홀로 드날리던 기약이 어찌 가히 옥연에[게 첫 자리를 물려주리오? 세상에 나라를 쓰러트리던 한궁부인(漢宮夫人)과,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던 초대선녀(楚臺神女)가 있으면 적이 부끄러운 마음이 서리려니와, 그렇지 아니 하고서야 저 옥연 따위를 어찌 족히 꺼리리오?”
섬월이 다시 말하기를,
“적랑의 말이 어찌 그리 용이하뇨? 우리들이 일찍이 관동에 있을 때는 크면 태수(太守)와 방백(方伯)이요, 적으면 호기로운 선비와 협기(俠氣) 있는 풍유랑(風流郞)의 잔치뿐으로 강한 대적을 만나지 못하였기로 남에게 첫째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지만, 이제 월왕 전하는 대내(大內)의 귀하신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나신지라 안목이 매우 높고 평론함이 날카로우시니, 마치 적랑의 말은 주먹들을 보고 태산(泰山)을 업신 여긴다는 옛말과도 같도다. 하물며 옥연은 지략(智略)이 월왕 궁중에서도 장자방(張子房)이라, 장막 가운데 앉아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거두는 책략이 있거늘, 이제 조괄(趙括: 큰소리만 치다가 진나라 군사에게 잡혀 죽은 장수)과 같이 큰소리를 치니 아무래도 패배를 당하리로다.”
하고, 이어서 승상에게 아뢰기를,
“적랑이 우쭐거리는 마음이 있사오니 첩이 그 흠처를 말씀드리겠나이다. 적랑이 처음으로 상공을 따를 적에 연왕(燕王)의 천리마를 도적질한 하북 소년이라 자칭하고, 상공을 한단(邯鄲)길가에서 속였으니 그 용모가 곱고 태도가 유미한들 상공께서 남자로 속았사오리까? 또한 적랑이 상공을 처음으로 모시던 날 밤에 어둠을 타 첩의 몸을 대신하였으니 이는 바로 남의 힘으로 소원을 이루었음이거늘, 이제 첩을 대하여 이러한 자랑을 내놓으니 우습지 않겠나이까?”
경홍이 웃으며 이에 응답하기를,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란 측정치 못하겠나이다. 천첩이 상공을 따르기 전에는 하늘 위에 항아(姮娥)같이 칭찬을 하더니, 이제와서는 괄시하니 상공의 은총을 홀로 차지하고자 하여 질투하는 기미가 있나이다.”
섬월과 모든 낭자들이 다 소리내어 웃기에 영양공주가 이르되,
“적랑의 가냘품이 저 같거늘 남자로 보았음은 승상께서 한쌍 눈동자가 아마도 총명치 못한 연고요, 적랑의 아름다움이 이로 말미암아 떨어지지는 아니하리라. 그러나 계랑의 말하는 바 과연 옳도다. 여자가 남복으로써 사람을 속이는 자는 필시 여자로서의 고운 태도가 없음이요, 또 남자가 여복으로서 사람을 속이는 자는 필시 장부로서의 기골(氣骨)이 없음이니, 다 그 부족한 곳을 따라서 그 거짓말을 꾸밈이로다.”
승상이 소리내어 웃으며 이르기를,
“공주의 말씀이 과연 옳도다! 한쌍의 눈동자가 청명치 못하여 능히 거문고의 곡조를 분별하되 여복을 입은 남자는 분별치 못하였으니 이는, 바로 귀는 가졌으되 눈은 없음이라, 면상의 일곱구멍 중에 하나가 없음인즉 어찌 가히 온전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으리요? 공주는 비록 소유의 잔졸함을 비웃으나 기린각(麒麟閣 )에 양원수의 화상을 보는자는 다 외모의 웅장함과 위풍이 당당함을 칭찬하더이다.”
모인 사람들이 다시 한바탕 크게 웃으니 섬월이 말하되,
“바햐흐로 강한 대적을 상대로 진을 칠 터이온즉, 어찌 그다지도 한가지로 희롱의 말씀만 할 수 있겠나이까? 전혀 우리 두 사람만 믿기는 어렵사오니 역시 가유인(賈孺人)이 동행함이 어떠하오며, 월왕이 또한 모르는 분이 아니시니 진숙인(秦淑人)도 동행한들 무슨 거리낌이 있겠나이까?”
이에 진씨가 대답하기를,
“계랑 적랑 두 낭자가 만일 여자의 과거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내 마땅히 한 팔의 힘이라도 도우려하나, 가무(歌舞)하는 마당에서 첩을 어디다 쓰리요? 이는 이른바 시정 아치를 몰아가 싸우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성공치 못할가 두려울 따름이라.”
춘운이 또한 이르기를,
“첩의 한몸이 남에게 비웃을 받으며 재치없는 가무로 수치를 당할 뿐이라면 이러한 큰 놀이에 어찌 구경할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첩이 만일 따라가면 사람들이 분명 손가락질 하며 저는 대승상 위국공의 첩이요, 영양공주의 잉첩이라 하며 웃을 터이니, 이는 곧 상공께 비웃음을 끼치고 두 정실부인께 근심을 남김이니 춘운은 결단코 가지 않으리이다.”
영양공주가 이에 되묻기를,
“어찌하여 춘운이 가는 것으로써 상공께 비웃을 받으며 또 우리가 그대로 말미암아 근심이 있으리오?”
춘우이 대답하되,
“비단요를 널리 펼치고 구름 차일(遮日)을 높이 걷으면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양승상의 첩 가유인이 온다 하며 어깨를 부비고 발꿈치를 돋으며 구경하거늘, 마침내 걸음을 옮겨 자리에 오르면 이 몸은 국대강이에 더러운 얼굴이라,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 하는 말이 양승상이 등도자(登徒者 : 옛날 중국의 호색한)와 같은 호색하는 병이 있도다 하리니,이 어찌 상공께서 욕을 당하심이 아니며, 월왕 전하는 일찍이 누추한 물건을 보지 못하였기로 첩을 보시면 분명 구역질이 나서 미령하실 터이니 이 역시 마마께 근심이 아닐 수 있사오리까?”
난양공주가 나무라되,
“가씨의 겸사는 너무 심하렷다! 전자에는 사람으로 귀신이 되더니 이제는 서시(미인계로 바친 원나라 미녀)같은 미녀로써 무염(無鹽) 같은 추부(醜婦)가 되고자 하니 그 말을 아무래도 믿지 못하겠도다.”
하고, 이에 승상에게 물어보되,
“어느 날로 기약하셨나이까?”
승상이 대답하되,
“내일로 언약하였소이다.”
경홍과 섬월이 이에 이르러 말하기를,
“동·서 양부의 교방에 아직도 영을 내리지 못하였으니, 일이 이미 늦었나이다.”
이어 우드머리 기생을 불러 명을 내리되,
“내일 승상께서 월왕과 더불어 낙유원에 모이기로 언약하셨으니, 양부의 모든 기생들은 모름지기 새 단장으로 꾸미고서, 악기를 가지고 내일 일찍이 새벽에 승상을 모셔 따라가도록 하라.”
팔십 명의 기생이 일시에 명을 받고 얼굴 치장을 하며 눈썹을 그리고 악기를 잡아 풍류를 익히며 준비에 바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