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가 날려먹은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두 번 정도는 있다.
자주 경험하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글 완성 직전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멘붕이 온다.
며칠간 침잠해야 본래로 돌아올 수 있다.
이번 후기는 코스도, 참석자도 특별나서 적을 거리가 많았다.
신이 나서 열 올려 적다보니 중간 저장도 소홀했다.
산행 다녀온 지 벌써 3일 지났다.
다시 쓰는 일은 번거롭고 수고롭다.
새로운 기분으로 적는 것이 아니고
날려버린 내용을 기억속에서 꺼집어내는 일이 태반을 넘기 때문이다.
10km. 9시간. 2만보.
대구 도심은 35도를 넘긴 날씨였지만
팔공산 숲그늘 만큼은 25도 근방.
하나도 더운 줄 몰랐다.
보림님. 야월님. 쑤야님. 분다비님. 시절인연님이
참석하셨다.
산으로 이름 붙은 곳은
무조건 모두 올라보는 프로 산악인 쑤야님.
닉네임과 완전 다르신 분다비님.
조용하고 차분하시다.
'분답'(紛沓)의 사전적 의미는
분위기가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아니하다.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품사는 명사다.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북적북적하고 복잡할 때
'분답다'로 표현하여 형용사로 사용한다.
시절인연님은 취향과 기질이 깃발과 비슷하다.
가장 신참이다.
그러나 산행 경력은 보림님 쑤야님 야월님 못지않다.
신발끈(?)은 깃발이 제일 짧다.
보림님과 야월님은 친형님처럼 친누님처럼
글쓴이를 챙겨주신다.
왼손에 약함을 들고 계신다.
1300년 세월이 하루같이 흘렀다. 통일신라시대 마애약사여래불.
동화사 봉황문 옆.
동화사 봉황문 오전 9시 출발.
동화사(桐華寺)의 동(桐)은 오동나무 "동"자이고,
화(華)는 "빛나다, 화려하다, 꽃"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동화사는 오동나무 꽃이 아름다운 절이다라는 뜻이다.
전설의 새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화사는 예로부터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그에 맞추어 일주문을 봉황문(鳳凰門)이라 하였고,
대웅전으로 진입하는 누각을 봉서루(鳳棲樓)라 하였고
그 앞에 봉황 알을 상징하는 둥근 바위 3개를 올려두었다.
작은갓바위↓
동화교에서 1.5km지점.
목교 지나 마애불 능선으로 올랐다.
오전 10시 마애불능선의 모래재(520) 도착.
노래재는 느패재와 동화사를 연결하던 중요한 고개였다.
숨 헐떡거리며 된바알 세게 오르면 해발 610m 한봉이다.
한봉에 서면 시루봉(680)과 인봉(580)이 보인다↓
서쪽으로 케이블카 상부 신림봉(800)과 장군봉(900)이 보인다.↓
삿일봉(760). 금당능선 중간에 우뚝하다.
삿일봉 정상에는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가 평상처럼 널려있다.↓
↓좌측이 금당능선.
가운데 볼록한 곳이 신녕봉(1000).
신녕봉 아래 골짜기가 폭포골이다.
맨 오른쪽이 바른재(850).
북방아덤. 노적봉(890)이 살짝 보인다.
겨울철 낙엽기보다 하절기는 전망이 안 나온다.
이런 능선길이 삿갓봉(930)까지 2.5 km 정도 죽 이어진다.
마애불 능선에서만 10번 쉬었다.
대략 200m에 한번씩 휴식을 취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날 전체 도보 시간 9시간에서
쉬는 시간을 모두 모아보니 4시간이 넘었다.
이날 산행에는 자주 쉬고 천천히 가는 도보에
뚯을 같이 하는 사람만 모였다.
대구 사람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입힌 골프장.
전대갈 시대 유물인데 지금도 성업 중이다.
골프장 허가가 날 때는 2.28 주역들도 침묵했다.
권력에 굴종하였던 것. 수수 방관의 댓가는 돈과 자리.
돈 몇 푼에 야성을 잃고 순치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망조가 들었다.
대구시민의 명예가 곤두박질쳤다.
내 한 몸, 내 가족만 생각하는 풍조가 더 심해졌다.
'부끄러움을 팝니다'는 말이 시중에 떠돌았다.
2.28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변절에 아연실색했다.
삿갓봉(930) 오후 2시.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삿갓봉(930)에서 바른재(850)로 내려오면
정면으로 코끼리바위봉(980)이 보인다.
신녕봉(1000)에서 북편 영천 방향으로 뻗어있는 산줄기에
코끼리 바위가 있다.
명마산 장군바위에 인공의 힘이 들어갔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 바위는 바늘이 들어갈 틈새가 없다.
이 바위를 보면 사람의 힘이 전혀 작용하지 않아도
명마산 장군바위가 생성될 수 있음을 알았다.
순수 자연물이다.
바른재(850).
폭포골 삼거리에서 왼쪽은 도마재. 오른쪽은 바른재다.
북쪽을 향하였을 때 동쪽 방향을 '바른쪽'이라 한다.
바른재의 유래다.
파계사 뒤쪽 파계재와 높이가 같다.
파계재는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로 통한다.
바른재는 바로옆 느패재보다는 50m 높다.
느패재는 은해사와 동화사를 왕래하는 길목이었는데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철망을 치고 폐쇄하였다.
폐쇄 전에는 은해사 -> 운부암-> 느패재 ->
모래재 -> 동화사로 통하였다.
바른재는 가는그늘사초가 유명하다.
영천 신원리 남쪽 골짜기 끝이다.
바른재에서 북쪽으로 100m 내려가면 있다.
팔공약수터.
가팔환초 종주족에게 매우 유용한 식수원이다.↓
등로 주변에 진달래 나무가 많다.
코끼리바위 확대사진.
바른재(850)에서 신녕봉(1000) 오르는 길은 조금 험하다.
사람 얼굴모양 소나무 줄기↑
삿갓봉 주변에 꽃며느리밥풀이 군락을 이루었다.
↑꽃며느리밥풀
붉은 보라빛으로 피는 아래 꽃입술에 도드라진
두 개의 하얀 밥풀 같은 무늬를 머금고 피어나 붙여진 이름이다.
산기슭부터 정상 부근까지 등산로 주변에 무리 지어 피어 있다.
이 꽃은 입술 모양으로 벌어진 분홍꽃잎 사이로 밥풀처럼
생긴 흰 무늬 두 개가 있어서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볕이 잘 드는 큰 나무 밑에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데,
일반적으로 환경 자체가 매우 척박한 마른 땅에서 자란다.
일부 식물학자들은 꽃며느리밥풀을 신갈나무 등에 기생하는
반기생식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한국의 식물학 연구는 아직도 '카더라' 수준이 많다.
이름만 들어도 친근감이 느껴지는 우리나라 자생 야생화다.
며느리밥풀이라는 이름은 꽃부리 중앙에 있는 2개의 밥알무늬와
연관하여 전해오는 슬픈 전설에서 유래한다.
어느 산골 마을에 홀어미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아들이 장성하자 며느리를 맞았다.
가난한 집 딸이 12살 어린 나이에 군입을 하나 덜어주기 위해서
시집을 온 것이다.
당연히 빈손으로 시집 왔다.
소처럼 일을 해도 시어머니의 박대 속에 보리밥 한 그릇
제대로 얻어 먹질 못했다.
홀어미로서 아들을 빼앗긴 것 같았는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집만 비우면 시어머니의 며느리 학대가 더 심해졌다.
놀부의 심보를 넘어서는 시어머니의 학대에 며느리는 어쩔 줄 몰랐다.
그래도 출가외인인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친정 부모님이 얼마나 상심을 하겠나 싶었다.
이제나저제나 나아지겠지 하며 며느리는 참고 또 참았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였는지라 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아들은 먼 곳으로 머슴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시어미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며느리 구박이 더 심해졌다.
며느리는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며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죽어라 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미는 부엌에서 밥솥을 열어 뜸이 잘 들었는지
밥알 두 개를 씹어보던 며느리를 어른이 먹기도 전에 밥을 먹는다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에 이르렀다.
“어른 몰래 어른보다 먼저 배 채우는 집안 망칠 년”으로 흉이 잡힌 것이다.
시어미 구박에 견디지 못하여 약해질 대로 약해진 며느리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들은 대성통곡하였다.
돌아온 아들에게는 시어미는 이렇게 변명을 했다.
"어찌 시에미 상에 올리지도 않은 것을 지가 먼저 다 처먹어.
그래서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막 대들지 뭐냐. 내가 힘이 있어야지.
그래서 작대기로 두어 대 쳤는데 하도 처먹은 게 많아서
그런지 체해서 죽었단다."
아들은 솔밭이 우거진 어느 길가에 아내를 묻어주었다.
그 후 그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이 돋아나더니
흰 밥알이 두개씩 박힌 듯한 꽃이 많이 피어났다.
며느리의 억울함과 한 때문에 꽃부리에 밥알 두개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고 동네 사람들은 생각했다.
옥황상제가 억울하게 죽은 며느리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꽃으로 환생시킨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꽃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서방님, 제가 먹은 것은 바로 이 밥풀 두 개뿐이어요.
그것도 다 먹지 못하고 이렇게 입술에 묻어 있는 걸요.
전 결백합니다. 너무 억울해요."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며느리밥풀꽃이라 불렀다.
세상이 너무 무섭고 수줍음을 잘 타기 때문에 이 꽃은
산 속에서 다른 나무나 풀에 숨어서 고개를 숙이고 핀다
영락없이 꽃 모양이 입술에 밥알을 두 개씩 물고 있는 형상이다.
우리나라 야생식물 중에는 아들이나 딸, 시어머니 등이
꽃 이름에 붙은 야생화는 없다.
유독 며느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며느리-”가 들어간 꽃으로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이 있다.
하필이면 왜 꽃 이름에 며느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아마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고질적인 고부갈등,
그것도 일방적으로 며느리에게 불리하게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봉건적 시어미 시집살이에 냉가슴 앓던 며느리에게
주어진 삶은 비극이었다. 때이른 젊은 죽음은 다반사였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했던 시대에 여성은 언제나
억눌리고 찌들리는 삶을 강요받았다.
며느리밥풀 속(屬)은 변종이 많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며느리밥풀 앞에 꽃-, 흰-, 털-, 수염-,
애기-, 새-, 알- 등의 접두어를 사용한다.
종류는 6가지로 꽃며느리밥풀, 애기며느리밥풀,
수염며느리밥풀, 알며느리밥풀, 털며느리밥풀, 새며느리밥풀이 있다.
이들은 포엽(꽃 아래 작은 잎 같은 것)의 색깔과 가시를 보고
구별하는 것이라 구별이 힘들고 어렵다.
공통적으로 입술 모양의 빨강 꽃에 아래 입술에는
밥풀 모양의 하얀 무늬가 두 개씩 있다.
꽃며느리밥풀의 줄기는 네모지고 30~50cm 정도 높이로
자라고 가지를 치며, 잎은 좁고 기다란 형태이며 끝이 뾰족하고 마주난다.
줄기와 잎에는 잔털이 많이 나 있다.
도마재(950) 위치목은 <48>번이다.
이웃하는 신녕봉(1000)은 따로 정상석이 없다. 헬기장만 있다.
도마재(950)는 영천 신녕면 치산리 사람들이
대구 불로시장을 다니던 고개다.
고개 형상이 음식을 썰고 다지는 조리 용구인 도마를 닮아서
옛날부터 도마재로 불렸다.
신녕재로 표기된 엉터리 이정표가 도처에 았다.
신녕재가 아니고 도마재다. 거리 표시도 중구난방이다.
도마재의 '도마'는 말 등을 뛰어넘는
기계체조의 도마(跳馬)가 아니다.
도마재 북쪽은 치산계곡이다.
공산 폭포와 수도사가 유명하다.
팔공산을 아는 이들은 치산계곡을 으뜸으로 친다.
맑고 찬 치산 계곡물은 흐르는 것만 보아도 더위가 가신다.
여름에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 발을 씻으며 노는
탁족회(濯足會)에 치산계곡은 안성마춤이다.
<49>번(980)에서 좌틀하였다. 오후 3시50분.
금당능선 시작점이다.
운지버섯을 채취하였다.
버섯에 정신이 팔려 삿일봉은 놓쳤다.
삿일봉 가기 전에 수시골로 내려섰다.
부드러운 길이 동화사 템플스테이까지 이어졌다.
동화사 템플스테이↑
오후 6시 봉황문에서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