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 길 떠나다>
짐 싸 놓고 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집이란 잠시 머물면서 쉬다가, 또 다른 떠남을 준비를 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비워 두는 장소이다. 집안에 가구는 두 종류로 나눠진다.
*떠날 때 두고 가는 것 : 불단과 탱화, 침구와 책장, 찬장과 식기, 냉장고와 에어컨.
*짐 꾸려 갖고 가는 것 : 가사와 세면도구, 내의와 겉옷, 필기구와 컴퓨터, 안경과 약, 모자와 신발.
발을 띠기도 전에 짐이 먼저 앞장서 걸어간다. 떠날 것을 너무 오래 미루면, 머무는 것이 지루해진다. 삶이 지루해지면 떠나야 한다. 삶은 떠남이며 머물지 않음이다. 삶은 새로워지는 것이다.
담양을 지나며 추월산을 바라보다 백양사에 도착. 오후 2시. 방 청소하고 차 한잔하며 도량에 좌정하다.
1.백양사 고불선원에 짐을 내리고 정리하며 읊다.
送客空庭鳥朗吟, 송객공정조낭음
兀然白鶴溪流潺; 올연백학계류잔
雙四年前會西翁, 쌍사년전회서옹
現今生死無位人. 현금생사무위인
손님 보낸 빈 도량에 새 울음소리 떨어지고
백학봉은 우뚝한데 골짝 물소리 잔잔히 들려와
44년전 서옹선사를 만난 뜻은 무엇인가?
현금 생사 이대로 無位眞人인 것을
*원담은 1979년 겨울 서울 상도동 백운암에서 서옹선사를 처음 뵙고 참선을 지도받았다. 그리고 1995년 백양사 다시 만나 고불선원(큰절)과 운문선원(운문암)에서 모시고 살았다.
2.포은 정몽주의 시 그리고 서옹선사의 차운
백양사 입구에 쌍계루가 서 있는데, 누각 앞에 있는 연못에는 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가득 담겨 그 수면에 백학봉과 푸른 숲을 그림처럼 비쳐주고 있다.
雙溪樓 쌍계루
圃隱 鄭夢周(1337~1392) 포은 정몽주
求詩今見白巖僧, 구시금현백암승
把筆沈吟傀不能; 파필침음괴불능
淸叟起樓名始重, 청수기루명시중
牧翁作記價還增; 목옹작기가환증
烟光縹缈暮山紫, 연광표묘모산자
月影徘徊秋水澄; 월영배회추수징
久向人間煩熱惱, 구향인간번열뇌
拂衣何日共君登. 불의하일공군등
이제 시를 써 달라는 백양사(=백암사)스님을 만나니
붓을 잡고 생각에 잠겨도 글이 나오지 않아 부끄럽구나
청수 스님이 누각을 세우니(1337년) 그 이름에 더욱 무게 실리고
목은 (이색)선생이 기문을 지으니 그 가치가 더해졌구나
그윽한 놀 빛에 저문 산색은 불그스레 하고
달빛이 배회하는 가을 물은 맑기도 하다
오랫동안 세상 번뇌에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볼까나
3.서옹선사(1912~2003)가 정몽주의 시 ‘쌍계루’의 운을 따서 짓다
次雙溪樓韻 차운 쌍계루
尨眉緇衲一癡僧, 방미치납일치승
依杖隨溪步自能; 의장수계보자능
看到雲烟醒又醉, 간도운연성우취
翫弄神變錯還增; 완롱신변착환증
金風暗換楓初紫, 금풍암환풍초자
秋月方明水愈澄; 추월방명수유징
凡聖都忘閒吹笛, 범성도망한취적
倒騎須彌任運登. 도기수미임운등
戊辰 仲秋節 西翁 題 무진 중추절 서옹 제
素菴 玄中和 謹書 소암 현중화 근서
門徒 謹竪 문도 근수
포은 정몽주의 시 ‘쌍계루’의 운을 따서 짓다
하얀 눈썹에 승복 걸친 어리석은 한 중이
지팡이 짚고 계곡 따라 걷노라니
저녁놀 빛 사라질 때까지 보며 깨어났다 다시 취하고
신통변화를 갖고 놀다 착각에 다시 착각한다
가을 바람 살살 불어오니 단풍이 붉어지고
가을 달은 휘영청한데 물은 더욱 맑아라
중생과 부처 모두 잊어버리고 한가로이 피리를 불며
수미산을 거꾸로 타고 마음대로 노닌다
무진년(1988년) 중추절 서옹 짓다(77세)
소암 현중화(1907~1997) 삼가 쓰다(82세)
문도가 비를 세우다
첫댓글 *현금 생사 이대로 無位眞人인 것을*
이 부분을 읽고, 울컥하는 감정이 일렁입니다.
덕분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