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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Adam Grant는 “오리지널스Originals : 어떻게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가?”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탁월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발명왕으로 현대 산업 기술의 주역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Tomas Edison는 평생 1,093개나 되는 많은 특허들을 취득했지만 현재는 지극히 일부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론 물리학자로 과학계의 혁명을 이끌었던 그Einstein Albert는 무수히 많은 논문들을 발표했지만 상대성 이론을 제외하면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밤낮 없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수고한 것에 비해서 정작 알려지거나 현실 속에 반영되어서 실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적은 양에 불과합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그Philip Warren Anderson는 “양이 많으면 달라진다More is Different.”라고 주장했습니다. 액체 상태였던 물은 100도라는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하게 되면 수증기로 변합니다. 반드시 100도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끓이는 양적 증가가 전제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지극히 작은 변화라 할지라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만큼의 양이 채워져야 합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일만 시간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동차 한 대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기까지 무려 6만 시간이나 되는 엄청난 투자를 했다는 광고도 있습니다. 물리학의 양질전화量質轉化의 법칙에 따르면, 양이 축적되는 과정이 반복되면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시도 쉴 틈이 없는 바쁜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셨습니다.
이미 더 이상의 공급이나 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한 분이셨지만,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우고 또 채우셨습니다. 마침내 견디기 힘든 고난과 핍박 속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당신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으셨습니다. 사도Paul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을 위한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열정으로 무장한 그는 거듭난 즉시 영혼 구원의 현장에 투입될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으로 보내졌습니다. 삼년을 보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사도들 가운데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의심하며 경계했습니다. 여전히 죽이려는 사람들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을 위해서 일생을 불태우리라는 청운의 꿈을 품고 넘었었던 산Mt, Amanos을, 이제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서 넘어야했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구 하나 찾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웠습니다.
그렇게 16년을 채운 어느 날, 사전에 어떤 예고도 없이 바나바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이후, 목이 잘려 죽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질적인 성장을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을 거쳤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필요한 양을 채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릴 가능성이 높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변화를 위한 양을 충분히 채우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Elijah를 부르셨습니다. 악행을 채우고 있었던, 심판을 자초하고 있었던 왕에게 자신이 명령하기 전까지는 결단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지독한 가뭄이 이어질 것이라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결코 쉽지 않은 위험을 무릎 쓰고 당신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그에게 그릿 시냇가로 들어가서 지면에 비가 내릴 때까지 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이번에도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까마귀의 공궤供饋를 통해서 그를 먹이셨습니다. 선지자에게는 그야말로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혹독한 가뭄으로 시냇물이 마르자 이번에는 히브리인도 아닌 이방 여인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고 자식과 함께 죽기로 작정한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여인에게 명령하여 음식을 주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특히, “음식을 주게כַלְכְּלֶֽךָ (카르케레카)”는 단순히 음식을 제공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 정성을 다해서 보살펴 준다는 의미입니다.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는 유대인이 자신의 몸을 의지하여 맡기고 또 보살핌까지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편, 혹독한 가뭄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랐습니다. 여인은 양식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난 다음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생떼 같은 아들과 함께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인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볼 때, 선지자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이방 여인에게 자신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이미 미물에 불과한 까마귀를 통해서 자신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집에 기름과 밀가루가 끊어지지 않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혹독한 가뭄이 무색할 정도로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여인이 선지자를 섬기며 돌볼 수 있는 환경을 넉넉하게 마련해 주셨습니다. 거기다 선지자를 통해 죽어서 호흡이 완전히 끊어졌던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까지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들은 하나같이 선지자를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책임지고 돌봐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분히 축적되자 곧 필요한 양量이 공급되자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질적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사납게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왕 앞에 설 수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양질전화量質轉化가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이 무엇이든지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함께 동행 하며 책임지고 보호해 주십니다. 물론, 온전히 순종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여러 가지 경우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으로 존재가 아주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숙한 당신의 사람으로 거듭난 선지자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왕에게 나아가서 자신을 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보이라רָאָה(라아)”를 직역하면 “가서 만나라”입니다.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 등의 뜻을 포함합니다.
앞서 선행된 어떤 예시나 예견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선지자는 지독한 가뭄을 예언했습니다. 예언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졌습니다. 풍요로움과 다산을 보장해 준다는 바알과 아세라 숭배의 중심지로 전락해버린 사마리아는 물론 북 왕국 이스라엘 전체에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기근이 덮쳤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어리석으며 허무한 일인지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이제 가뭄이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던 왕과 백성에게 알려야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여호와가 가뭄은 물론 온갖 종류의 자연 현상을 친히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여호와만 유일한 하나님 되심을 증명해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풀어 놓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선지자를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왕상18:17b)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를 북 왕국 이스라엘과 민족 전체에게 해악害惡을 끼치는 역적逆賊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이는 선지자가 아니라 왕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지극히 왜곡된 논리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바알과 아세라 곧 우상 숭배를 장려하는 지극히 불신앙적인 정책을 몰아붙이고 있었던 왕에 대한 선지자의 평소 행동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국정을 어지럽히고 훼방하는 것으로 평가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또 북 왕국 이스라엘을 스스로는 돌이키기 어려운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던 혹독한 가뭄은 선지자가 저주를 선포한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왕에게 있어서 선지자는 어느 면으로 보든지 불길不吉하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우상숭배 놀이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어 있었던 왕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랬습니다.
사실 왕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제대로 의식할 수만 있었다면,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의 거룩한 척도에 비쳐 볼 수만 있었다면 분명 진계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징계를 당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선택을 수시로 반복했습니다. 거기다가 북 왕국 이스라엘 왕조를 열었던 왕Jeroboam은 백성들이 제사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때마다 불안했습니다. 그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라고 주장했습니다. 굳이 예루살렘까지 내려가지 말고 금송아지 앞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선왕Omri은 더욱 가증한 우상 숭배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현재는 한걸음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도입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비난은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불신앙의 죄를 채워가고 있었던,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가뭄을 당할 수밖에 없는 불신앙적인 정책만 고집스럽게 펼치고 있었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조 전체가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왕은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하는 가증스러운 죄를 채워가고 있던 죄 된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즉”(왕상18:19a)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지금 서로를 가뭄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비난하고 있는데 이제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하자!”라는 대단히 도전적인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선지자는 자신과 국가 정책으로 양성하고 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능력 대결을 제안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특별한 장소인 동시에 바알과 아세라에게 성소로 바쳐진 갈멜 산을 능력 대결을 벌일 장소로 특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자손” 곧 이스라엘 각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바알과 아세라 숭배라는 가증스러운 죄에 깊숙이 빠져 있었던 불신앙적인 집단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을 향해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곧 창조주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18:21a)라고 꾸짖었습니다. “어느 때까지 (여호와 신앙과 바알과 아세라 숭배) 두 의견으로 나뉘어 (병신처럼) 절뚝거리며 살려고 하느냐?”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집단이 가지고 있었던 여호와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지적이 아닙니다. 여호와와 바알과 아세라 숭배로 나눠져 있는 분열상에 대한 정확한 지적입니다. 동시에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해소解消하라는 촉구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집단은 당장 여호와 한 분만 섬기겠다고 대답했던 여호수아의 때와는 달랐습니다. 묵묵부답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인정사정없이 내팽개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왕실의 강압적인 우상 숭배 정책에 완전히 짓눌려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죽음의 자리로 던져질 수도 있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참된 이상 곧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비겁했습니다. 선지자는 능력 대결의 방법으로 불에 태워서 드리는 희생번제를 제시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에서 일반적으로 드려지고 있었던 제사 형태였습니다. 또 선지자는 각자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되,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허구가 아니라고 한다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여 보라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완벽한 인격이신 하나님시라면 몰라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만들어낸, 만들어진 사물에 불과한 바알과 아세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알과 아세라는 불로써 응답하기는커녕 어떤 증거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85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동튼 직후부터 오전 내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심지어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부르짖어봤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끝내 침묵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을 따르는 우상숭배자들에게 씻기 어려운 굴욕을 안겨주었습니다. 허무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선지자가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왕상18:27b)라고 조롱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으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피곤치 않으십니다. 곤비치 않으십니다.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십니다. 어디에나 계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드러내십니다.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가 저녁 소제를 드릴 때 곧 오후 세시까지도 아무런 반응도 없고, 아무런 대답도 없고, 아무런 기척도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각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가까이 불렀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 수대로, 열두 개의 돌을 모았습니다.
이 돌들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핍박과 탄압이 있었을 때 무너진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었던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아올렸습니다. 화제火祭로 드리는 번제燔祭의 예를 따라서 희생제물을 잡았습니다. 제단위에 펼쳐놓은 장작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제단 주변에는 깊은 고랑을 팠습니다. 물을 흘러넘치도록 충분히 부었습니다. 세 번 반복했습니다. 여호와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면 결코 제물을 태울 수 없을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 지도자들이 시비를 걸어올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여호와여! 응답하여 주십시오. 응답하여 주십시오. 이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당신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분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왕상18:37)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기도와 비교할 때 서운할 정도로 짧은 그러나 진실하고, 순전하며, 정열과 함께 뚝심까지 담겨 있는 기도를 여호와께 올려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듣는 분이 아니십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식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진 아버지처럼 지극히 간단한 말 한 마디는 물론 은밀하게 내놓은 탄식까지도 결코 놓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는 분이십니다. 가장 적당한 때가 도래하면 응답해 주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불신앙의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분이십니다. 깨진 당신과의 관계를 지극히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는 분이십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지자가 기도를 채 끝내기도 전에 하늘로부터 여호와의 불이 내렸습니다.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은 물론 흙까지도 태워버렸습니다. 도랑 안에 찰랑거리고 있었던 물까지도 완전히 말려버렸습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만 전심全心을 다해 섬겨야할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선지자가 당신의 종이며, 오직 당신의 말씀대로만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선지자가 기도한 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경악驚愕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혼비백산했습니다. 내동댕이쳐지기라도 하듯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왕상18:39b)라고 외쳤습니다. 자신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서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현혹하였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였습니다.
바로 그때, 선지자는 삼년반째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던 가뭄을 단 번에 끝내버릴 수 있는, 이제까지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자연현상을 홀로 지배하시는 여호와만 보여줄 수 있는 큰 비 소리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땅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습니다. 약속한 비를 내려주시도록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어떤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기도했습니다. 어떤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기도했을 때도, 네 번째 기도했을 때도, 다섯 번째 기도했을 때도, 여섯 번째 기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왕상18:43b)라는 증거에 따르면, 일곱 번까지 반복했습니다. “일곱”은 하나님의 수입니다. 완전수입니다. 본 절에서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정도로 충분히 채워졌다는, 가뭄을 끝낼 큰 비가 내릴 만큼 충분히 채워졌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의 손바닥만 한 구름이 보이더니 단번에 가뭄을 끝낼 폭우暴雨로 바뀌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가 이스라엘과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참으로 위하는 자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일어섬도 넘어짐도 필요한 양이 채워질 때 나타납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천재의 놀라운 업적 뒤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실패가 있었습니다. 모차르트는 35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600여 곡을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은 650곡 만들었습니다. 바흐는 1,000곡 이상을 만들었습니다. 보통 작곡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런던 교향악단이 선정한 세계 50대 고전 음악의 목록에는 모차르트의 작품은 여섯 곡, 베토벤의 작품은 다섯 곡, 바흐의 작품은 세곡 정도밖에 올라와 있지 않았습니다.
천재적인 작곡가들도 만드는 곡마다 족족 명곡은 아니었습니다. 압도적으로 많은 시도를 통해서 명곡을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분야에서든 압도적인 성과를 거둔 사람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또 하나는 실패해도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시도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시도의 절대량이 존재합니다.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성령 안에서 무시로 (반복해서) 기도하라.”(엡6:18)라고 외쳤습니다.
“항상 기도에 힘쓰라.”(롬12:1)라고 외쳤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끊임없이 입술을 움직여서 기도하라기보다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든 하나님께 나아갈 마음을 준비하고 갖추는 등 기도하는 자세로 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눅18:1)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또 세밀하게 인도해주시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질전화의 법칙은 무수히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반복해서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나 이루어지는 법칙입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 속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문제들 앞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한 분만 더욱 더욱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응답받기 위해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시도의 절대량을 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밀하게 인도하시고 또 필요까지도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