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이 현순씨가 살던 충청도 지역에 몰려온 것은 7월초였었고 일주일만에 충청도를 모두 점령하고 경상도로 밀고 내려갔다. 현순씨는 아버지가 북한군에게 끌려간 것이 7월 중순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할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남한의 각 지역을 점령하자마자 그 곳의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강제 징병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엄마 뱃속 아기의 아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군 패주 때 북한군을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친구들은 아버지가
낙동강 전선으로 끌려 가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
엄마가 왜 아직 돌도 되지 못한 딸을 두고 집을 나갔는지 지금도 현순씨는 알지를 못했다. 그저 아버지는 현순을 아내의 배에 남기고 불귀의 길을 가버렸고 겨우 다음 해 2월 현순을 낳았으나 캄캄한 암흑만이 보이는 미래에 절망한 엄마는 인륜적으로 보아 냉혹한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아직 젊었던 엄마는 성격이 강했고 냉정했다. 아기에 대한 애정보다도 시집살이를 하며 살아야 하는 청상과부가 될 운명을 거부하는 욕구가 솟구쳐 충동적으로 가출을 단행해 버린 것이 아닌가 했다.
정말 걷지도 못하는 돌전의 현순 아기는 이제 폭풍우 치는 황야에 내버려진 아기 새와 같은 처지로 홀로 험한 인생의 첫 날개 짓을 하여야 했다. 깃에 솜털도 나지 않은 그 날개 짓은 너무도 힘이 들었다.
엄마가 없는 세상의 아기 현순에게는 매사가 두려웠다. 며칠간 울고 또 울던 현순의 울음은 점점 줄어들면서 웃음도 없어졌다. 엄마, 아빠하는 몇 가지 말을 담던 옹알이를 다시 하지 않았다. 방싯방싯하고 잘 웃던 예쁜 얼굴에는 돌 같은 무표정이 들어앉아 버렸다.
부모과 행복하게 살던 아기들이 부모와 결별이 되어 고아원에 맡겨지면 며칠간 사이에 아기에게 일어나는 심리의 변화인 자폐의 증상이 현순에게도 발생했던 것이다. 무표정과 말없는 성격을 가진 현순은 사춘기를 지날 때까지 그렇게 성장해갔다.현순의 초등학교 통신부에 ‘총명하나 우울함’이라는 말이 두어 번 이나 올라왔었다.
현순 아기에게 그래도 하느님의 주신 도움은 할머니가 정말 마음이 고운 착한 분이었다는 행운이었다.. 할머니는 가출한 며느리를 대신해서 손녀를 길렀다. 냉정한 할머니라면 그때 고아의 많은 인척들이 하듯 손녀를 고아원에 맡겨버렸을 것이다.
할머니가 손녀를 기르는 조손[祖孫] 가정의 환경은 아무래도 엄마가 기르는 환경에 비하면 부족한 점은 있었다. 같이 사는 큰 집의 은근한 차별도 있었다. 현순이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녀가 할머니 앞에서도 자주 말이 없고 무표정하면 할머니는 “에미 못 된 것은 다 닮았구나.” 하고 탄식을 하게 했던 것이었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현순을 잘 길러 낼만큼 그렇게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인 가장인 큰 아들, 즉 큰 아버지는 묘목을 길러서 관에 납품하는 사업을했었다. 묘목을 길렀고 납품하고 묘목을 심은 뒤에는 관내 여기저기 다니며 사방사업 지대를 돌아보고 관리하는 직업이었다.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었고 별다르게 풍족한 도움도 주지 못해서 할머니와 큰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은 밭뙈기를 경작했고 농사일 간간히 나물을 캐어 가까운 A시에 나가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