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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다말의 변신도 역시 무죄인가?>의 줄거리:
여자의 변신은 무죄! 그럼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해서 임신하기 위해 창녀로 위장한 다말의 변신은 무죄인가요 유죄인가요? 당연히 유죄이고 나아가서 추악한 패륜이지요. 사정이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한 것은 왜 며느리 다말이 이렇게 패륜적인 행동을 통해 나은 베레스가 유다를 잇는 아들로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족보에 버젓이 올라가 있는 것일까요? 내막을 알고 보면 이 패륜은 다말의 목숨을 건 사투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사투였을까요?
다말의 변신도 역시 무죄인가?
(창38:12~19)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다말의 변신도 역시 무죄인가?>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다말의 변신도 역시 무죄인가?’
‘역시’라는 말을 쓰게 된 이유는,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탤런트 김미숙 씨가 1991년에 르느아르라는 제화회사의 광고 모델로 나와서 CF를 찍습니다. 여러 종류의 구두 광고 시리즈 중에서 샹송 같은 분위기의 CM송이 깔리는 가운데 카피가 하나 나오는데 ‘변신을 꿈꾸는 여자는 아름답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 날마다 새롭게’라는 말입니다. 25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도 거기서 나온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김미숙 씨가 보통 때에 TV화면을 통해서 보이는 이미지는 순박하고 순수하고 청순하고 풋풋한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광고에서는 아주 화장을 진하게 하고 관능미 넘치는 도회지의 여자로 나옵니다. 그렇게 풋풋했던 모습에서 팜므파탈의 모습으로 변신을 했는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고 매력적이고 자연스럽게 잘 받아들인 모습에서 ‘무죄’라는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어색했고 거북했다면 여자의 변신은 ‘유죄’가 됐겠죠.
오늘 본문에 우리가 읽은 대로 다말이 창녀로 변신을 합니다.
이 다말의 변신은 무죄입니까? 유죄입니까?
여자의 변신은 무죄인데, 다말의 변신은 무죄입니까? 유죄입니까?
창녀로 변신해서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해서 임신을 했습니다. 당연히 유죄 정도가 아니라 패륜인데, 예수님의 족보에 다말이 올라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정말 궁금한 것이 있어요. 무엇이냐?
분명히 유다가 정식 아내가 있습니다.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수아라는 사람의 딸이 유다의 정식 아내입니다. 이 아내가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둘째가 죽고 마지막 셀라라고 하는 막내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유다의 정식 부인이 낳은 셀라가 살아있으니 셀라가 다말과 결혼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 아들로부터 예수님의 족보가 내려가는 것이 맞는데, 유다의 족보가 예수님이 탄생하는 족보로 왜 이렇게 며느리가 창녀로 변신을 해서 시아버지를 꾀어서 잠자리를 하여 낳은 아들이어야 합니까?
시아버지 유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도 선민인데 물론 정식 부인인 수아의 딸이 죽은 상태이고, 양털 깎는 시기가 축제 기간이라서 술에도 좀 취했겠지만, 어쨌거나 선민이 창녀를 찾아가서 창녀로 변신한 며느리와 잠자리를 해서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를 낳습니다.
정식 부인에게서 낳은 살아있는 아들은 셀라이고, 며느리와 잠자리를 해서 낳은 아들 중에서 베레스와 세라가 있습니다. 이 베레스가 예수님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1:3절에 보면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라고 이어져 내려갑니다.
그러므로 다말의 창녀로의 변신이 분명히 유죄는 유죄인데 도대체 무슨 내막이 있기에,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때 사용되는 가계에 이런 패륜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 포함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다말의 변신의 성격을 알아보려면 우선 다말의 의중을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다말은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을까요?
단지 다말의 행위를 비도덕적이라고만 보고 넘기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이고 일반적으로 볼 때에 다말 자신이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절대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아버지가 술 먹고 취해서 잠자고 있는데 마침 그 옆에 여자가 있어서 술 취한 김에 잠자리를 하고 났더니 며느리였다는 것이 아니고, 치밀한 계획과 계산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말은 창녀로 변신해서 시아버지와 잠자리를 해서 아이를 갖게 될 것을 목적했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질 경우에 자신이 얻을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실(失)의 내용의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만, 유다가 며느리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자기 아이인줄을 모르고 한 말이 무엇이냐?
끌어내서 불사르라고 합니다. 아직 과부 옷을 입고 있을 때인데 임신을 했으니 끌어내서 불사르라고 합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그 당시 통용되었던 도덕적 기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아이인줄로 안 다음에는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말은 화형에 처해질 것도 알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면했느냐?
시아버지의 물품인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주인의 아들을 내가 가졌다고 합니다. 유다가 막내아들을 주겠다고 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주지 않으려고 하다 결국 다말이 이런 일을 벌였으니 자기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화형은 면하게 하지만, 다시는 다말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다말은 평생 쌍둥이를 낳고 기르면서 혼자 산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셀라가 장성하면 다말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안 주었으니 계대 결혼의 풍습을 범한 유다의 잘못으로, 다말은 이것을 기회삼아서 새 출발을 하면 됩니다. 다말의 이혼과 재혼을 나무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허물은 유다에게 가기로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새 출발을 하지 않고 시아버지를 끌어 들여서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임신을 해버리는 것입니까? 이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혼부부가 아기를 못 낳고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남편이 무정자증입니다. 그래서 정자 은행에서 정자를 받아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데, 중간에 의사와 시아버지가 짜고 시아버지의 씨를 며느리에게 심었습니다. 그 후로 아이가 중학생 쯤 되었을 때에 이 사실을 며느리가 알았습니다. 시아버지의 씨가 자기 속에서 지금 키우고 있는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며느리가 구토를 합니다.
다말도 시아버지가 무슨 매력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이 며느리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다말이 이런 행동을 자행한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아브라함 선민의 집안에 머물러 있겠다는 것이었고, 그 집안의 울타리 안에 남아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할례 언약을 체결해 주시면서 12-14절에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들이라도 아브라함의 집안에 들어와서 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 여자는 어떻게 아브라함 집안의 사람이 됩니까?
다를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의 씨를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말이 창녀로 변신해서 시아버지의 씨를 받았던 이유는, 상식적인 이해의 득실을 따진다면 미친 짓입니다. 자기가 손해 보는 것 밖에는 없어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브라함의 집안에 머물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남자라면 할례를 받으면 되겠지만 여자는 그럴 수가 없으니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는데, 아브라함 자손에 속한 사람들의 씨를 받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유다가 셋째 아들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창녀로 변신을 해서 시아버지의 씨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죽기를 각오한 사투를 벌인 거예요.
다말의 생각에는 내가 아브라함 집안의 사람이 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화형이라는 것이 유다가 만들어낸 창의적인 형벌이었겠습니까?
과부가 임신을 하면 화형에 처하는 것이 그 당시에 통용되는 처벌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도 사투를 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집안사람이 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렇게 아브라함 집안의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할례를 통해서 아브라함 집안사람의 경계를 딱 그어 놓습니다.
그때 뭐라고 하시느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하라는 말씀이고, 바로 어제 살펴본 38장 앞부분에서도 나왔습니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유다의 첫째 아들인 엘이 악함으로 죽었고, 둘째 아들 오난이 또한 악함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사투를 벌이는 심정으로 시아버지의 씨를 받아 임신하기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이 여호와의 목전에 있기 위해서입니다.
참 이상한 여자 아닙니까?
왜냐하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해서 자기의 남편이 죽었고, 자기의 시동생이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여호와의 목전에 있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창녀로 변신을 하여 시아버지의 씨를 받아서 임신을 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여호와의 목전에 있고 싶어 할까요?
이 여자가 굉장한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족보에 올라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 목사님의 목전이라면 여자분들 화장 안하고는 목사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화장은 나중에 지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자들 말로는 그렇지 않으면 피부가 뒤집어진다고 하더군요.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자면 다음날 아침에 피부트러블이 생기고 난리가 납니다.
목전(目前)이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면서 편한 사람일 경우에는 누가 앞에 있어도 상관이 없지만, 까다로운 시어머니가 늘 며느리를 쫓아다니면서 24시간 시어머니의 목전에 있다면 행복할리가 있습니까? 그러면 어떨 때에 목전에 있는 것이 좋습니까? 누구의 목전이 좋습니까?
그 사람이 좋고 그 사람이 편할 때에 그 사람 목전에 있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자가 이상한 여자인 것은, 이방인인데 여호와의 목전에 있기 위해서 목숨을 겁니다. 그 당시 전 세계 지구 표면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으로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관계하시던 집안은 아브라함 집안 밖에는 없었어요. 이 집안을 벗어나면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가족이 존재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야기를 시집와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듣고 이삭의 이야기를 듣고 야곱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이방 여자가 여호와의 목전에 있기 위해서, 그 집안의 씨를 잉태해서 그 집안에 있기 위해서 목숨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좋아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 가장 편안함을 느끼고, 다른 곳에서의 행복을 원치 않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같이 있으면 좋은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을 때에 목전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반대로 목사님이 날 쳐다보고, 사장님이 날 쳐다보고, 시어머니가 쳐다보는 목전이 좋을 리가 없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애인이 날 쳐다보고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황홀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말의 변신이 유죄입니까? 무죄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 22:12절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인생전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바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목전에 있기 위해서, 하나님을 갖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이삭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얼마나 비윤리적입니까?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죽인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실제로는 요셉이 죽지 않았지만 피 묻은 채색 옷을 보고서 마음에서는 죽은 것으로 믿은 것처럼.
왜? 여호와의 목전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편하고 좋으니 그 여호와 하나님이 들어오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마음에서 이삭을 죽인 것입니다. 다말도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비윤리적입니까?
그러나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 다말의 마음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있기 위해서 똑같이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여호와의 목전에 있기 위해서는 누구나 목숨을 건 사투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여호와가 좋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편해서, 그분 목전에 있을 때에 내가 가장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면 다말과 같이 사투를 건 투쟁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투 없이 선민이랍시고 있다가는 첫째 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함으로 죽었다는 이야기처럼 결국은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말과 같은 사투를 벌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해야 돼요. 다말처럼 자기 인생전체를 다 포기하고 화형 당할 수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남자라는 것은 자기 인생에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유다의 씨를 받아서 두 아들을 키우면서 다른 남자와 결혼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나고 어머니로서의 인생만 남은 것입니다. 이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 걸면서 사투를 하므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방 여자인 다말로서는 아브라함의 씨를 받아야 아브라함의 집안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말은 여호와의 목전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잉태하는 것인데 그냥 잉태해서는 안 됩니다.
다말처럼 내 것을 다 버리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마음에 잉태할 때에, 다말에게서 소중했던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나에게 소중했던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가면서 예수님이 잉태가 됩니다. 그러고 나서야 여호와의 목전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돈이 많아서 돈의 목전에 내가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부자고 기쁘겠습니까?
그것과 비교해보면 알아요. 여호와의 목전에 있으면 여호와로 부자인 상태, 여호와로 편안한 상태, 여호와로 행복한 상태, 여호와가 나를 보고 계심이 너무나도 기쁘고 좋은 상태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잉태할 때 이루어집니다.
마치 다말이 시아버지의 씨를 잉태함으로 아브라함의 집안사람이 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잉태함으로 이 세상 것을 다말처럼 마음에서 다 버릴 때에 여호와의 목전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목전에 거할 수 있는 자들로 부름 받은 선민들이 첫째와 둘째 아들인 엘과 오난처럼 악을 행한다면 선민 됨이 무효화 되어버립니다. 악은 여호와 하나님의 목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주도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다말처럼 자기 인생을 걸고 시아버지의 씨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나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말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선민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있는 것,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이 가장 편하려면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이 아니라, 가장 복된 말씀이라는 것을 오늘 삶 속에서 느끼시고 체험하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까다로운 상관의 목전에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여호와를 생각해서 여호와를 망각하며 살지 않게 하여 주시고, 가장 사랑하는 애인이 나를 쳐다볼 때와 같이 여호와의 목전에 거하기 위하여 오늘도 다말의 사투를 십자가 붙잡고 행함으로 기어코 여호와의 목전에 거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다말과 같은 사모하는 마음을 주세요^^