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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5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성경본문 : 예레미야애가 1: 1-5
1.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4.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5.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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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최영기 목사
독일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말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선언한 곳에 세워진 동상을 보았습니다. 말틴 루터 상이 가운데에 있고 그 주위에 종교 개혁을 도왔던 역사책에서 읽었던 인물들의 동상이 둘러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극도로 타락한 암흑시대에 시원한 빛줄기처럼 등장하여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말틴 루터를 회상하면 가슴이 감동으로 젖어왔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음이 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위대한 신앙 선배와 신앙의 유산을 까먹고 세속적으로 되어버리고 이와 더불어 2류 국가로 전락해가고 있는 독일이 기억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기독교가 완전히 내용을 상실하고 문화 종교가 되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독일은 아직 기독교 국가입니다. 목사는 국가 공무원으로 간주되고 정부에서 2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생활비를 지급합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구는 10%가 안 됩니다. 신앙적으로 높은 곳에 있다가 낮은 곳으로 추락한 모습이 슬픔을 심어주었습니다.
애가에서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한 슬픔을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가라는 말은 슬플 ‘哀’자에 노래 ‘歌’ 자가 합쳐서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슬픔이 더 큰 이유는 단순히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가 망했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곳이 폐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과 비교하여볼 때에 현재의 황폐는 더 큰 아픔과 슬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1:1).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낮은 자리가 더 처참한 것입니다.
칭찬을 들을 만큼 우리가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는 모범 교회라고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섬김의 본이 되는 교인이라고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만일 우리 교회가 무너지고 우리 성도가 실족하여 낮은 자리에 떨어지면 처참함이 보통 교회나 성도의 경우보다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가는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줍니다.
Ⅰ. 파멸의 원인은 죄이다.
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던 조직과 개인이 낮은 자리로 떨어져서 수치를 당하게 됩니까? 죄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도 나라의 황폐한 모습을 보면서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한탄을 합니다(1:8). 예레미야의 마음이 더욱 더 아픈 것은 죄를 지으면 멸망이 온다고 계속해서 경고했다는 것입니다(2:17). 이러함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선민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는데 설마 망하도록 두시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선민이라도 멸망케 하시고 거룩한 도성이라도 파괴시키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파괴 되는 것을 허락하신 정도가 아니라 그 일에 앞장 서셨습니다(2:2).
우리들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얼마나 죄를 염오하시는지를 잘 알아야합니다. 이러한 염오감을 이해 못하고 선민이니까, 거룩한 도성이니까,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런 비참함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선민이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는 사실을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보호막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잘못된 보호막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이 순간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면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고(요 1:12)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영생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5:12). 그런데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벌이는 술자리에 다 참석하여 같이 취하고, 2차 가서 술집 여자하고 자는 것에도 동참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천국 가는 패스 정도로 생각하고 그러한 패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삶을 살든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죄를 간과하는 분이 아닙니다(출 34:6-7). 죄 지은 자는 반드시 벌하십니다. 죄를 짓자마자 벌이 내리지 않는 것은 회개하기를 바라는 하나님께서 참으시기 때문이지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쌓으면 언제인가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 것이고 그 때의 수치는 세상 사람들과의 수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Ⅱ. 자신을 성찰하여 죄를 발견하고 회개한다.
그러므로 계속 고난을 당하고 역경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죗값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일어나는 역경이 모두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이 우리를 훈련시키고 축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일 수가 있습니다(히 12:6). 그러나 많은 경우에 당하는 역경이 자신의 죄 때문인 수가 많습니다. 성전의 전인 몸을 소홀히 관리해서 질병에 걸립니다. 교통 법규를 무시하고 난폭 운전을 하는 습관이 교통사고를 가져옵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은 결과로 가정 파탄이 옵니다. 자녀들을 주님의 뜻대로 양육하지 않은 탓에 자녀들이 불량아가 됩니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일을 하지 않고 과욕을 부리다가 사업이 망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역경을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단정 짓기 전에 자신이 죄 가운데 있지 않은가를 살펴야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당장 벌하지를 않으십니다. 계속 경고하시고 뉘우치기를 바라시다가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죄를 찾아내어야합니다(3:39-40). 자신이 죄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오래 동안 참아주시니까 죄에 익숙해져서 깊은 성찰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죄에 관하여 자신이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요일 1:8).
경건의 삶을 도입한 가정 교회를 하는 교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경건의 삶을 수강할 때에는 자신이 변화 받기 원하는 한 분야를 과제로 놓고 자신과 반원이 기도해서 교정합니다. 이것을 영적 과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자신의 영적 과제를 “너무 솔직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내더랍니다. 그런데 이분은 목사님의 조그마한 말 실수도 그냥 넘기지 않고 반드시 글로 적어서 주보함에 넣고 이웃에 대해서도 너무 비판적이라 친구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높은 직분을 가진 분인데 가정 교회를 시작하면서 목자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에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분이라고 합니다. 이런 분이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자신은 친구가 하나도 없는 외로운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솔직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관해서는 자신이 자신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자신의 죄에 관해서 물어야합니다. 이웃은 죄를 즉시 지적해줄 것입니다. 우리는 비난을 받을 때에 억울하다거나 오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귀를 기우려야합니다. 한 사람이 비난하면 무시해도 됩니다. 두 사람이 비난하면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세 사람이 비난하면 믿어야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보지 못하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역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Ⅲ. 회개하면 회복이 보장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죄의 결과로 자신의 삶이 아무리 망가졌다할지라도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복주기를 원하는 본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3:33). 또 그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3:23-24).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 자는 벌하십니다(출 34:6-7). 이 사실을 예레미야는 2:17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죄를 고백하면 반드시 용서하여 주십니다(요일 1:9). 그리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회복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죄의 용서는 즉각적이지만 죄의 결과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박힌 못을 뺀다 해도 그 구멍이 메워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3:21-22).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죄를 지었고 죄로 인하여 인생과 가정과 사업이 망가졌다할지라도 회복을 기대하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얼른 회복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직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셔서 그런가 의심이 들지 모르지만 그런 의심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시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신다고 했습니다. 다만 회복에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또 과거에 지는 죄가 다시 기억나고 양심을 괴롭혀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셨나 생각하고 같은 죄를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반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신다고 했습니다. 수치심을 남겨두신 것은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죄가 기억이 날 때마다 다시 회개하지 마시고 그런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Ⅳ. 지도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죄에 대한 두려움이다.
지도자 된 사람들은 특히 죄에 민감해야합니다. 지도자라고 하면 가정의 가장, 목장의 목자, 사역부서의 부서장, 회사의 사장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들이 잘못될 때에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고난을 겪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한 것도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의 죄 때문이었습니다(4:12-14).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영광이면서도 두려운 일입니다. 지도자가 잘 할 때에는 그로 인하여 공동체가 복을 누립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 될 때에 탄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 배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그 배는 파손되지 않았고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다 목숨을 건졌습니다(행 27:24). 그러나 지도자가 죄를 지으면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요나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시리아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였을 때에 이 명령을 거역하고 스페인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폭풍을 만나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목숨을 잃을 번 하였습니다. 요나때문이었습니다 (욘 1:12). 이들은 요나를 물에 집에 던져 넣고서야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화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 자신을 항상 성찰해야합니다.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죄를 멀리 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자녀들을 생각해야합니다. 가장이나 지도자의 죄로 인하여 화가 닥칠 때에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이 자녀들입니다. 애가에도 지도자들의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자녀들에 대한 애통함이 오늘 본문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4:2, 4). 그러므로 죄가 유혹할 때에, 그 죄를 짓거나 그 죄가 발각되었을 때에, 자녀들이 당할 수치와 고난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고 싶은 욕구가 많이 감사될 것입니다.
자녀라는 것은 반드시 육적인 자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자녀도 포함됩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죄에 넘어갔다는 기사를 읽을 때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나?” 개탄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 처지에 있었으면 똑같은 죄를 범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죄의 유혹에서 건져주셨으니까 앞으로도 건져주시리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있지만 죄를 짓지 않으리라는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 같거든 제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한없는 복을 내리셨는데 이런 하나님에게 수치를 심어드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심어줄 상처가 두렵습니다. 실망할 우리 교인들, 안 믿는 사람들의 비웃음, 저를 존경해주는 목회자들의 절망. . .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심어주기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남들에게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남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가능성도 큽니다. 죄를 암이나 에이즈처럼 두려워하고 멀리하여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쓰임 받는 우리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