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동화- 손가락 뿌리의 꿈
박경선
하늘 보고 자라면서 하늘로 하늘로 꿈이 뻗어 오르는 나무가 있다. 그 나무 밑, 보이지 않는 곳에 칠흑 같은 어둠을 이불로 덮고도 하늘보다 더 원대한 꿈을 품고 생동하는 뿌리가 산다.
뿌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에 ‘얏!~’ 기합으로 동지를 불러낸다. 불려 나온 뿌리들이 다른 뿌리들을 불러내고, 불러내고 하면서 사방으로 퍼져 나선다. 기세등등하게 나서게 된 힘은, 어둠 깊은 곳에서 이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길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꿈에는 한계가 없다. 무한대로 꿈꿔라!’
그래서 가느다란 손가락 모양의 뿌리들이 꿈을 찾아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동굴 속을 지나다가 죽은 나무에 매달린 뿌리의 혼을 만났다. 말하지 않아도 발레리나의 꿈을 품고 나르던 소녀의 혼이 깃들어있음을 훤히 짐작할 수 있는 몸짓이었다. 한 다리로 서서 두 팔로 삶을 끌어올리다 지쳤나 보다. 영혼의 다리를 코와 머리에 붙여 춤추는 모습이었다. 동지들이 둘러앉아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제 귀에는, 혀를 끌끌 차던 엄마, 아빠의 소리가 박혀 있어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걱정했어요. 그러든 말든 저는 춤추는 게 좋았어요. 관심 없는 공부보다 마음대로 춤추며 그저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거든요. ‘꿈이 갸륵하다. 새벽 시간에 여기까지 너가 올 수 있으면 내가 틈내어 가르쳐줄게.’ 읍내에 사는 재능 봉사 선생님을 만났어요. 새벽에 혼자 걸어 다니며 배웠지요. 그러다가 새벽어둠 속에서 시커먼 자동차가 저를 치우고 지나갔어요. 미처, 엄마, 아빠에게 제 재능을 보여드리지도 못했는데….”
소녀의 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끝났지만, 둘러앉은 뿌리들은 혼에게 위로해 줄 말을 미처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뿌리마다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한마디씩 덧붙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자동차 괴물이 어둠 속에서 잘못 본 거지.”
“그럼, 너는 다만 운이 없었을 뿐이야.”
“아무리 운이 없어도 그렇지. 목숨을 빼앗아 가디니, 그건 아니지!”
뿌리들은 손가락을 펼쳐 모아 소녀의 영혼을 감싸고 소녀가 편안히 잠들도록 기도해 주고 나서 다시 길을 나섰다.
‘우리들이 찾아가는 꿈길도 순탄치 않겠어!’
이제 뿌리들은 가슴 속에 저마다 불길한 예감을 숨기며 허덕허덕 흙을 파헤치며 뻗어갔다. 맨 뒤에서 따라오던 긴 뿌리 할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얘들아, 이 동굴을 벗어나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
“다른 꿈길을 알고 있나요? 알면 말해 보세요!”
모두 반가움에 긴 뿌리를 둘러 샀다.
“동굴에서 나가면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게야. 파도타기를 하면 자동차 괴물이 덤빌 수 없는 길이거든.”
“좋아요. 우리 그 길을 찾아가요!”
동굴을 나오니 긴 뿌리 말대로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뿌리들은 가느다란 몸으로 파도에 올라타서 흔들리며 꿈을 찾아 떠났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점점 더 깊은 바다로 들어섰을 때 뿌리들의 귀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애들아 어서 배에서 나와! 구명조끼 입고 똑딱 배를 타야 해. 어서어서!”
세월호를 타고 아이들과 수학여행을 가던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세월호 때 선생님이 아직 여기서 뭐 하시지?’
뿌리들은 둘러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뒤에서 악어가 긴 꼬리에 창을 달고 헤엄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나, 악어가 저 창으로 아이들을 찌르면 어째!
그 순간 배가 뒤집혔다. 선생님은 배가 뒤집힌 게 무섭지 않은 듯했다. 따라오는 악어의 창도 두렵지 않은 듯했다.
“어쩌지? 배가 뒤집혀 아이들이 저 깊고 어둡고 차가운 바다속에 빠진다면? 그건 바닷속이 아니라 평생 내 가슴에 묻히는 일이지. 그럴 수는 없어!”
중얼거리던 선생님은 바닷속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한 아이라도 더 건져낼세라 미친 듯이 바다를 허적대며 다녔다. 아까 따라오던 악어는 이제 약이 올라 꼬리와 혀 양 끝에 창을 달고 따라왔다. 악어의 창이 선생님을 겨누었다. 선생님은 물 위로 잠시 떠 오르며 혀를 길게 빼어 숨 고르기를 하다가 숨비소리인 듯. 휘파람 소리인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깊은 물속으로,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가느다란 뿌리들은 어찌어찌 헤엄쳐 나와 바닷가에 앉았다. 소라 껍데기에 달라붙었던 긴 뿌리가 입을 열었다.
“겨우 살아나고 보니, 꿈이 사라져 버렸어. 하나밖에 없는 내 목숨을 보듬고 그저 살 테야!”
그 말에, 조개껍대기에 달라붙었던 잔뿌리 하나가 나섰다.
“에게게, 그래도 한 번밖에 없는 삶인데 세월호 선생님처럼 살다 죽어야 제대로 살았다 할 수 있지요. 난 꿈을 펼치며 제대로 살길을 떠날래요!”
2025년 3월 6일 목요일 1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